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준혁 (3)
김무영은 유성그룹의 대표이사의 막내아들이다. 그리고 그는 나를 싫어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랬다.
서재는 이십오 개의 코너와 두 개의 잠금장치가 달린 주물 대문을 지나고 난 후 복도의 끝에 위치해 있었다. 안은 어두웠다. 창을 등진 의자에 앉은 무영은 실내에 익숙하지 않은 눈에 얼른 띄지 않을 정도로 어둠에 푹 잠겨있었다. 인기척만으로 나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최준혁입니다.”
무영은 인사를 듣고도 곧바로 일어서지 않았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 몇 번이고 주의를 들었다. 존댓말을 쓸 것, 자세를 바로 할 것, 표정을 드러내지 말 것, 거리를 지킬 것, 사용인으로서 자각하고 있을 것.
그에게 정중해야 할 의무를 가진 나와는 달리 그는 나를 무시할 권리가 있었으므로 무영의 무응답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영은 내가 들고 와 내민 검사 결과지를 흔들었다. 책상 위에서 종이의 그림자가 석양의 빛으로 춤췄다.
“너한테서 뭘 받으라고?”
센터에서 단체복으로 지급된 회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나를 훑는 그의 시선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을 보고 있는 내 눈에 볼 만한 것이란 무영의 발뿐이었다. 그는 밑창이 어디에도 흠집을 낼 수 없으리만치 부드러운 신발을 신고 있었다. 요트에서 신는 종류의 신발이다. 깃을 세운 베이비 블루 피케 셔츠와 흰색 면바지에서는 희미한 바람 냄새가 났다. 바다의 냄새였다. 바다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시지각화된 바다의 정보 정도는 업로드되어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알 수 있다. 파도의 테두리에 생기는 흰 거품, 짜고 비릿한 내음, 육지 쪽으로 불어오는 습기를 품은 바람. 모래사장을 걷는 사람들과 그들이 걸친 미소들.
그런 바다에서 오후를 보낸 그가 하루의 마무리로 나와의 만남을 고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요트에서 억지로 끌려왔을 무영은 이미 짜증에 가득 차 있었다.
“네가 최준혁이야?”
“네.”
“하나만 알려줄게.”
시간을 버티며 무두질되어 온 고상한 윤기를 흘리는 진짜 가죽 소파에서 무영은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 앞에서 불편한 자세로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는 알 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일어난 무영은 무릎 뒤의 움푹 파인 부분을 정확하게 노려 발등으로 걷어찼다. 앞으로 넘어져 무릎을 꿇은 내게 무영은 뇌까렸다.
“윽!”
“…네가 뭐라도 된 줄 착각하지 마.”
갑작스러운 발길질에 땅을 짚으며 고개만을 치켜들자 코끝으로 내려다보는 눈이 차가웠다.
“나를 대신 할 수는 없어. 그 누구도.”
고매하고 유수한 집안의 막내아들. 상처 입어 본 적 없는 자존심. 우연의 일치로 코딩된 유전자의 교집합마저 허락하지 않을 정도의 오만함. 그러면서도 영원히 쟁취 불가능한 신체가 주는 열등감.
그것이 무영이었다.
무영은 두 달에 한 번 내게서 채취한 혈액을 앰플 형태로 가공한 주사를 맞기 위해 센터에 왔다. 무영의 부모, 그리고 형은 모두 우성 알파였다. 열성 알파인 무영은 그들에게 교정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과학의 첨단인 센터에서 나의 혈액에서 분리한 혈청을 무영에게 투여하는 기묘한 치료법이 자행되었다. 우스운 시도였으나 무영 부모가 내어놓는 스폰서십은 결코 비웃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기에, 그 동그라미들 앞에서 이런 혈액 성분의 이식으로 열성이 우성으로 변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연구원은 아무도 없었다.
왜? 유전자 탄 주스라도 마시게 하지? 이게 무슨 잔 돌리면 옮는 병도 아니고. 그러나 빈정거림의 데시벨은 낮았다. 벽이 얇은 하숙집에 사는 여래보다도 더욱 작은 소리였다.
대부분의 시술은 무영 부父가 오너로 있는 기업이 소유한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야.”
혈액이 일체의 오염 없이 가공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피를 뽑고, 뽑힌 피가 처리되는 동안 무영과 나는 내내 유리 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야, 너.”
데리고 온 오메가를 무릎에 앉히고 있던 무영이 나를 불렀다. 그는 볼 때마다 동반하는 오메가를 갈아치웠다. 무영은 그런 편력 행위가 자신에게는 일절 하자도 없으며 왕성한 알파의 페로몬을 가진 것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애무는 진했다. 무영의 손안에서 주물러진 오메가는 무른 과일처럼 으깨지고 있었다.
“너도 하고 싶어? 하게 해줄까? 빼지 말고 말해 봐.”
싫다. 고개를 젓자 무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신경질적일 정도로 높은 음색은 그가 가진 선명한 악의에도 불구하고 해맑았다. 무영 허벅지에 걸터앉은 오메가가 걸친 얇은 상의에는 거듭된 애무로 뾰족해진 유두가 천을 뚫고 나올 듯이 선명했다.
“왜, 너도 꼴에 남의 손 탄 건 먹기 싫냐? 꼴에 우성 알파라고?”
먹는다가 섹스하다의 비속어임을 이제 아는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서 가 봐.”
무영이 턱짓으로 지시하자 그의 허벅지에서 일어난 오메가가 내 앞으로 와서 섰다.
“그 잘난 우성 알파가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 좀 하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내게 오메가는 설핏 이마를 구겼다. 남의 신체 부위를 오랜 시간 쳐다보는 건 무례한 행위이다. 오메가의 젖꼭지에서 서둘러 눈을 돌리자 무영의 재촉이 곧장 따랐다.
“미적거리지 마. 일분마다 하루씩 입금 늦어져.”
그 말을 신호로 오메가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내 목을 감았다.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달콤한 향기가 동시에 끼쳐왔다. 벌려진 입술에서 끼치는 숨이 피부에 닿는다. 멀미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얼굴을 피하는 내게 오메가는 고집스럽게 몸을 붙였다. 타인과의 접촉은 익숙하지 않다. 점점 더 급박하게 밀려오는 토기에 나는 오메가의 팔을 어깨에서 떼어냈다. 이제 어쩌냐는 오메가의 시선에 맞은편 의자 등받이에 다리를 올리고 있던 무영은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로 했다.
“야, 쟤 최상급이야. 너랑 똑같은 우성 오메가. 뭐가 모자라? 쟤 가지고는 성이 안 차? 더 화끈한 애, 데려다줘?”
역겹다. 너무 달다. 이건 여래의 냄새가 아니다. 여래의 냄새는 좀 더 옅고, 그래서 편안하다. 밀도 높은 페로몬에 구토가 치밀었다. 토기에 입을 막은 나를 무영이 막아선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발치에다 오메가를 그대로 밀어버리고 말았다. 오메가는 바닥에 부딪힌 머리를 문지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피해 숨어있을 때, 그의 발걸음 소리를 엇박으로 따르던 내 심장의 소리였다.
사람을 때렸다. 다치게 했다. 아버지처럼. 아버지와 같이.
“미. 미안…. 저, 어디를 다쳤는지….”
“비켜! 별 꼴같잖은 게! 짜증 나! 너 때문에 돈 못 받으면 책임질 거야?”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 오메가가 내 손을 쳐냈다.
“하이고야.”
보고 있던 무영이 끼어든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별 희한한 게 다 있네?”
원심분리된 혈액이 유리 벽 위를 가로질러 앰플 병에 담기는 걸 보며 무영은 중얼거렸다.
* * *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무영이 상기시킨 과거의 뒷맛이 쓰다. 편의점에 들른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두 시간짜리 수업이 두 개, 세 시간짜리 수업이 한 개인 날이다. 공강은 중간의 한 시간뿐으로 점심 먹을 시간을 따로 내기 힘들었으므로 일곱 시간의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먹을 것을 준비해야 했다.
과자며 위생용품, 주스며 청량음료들이 빼곡하게 나란히 귀퉁이를 맞추어 줄지어 있는 편의점이 좋다. 늦도록 조명을 밝힌 간판과 기분 좋을 정도의 냉기와 밝은 채도의 유니폼이 마치 놀이동산 같다. 그 둘은 닮았다. 청결과 정돈을 위해 누군가의 노동력이 끊임없이 투입되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라는 점이 특히 그렇다.
놀이공원은 재미있는 장소로 자주 추천되는 곳이긴 하지만 내게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고 그 사람들이 너무나 흥분된 것처럼 느껴져서 꺼려진다. 편의점도 내게는 충분하게 흥미로운 장소이므로 놀이공원을 대신해 나는 여기를 탐구한다. 빵 및 간식류가 있는 매대와 냉장 진열대는 붙어있어서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걸음은 자연 느려진다.
밥으로 먹어.
여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콜릿이 들어간 빵 앞에서 서성거린다. 삼각김밥은 너무 작고 밥알이 송곳니의 옆에 끼일까 봐 번거롭다. 내 송곳니는 뾰족하며 앞니의 열에서 조금 더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 사이에 음식물이 자주 끼는 편이기 때문에 식사 후 나는 꼭 이를 닦는다. 여래는 그런 내 습관에 대해서 잘 몰랐으므로 어디서건 밥을 추천한다. 아마 알고 나면 추천의 빈도는 적어지리라. 이런 이야기를 앞으로 차차 나누어야겠다.
여래와 나 사이에는 육 년이라는 시간이 놓여있다. 그 육 년은 공백으로 비워진 공간이 아니었다. 커다란 돌덩어리처럼 어딘가를 꽉 막고 있는 장애물이었다. 같은 시간을 거쳐 오지 않은 우리가 공유할 화제는 별로 없었다. 대화는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늪지대를 건너듯이, 침묵의 수렁에 빠져가면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이야기를 했고 여래는 그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나는 여래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즐거웠다. 천천히, 느리게. 마치 식물의 성장 같은 이야기들이 행복했다.
여래는 고기를 좋아한다. 여름에 놀러 가본 적이 없는 여래의 발은 아주 희다. 자주 입는 옷은 반바지와 후드티셔츠다. 여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잔다. 마치 그동안 미뤄왔던 잠을 벼르다가 한 번에 자는 듯하다. 자지 않는 시간에는 공부를 한다. 대학에 가고 싶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자기 나이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하는 여래의 눈은 반짝거렸다.
커버를 씌우지 않은 냉장 진열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김이 차갑다. 여래에게는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게 기억이 나 우유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밀치고 들어왔다.
“아이 씨발, 좁아터져가지고.”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온 그 때문에 나는 옆으로 한 걸음을 비켜나며 주춤거렸다. 남자는 항공기의 관제탑에서 쓰는 것 같은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밀려 나갔지만 남자를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좁은 데서는 기능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나는 생각에 빠져 있었고 느리게 걸었다. 대부분의 경우처럼 내가 나쁘다. 남자는 지폐와 동전을 점원에게 던지고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출입문에 달린 차임벨이 찌르르 울었다.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카운터 앞으로 굴러떨어진 동전을 주워 점원에게 내밀었다. 점원이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고맙습니다.”
고맙다니, 당치도 않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어야 한다. 사회과에서 특히 강조했던 덕목이다. 그러나 대학에 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했고 이기적이었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그러나 이미 몸에 밴 습관은 지울 수 없었기에 나는 타인을 흉내 내 쌀쌀맞게 모른 척하는 대신 배운 대로 할 뿐이었다.
편의점의 로고가 그려진 조끼를 입은 점원은 빠르고 능숙하게 우유와 빵의 바코드를 찍었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카드로만 계산한다. 동전을 세고 건네서 다시 확인시키는 일련의 행동들은 때때로 너무 오랜 시간을 소요하는 동작들이다. 타인이 내게 주의를 기울이는 그때마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땀에서는 냄새가 난다. 누구도 나의 체취를 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오지 않지만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사회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다. 나쁜 냄새가 나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무엇도 할 수 없다. 내밀어진 물건과 카드를 받고 머리를 숙이자 점원은 더 이상 고맙다고 하는 대신 그녀의 키만큼이나 자그마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좋은 피드백이었다. 겨우 안심이 된다.
그 미소로 나는 내가 안전하고 올바른 무엇이 된 것 같다. 틀리거나 고장 나지 않은 어엿한 한 명분의 인간이.
편의점은 좋은 장소이다. 기성품의 미소가 부담스럽지 않게 존재한다.
강의실의 제일 뒷줄 중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검은 비닐봉지를 연다. 수업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이십 분, 앞을 제외한 강의실의 나머지에는 나를 빼고는 앉은 사람이 없었다. 출석이 성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십 퍼센트로 높지 않아서 교실은 대체로 한산하다. 그래도 무언가를 먹는 데에는 약간의 자기 최면이 필요하다. 냄새도 소리도 없다고 믿어야 한다. 일단은 빠르게 먹어야 한다.
빵을 접어 한입에 넣어 씹는다. 우유를 두 번에 나눠서 마신다. 맛있다. 그 과정을 한 번 더 되풀이한다. 여래가 저녁에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느냐고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대한 솔직하게 대답하고 싶지만 여래가 시키는 대로 김밥을 먹지 않은 데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쁜 아이이고 싶지 않다.
지이잉.
진동에 얼른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낸다. 혹시 여래의 약속이 취소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기대에서다. 그러나,
[시술 당일을 기준으로 일주일 전부터 약품 섭취 및 컨디션 관리에 주의해 주세요. -유성그룹 전략기획실-]
이번에도 발신인은 여래가 아니었다. 그룹 측에 내 퇴소 의사가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무시하고 있던지. 퇴소와 더불어 유성그룹, 정확하게는 김무영과의 스폰서십이 자동적으로 종결되리라고 믿었던 게 안일했다. 망설이다가 번호를 찾아 메시지를 입력한다. 무영의 비서에게다.
[차주 내원 불가. 스폰서십 종료일에 갱신 의사 없음.]
하루가 길다. 여래의 약속에 무영의 연락까지, 피곤하다. 이럴 때에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최대한 신경을 분산하는 것이다. 내 경우 그것은 재활용 쓰레기의 분리이다.
비닐 포장을 납작하게 만들어 여분의 공기를 빼고 종이처럼 접는다. 우유팩 역시 마지막 한 방울까지 공을 들여 마신 후, 비닐 포장과 같이한다. 모든 쓰레기들을 최소한의 부피로 만들고 비닐은 플라스틱에 우유팩은 종이류에 구분해서 버린다. 기계적인 행위는 안전하다. 생각의 여지가 거의 없다.
수업을 들을 때는 집중해서 모든 내용을 소화하려고 노력한다. 미술사에 대한 교양 수업은 강의 첫 시간에 배부된 참고 서적을 미리 읽었다면 이해 가능한 수준이어서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필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두 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다른 강의실로 이동하여 남은 빵을 마저 먹는다.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서 마시고 캔 및 유리병의 푯말이 붙은 플라스틱 통에 버린다.
그러나 모든 일을 공들여 해도 그 작업이 항상 신경안정의 효과를 발휘하지는 않는다. 여래의 방에 가도 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쓸쓸해진다. 중력이 증발하고 공기가 옅어진다. 산소 역시 분자이므로 중력이 없는 곳에서는 모두 달아나 버린다. 그곳에는 소리가 없다.
소리, 있어.
그것을 알려주던 따뜻한 손을 다시 느끼고 싶다. 이럴 때의 나는 응석받이가 된다. 지난 육 년 동안 내가 도대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 * *
“어, 우리 준혁이네….”
희미하게 웃는 여래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불그스름했다. 밖에서는 좀처럼 아는 척을 하는 법이 없어서, 오며 가며 고시원 앞에서 그를 만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게 전부였던 여래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말마저 걸어주며 너그러웠다. 다가와 가슴께에 머리를 기대며 올려다보는 여래가 나른하다.
“최준혁 너어, 왜 나와 있어?”
아홉 시까지 기다리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고시원 바깥으로 나온 나는 홀수째의 전봇대에서 다시 고시원으로 회귀하는 패턴으로 시간을 소비하며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첫 번째 전봇대에서 다시 고시원으로, 세 번째 전봇대에서 다시 고시원으로. 그렇게 큰길가의 편의점까지 나왔다.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고 팔짱을 낀 채 학생들이 종종걸음을 쳤다. 북극성처럼, 등대처럼, 편의점은 어두운 밤길의 불을 밝히고 지도가 되며 사람들을 보내주었다. 역시 편의점은 좋은 장소다.
대로로 나오자 기점으로 삼을 전봇대가 없어져 편의점 바깥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을까 어쩔까를 고민하던 나의 등을 여래가 탁, 친 게 방금 전의 일이었다.
“우리 준혁이… 형아 기다렸니?”
물론이다. 지금은 시월 말, 늦가을의 밤은 산책으로 일없이 나올 만큼 녹록한 기온이 아니었다. 대답을 해야 하나? 정말 모르고 있는 걸까? 궁금해서일까? 아니다, 이건 술 때문이다. 여래는 취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고 웃음을 낭비하는 것을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히힛. 열심히 생각하는 것 봐. 귀여워….”
여래는 혀를 내밀고 웃었다. 찬바람에 코가 간지러운 듯 어깨에 얼굴을 세게 비비는 여래는 작은 동물 같다.
“너, 달마시안 같아. 멍들어가지고… 얼룩덜룩.”
그에게서는 간장과 설탕, 참기름과 후추의 갈비 냄새가 났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학교에서 대충 때워 잊고 있던 허기가 맹렬하게 달아올랐다. 식욕이 돌았다. 배가 고파졌다. 무언가 먹고 싶다. 그것이 여래라면 좋겠다.
“귀여운 내 강아지… 형아는 집 찾아갈 수 있는데 왜 나왔어.”
뚫어져라 보는 내 뺨을 여래를 슬슬 쓸었다. 취했을 때면 고집을 부리듯 자신을 삼인칭으로 형이라 부르는 여래 쪽이 훨씬 더 귀엽다. 재재거리는 입에 입 맞추고 싶다. 끌어안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네 시간 사십칠 분을 보충하고 싶다. 침샘에서 터져 나오는 타액 같은 이 욕망이 당혹스럽다.
“들어가자. 여래, 춥겠다.”
그러나 내 속내를 알 수 없는 여래는 느긋하게 웃을 뿐이다.
“알게써어… 뭐가 그렇게 급해. 그래, 그래. 알겠다구. 아참! 준혁이 밥 먹었니?”
드디어 나왔다. 내가 걱정하던 그 질문이었다.
“대충.”
“대충 뭐로. 말해봐.”
곤란하다. 빵을 먹었다고 정직하게 말해야 하나?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하나? 거짓말, 잘 못 하는데. 어쭙잖게 더듬는 내게 짧게 혀를 차며 여래는 부스럭거렸다.
“너 또 아무거나 주워 먹었지.”
주워 먹지 않았다. 사 먹었다. 억울해서 뭐라 항의하려는 나를 보고 여래는 검지를 펴 흔들었다.
“쯧쯧. 내가, 내가 어? 너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준비했지. 짜잔.”
온기가 가시지 않도록 잠바 안에 내도록 품고 온 은박지를 꺼내서 벌리며 여래는 한 번 더 웃었다. 은박지 안에는 갈비가 여덟 점쯤 가위질되어 나란히 누워있었다. 기름진 고깃점들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굽다 남아 말라비틀어진 고기가 아니라 깨끗한 불판에 제일 처음 올렸던 고기가 은박 위에서 먹음직스러웠다.
“먹어. 먹어봐. 맛있더라. 너 주려고 싸 왔다.”
이상했다. 내가 없는 데서 내 생각을 했다는 것이. 바람에 닿은 문풍지처럼 마음이 바르르, 떨렸다.
“얼른 먹어보라니까. 맛집이래. 그리구 다음엔… 석진이 만날 때에… 같이 가자. 걔가 너 데려오라고 했다구. 나도… 흐… 그런다고 했는데에 네가 안 가니까… 꼬옥, 내가 뭐 일부러 안 데리고 오는 것처럼 되잖아… 응?”
“….”
“응? 담엔 같이 가.”
“그래.”
“너 혼자 있는 거 신경 쓰여.”
“왜.”
“그러게?”
실없이 여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치도 산만한 걸 혼자 둔다고… 내가 왜 걱정하지?”
여래는 아주 살짝, 실금같이 얇게만 앞니를 보이며 웃었다. 무표정과 경계한 웃음이 서늘했다. 하지만 여래의 온도는 정상 체온보다 항상 조금 높다. 그래서 내게 나눠줄 온기가 있다.
“옛날 생각나서 그러나? 미안해서… 주제에 말이야.”
여래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자 약간분의 압력만큼 나는 밀린다.
“미안해서.”
“….”
“내가 너 두고 갔었잖아. 그래서.”
고기를 입안으로 욱여넣고 은박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는다. 참지 못하고 깍지를 껴 그를 당겼다. 걸음이 빨라졌다.
“야, 형님이 말씀 중인데!”
“빨리 가자.”
“야.”
“빨리 가.”
문을 닫자마자 선 채로 여래의 옷을 벗겼다. 바지를 끌어내려 벗기고 그 앞에 무릎을 꿇자 여래는 싫은 듯 다리를 모았다. 가느다란 허벅지를 손으로 잡아 벌리자 항의가 이어진다.
“으읏…! 기껏 걱정이 돼서 일찍 왔더니만….”
“미안.”
“미안하다는 태도냐, 이게….”
여래 냄새가 달다. 무영이 데려왔던 어떤 오메가도 이렇지 않았다. 이 달콤함은 나만이 알 수 있기에 특별하다. 여래의 페로몬은 옅으므로 아주 가까이 다가가거나 옷을 벗기지 않고서는 맡을 수 없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흥분시킨다.
엉덩이를 잡아 밖으로 벌리자 겨울철 실내 온도를 만나 바싹 긴장한 비부가 오므라들었다. 여래는 내 어깨를 움켜쥔 채로 이를 갈았다. 어제도, 그제도 했기 때문에 내벽은 부드러웠으므로 바로 넣어도 좋았다. 조여든 건 입구뿐이었다. 오른쪽 허벅지를 아래로부터 잡아서 들어 올린 후 바로 삽입하자 여래 입에서 긴 신음이 터졌다.
“아응… 아…!”
허리를 틀자 체중을 더해 깊어진 자세에 여래는 숨을 들이켰다. 바둥거리는 발이 겨우 바닥을 스친다.
“허억.”
합판 문 뒤로 복도를 지나는 발걸음 소리가 바로 옆인 듯 가까웠다. 도리질하는 여래의 입에 입을 겹치며 속삭인다.
“조용히 해. 들리겠어.”
“이 새끼야…! 갑자기 이게 무슨….”
술기운 때문인지 안은 더욱 흐느적거리며 따뜻했다. 그 느낌을 구하며 끝을 찔러 올리자 목을 안은 여래가 쉰 목소리로 애원했다.
“…누워서 해. 나 힘들어.”
허리부터 엉덩이로 이어지는 선에는 굴곡이 거의 없다. 여래의 골반은 매우 좁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몸을 겹치기 위해서 다리는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벌려져야만 한다. 허벅지와 사타구니가 만나는 지점에 얼굴을 묻자 긴 한숨이 뱉어졌다. 빳빳한 음모가 시작되는 거무스름한 경계를 소리 나게 빨자 벌려진 다리가 모여들었다.
몸은 바다 속 수초처럼 부드럽게 흐느적대기 시작했다. 여래는 자극에 민감해서 피부의 얇은 부분을 문지르거나 핥아주는 것만으로도 쉽게 얼굴이 새빨개지곤 했다. 짙은 향기가 나는 아래를 끊임없이 이와 혀로 괴롭히자 세워진 성기가 내 볼과 귀에 닿아 왔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채로 떨며 곧추선 것을 뺨으로 문지른다. 여래는 가늘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심이 잡아 뺨으로 코로 입술로 애무하는 아래가 그 끝을 조금씩 적시며 울고 있었다. 잡은 그의 것을 혀를 내밀어 아래서부터 위로 입 맞추며 쓰다듬었다. 남의 생식기를 핥는다는 거부감은 없다. 놀랍게도.
“하지 마… 하지, 하지 마….”
그러나 말뿐이다. 여래는 성기를 핥는 나를 적극적으로 밀어내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거짓말쟁이는 베개로 얼굴을 가린다. 어제와 똑같이 방의 벽은 너무 얇았다. 방금 만도 옆방의 고시생이 의자를 끄는 소리가 긴 꼬리를 남기며 듣지 않았던가. 쾅,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우리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래가 조심하려 드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보건 시간에 시청한 영상물에서도 성행위는 조용한 공간에서 당사자들 간의 합의하에 성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으응.”
아래를 아래와 이어 붙인 다음 등을 둥글게 말아 입술을 겹치고, 그가 뱉은 젖은 신음을 대신해 삼킨다. 숨이 차오른 여래가 가슴을 밀치자 붙잡혀 있던 혀는 악수를 놓치듯 조금 나와 둥근 끝을 보였다.
“숨 막힌다고, 바보야.”
“미안. 몰랐어.”
“싫다, 정말.”
“싫어하지 마.”
“….”
“싫어하지 마.”
겁먹어 멈춘 나의 등을 그의 손이 쓸어내렸다. 엉덩이께로 내려온 상냥한 손이 나를 좀 더 그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여드는 자극에 얼굴을 찡그리는 내 옆으로 그가 속삭였다.
“싫은 사람하고 이런 짓 안 해….”
이가 아프리만치 달콤한 말을 삼키지 못하고 머금는다.
여래는 팔을 들어 침대의 머리와 만나는 벽을 잡아 몸이 밀리지 않게 버티고 있었다. 물결처럼 쓸려가지 않도록. 아래가 더욱 세게 부딪힐 수 있도록. 그것이 몹시 야하게 느껴져서, 다시 아랫도리에는 뻐근하게 피가 쏠렸다.
아플 정도로 단단해진다. 낫는 방법은 더욱 세게, 그에게 밀어 넣어 중심에 닿는 수밖에 없단 걸 이제는 안다.
대체로 옅은 갈색과 가끔의 검은색, 형광등 불빛에 반사된 흰색 반점으로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여래 눈 안에서 일렁인다. 바라본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어이없을 만큼 열중해있어서 그것이 한심하다. 부끄럽다. 어깨 옆으로 몸을 디디고 있던 팔을 옮겨 손으로 눈을 덮었다. 얼굴은 작고 한 번의 손짓만으로도 가려진다. 눈꺼풀을 닫아 눈을 감겼다. 손목에 닿은 관자놀이는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뻗어진 팔과 다리가 조난을 두려워하는 선원처럼 내 몸을 끌어안았다. 거칠게 부표를 흔드는 파도가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길게 나왔다가 다시 깊이 들어가길 반복하면서 벌려진 입술만이 뻐끔거리고, 목구멍 안쪽에서 신음이 끓어오르는 순간 여래의 가슴이 활짝 펴지며 등이 튀어 올랐다. 삼십육 점 오도의 온도로 튀어나온 정액이 배꼽 안에 고이다가 흘러넘쳤다.
“준혁아….”
언제나 내가 미치지 않을까를 두려워해 왔다. 잠복한 유전자가 드러나 나를 장악하고, 휘두르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공포가 존재한다. 머릿속에 심어진 폭탄의 뇌관은 단숨에 정상 이상으로 발화해 터질 수도 있다. 그릇 안에 든 연한 두부를 볼 때면 그 흔들리는 움직임이 마치 으깨어지기 쉬운 나의 뇌를 떠올리게 했으므로 기분이 나빴다. 늘 ‘정상’이고 ‘보통’에 속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지금의 나는 그 결과이다.
경직되어 있고 침체되어 있는 나. 다음 행동을 설계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나. 지긋지긋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본질적인 한계. 편의점에서 새치기를 한 남자에게도 항의하지 못하고, 매번 오메가를 갈아가며 조롱하는 무영에게 침묵하는 나.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여래와 함께 있으면 다르다. 나는 그저 움직인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다. 나를 제어하던 퓨즈는 녹아버리고, 허리와 엉덩이는 제멋대로 흔들렸다. 근육의 이완과 수축에서 파생된 쾌감은 뇌의 명령보다 빠르고 강렬하다. 생의 처음으로 나는 자유롭다. 무영에게도 센터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고유한 나 자신으로서만 살고 있는 기분은 쾌감에 가깝다.
해야 한다, 와 해서는 안 된다, 의 고삐가 없는 벌판에서 무한한 가능성으로 달리는 이런 느낌. 그가 울어도 노팅 된 성기는 빠지지 않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아내며 허리를 떨었다. 그 행동에 필요한 불필요한 생각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남자가 사랑스럽다.
그뿐이었다.
* * *
“홈커밍데이?”
여래는 누운 채로 초대장을 들어 올려 불빛에 비춰보았다.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을 쳐낸 여래는 내 가슴을 디디며 위로 타고 올랐다. 아침에 두고 간 걸 이제야 확인하는 여래가 게을렀다. 하지만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나는 탓할 말을 잊는다.
“나도 가도 돼?”
“아니, 꼭 와줘야 해. 퇴소 절차를 그때 정식으로 접수하기로 했어. 이것저것 여래도 함께 가야 한다고 들었어. 신원보증인… 같은 건데… 그건 여래가 나랑….”
“어? 너 거기 나와? 센터 나올 거야?”
여래는 내 손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차 싶었다. 아직 여래에게는 센터를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까닭이었다. 순서가 뒤바뀌어도 완전히 뒤바뀌었다. 낭패스러운 나는 중언부언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려고 해. 말을 못 했어. 미안해. 저번에 갔을 때 상담 받았어. 나오고 싶어서 찾아갔어. 매니저가 상담을 해줬는데.”
누더기같이 이곳저곳을 함부로 기워 붙인 나의 설명에 무얼 생각하는지 여래는 말이 없었다. 살짝 식은땀이 돋았다. 멋대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말 걸 그랬다. 여래가 화를 낼 수도 있다.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네 인생을 왜 내 인생과 겹치려 하느냐 항의할 수도 있다. 초조해서 눈치만 보고 있던 그때 여래의 눈이 스위치를 넣은 전구처럼 반짝, 밝아졌다.
“그럼 최준혁 있잖아. 너… 너한테 무슨 실험도 이젠 안 하는 거야? 머릿속에다가. 저번에 말했잖아.”
“그건 속에다가 하는 게 아니고 전기적인 자극을….”
“아무튼지 간에!”
“응. 안 해.”
“우와아….”
신음성에 순간 긴장한다. 무슨 의미일까, 이건 또. 옆방에서는 헛기침 소리가 높아졌다. 눈치를 보며 살피는 내게 여래는 함빡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말 잘됐다.”
잠깐 말을 잊은 사이 여래가 재재거렸다.
“나 거기 싫어. 너한테 이런 거 저런 거 시켜서… 이상한 데야! 다 비밀이라고만 하고 넌 얘기도 잘 안 하니까. 뭐… 말한다고 한들 내가 알아들을 수도 없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여래는 초대장의 모서리로 내 가슴 한구석을 쿡 눌렀다.
“넌 아무렇게나 취급당해도 참고만 있잖아. 도통 말을 안 하니까.”
찔린 부분으로부터 작고 예리한 통증이 퍼져나간다.
“걱정되게시리.”
여래는 곧 표정을 바꿔 밝게 들뜬다.
“그런데 이제 거기 나온다니까 완전 잘됐지. 나옴 어떻게 할 거야? 생각해둔 거 있어?”
“여래랑.”
“응.”
“여래랑 살고 싶어.”
초대장을 보던 여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치. 웃긴다, 너.”
싫다는 소리일까? 가슴이 덜컹거린다. 내가 너무 들떴는지도 모르겠다는 자각에 갑자기 불안해진다.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여래는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누구랑 어쩌려고 그랬어. 당연히 나랑 살아야지. 별 시답잖은 말을 하고 있어.”
“아….”
“아무튼 초대장 쓰면 되는 거지? 어디 보자. 음. 이름이랑, 소속. 관계. 쉽네. 그런데 생각할수록 진짜 웃기네. 뭐? 여래랑 살고 싶어? 웃겨. 나 아님 그럼 다른 누가 있단 거야 뭐야. 최준혁 주제에.”
무어가 불만인지 구시렁대는 여래가 신경 쓰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여래와 함께 있을 수 있단 생각에 들뜬다. 앞으로도 계속이다. 여래가 허락했다. 마음이 견딜 수 없게 날뛰었다.
벗은 등을 보이며 배를 깔고 누운 여래가 초대장에 뭐라고 적어 넣으려는 걸 낚아챈다.
“뭐야, 이리 내.”
“이건 나중에.”
“야, 안 줘? 안 내놔?”
“한 번 더 하자.”
꼿꼿해진 아래를 의도를 담아 비비자 여래는 질겁하며 나를 밀쳤다.
“이… 이게 진짜! 나 허리 아파!”
쾅!
머리 위, 벽이 울리자 여래는 어깨를 모으며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옆 방을 의식해 한결 누그러든 기세였다. 방 벽이 얇은 게 이런 때는 도움이 된다. 움츠러든 그의 어깨에 입을 맞춘다.
“한 번 더 해.”
“미쳤나 봐. 정말…. 아우씨!”
여래는 가슴에 달라붙는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빨아서 흐물흐물해진 젖꼭지를 건드리자 나지막한 부탁이 이어졌다.
“살살 해.”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내리는 비는 차다. 인문대의 로비에서 서서 오렌지빛 가로등을 부수며 내리는 빗방울을 본다. 습기에 젖은 먼지의 냄새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비강의 깊은 데까지 찌르고 들어왔다. 찡, 하고 아파온다.
야간까지 이어진 수업으로 벌써 시간은 여덟 시였다. 바깥은 한밤중처럼 어둡다. 낡은 대리석 바닥을 우산을 펴는 학생과 누군가를 기다리는 교수, 연락을 하는 근처 중국집의 배달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곳에서 나는 비를 맞는 사람이었다.
오늘 나는 우산이 없다. 영하로 낮아진 기온은 이번 주 주말까지 회복되지 않으며 강수확률은 약 70퍼센트라는 기사에 만약을 대비해 가지고 다니던 접이식 우산을 여래의 가방으로 옮겨 넣어놓았기 때문이다.
“춥다.”
내피와 외피가 분리되는 아웃도어용 점퍼에 붙은 모자를 이마까지 당기고 끈을 조였다. 콧등 위로 빗방울이 부딪혀 깨어졌다.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빠르게 걷는다. 옆으로 자신을 기다린 우산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춤을 추듯 짝을 지어 사라졌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종류의 배웅이나 기다림은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 엄마는 없었고 은애원에서는 모두가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센터는 지하 연결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어 볼까 하다가 만다. 어차피 여래로부터의 연락을 없을 터였다.
여래는 요새 바쁘다. 매니저가 우려한 파트너의 직업 유무에 대해 말하자 여래는 바로 일을 구했다. 버스로 여덟 정거장 떨어진 대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여래는 오후 두 시부터 아홉 시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붙박여 있었다. 어차피 같이 살려면 적어도 원룸은 가야지, 그러려면 돈이 필요해, 라고 하는 여래를 말릴 겨를은 없었다.
정해진 쉬는 시간, 그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은 한 시간 중 십 분 외에는 휴대폰을 보는 게 금지되어 있어서 나는 여래가 일을 하는 시간대에는 메시지를 보낸다거나 전화를 걸어 방해하지 않았다. 여래가 부재하는 감각은 괴롭다. 그러나 그가 퇴근할 때 내가 넣어둔 우산을 쓰고 오겠지, 라고 생각하니 외로워졌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웃고 싶다. 이럴 때 웃을 수 있으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웃음은 역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우산 아래서 웃고 있을 여래를 떠올린다. 웃을 수 없는 내가 웃는 방법이었다.
빠아앙.
지하 주차장에서 나온 차가 내 뒤에서 경적을 울렸다. 가로수가 심어진 곁으로 피하며 발걸음을 빨리한다. 비를 맞는 것도 싫었지만 혹시라도 여래가 먼저 방에 돌아 와있을까 싶기도 했다.
여사님, 들이 주가 되는 식품 매장의 파트타임 판매직은 계속해서 서 있어야 하는 것 외에 육체적으로 그리 크게 힘든 편은 아닌 듯했다. 그나마 여래가 일하는 정육부가 남자가 많은 편이었다. 일을 하고 돌아온 여래에게서는 날고기의 비린내와 유리 진열대의 차가운 냉기가 배어있었다. 부은 여래의 다리를 내 허벅지에 올리고 무릎 밑의 움푹 파인 부분을 엄지로 누르자 여래는 목욕탕에서 반향 되는 아저씨들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아아, 하고.
빠아아앙.
비키는 나를 지나치지 않은 차가 뒤에서 계속해서 쫓아왔다. 추월해 가기를 기다려도 좀처럼 속력을 내지 않는 차에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깨를 모으고 가방끈을 추스르며 벽에 붙는다.
빠아아앙-.
이어지는 경적에 머리 위에서는 드르륵, 창문이 열리고 내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상가 건물의 1층에 입주한 슈퍼마켓의 주인아저씨도 손을 멈추고 유리창 바깥을 넘겨다본다. 그제야 깨달았다. 차가 나의 주목을 원하고 있음을.
마침내 뒤돌아서 경적을 울리는 차를 본다. 거대하다는 단어 외에는 어울리는 단어를 생각해 낼 수 없는 우람한 세단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왁스 코팅을 마친 검은 보닛 위로 빗방울이 미끄러졌다. 특히 공을 들여 닦은 듯한 엠블럼이 가장 깊은 윤기와 가장 밝은 그림자로 헤드라이트에 반사됐다.
멋진 차였다. 오줌 냄새나는 싸구려 골목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안녕.”
운전석의 차창이 열리고 손만이 나와 흔들렸다. 단정하게 손질된 손톱이 완벽에 가까운 타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이런 차와 저런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학교에서부터 따라왔는데 영, 눈치채주질 않네?”
김무영이었다.
“아….”
이제야 계속 빵빵거리던 차가 왜 이렇게 내게 신경질이 나 있었는지를 알겠다.
“타. 비도 오는데.”
올라탄 조수석의 가죽 시트에 비가 묻을까 염려하는 내 어깨를 탁, 쳐서 눌려 앉힌 무영은 유쾌했다.
“어떻게 학교생활은 할 만하고?”
“네.”
“신기하네, 절대 센터 못 벗어날 줄 알았더니.”
“네.”
“대답은 네네밖에 못 해?”
“…네.”
무영은 앞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 씨발. 뭐 길이 이래. 저쪽으로 빠져서 큰길로 돌아간다. 괜찮지?”
괜찮지 않았다. 골목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을 통해서라면 여래의 방까지는 5분 남짓한 거리는 버스 정류장이 끼어있는 대로로 돌아가면 20분이 걸렸다. 불만스러워진 나를 개의치 않고 무영은 핸들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실험실 나간다고 했다며?”
무영은 센터를 실험실이라고 말했다. 실험실이라는 단어는 내게 비커와 가운과 쥐를 떠올리게 했다. 사실 그에게는 내가 그중 어느 것보다 나을 것이 없는 존재이기는 했다.
쓰윽, 탁. 쓰윽, 탁.
라디오도 음악도 없는 차 안에서 와이퍼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리드미컬하다.
“결혼이라고 해야 하나, 결합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뭔가를 한다는 소식 들었어. 오메가랑. 축하해?”
“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지.”
둘의 차이가 그렇게 중대하고 크다고는 여기지 않지만 일단은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답지 않게 굳이 나가려는 이유가 궁금하더라니… 하하.”
비가 오는 도로는 주차장처럼 변해있었다.
“섹스해 보니까 어때? 좋아 미치겠어?”
다들 내게 섹스에 대해 묻는다. 센터원들도, 무영도 그렇다. 도무지 왜들 난리인지 모르겠다.
앞차의 빨간색 후미등이 빗방울에 번지자 와이퍼가 바쁘게 그 자리를 닦아냈다. 무영은 핸들에 손을 올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통 체증을 겪어보지 못한 짧은 인내심이 그의 입가를 심술궂게 구겼다.
“그 돈을 다 사양하고 센터를 나가게…. 너 완전히 빠진 모양이더라?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인지 궁금해 가지고 말이야.”
“….”
“나이도 너보다 많고 직업도 없다며. 남자고. 열성오메가.”
정확한 정보다. 하지만 왠지 채워진 안전벨트가 답답하리만치 조여 와서 몸을 뒤챘다.
“열성이니 생식 능력도 떨어질 거고, 남자라 나긋나긋하지도 않을 거고. 나이도 많으니 피부도 푸석푸석할 거고. 너 그런 취향이었어? 그래서 그동안 한 번도 오메가랑 안 한 거야? 내가 꽤나 대다 바쳤잖아. 그걸 거들떠도 안 보길래 난 너한테 하자라도 있는 줄 알았지. 그런 놈한테서 성분 수혈 받는 걸까 봐 개짜증 났잖아.”
무영의 말은 빠르다. 그 사이를 파고들 틈을 좀처럼 내주지 않는다. 빈정거리던 무영은 이제 으르렁거렸다.
“우리 꼰대들이 난리야. 시발. 이제 와 우성 알파를 어디 가서 찾느냐고!”
무영은 짜증 난 듯 핸들을 내리치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심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 까다로운 존재가 되는 것만이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 듯했다. 정차한 버스를 향해 던지는 무영의 시선에는 짜증이 막 결정을 이루기 시작하는 소금기처럼 어려 있었다. 내리고 싶다. 하지만 차는 느리게, 느리게만 움직일 뿐이었다.
“네가 나가고 싶다고 해서 멋대로 되는 건 아니야, 알지?”
“유성 그룹과는 건당으로 계약했습니다. 센터에는 퇴소 신청서를 구비했습니다. 제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와서 발 빼겠다는 거야?”
계약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계약이란 당사자 쌍방이 동등한 관계임을 상정한다. 김무영은 나를 그런 존재로서 인정해본 적이 없었다.
“웃기지 마, 병신 새끼야. 피 팔아서 먹고사는 주제에 거들먹거리지 말라고. 이마만큼 사는 게 누구 덕인 줄 알아야지.”
무영은 기어를 잡았던 오른손을 들어 내 뺨을 쳤다. 실험실 쥐의 궁둥이를 두드리듯 찰싹, 가볍게 때리는 손이 모욕적이었다.
싫다.
화가 난다.
허벅지 위에 올린 주먹에 힘을 준다. 힘줄이 갓 태어난 산맥처럼 꿈틀거렸다.
“주제 파악해라. 최준혁.”
그 순간 나는 이성을 잃을 뻔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구원받는다.
버스 정류장에는 미처 우산을 가지고 오지 못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높았다. 이름 없는 얼굴들.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물비늘 같은 편린들. 그리고 그중에 내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얼굴이 있었다.
여래였다.
“잠깐.”
“뭐가.”
“잠깐, 창문.”
서둘러 버튼을 누르자 창문이 내려진다. 검은색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던 여래가 앞에 멈춘 차와 그 안의 나를 눈치채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 뭐야. 어디서 나타났어, 너.”
여래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웃었다. 뺨과 코끝이 빨갛게 얼어있다. 가방 안에 우산이 있는데 왜 쓰지 않고 있는지를 물어보려 하는데 무영이 흠, 하고 헛기침을 한다.
“누구야, 최준혁?”
대답하지 않는다. 무영과 상호작용하고 싶지 않다. 이번에는 무영도 올바른 대화의 용례를 나에게 지적하며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무영은 여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훑었다. 노골적이기까지 한 시선에는 관찰과 호기심이 역력했다. 무언가 가슴이 껄끄러웠다.
“내릴게요. 걸어가겠습니다.”
“…최준혁, 내 얘기 흘려듣지 마.”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차 밖으로 나온 나는 바로 여래의 가방을 뒤진다. 넣어놓은 자리 그대로인 우산을 꺼내 펼친다. 그 안으로 여래를 들이니 작은 우산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꽉 찬다. 어깨를 당겨 거리를 좁히자 여래가 들고 있던 검은 봉지가 다리에 채였다.
“우산 넣어놨었어? 말을 해야 알지. 알았음 안 뛰는 건데! 그대로 다 맞았네.”
“이런.”
“괜찮아, 괜찮아. 많이 안 젖었어. 그런데 벌써 귤이 나왔다? 헤헤. 마트서 안 사고 리어카에서 샀어. 이천 원어치만. 밥 먹고 먹자. 한 번에 열 개는 먹어야 되는데 속을 알아야지. 맛을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서 조금만 사봤어. 그런데 맛있으면 어떡하지. 리어카 아저씨 다른 데로 갈까 봐서.”
봉지 안을 열어 보여주는 여래가 조잘거리며 웃었다. 그 얼굴이 따뜻하다. 무영과 함께 있느라 식었던 피가 데워지고 나빴던 기분이 풀어진다. 아직 내려진 채인 창문으로 무영은 우리 둘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여래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차 쪽을 한 번 더 흘끔거리기까지 하자 무시할 수가 없다. 해석하고 싶지 않은 신체언어지만 답을 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을 태세라 대답한다.
“아는 사람이야.”
나는 무영을 거의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나를 모르는 여래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준혁이 태워주셔서.”
무영은 어두운 차 속에서 여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기요.”
여래는 귤 두 개를 집어 창문 안으로 내밀었다. 무영은 여래가 내민 귤을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가시면서 드세요.”
한 번 더 재촉하자 하는 수 없단 듯 무영은 손을 뻗어 귤을 받았다. 무영은 여래와 그의 어깨에 걸쳐진 내 손을 번갈아 쳐다보며 무영은 손안의 귤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또 보자. 최준혁.”
왜 저런 표정일까. 나는 무영의 매끈한 얼굴에 이는 균열을 이해하기 어렵다. 무영은 차창을 닫으며 무엇이 불만인지 턱을 굳혔다.
“춥다. 빨리 가자. 준혁아.”
여래가 내 점퍼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움직이는 손이 간지러워 그의 정수리에 뺨을 비볐다. 사랑스러운 감촉이 방금 전까지 빳빳하게 날을 세운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그날의 매상이며 손님이며를 이야기하는 여래의 목소리가 차근했다. 차는 아직도 밀리고 있었다. 무영의 차는 버스 정류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 거기에 갇혀있었다.
마음대로 하라지. 더는 모른다.
주변을 둘러본 뒤 우산을 젖혀서 우리를 가리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불시의 키스에 얼떨떨해졌던 여래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밀치고 앞으로 걸어가지만 나는 금세 따라잡고, 우산 안으로 다시 그를 잡아당긴다.
순순하게 딸려오는 그가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나를 올려다봤다.
키스 금지의 표지판은 어디에도 없는데.
* * *
골목 입구 백반집에서 삼치구이와 제육볶음을 시켜 저녁으로 먹는다. 밥 한 공기를 더 추가해서 사이좋게 반으로 갈라 나누었다. 두 그릇은 너무 많고 한 그릇은 조금 적었기 때문에 나는 여래와 무엇을 먹는 게 좋다. 딱 알맞은 기분이 든다.
여래와 함께 있으면 비틀린 관점이 바로잡히고 무게 중심이 가운데로 온다. 균형 잡히고 올바른 느낌이 든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달리는 트랙에서 이탈해 있는 나에게는 더욱이나 그렇다. 탁자용 냅킨을 접어 상 위에 올리고 수저와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는 나에게 여래는 좋은 신붓감이라며 웃었다. 반찬을 내리던 몸집 좋은 중년 여자가 여래의 허튼소리에 같이 깔깔댔다.
웃는 건 좋다. 그 주체가 비록 내가 되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다.
황갈색의 식탁과 그 주변에 음식을 두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비누 거품처럼 녹아든다. 주말드라마 같은 풍경이 따뜻하면서도 어색해서 나는 물 잔을 엎었다. 자연스러운 애드리브인 양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여래와의 동반 캐스팅인 덕분인지도 모른다.
“가만있어 봐.”
내가 당황한 사이 여래는 마른 수건을 빌려와 토닥이며 바지 위를 닦아주었다. 고전적인 성 관념에 따르자면 신부가 어울리는 쪽은 이쪽이라고 생각하지만 말하지는 않는다.
백반집에서 나와 다시 우산을 같이 쓴다. 들리는 소리라곤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혀 타닥거리는 머리 위의 진동뿐이다. 우산 안은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이 되어서 나는 좀 더 그의 곁으로 붙어 섰다. 주머니 안의 손에 깍지를 끼어보기도 하고 풀어 보기도 하는 내게 여래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누구야?”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찾자 피식, 김이 빠지는 소리로 그가 웃었다.
“아니, 아까. 차 태워준 사람.”
“아까, 차?”
“그래. 아까 차 말이야. 친구야? 누군데 얻어타고 왔나 해서.”
친구, 친구라니. 나와는 얼마나 인연이 없는 단어인가. 의미에는 익숙하지만 사용해본 적 없는 단어의 쓰임에 당황한 나는 그것이 무영을 가리킴을 한참 후에야 겨우 안다. 서둘러 고개를 젓는다. 살그머니 웃음기가 퍼지는 여래의 얼굴에 목이 멘다. 기뻐하며 기대하는 분위기를 저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긍정은 거짓말과 다름없다. 고개를 저어 보이지도, 끄덕이지도 못하고 갸웃하는 걸로 겨우 눙친다. 무영은 친구가 아닌데, 그런데.
“친구 비슷, 한 거 같아.”
그 단어의 가장 나쁜 경우와 최악의 의미만을 조합해 새로이 만든다면, 아주 낮은 가능성으로 무영과 나는 친구 그 비슷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간에 그와 나는 피를 나눈 사이이기도 하니까.
“우와, 어떻게? 어떻게 아는 사인데?”
“세… 센터에서. 오며 가며. 많이는 몰라.”
“그래, 원래 천천히 알아가는 거지. 다 그래.”
식은땀이 다 난다.
“사람 좋아 보인다. 비 오는 날 태워도 주고.”
무영이 사람이 좋다고? 내 귀에 문제가 생겼나?
뭐라 대꾸할 줄 모르는 나를 두고 조잘대는 입이 바쁘다.
센터 방문일, 로비에서 내방을 기다리고 있는 인파들을 앞두고 끈이 풀어진 구두를 당연하다는 듯 수행원의 무릎에 올리고 묶어주기를 기다리는 무영을 침묵 속에서 지켜본 적이 있던 센터원이라면 무영과 사람 좋음을 그를 설명하는 서술어로 선택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건 좋지 못한 습관이다. 여래가 착각한다면 그건 그대로 놓아두는 게 낫다. 어차피 앞으로 둘이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니까.
“조금 마음이 놓여.”
내려다본 여래의 뺨이 부드럽게 솟는 것으로 나는 그가 웃고 있음을 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영과 내가 친구인 게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관심의 조리개가 무영에 맞춰져 있는지 친구에 맞춰져 있는지 가늠해본다. ‘무영’이라면 언짢아지고 ‘친구’라면 좌절하게 된다. 어느 쪽도 내가 능숙한 분야는 아니었다.
“너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필요해. 친구나 선후배나 그런 거. 학교 집, 학교 집, 하지 말고 세상을 넓혀보는 게 좋아.”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하긴. 그러고 나면, 내가 보잘것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띄워진 쓸쓸한 미소를 지우며 여래는 씩씩하게 걸었다.
이상한 생각이었다. 여래가 내게서 보잘것없어진다는 게 첫 번째로 이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야 한다는 여래의 주장이 두 번째로 이상하다. 너무나 이상한 나머지 사실은 그것이 나를 그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변명이 아닌지 의심한다. 헐거워진 손의 깍지를 힘줘 다시 잡아 단단히 쥐었다.
나에게는 여래뿐이다. 다른 사람 같은 건 필요 없다.
지이잉. 진동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낸다.
[목요일 내원 부탁드립니다. -유성그룹 전략기획실-]
문장은 이전까지 친절하고 자세하던 태도를 버리고 강압적일 정도로 단순해졌다.
“뭐야?”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자 여래의 눈이 미심쩍단 듯 가늘어진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여래는 내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어어? 이게 숨기는 것도 있어. 야,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누군데 그래, 점점.”
장난기 띤 여래가 휴대폰을 빼앗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기 전 겨우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리는 데 성공한다.
“…친구.”
양심이 따끔거렸다. 거짓말 또한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여래는 다짐을 받듯 재차 물었다.
“친구? 그럼 아까 그 사람?”
“응.”
“잘 들어갔냐고 물어봤어?”
“…응.”
무영은 유성 그룹을 전부 짊어진 양 으스대고 유성 그룹은 무영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므로 그 둘은 내게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대상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렇게 대답하는 데에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이 들진 않았다. 다만 신경 쓰였던 것은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양 오오, 하는 거품 섞인 탄성을 지르며 옆구리를 찌르는 여래였다.
여래도 내가 보통이 되길 원할까? 친구를 가지고 사회에 어울리고 섞여서 적응하길 바라는 여래의 기대를 생각하자 마음은 답답해진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자바라 옷걸이에 젖은 옷을 걸어 말린다. 검은 봉지에서 튀어나온 귤을 침대 위로 쏟아놓으며 여래는 그 옆에 앉았다. 귤껍질을 까느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를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조금 위로 들었다. 엉덩이 모양으로 움푹 꺼진 그 자리에 내가 대신 앉고, 앉은 허벅지 위로 그를 앉혔다. 이렇게 앉으면 자리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
침대는 좁을수록 달콤하다.
“요새 이상하게 귤이 먹고 싶어.”
“응.”
“그냥 겨울이 돼서인가.”
여래는 내 허벅지에 올라앉은 자리가 불안한지 입술을 깨물며 투덜대다가 곧 귤껍질을 벗기는 데 정신이 팔렸다. 어떤 귤은 시었고 어떤 귤은 달았다. 어떤 귤은 아무 맛이 나지 않기도 했다. 엇비슷한 주황색에 초록색 배꼽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같은 당도와 같은 맛이 아니다. 귤은 그래도 괜찮은 것이다.
나도 그럴까?
삐걱거리고 비틀거려도?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아도 좋은 걸까? 하나를 떼어 내 입에 넣어주던 여래가 웃었다.
“먹다 말고 왜 이렇게 심각해. 아까부터 이상하다, 최준혁.”
마주 보고 앉은 여래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묻는다. 조금 멍해져서 내 위로 올라타 앉은 그를 쳐다본다. 그가 어떻게 나의 기분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떻게 알지?”
“말도 없고, 눈빛도 음침하니까 그렇지. 내가 왜 몰라. 어린애 주제에 시무룩해져 가지고선.”
“안 그랬어. 그리고 나는 너보다 세 살만 어려. 어린애가 아니야.”
“어어, 이젠 제법 대거리까지.”
“아니야. 난 여래한테 안 그러는데.”
“어휴, 좀 컸다고 짜증 내는 거 봐.”
“됐어. 안 해, 말.”
“장난이야. 장난. 웃어. 웃어 봐.”
여래는 양 엄지로 내 입꼬리를 잡아 억지로 늘린다. 웃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스운 모습일 것은 확실하다. 얼굴에서 손을 잡아 떼버리고 허리를 당겨 깊게 안았다. 늘 보던 시점이 아닌 올려다보는 그는 조금 다르다. 내가 모르는 여래가 또 여기 있다.
“웃어봐, 준혁아.”
“못 해.”
“내 강아지.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두드려 맞은 개같이 축 처진 얼굴이 수채화 같은 눈동자에 비친다. 들여서 키우는 애완동물이 아닌 가축에 가까운 종류라 짖을 기회는 도둑이 들어왔을 때뿐인, 방범 도구에 가까운 개가 거기에 있다.
오랜 습관대로 짖지도 울지도 않은 나를 여래는 알아챈다. 무영을 만나 어두워졌던 마음이 내내 밝아지지 않고 있었지만 밥을 먹고 길을 걷는 동안 말한 적은 없었다. 나는 크게 웃는 법도 없지만 크게 찡그리는 법도 없어서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는 법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센터의 연구원들도 모르는 나를, 여래는 어떻게 아는 걸까.
여래는 정말로 똑똑하다. 무엇이든지 알고 있다. 대학 따위 가지 않아도 훌륭한데, 왜 그는 대학에 가고 공부하고 싶어 하는 걸까.
“…어떡해야 우리 강아지 마음이 풀어지지?”
기분은 이미 나아져 있었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그 손길이 계속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을 뿐이다. 손가락으로 만든 빗살이 머리카락과 헝클어진 밤을 가다듬는다. 최악에서 건져 내진다.
여래가 없는 별의 중력은 목성과도 같다. 목성의 중력은 지구의 이점 칠 배. 짜부라드는 압력과 대기의 폭풍 속에서 나는 잘 살아나갈 수가 없다.
그가 좋다. 지구의 중력에서 나를 살게 하는 그가.
“말해 봐,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 테니까.”
그래?
내가 원하는 걸 정말로 알고 싶어? 너를 가두고 싶다. 개기월식의 밤에. 달이 없는 밤의 어둠으로 너를 유배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고백이 너를 진저리 치게 하리란 것쯤은 이제 안다. 그래서 나는 말 대신 귀에서 목이 이어지는 부분을 빨아들여 자국을 남겼다. 오줌을 갈기고 손톱을 긁어대는 영역 표시에 다를 바 없는 마킹에 여래가 얼굴을 찡그렸다. 단번에 눕히고 남자를 끌어안았다.
“몸으로.”
잘 들리지 않는 여래는 고개를 갸웃한다.
“몸으로 위로해줘.”
나지막이 한숨을 뱉은 여래가 조그맣게 웃음을 보였다.
“가면 갈수록 뻔뻔해진다, 최준혁 너.”
그러면서도 여래는 내 목에 팔을 걸었다.
“네 머리엔 그거밖에 없냐?”
사실 그렇다. 잠자코 기다리는 내게 여래는 몸을 붙였다.
“최준혁 정말 싫다.”
싫다고 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결국 팔을 들어 내가 옷을 벗기는 걸 도와주는 여래는 오늘 밤 역시 수수께끼로 남는다.
* * *
[진료 예약 1시간 전입니다. -유성 그룹 전략기획실-]
[진료 대기 부탁드립니다. -유성 그룹 전략기획실-]
[진료실 앞좌석에 착석 부탁드립니다. -유성 그룹 전략기획실-]
[최준혁 씨.-유성 그룹 전략기획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최준혁 씨. 전화 받아주세요. 좀!]
급한 나머지 유성 그룹 전략기획실은 자기 이름을 붙여 넣는 걸 잊었다. 문자 너머로 그걸 보내는 인간이 처음으로 엿보였다.
* * *
[몇 호?]
열한 시 사십오 분, 406호 강의실에서 수업이 끝난 것과 거의 동시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여래와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기 전부터 들썩거리던 나는 얼른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선다.
그런 나를 붙드는 건 강의실 뒤편의 출입구에서 부글대는 소음이다. 여학생 셋과 남학생 하나의 군집,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짝을 이룬 학생들의 시선이 희미한 푸른 광택을 띄는 검은색의 정장의 남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멋을 부려봤자 화학섬유뿐인 학생들 무리 속에서 그가 입은 옷의 질감과 빛깔은 이질적일 정도로 튀어 보였다. 쏟아지는 관심과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 무시하고 있는 오만한 태도가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더 알아보려는 노력은 필요 없다. 약속이 먼저다. 지나치려는 나를 향해 그가 손을 들었다.
“야.”
무영이었다.
너무 많다. 너무 자주다. 기껏해야 우리는 일 년에 대여섯 번, 그것도 무영의 일방적인 적의에 내가 쩔쩔매는 십분 내외로만 조우하는 사이에 불과하다. 문 앞을 지나치려는 걸음을 막아선 무영을 노려보자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흐응, 콧소리를 냈다.
“뭘 또 그렇게 봐? 쫄았냐?”
무영은 내가 그를 무서워하길 바란다.
“쫄릴 거면 왜 안 나왔어, 이 새끼야.”
무영은 갑자기 내 목을 끌어당겼다. 가까이 붙은 거리에 말소리는 우리 사이에서 맴돌았다.
“최준혁. 니가 안 오니까 내가 여기까지 왔잖아. 이게 말이 돼?”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빠져나가던 사람들이 정체를 만들며 웅성거렸다. 깜박거리는 눈동자들이 무영과 나를 본다. 물고기의 그것처럼 감정이 없는 눈들이다. 갤러리의 관람을 느긋하게 관조하는 무영과 나는 다르다. 주목당하는 건 질색이었다. 시선들 사이에서는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무영은 이런 나를 잘 알았다. 그래서 지금 온 것이다. 일부러, 사람이 많은 장소를 골라, 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들기 위해. 악의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오늘만은 다르다. 여래가 기다리고 있다.
“놔….”
“뭐?”
무영은 되물었다.
“뭐라고?”
“놔, 놔 주… 세요. 그 건으로는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얘가 뭐라는 거야.”
“오늘은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곤란합니다.”
무영의 손목에 걸린 금색 시계가 눈 바로 옆에서 번쩍거렸다. 비싸고 무거운 시계의 무게를 더해 무영은 나를 압박해왔다.
“너 지금 나한테 유세 떠냐? 그걸로 호구라도 잡으려고? 이 건방진 새끼가.”
솔직해도 된다면 고백하겠다. 나는 무영이 싫었다. 늘 그랬다. 그는 나를 모욕하고 경멸하기 위해 장전된 총처럼 건드리기만 하면 격발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싫다, 는 폭력의 단초이며 건설적이지 못한 감정이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숨겼다. 센터에서 길들여진 대로 나는 나의 폭력성을 억눌러야 했다. 게다가 며칠 전 여래의 명명 하에 우리는 친구가 됐다. 비슷한 나이의 동성을 두고 흔히 할 수 있는 오해였으나 여래가 그렇게 말했으므로 나는 최대한 노력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래를 위해서도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인가 보았다. 무영과 잘 지내는 일이란 평생을 가도 어려울 것이다.
다시 시계를 본다. 열한 시 오십오 분이었다. 충분히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다. 처음의 오 분에 더해 다시 오 분이 지나갔으므로 남은 건 오 분뿐이었다. 여래와의 약속 시각이 촉박해져 초조해진 그때였다.
“어! 준혁이 친구!”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여래가 무영과 나를 신기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준혁이 친구죠? 저번에도….”
무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무영은 자신이 최준혁의 친구로 불린 이 상황이 너무나도 의외였던 모양이다. 무영은 얼이 다 빠졌다. 여래는 무영을 향해 싱글거렸다. 여래가 무영을 향해 웃지 않을 이유도, 웃는 여래를 보고 언짢을 이유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더더욱 기분은 나빠졌다.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는 무영을 두고 여래는 다급하게 전의 만남을 상기시켰다.
“지난번에도 태워줬었잖아요? 버스 정류장에서 본!”
기억을 떠올린 무영은 떫게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안녕하셨어요?”
“아, 네…. 뭐.”
“저는 주여래예요. 저기… 저는… 저는 준혁이랑….”
왜인지 여래는 갑자기 말끝을 흐린다. 내 오메가다. 나의 반려다. 내 것이다. 망설이는 여래 대신 내가 나서려는 때였다.
“김무영입니다.”
내민 무영의 손을 바라보던 여래는 벗어서 안고 있던 패딩을 추켜올렸다. 그 아래로 드러난 손이 작았다. 무영은 미심쩍단 듯 내려다보며 여래의 손을 잡았다. 나쁜 예감이 들었다.
“자주 뵙네요? 최… 준혁이랑 친한가 보죠?”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예요. 저희들 같은 시설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끝? 당황해서 여래를 보는 나를 다시 무영이 눈으로 좇는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서사와 세월은 그 단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어림도 없다. 왜인지 나는 무영 앞에서 어제도 우리가 섹스를 했고, 그제도 그랬고, 성인이 된 이후로 다시 만난 날부터 그랬다는 걸 꼭 강조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영이 빨랐다.
“아, 그 은애원인가 하는 곳?”
“들어본 적 있으시구나.”
“시설에서 컸단 얘긴 들었는데 이런 형이 있는 줄은 몰랐네. 최준혁, 왜 말을 안 했어?”
무영은 심상하게 내 등을 쳤다.
“전혀 몰랐잖아.”
가볍고 경쾌한 두드림에는 일종의 친밀감마저 스며있었다. 여래 앞에서 얼굴을 갈아 끼운 그는 내가 아는 김무영이 아니었다. 다음 병원 스케줄을 잡는 비서실장에게 애먼 짜증을 부린다거나, 끼고 나타난 오메가의 머리를 쿡쿡 찌르며 무시하고 경원함으로써 그가 가진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김무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무영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있게 굴었다. 놀라움에 턱이 빠질 것 같았다.
그런 무영을 보던 여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희들 점심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학생식당 가려고 했는데.”
싫다. 절대로 싫다. 거절하겠다. 그러나,
“껴도 되려나 모르겠네요.”
“되죠. 돼요. 그치?”
무영과 여래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대학은 유성 그룹이 자금을 출자한 사학 재단 소속이었다. 어릴 적부터 이곳에 드나들었고 무영에게 대학이란 전혀 조심해야 할 장소가 아니었다. 먼저 앞서나가며 교수의 인사를 받는 무영의 뒤에서 나는 여래의 팔을 잡았다.
“왜, 말하지 않았지?”
“뭐가.”
“우리가 잔걸, 같이 사는 걸 왜 말하지 않았느냔 말이야.”
여래는 잡힌 팔을 흔들어 빼낸 후 투덜거렸다.
“야! 말이 돼? 갑자기 그런 걸 말해서 뭐하게.”
“그건 중요한 정보야. 너와 내가….”
“쪽팔리게… 그걸 왜 떠벌리고 다녀.”
“뭐?”
“그만 좀 해. 사람들 있잖아.”
다시 팔을 잡은 내 손을 여래는 붙들어 뿌리쳤다.
“최준혁. 주여래 씨?”
“네!”
“빨리 오세요.”
“가요!”
멀리서 사람 좋게 손을 흔드는 무영을 향해 고개를 까딱 해 보인 여래가 나를 이끌었다.
“가자. 나 배고프다.”
“….”
“네 친구라며. 잘 보여야지 않겠냐.”
“친구….”
“그래서 그런 거야. 오메가라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 모르잖아. 너까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서.”
“….”
“됐지?”
보채는 여래는 그의 웃음을 무기로 꺼내 든다. 여래의 웃음은 설탕 조각처럼 뿌려져 반짝반짝 예쁜 빛을 낸다. 그에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말을 잊는다.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서너 걸음 앞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무영은 꺼낸 담배를 문 채 멈춰 서 있었다. 처음에는 무영이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걸음을 빠르게 한 여래가 폭을 좁히는 대로 이동하는 시선에 비로소 그가 여래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래 씨. 둘이서 무슨 비밀 얘기했어요?”
“하하, 무슨요.”
“제 흉 안 봤어요? 최준혁이?”
“아니라니까요.”
무영은 여래를 향해 장난치듯 웃었다. 무영의 웃음에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능하지 않은 일을 무영은 손쉽게 해냈다. 타인에 비교하여 스스로가 못하다는 느낌에 대해서 머릿속의 사전을 찾아본다.
일치하는 단어는 바로 열등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