2부 : 준혁 (2)
“최준혁?”
생각에서 빠져나왔을 때 마주한 것은 매니저의 의아한 눈이었다. 나는 아직도 매니저에게 답을 하지 않았다.
네 파트너도 너를 좋아하니?
여래는 나를 좋아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도대체 어떤 농도와 질감일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말은 불완전하며 심지어 나는 그것에 불능한데.
고개를 흔들었다. 바른 질문이 아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상관이 없다니.”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저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같이 있어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으니 저는 끝까지 그 사람 곁에 있겠습니다.”
그렇다. 여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괜찮다. 여래가 나를 내가 여래에게 그러는 것만큼 좋아하지 않아도 어차피 나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여래가 나를 좋아하는 양과 질은 내가 그와 함께 있는 것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일어나는 나를 매니저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진행해 주세요. 신원 보증인에 대한 건 알려주신 내용대로 하겠습니다. 성가신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상담이 길어지면 일정은 하나씩 지연이 되고 완벽주의자인 그는 야근을 해야 한다. 그에게는 퇴근해서 숙제를 봐주고 책을 읽어주어야 할 두 명의 딸이 있었다. 그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하니까. 내가 여래와 늘 함께 있고 싶은 것처럼 그도 그의 가족과 같이 있고 싶을 것이다.
매니저의 한숨이 마술사의 스카프처럼 길었다.
“하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케이가 또 인간의 말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바보 같은 케이. 어리석은 케이. 억지로 인간의 무리에 섞인 케이.
그를 보내 줘야 하는데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케이의 탓이다. 케이 때문이다. 손바닥에 땀이 찬다. 연속해서 손을 접었다 펴는 나를 향해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한 달 뒤에 홈커밍데이가 있어. 동반인을 초대할 수 있는 초대장을 보낼 테니까 회신해 줘. 너도 여기까지 자주 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날 같이 처리하도록 하는 걸로.”
홈커밍데이는 일 년에 한 번 센터원들이 센터에 자신의 친구나 가족을 초대하여 숙식과 일상을 해결하는 센터를 구경시켜 주는 행사이다. 가족이나 친구가 없는 나는 한 번도 거기에 누군가를 데리고 와 본 일이 없었다. 여기까지 이견은 없었다. 놀란 것은 다음 대목에서다.
“동반인으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 주여래를.”
선뜻 대답하지 않는 내게 매니저는 한 번 더 강하게 주장했다.
“절차에 있는 거야.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 뭐랄까 사전 면담 같은 거지. 흠.”
어제 읽어본 규정집의 어느 항목에서도 신원 보증인의 면담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 전 그는 틈을 주지 않겠단 듯 볼펜을 꽂은 클립보드를 들고 들어왔던 문을 향해 나갔다.
“그 날 꼭 보자고 해!”
출입문으로 가기 위해 지나치는 테이블들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엿들은 정보를 분해 재조립하는 입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호의보다 익숙한 적의를 등으로 받아내며 나는 휴게실을 나와 방으로 향했다.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정부 기관, 속칭 센터는 총 여덟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생, 편의, 취사 시설을 개별 동 마다 구비해 동마다의 독립성을 확보한다. 센터원들에게는 각각 6평 남짓의 방이 배정되며 수면과 배변 이외의 활동은 공유된 장소에서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알파와 오메가의 동은 센터의 양 극단으로 분리되어 있어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물리적, 심리적 충돌을 예방한다. 센터는 알파와 오메가의 개체수의 증식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개인들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은 각자의 생체 비밀번호를 인식해야만 접근가능하게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 쉽게 말해 센터원들은 방에 허가받지 않은 누군가를 끌어들일 수 없다. 알파는 오메가를, 오메가는 알파를 만나지 못한다. 여기는 난교의 장이 아니다. 또한 사랑을 발견하는 장소도 아니다. 어차피 내 경우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대학교에 다니면서 공실로 두었던 탓인지 방 안의 집기에는 먼지가 희게 앉아있다. 은행 거래에 필요한 토큰과 신분증을 챙기고 서랍을 닫자 더 이상의 볼일은 없었다. 접수계원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교대조는 이미 바뀌어있었다. 데스크를 살피는 내게 명찰을 단 남자가 묻는다.
“무슨 볼일 있으십니까?”
옅은 미소를 걸친 채지만 얼른 가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그가 키보드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노골적으로 내 이마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안도해서 비로소 짧은 한숨을 내쉬는 그를 등지고 나왔다. 이르게 찾아온 어둠을 헤치고 버스 터미널로 가 서울로 가는 표를 끊는다. 차창에 기대어 이마의 열기를 식히며 나는 매니저와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되새김질한다. 노후한 엔진이 뱉은 매연이 머릿속을 채웠다.
여래가 나를 이용할지도 모른다고.
이 말은 괜찮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용가치가 있는 한은 나를 떠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여래가 나를 좋아하느냐고.
예리한 각도의 물음이 마음을 아프게 찔러왔다.
“아야….”
무방비하게 흔들리다 차창에 부대낀 이마에 다시 신음이 나왔다.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널름거리는 화염 속, 찌그러진 프로판 가스통이 날아오는 그 날의 장면은 언제건 나를 덮치려 엎드려있다.
목격자이자 사고 시 상해를 입은 피해자로서 번호를 적어준 이유로 방문한 경찰서에서 사건 당시의 CCTV를 보았다. 그 안에는 여래를 찾는 내가 다친 짐승처럼 절규하고 있었다. 경찰은 본인이 맞느냐고 물었다. 끄덕이는 고개가 멈춘 것은 인파들 너머의 여래 때문이었다. 여래는 숙인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 방향에 내가 있었다. 바로 다음 순간 여래는 웅크리며 신발 뒤꿈치를 만졌다. 그리고 그대로 한참을 주저했다. 그 때 깨달았다. 여래가 신발 뒤축을 정리한 건 빨리 뛰기 위해서라는 걸. 빨리 뛰어서 내게서 도망가기 위해서라는 걸. 여래는 또다시 나를 두고 가려고 했었던 것이라는 걸.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여래는,
“너 여기서 뭐 해!”
다시 내게로 왔다.
어째서 여래는 그대로 도망가지 않은 걸까?
* * *
똑똑.
노크 후의 정적은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아직 여기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 더 두드릴까 하는 그 때 문이 열렸다.
“으응…. 이 시간에 뭐야.”
눈을 비비며 여래가 나왔다. 여래는 후드 티셔츠에 트렁크 팬티만을 걸치고 있었다. 정말 깜짝 놀랐다. 속옷 아래로 드러난 마른 다리도 그렇지만 신원 파악 절차와 매무새의 확인 없이 곧장 문을 여는 그의 무방비함이 불안하다. 다음에는 적어도 이름이라도 묻도록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를 껴안고 싶다.
“왔어. 와버렸어.”
“…자고 온다더니.”
“이미 와 버린걸.”
여래는 비키며 내가 들어설 자리를 만들었다.
“들어와.”
자정 가까이에야 도착한 하숙집의 방은 여래가 데워놓은 온기로 가득했다. 좁은 침대에 여래와 내가 동시에 눕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억지로 몸을 겹치듯 눕는다. 여래는 끌어안은 내게 답답하다며 불평을 하지만 닿은 몸이 녹아내릴 듯 따뜻해 얼른 눈을 감고 모르는 척을 한다.
투덜거리며 돌아누운 여래의 등을 뒤에서 안자 부드러운 엉덩이가 배를 눌러왔다. 팔은 자연스럽게 여래의 허리에 둘러진다. 엉덩이에 닿은 아래가 마치 버튼이라도 누른 듯 단단해졌다. 바지 안에 갇힌 성기는 딱딱한 청바지의 구속에 더욱 자극받으며 두께를 더했다. 묵직하게 누르는 아래에 여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 마.”
사랑스럽고 야한 감촉이었다. 뜨거워진 아래를 비비며 안은 팔에 힘주자 손등이 꼬집혔다.
“하지 말라고 했다.”
숨죽인 경고는 낮았다. 방 벽은 얇았다. 약간의 기척만으로도 옆방 사람은 금방 화를 냈다. 여래와 내가 좁은 방 안에서 먹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종종 책을 벽으로 내려치는 소리가 진동과 함께 울려 퍼졌다. 그것은 벌레를 잡기 위한 동작은 물론 아니었다. 벌레처럼 후려쳐지기 싫은 여래의 목소리가 작았다.
“뭐라도 먹고 와. 오늘 안 올 줄 알고 밥 같은 거 남기지도 않았는데. 배가 고프니까 잠도 안 오는 거지. 그러니까 자꾸 들러붙고….”
“배 안 고파. 터미널에서 햄버거 먹었어.”
“준혁아. 그런 것만 먹으면 좋질 않아….”
잠꼬대같이 중얼거리는 말이 부드럽다. 여래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이 나의 날숨에 흩어진다.
“여래는? 뭐 먹었어.”
“나? 나야 대충 뭐. 밥이랑 김이랑. 있는 걸로 먹었지. 집에서 노니까 입맛도 없고.”
“그런 것만 먹으면 좋지 않아. 여래야.”
뒤에선 본 뺨이 도톰하게 솟아올라 등 돌린 그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식사뿐만이 아니라 요사이 도통 입맛 당겨 하는 것이 없는 여래가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었는데 여래는 빙긋이 떠오른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까분다. 너.”
입을 맞추자 그의 웃음이 내게로 옮아왔다.
그래. 하루에 한 번씩, 그를 웃게 해야지. 칭찬 도장을 모으듯이 스마일 마크를 모으는 거다. 계속 여래를 웃게 해야지. 그럼 여래도 나를 조금은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
나를 좋아해 줘, 여래야.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너를 놓아줄 수는 없으니 제발, 부탁이야.
여래야, 나를 좋아해 줘.
* * *
다음 날.
책상 위에 홈커밍데이의 초대장을 올려두고 옷을 갈아입는 내내 여래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밤늦게 도착해 바로 잠든 탓에 매니저와의 상담 내용을 전할 시간이 없는 게 아쉽다. 지금이라도 간결하게 여래에게 말할까 싶어 깨우려는 제스처를 취해본다.
“갔다 올게.”
뺨에 입을 맞추자 싫은 듯 찡그린 얼굴이 베개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도 여래는 당부인지 잠꼬대인지를 중얼거렸다.
“모자 써… 너 이마… 이마 다쳤잖아. 사람들 기겁한다….”
낫지 않은 이마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무심결에 손을 들어 상처를 가렸다.
“꼭 병원 가보구… 음… 또… 밥 챙겨 먹고….”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여래가 죄다 대신한다. 밥을 챙겨 먹어야 할 건 여래다. 이제 목재소에서 이른 아침부터 출고나 하역을 할 필요가 없어진 여래는 오전 아홉 시가 되어도 식사마저 거른 채 잠 끝이 길었다. 그것은 흡사 다친 짐승이 수면으로 상처와 체력을 회복하는 것과도 같았다. 몸이 좋지 않은 건 아닌지 걱정하는 내게 여래는 목재소가 망한 김에 잠이나 자두고 싶을 뿐이라며 말을 잘랐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는 것뿐이야, 라고.
“응. 다녀올게. 책상 위에 올려둔 거 나중에 읽어봐.”
“그래에….”
여래는 벌써 이불 무덤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하숙집의 좁은 복도에는 문들만이 빼곡하다. 맞은편으로 좌측 세 번째, 문을 열고 나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흠칫 놀라 방문에 바싹 붙었다. 그는 내 이마의 상처에 경악했다. 여래가 남들한테 보이지 말라고 했었는데 아차, 싶다. 얼른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화재 당시, 앰뷸런스 안을 머리로 박아대느라 생긴 이마의 멍은 점점 아래로 퍼져 눈께까지 와있었다. 그것은 몹시 우습고도 흉했으며 위험하고 불량한 몰골이었다. 나를 흘끔거리던 남자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저, 이 방 사시는 분이세요? 벌써 이사 나갔나? 저번엔 조금 더 작은 남자가 들락거리던데 혹시나 싶어서….”
처음 그를 놀라게 해 미안했던 초조함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여래를 기억하는 남자에, 기분이 여름의 음식처럼 단숨에 상해 버린다. 안에서 잠금 버튼을 누르고 문을 닫은 후 밖에서 손잡이를 열 수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한다. 남자는 자신 말에 대답도 없이 문의 걸쇠를 거듭 확인하는 나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손쉽게 여래의 방에 들어올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잠을 깨우게 해서는 안 된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나란한 방들은 마치 걷어차면 날아갈, 가벼운 종이 상자 같았다. 허술하고 싸구려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도 여래를 건드리지 마. 그럴 가능성만으로도 나는….
저절로 눈썹이 찌푸려진다. 그럴 때의 나는 꽤 험악하다. 나를 코코로 불렀던 센터원들조차 이럴 때면 조용히 자리를 비키거나 눈을 옆으로 흘기며 분위기를 살폈다. 남자가 나와 내 뒤의 문과 그 안의 여래를 염탐하는 것 같다. 꺼져. 사라져. 다친 이마가 아플 정도로 표정은 구겨진다.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내게 남자는 질려버렸다.
쾅!
짧게 숨을 삼킨 남자가 세게 문을 닫으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하숙집을 나온다.
* * *
학교의 정문에까지 이르는 길은 나지막한 언덕이다. 두둑한 점퍼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드문드문 이어지는 학생의 행렬을 따라간다. 가로수에 묶여 있는 현수막에는 영어인증시험과 운전면허증 학원의 광고가 쓰여 있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합격을 보장한다는 말을 무심결에 읽어 내려간다. 문자정보에 대한 무작위적인 수집은 나의 습관이다. 현수막에 붉은색으로 강조된 번호를 순간적으로 외우는 사이 오른쪽 주머니 안에서 손과 겹쳐져 있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문자였다.
[오늘 저녁 약속 생겼어~]
여래가 하는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문자 또한 귀엽다. 특히나 나는 절대로 쓰지 않는 물결 표시가 대단하다.
[석진이랑~]
[같이 갈래?]
그 이름을 안다. 윤석진. 여래의 친구. 나이는 동갑. 나와 같은 대학에 다니는 베타 남성. 중립적인 성격. 그에서 기인하는 친절함과 거리감. 나와 여래에 대한 호기심과 그에 대해 보류할 줄 아는 인내심. 천박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지성. 아무리 보수적으로 판단한다 하더라도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람.
둘은 일주일, 혹은 이 주일에 한 번쯤 만나 술이나 고기를 먹으며 두 시간에서 두 시간 반쯤 이야기를 나눴다. 가끔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여래는 석진과 약속이 잡힐 때면 매번 내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다.
여래는 석진과 있을 때 좀 더 수다스러워졌으며 투박하고 거친 어휘를 사용했다. 술은 썼고 PC방의 책상은 담뱃진 때문에 끈적거렸다. 다 내가 싫어하는 감각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감내하면서까지 석진을 만나는 효용은 내게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거절하기로 한다.
텍스트를 입력하기 위해 길 옆으로 비켜선다. 비탈길을 타고 내려온 차가운 바람을 거슬러서 올라가는 학생들이 앞을 웅크리고 지나갔다.
[안 가.]
[그래? 알겠오~]
회신은 빨랐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을 여래를 그려보자니 기분은 정의할 수 없는 양상으로 복잡해진다. 다리는 갑갑해하고 배는 추워하는 습관대로 후드 티셔츠 한 장에 팬티 차림일 여래가 허벅지 사이에 이불을 끼우고 누워있는 모습이 떠오르자 행복한 동시에 짜증이 났다. 내가 부재하는 곳에서 여래가 함부로 귀엽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지를 제대로 입고 있기를 빈다. 단추가 달렸다면 단추를, 지퍼가 달렸다면 지퍼를 목 끝까지 채우고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학교에서 저녁 사 먹고 와~]
[밥으로 먹엇~!]
여래는 밥에 대단히 집착한다. 그가 함께 먹어주지 않을 때 특히 그렇다. 이마에서 오르는 열기가 어린애 취급을 당해서인지, 아니면 예정에 없는 스케줄이 생긴 여래 때문인지 모르겠다.
대학에 입학 후 두 번째 학기였다. 학교에 가는 시간이 아깝게 여겨졌기 때문에 일주일의 삼일 정도만을 등교하도록 과목을 조절해 수강 신청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절약해도 등교와 하교만으로도 시간은 갔다. 그것이 초조했다. 여래와 있을 수 있는 기회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리해서 일정을 조절했지만 그는 종종 이렇게 자신만의 일정을 만들어 내가 애써 좁힌 서로의 부재를 다시 넓게 벌리곤 했다. 그에게서 소외되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 싫다, 라고 말해도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더욱 싫었다.
약속 따위 취소되어버렸으면 좋겠다. 석진이 갑자기 아팠으면 좋겠다. 아니면 변덕스러운 여래가 돌연 저녁에 나가기를 포기했으면 좋겠다. 추우니까, 귀찮아서, 다른 볼일을 핑계로 말이다. 천재지변, 전쟁 발발.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약속 파기의 가능성 중에 ‘나’와 관련된 항목이 끼이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지이잉.
다시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이 혹시 여래인가 싶다. 얼른 들어 올려 확인한다. 그러나 반색한 게 무색하게도 발신인은 여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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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은 완전히 나빠진다. 김무영을 만나야 할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최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