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준혁 (4)
점심은 한식으로 고른다. 식판에 밥과 반찬을 받아 자리에 앉자 여래는 나와 무영을 흘끔거리며 점심 자리에서 맴도는 침묵을 쫓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떠들어댔다.
“와, 사람 되게 많다, 그죠.”
“꼭 처음 오는 것 같이 말하네.”
“아… 맞아요. 저 여기 안 다니거든요.”
“그러시구나.”
“그런데 다닐 생각은 있어요. 이번 수능도 볼 거구요. 컷이 높긴 한데… 그래도 써보려고요.”
“무슨 과로?”
“글쎄… 취업 잘 되는 과?”
무영은 짧은 웃음을 뱉었다.
“그래요. 지원하기 전에 연락주세요. 미리 저도 귀띔 좀 해놓게.”
“어디에요? 논술 학원 이런 데 아는 데 있어요?”
“아뇨.”
여래를 손짓해 부르는 무영이 은밀했다. 식판 위로 몸을 숙인 여래에 무영은 고개를 기울였다. 피가 서서히, 증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말 공개적으로 하긴 그런데 아시는 교수님한테 말씀 좀 드려놓게요.”
“아? 우와. 대박이다.”
“저희 고모가 재단 이사장으로 있고 그러셔서, 안면 정도는 있으니까.”
“와….”
여래는 동경과 선망이 뒤범벅된 눈으로 무영을 쳐다보았다. 그런 종류의 특혜와 편의는 여래의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무영이 가진 것은 권력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시혜적으로 베풀 수 있는 타이밍과 효과적인 방법마저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센터의 오메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초조했다.
그러나 여래로부터 잠자코 있을 것을 주문받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나는 젓가락으로 장조림을 갈가리 찢었다.
“먹어.”
썰린 고기에 붙은 근막은 이가 약한 여래가 먹기에는 좋지 않다. 근육의 결대로 찢어 나란하게 밥 위에 올리고 나서야 나는 만족한다. 하지만 내가 젓가락을 들고 애를 쓸 때부터 안절부절못하던 여래는 자기 밥 위에 오른 장조림에 결국 수저를 세게 내려놓고 말았다. 턱을 괸 무영이 그런 여래를 흥미롭게 응시했다.
“장조림이 질겨.”
“…괜찮아, 먹을 만한데.”
“아직 치과 치료 두 번이나 남았어. 질기고 딱딱한 음식의 섭취는 자제해 주세요,라고 그랬어.”
“됐다니까.”
“여래, 이 아프니까.”
“내가 애도 아니고. 저리 치워….”
“안 좋아. 아직 치과 치료 두 번이나 남았어. 질기고 딱딱한 음식의 섭취는 자제해 주세요, 라고 그랬어.”
“그만하랬잖아. 나 별로 먹고 싶지 않다고. 유난스럽게 너 진짜!”
나를 물리치는 여래에 무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그럼 평일에는 공부만 하겠네요. 바쁘겠다. 저녁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려 했더니.”
“그러죠, 뭐. 저도 그렇게 안 바빠요. 알바도 하고, 할 거 다 해요.”
“어떤 알바?”
“두 정거장 지나면 대형 마트 있잖아요. 백화점 옆에요. 거기….”
“우연이 또 겹쳤네?”
무영은 화려하게 웃는다. 차림과 성품에 걸맞은 태도였다. 그는 굳이 소리를 지르거나 주먹을 휘두르지 않아도 고압적인 데가 있었다.
“거기 내 거잖아. 마트.”
짜증이 난다. 수위를 높이는 부정적인 감정은 거의 머리 꼭대기까지 찼다.
“오늘도 알바야? 그럼 다 먹었음 같이 갈래요? 내가 태워다 줄게요.”
“안 돼.”
무영과 여래가 거의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김무영,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마. 죽여 버린다.”
한 번도 해보리라 생각한 적 없던 욕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여래의 등은 날씨만큼이나 차다.
“여래.”
“….”
“여래야.”
“나 부르지 마.”
“주여래.”
“너 도대체 뭐야!”
앞서 가던 여래가 드디어 멈춘다. 하지만 돌아보는 눈길은 곱지 않았다.
“여래는 점심은 어떻게 할 거야?”
“점심? 저엄심? 네가 지금 파토 냈잖아!”
“화났어?”
“화났어.”
여래는 팔짱을 끼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 도대체 왜 그래!”
방금 전 내가 한 일을 떠올린다. 무영이 마트의 이름을 언급하며 여래에게 자신의 차에 같이 타고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여래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식당을 빠져나왔다. 식판 세 개와 함께 남겨진 무영은 폭소를 터트렸다. 여래는 쩔쩔매며 무영과 나를 번갈아가며 보았지만 둘 중 여래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준 사람은 물론 없었다.
“너 왜 안 하던 짓을 해.”
여래는 몇 번이고 관절을 확인하며 손목을 돌렸다. 갑자기 잡아채 아팠을 여래를 미처 배려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다. 고개를 떨군 내 밑으로 여래가 끼어들었다.
“최준혁, 나 봐봐.”
뭔가 무섭다. 싫다. 시선을 피하는 나를 여래가 다시 따라왔다.
“나 보라고. 봐보라니까. 야. 진짜!”
어디로도 돌릴 수 없도록 양쪽에서 붙들린 뺨이 얼얼하다.
“너 왜 그래. 네 친구라며. 그렇게 그냥 나와 버림 안 되는 거잖아.”
오해다. 바로잡아야 한다.
“…여래야, 그건.”
“다음부터 그러지 마. 응?”
장담할 수 없다. 무영과 여래가 어떤 교집합으로 묶여있단 것을 확인하게 되었으므로 더더욱 그렇다. 오히려 내 쪽이 여래에게 주의를 주어야 한다. 그의 접근을 경계하고 물리치라고. 하지만 일반적인 호의와 과도한 관심을 분별해낼 사회성이 내게는 없다. 틀리고 서툰 나에게 그가 실망할 것이 무섭다.
여래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문 나에게서 대답을 추궁하길 포기한다. 대신 주머니를 뒤적거린 여래는 내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거 책상 위에 계속 굴러다니는데 대신 부쳐줘. 그거 왜, 홈커밍데이.”
“…올 거야?”
“퇴소 상담 필수라며.”
“나한테 화났어도 가는 거야?”
여래는 어깨를 털썩 떨어뜨렸다.
“당연하지. 화나면 끝이냐? 화났으면 어때. 넌 그걸 풀어줄 노력은 안 하는 거야? 싸웠음 화해하면 되잖아. 계속 그렇게 눈치만 볼 거냐구.”
“그래도, 돼?”
밝은 낮이므로 입을 맞출 수는 없다. 대신 이마를 가져다 부딪치며 비볐다. 새침해진 여래는 금세 물러서 뾰로통하게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돼. 임마.”
“….”
“수업 가야지? 있다 봐.”
여래는 나를 금방 용서한다.
언덕배기 아래를 내려가며 녹아내리다 마침내 사라진 뒷모습에 나 역시 등을 돌려 교정을 향했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더 이상 사랑하게 될까봐 두렵다. 내가 본 사랑은 극단적인 것뿐이었다. 아버지의 생각을 한다.
적어도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아야 한다. 사랑이라는 당위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나는 그것이 두렵다. 앉은뱅이 탁자에 납작 엎드려 바닥을 울리던 발걸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파편적인 장면이 불쑥 융기했다 기억 너머의 어둠으로 사라져 간다.
수평선으로 마침내 사라진 작은 점이 된 여래를 다시 돌아보는 사이 차체가 낮은 스포티한 외제차가 옆에 부딪힐 듯 스쳐 지나가려다 멈춘다. 검은 차창이 내려오고 무영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기분 좋아? 최준혁.”
“별로 안 좋아.”
처음으로 무영에게 솔직해져 본다. 내게 이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나도야.”
무영의 검은 눈동자가 반으로 접히며 웃었다. 가짜 웃음이었다. 걸음에 반주하듯 느리게 운전하며 무영은 계속 말을 걸었다. 뒤의 차가 경적을 울렸지만 무영은 무시한다.
“나는 너랑 본질적으로 달라. 같을 수가 없는데… 이상해.”
“뭐가.”
“이상한 데서 취향이 겹친단 말이야.”
“취향?”
“나도 그런 걸 좋아하니까. 씩씩하고 서글서글하고 꼬인 데 없고 밝고…. 나랑은 완전히 다른 그런 거. 하긴 그런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여래는 물건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그를 말해서는 안 된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 역시 말하는 방법은 같다.
“내 오메가야. 내 거야. 어제도, 그제도, 계속 내 거였어. 계속!”
차체를 내려치자 둔중한 충격은 무영이 탄 차가 아니라 내게 와 나를 흔들었다.
“하, 이것 봐라. 아까부터.”
“내 오메가라고 말했어.”
빨간색의 프레임을 잡고 몸을 구부려 정면으로 무영을 본다. 입술이 뒤집어지고 송곳니가 드러나는 나를 거울 없이도 알 수 있다.
“이 자식이 미쳤나.”
미쳤나.
그 단어가 나를 쏜다. 무영은 정상이고 나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에는 정상인으로서의 권위가 있다. 나는 미쳤을까?
“잘 들어, 이 새끼야. 주여래건 뭐건 간에 센터 나갈 생각 하지도 마. 그래야!”
무영이 핸들을 내려치자 길게 경적이 울린다.
“그래야, 우리 엄마 아빠가 안심을 좀 하시겠다니까. 알겠어? 시발, 짜증 나!”
“….”
“또라이 새끼.”
불안에 익숙한 감수성이 경고음을 울리는 것에 고개를 흔드는 사이 무영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토하고 싶다. 어지럽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벤치에 앉아 추운 바람에 열기를 식힌다. 무영이 건드리고 간 콤플렉스가 엉망으로 얽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뉘엿뉘엿 빠르게 지는 겨울의 해에 여래가 부탁한 우편물이 생각나 교내 우편물 취급소가 문을 닫기 전 겨우 세이프 한다. 규격 봉투에 들어갈 카드 모양의 양면을 마주 접은 초대장에는 홈커밍데이의 영문이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금박을 입힌 글자 아래로 장소와 시간, 그리고 약도가 사각의 틀 안에 빼곡했다. 초대장에서 뜯어낼 수 있게끔 점선으로 잘린 RSVP는 작은 수표책 정도의 크기로 이름과 관계를 적는 란이 구분되어 있다.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기타와 기타 뒤의 괄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많은 카테고리가 무참하다 싶으리만치 난도질 돼서 나가고 단 네 개의 단어가 여래와 나를 설명하게끔 강요한다. 연기처럼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며 잡으려고 하면 흩어지는 여래. 내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그는 새벽의 푸른빛처럼 흐릿하고 부드러운 윤곽의 몸뿐이다. 아주 깊게 삽입했을 때 겹쳐 잡은 손과 손.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헐떡거리는 숨. 키스로 불어넣은 공기를 허겁지겁 들이마시기 위해 매달리는 조급함.
이런 관계를 보통 뭐라고 하는 걸까? 여래와 나는 무엇일까?
뭐든지 알고 있는 여래는 분명 바른 답을 적었을 테다. 궁금해져 카드를 연다.
‘가족’
발송을 위해 점선대로 오린 카드 위에는 가족의 체크박스에 표시가 되어 있다. 처음 가져보는 그 단어가 놀라워 봉투에 넣으려던 카드를 떨어뜨렸다. 아주 기쁜 것과 아주 슬픈 것은 닮았다. 어느 쪽이든 충격적이다.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긴다.
가족은 같은 집에서 자고 같은 집에서 먹는다. 생의 대부분을 함께하며 관심사를 공유한다. 남루함도 화려함도 함께다. 그는 나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그를 구속하고 핍박하더라도 우리는 헤어질 수 없다. 그가 걸어 들어온 것이다. 나의 올무로. 비약이라도 상관없다.
가슴이 터져나갈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겨우 중심이 잡힌다. 무영 따윈 중요하지 않다. 나를 미치게 하고 미치는 걸 두려워지게 하는 건 여래뿐이다.
* * *
점심은 소화 잘되는 걸로 꼭꼭 씹어 먹었는데 말이다. 가슴께가 답답했다.
‘온 김에 주여래 신상이나 털어볼까 했더니만.’
그렇게 중얼거리는 무영의 이맛살이 팍, 찌푸려졌다. 무영 기분이 언짢은 건 점심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리에 매달린 남자가 추처럼 자꾸만 바짓단을 끌어내렸다.
“본부장님. 저희 여기 나가면 제품 판로 끊깁니다. 달린 입이 많아요.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그는 마트에 들어오는 소형 가전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다. 마트의 고급화를 꾀하며 일정 규모 이하의 업체에 대해 계약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대기업의 자회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라며 신문에 인터뷰까지 나갔던 바로 그 업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무영이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무릎을 꿇으며 사정을 하던 남자는 그대로 복도를 기다시피 따라왔다. 00전자의 작업복을 입은 채인 남자는 춥지도 않을 텐데 떨고 있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여기서 이러시지 마십시오. 구매팀과 따로 자리를 주선하겠습니다. 일단 그거 놓으세요. 사장님. 여러 사람 곤란해집니다. 네?”
비서실장이 애먹네. 남의 일처럼 평하는 무영이 한가롭다.
“거기서는 본사 결정이라고 하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요!”
남자는 기어코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무영은 비서실장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딱히 탓을 하지 않아도 시선에 실린 책망을 아는 비서실장은 망했다는 심경을 애써 무표정으로 덮고 있었다. 무영은 나서려는 비서를 물렸다. 무릎을 접어 자세를 낮춘 무영에 사십 대 후반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사장님. 많이 힘드시죠.”
“본부장님….”
“참, 이거 저도 아들뻘 되는 제 앞에서 사장님이 이러시는 게 민망하고 죄송스럽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기가 막혀. 비서실장은 안경을 올리며 수위에 다다른 비아냥을 숨겼다. 언제 보아도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다. 무영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상냥해질 수도 온화해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진심이 아니라서 그렇지.
무영은 작업복을 입은 남자를 일으키며 어깨를 두드렸다.
“이렇게 현업에서 갈등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지금 당장 본사로 돌아가서 지시 검토 하겠습니다.”
“네? 아니… 저….”
“본부장님.”
내켜 하지 않던 본점 시찰을 이걸 빌미로 대충 내뺄 속셈이었구만. 비서를 보는 무영은 더 없이 심각한 표정 연기를 아직도 하는 중이었다.
“강 실장. 나 들어가 봅니다. 여기 일 좀 부탁해요?”
“아니, 저기. 저… 이렇게 그냥 가시면….”
엎드려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기 전 무영은 비서의 어깨를 잡아 가까이로 당겼다.
“강 비서 빨리 저 새끼 막아. 시발, 이번에도 내 옷 붙들 게 내버려둘 거야? 돈값 못 해?”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제가 인터뷰 철회 하겠습니다. 말 잘 못 했다고 정정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제품 보여드릴 게 여기 많아요. 잠시만….”
비서는 이번은 확실하게 남자를 붙들었다.
“사장님. 이리로 오세요.”
“본부장님!”
엘리베이터에 탄 무영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비서에게 막힌 남자의 손이 엘리베이터의 문을 스칠 듯했지만 닫히는 문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그가 부르는 자신의 직함을 들으며 무영은 가만히 문이 닫히기만을 기다렸다.
기분 완전히 잡쳤다. 재수 좆같은 날이었다.
마트의 본점은 강북의 재개발 되지 않은 구시가지에 있었다. 강남이 아닌 곳의 도로 사정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본점이라고는 하나 1호점이란 의미뿐 중추적인 역할은 유통계열사에 넘긴 그곳에 갈 이유가 무영에게는 없었다. 그 날도 똑같았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형식적인 방문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 체를 한 무영은 나머지 일정을 비서에게 떠넘기고 먼저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역장과 주차장이 어지럽게 엮인 지하를 질색하는 무영에 마트 측에서는 지하 이층을 아예 바리케이드로 막아 다른 차들의 출입을 통과시켜 버렸다. 텅 빈 주차장, 무영은 세단에 올라타자마자 핸들을 내리쳤다.
“시발… 씨이발!”
형은 백화점을 맡았다. 상당히 폼이 나는 일이었고 대외적으로도 그럴듯했다. 말로야 성장하는, 보다 고객 친화적인, 일반 대중과의 스킨십이 많아 그룹의 이미지에 전면에 나와 있다는 마트 분야였지만 그래봤자 마진 한두 푼에 벌벌대는 십 원짜리 장사였다. 형이 면세점을 들어가니 마니 하는 일로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이 순간에 자긴 입점 못 하면 회사 망한다며 무릎 꿇는 중소기업 사장을 물리치지 못한 비서에게 윽박지르는 게 전부다. 태어날 때부터 존재했던 형과의 차이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를 찰랑찰랑하게 메우는 것은 열등감뿐이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에 무영은 눈을 후벼 파낼 듯 거칠게 문질렀다.
똑똑.
주차 안내 직원이 차창을 두드렸다. 핸들에서 몸을 일으킨 무영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 넘겼다.
“저,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문제?”
“네. 본부장님. 계속 엎드려 계시기에….”
“문제는 무슨 문제. 너 내가 무슨 문제가 있어 보이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진 직원이 손을 내저었다. 경광봉이 마구 흔들렸다.
“아니, 저기.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왜 이 새끼야. 너도 내가 뭐가 모자라 보여서 그러냐고!”
“아, 아닙니다! 본부장님.”
무영이 부르기 전까지 그가 무슨 짓을 어떻게 하든 간에 내버려둬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마트 내에는 존재했다. 본점에 들릴 때면 생각과 연상의 흐름 상 무영은 항상 기분이 나빠졌고, 그 분풀이를 하듯 지하에서 무언가를 내려쳐 부순 후에야 그 일정의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아르바이트생일 주차요원은 무영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무영은 시키는 건 다했다. 그래도 형은 저 앞에 있었다. 그걸 가끔은 참을 수가 없었다. 죽여 버리고 싶은 건 형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으므로 만만한 게 센터의 오메가들과 최준혁이었다. 무영에게는 멋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무영도 알파였다. 소유욕, 지배욕, 과시적인 성향과 지배욕, 그에 더해 까탈스러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단지 그 앞에 열성, 이라는 단어가 붙는단 이유만으로 무영은 너무나 쉽게 자기 색을 잃을 것을 강요당했다.
세단 밖으로 나온 무영은 주차요원이 쓰고 있는 모자의 챙을 쳐 위로 들어 올렸다. 고등학교나 갓 졸업했을까 싶은 남자애는 수염으로 무르익지도 않은 부숭부숭한 검은 솜털을 인중에 잔뜩 매달고 있었다. 무영은 잡아챈 모자로 주차요원의 뺨을 툭툭 쳤다. 모자에 새겨진 마트 로고가 빠르게 흔들렸다.
“야, 너 뭐냐?”
“저… 저는… 주차….”
“우물쭈물하면 그냥 넘어갈 거 같냐?”
“아닙니다! 제가 몰라뵙고… 실수했습니다.”
툭툭 치는 손길은 이제 거의 갈기는 수준까지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본부장님!”
뒤따라온 비서가 부르는 소리에 무영은 손을 멈췄다. 딱 좋은 데서 고만 맥이 끊겼다. 날카롭게 노려보는 무영에 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내버려두면 또 저 모양이지.
“빨리 왔네, 강 비서님?”
“본부장님. 자제하십시오. 보는 눈도 많고, CCTV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이런 문제에 예민한 시깁니다. 내부 통신망에 그렇지 않아도 갑질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글이 올라왔었고 회장님께서도 특별히 신경 쓰라고 당부 주셨고요.”
“시발. 내가 그럼 할 수 있는 게 뭐야, 강 비서?”
무영은 주차장의 푸른 바닥을 향해 구두를 내려찍었다.
“이것도 못 해, 저것도 못 해. 거지같은 마트 사업부 하나 꼴랑 던져준 걸 내 마음대로 하지도 못해! 도대체 내가 뭐하는 새끼야? 나 여기 아들이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격분한 무영에 날아간 모자가 바닥에서 뒹굴었다. 모자를 주우려 허리를 숙인 주차 요원 바로 앞에서 무영은 그걸 차 날려버렸다. 굴러간 모자를 따라 엉거주춤 뒤뚱거리는 주차요원을 놔두고 무영은 다시 세단에 올랐다. 상대가 돼야 쪼는 맛이라도 있지 어차피 이건 그냥 분풀이일 뿐이란 건 무영도 이미 느끼고 있는 바였다.
“죄송합니다!”
잘못한 게 무언지도 모르면서 주차요원은 연신 허리를 굽혔다. 닫힌 차 문 너머로 강 비서가 다급하게 본가로 들어가느냐고 묻는 걸 두고 무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디로 가시게요. 오늘 본가에서 저녁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야근한다고 해.”
“그런… 본부장님. 본부장님!”
이대로 들어가 형 얼굴을 보면서 넉살 좋게 사업 확장이니 어쩌니 하고 뻥카를 날릴 기운도 없었다. 어차피 눈에 난 자식, 하루 정도 저녁을 거른다고 특별히 더 미워질 리도 없었다.
어디서 뭐 하고 놀다 들어갈까? 누굴 부를까? 어떡해야 드러운 입맛이 개운해질까?
무영은 핸들을 돌리며 초조했다. 빨리. 빨리 이 기분을 해소하고 싶다. 좁고 깊은 주차로의 나선을 따라 올라가던 세단이 지상으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였다.
끼이익!
삐삐삐삐삐!
“아, 씨발!”
전방추돌 경보 시스템이 급하게 울림과 동시에 무영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좁은 통로를 조심성 없이 지나려던 행인을 치기 직전에 세단은 멈췄다. 브랜드만이 비싼 차는 아니었던 것이다.
“야!”
오늘 정말 재수 옴 붙었다.
차창을 내린 무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무영 앞의 차도를 막 건너려던 보행자는 굳어 그대로 멈춰있었다.
“야! 너 뭐야!”
뒤에서 불어 닥친 바람으로 남자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급할 게 뭐가 있느냐는 듯 여유를 부리는가 싶어 무영은 더욱 바짝 약이 올랐다. 돌아본 무심한 하얀 얼굴은 늦가을의 공기 속에 파랗게 얼어있었다.
“어….”
차 문을 반쯤 열고 나온 무영의 찌푸려졌던 미간이 서서히 펴졌다. 뒤를 돈 남자가 낯을 밝히는 걸 무영은 얼떨떨하게 쳐다보았다. 아는 얼굴이었다.
“김무영 씨!”
여러 겹으로 붓질해 짙어진 어둠을 배경으로 융기한 희디흰 얼굴, 마음이 아플 정도로 연약하면서도 누구의 관심도 필요 없다는 듯 곧바로 쳐다보고 있는 시선. 날씨 탓인지 버릇인지 여러 번 침을 발라 앞니로 꼭꼭 씹어 붉어진 입술. 최준혁의 것이라는 오메가.
주여래였다.
무심하던 타인의 얼굴이 우연에 반가워하며 놀란 표정으로 바뀐다. 그 드라마틱의 끝은 시시하게도 그저 옅은 웃음이었지만 미세한 단위로 감정을 드러내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여래의 얼굴은 조금이라도 주의를 늦추면 금방이라도 휘발되어 버릴 듯해 무영은 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라보는 데 신경을 앗겨 무영은 방금 전까지 신경질을 부리고 역정을 내던 스스로를 잘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본래의 자신에 더 가까운 모습이라 하더라도 말이었다.
“김무영 씨, 맞죠?”
잘못 본 것도 아닌데 답이 없자 여래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천천히 차를 향해 걸어오는 여래에 인상적인 인사는 차치하고 당장 할 말도 마땅하지가 않아 무영은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차의 프레임에 문질렀다.
“어디. 안 좋으세요?”
여래는 무영을 향해 갸웃거렸다. 머리 하나가 작은 주여래와 눈을 맞추려면 내려다봐야 한다. 여래를 위한 낮은 시선이 어릴 때 키우던 강아지를 떠올리게 해 무영은 조금 한숨을 흘렸다. 안으면 팔딱거리는 작은 심장이 손에 움켜쥐어지던 개는 똑똑하고 예뻤다. 처진 눈매가 웃는 듯한 개를 무영은 좋아했다. 무영은 개를 위해 이것저것을 많이 샀다. 장난감, 간식, 옷이며 신발까지. 그러나 아무리 장난감을 들고 뒤를 쫓아다녀도 개는 어쩌다 가끔 집 밖으로 나와 심드렁하게 이름을 부르는 형을 향해 바로 달려가 버리는 걸로 무영을 실망시켰다. 개는 형의 생일선물이었다. 개는 누가 자기 주인인지 잘 알았다.
믹스 주제에 똑똑해봤자, 라고 칭찬인지 비아냥인지를 이죽거린 형은 다시 집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개는 그 자리에 못 박혀 문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효는 일 년이었다. 다음 해 생일선물로 형은 순종견을 원했다. 순종에게 몇 번을 물어뜯기고 나서야 믹스는 처리되었다. 무영은 분하고 어리둥절했다. 그렇담 자길 주지. 무영은 정말로 잘 돌볼 자신이 있었는데. 같은 침대에서 자고 산책도 매일 시키고! 그러나 무영에게는 기회조차,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쓸데없이 개 생각은. 무영은 혀를 짧게 차며 둘러댔다.
“아니. 갑자기 튀어나오니까 놀라서.”
“앗,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건 다 주여래 때문이다. 주여래가 너무 격식 없이, 속셈 없이 웃어서다. 다 큰 남자가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아니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부터, 아니 무영이 열성 알파란 것을 자각하고 나서부터 아무도 저렇게 웃어주지 않았다. 가족들은 냉담했고 친구들은 교묘하게 따돌렸으므로.
“그런데 대박. 진짜로 만날 줄은 몰랐는데요. 마트 주인 맞긴 맞네요?”
자신의 마트를, 주인이 카운터를 지키는 동네 슈퍼처럼 말한다. 재밌는 애였다.
“그러네요.”
앞에서 기웃거리는 여래에게서는 희미하게 고기 비린내가 났다. 무영이 설핏 미간을 구기자 여래는 눈치 빠르게도 목덜미를 긁었다. 하지만 냄새는 거기 묻어있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사이 수많은 틈에 침입한 냄새는 박박 문질러 닦아야 희미해질 것이었다.
“정육코너라 퇴근할 때마다 좀 그래요.”
최준혁이 한심하다. 제 것 하나 간수 못 하는 모지리. 빙충맞은 새끼. 거의 척수 반사적인 혐오와 적의였으나 오늘따라 그것은 한층 더 격렬하다. 무영은 건전지를 바꿔 끼우듯 기분을 달리하며 높게 물었다.
“아르바이트, 할만 해요? 힘든 거 없어요?”
“전혀요. 다 너무 좋아요. 휴게 시간도 꼬박꼬박 지키고요, 밥도 잘 주고요. 역시 일등 마트다운….”
“하하, 내 눈치 안 봐도 되는데.”
주여래가 쑥스럽단 듯 앞머리를 잡아당기는 걸 보며 무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여래의 노골적인 아부는 속이 빤해서 귀여운 데가 있었다. 무영이 웃는 걸 보던 여래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모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번에는 준혁이가 갑자기 자릴 뛰쳐나오는 바람에… 죄송했습니다.”
기분 좋았는데 왜 최준혁 얘길 꺼낼까. 아, 그랬지. 잊고 있던 사실의 삽입에 무영은 입매를 굳혔다. 무영과 여래 사이에는 최준혁이 있었다. 좁혀진 무영과 여래를 부자연스럽게 벌리며 거리감을 만드는 최준혁은 주여래한테서 나는 비린내보다도 질기게 들러붙어 있었다.
“준혁이 걔가 원래 좀, 핀트가 어긋날 때가 있어서요. 아시겠지만….”
“….”
“그런데도 같이 어울려주시고… 고맙습니다.”
주여래는 또 뜻 없이 웃는다. 그게 무영에게 어떤 의미가 될는지는 전혀 상관없단 듯 아주 예쁘게였다.
얘 정말 오메가인가? 무영은 조인 넥타이의 매듭에 검지를 넣었다. 갑갑했다.
놀 만큼 놀아본 무영은 오메가들의 습성을 잘 알았다. 오메가. 욕구에 취약하고 체력과 지력이 열등한 존재들. 사회적인 성취에서 배제된 그들은 다만 몇 푼을 위해 쉽게 몸을 팔기도 한다. 그러니까 주여래도 그래야 했다.
주여래도 오메가라는 데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계산서로 청구하지 않을 것처럼 주여래가 웃지 말았으면 좋겠다. 무영의 세계에서 그것은 공짜가 아니었다. 여래는 팔짱을 끼우며 부르르 떨었다.
“으악, 추워. 얼른 가보세요. 전 이리로 갈게요.”
“타요. 데려다줄게.”
팔을 붙들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말이다. 잡힌 팔뚝을 의아하게 보는 여래에 무영은 금방 손을 놓는다. 내가 그렇게 급했었나? 서두르는 스스로가 의아했던 무영은 얼른 덧붙였다.
“아까 차 보고 좋아했잖아. 인터넷에서나 보던 거, 타보고 싶지 않아요?”
“저야 감사하지만….”
“그럼 타.”
고압적인 단문에 여래가 어리둥절하게 보자 무영은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준혁이랑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냥 가라고 하겠어요.”
소환된 준혁의 이름에야 여래는 겨우 조수석 문에 손을 댔다. 자존심이 상했다. 국내에 한 자릿수로 들어온 수입 자동차의 엠블럼보다도 최준혁의 이름 석 자가 더 매력적인 듯 구는 주여래가 괘씸하기도 했다. 여래가 앉자마자 취소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무영은 액셀을 밟았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주차장 입구에서 넋을 빼고 있었어요?”
“저녁 뭐 먹지, 뭐 사 먹지. 그런 거요.”
“하하, 무슨 주부인가?”
“요새 입맛이 없어서요.”
“왜, 어디 아픈가 봐.”
“아뇨. 그건 아니고… 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
말 돌리는 게 능숙한 타입은 아닌가 보았다. 어색하게 창밖을 보는 여래에 무영은 그 부분에서 잠시 귀퉁이를 접어둔다. 나중에 펼쳐보고 곱씹어 볼 수 있도록 갈피를 끼운다. 왜 말을 돌릴까, 알아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도 이상하다 여겨졌는지 서둘러 덧붙이는 여래가 서툴렀다.
“그거랑 이런 거 저런 거. 공부 같은 거, 뭐 해야 되나, 몇 페이지 남았나 그런 생각 했죠, 뭐.”
“일이랑 같이하기가 힘들지 않아요?”
답은 없었다. 무영은 흘끗 조수석을 넘겨다보았다.
“여래 씨.”
생각에 잠긴 옆모습이 섬세하다. 그런 얼굴을 가진 주여래는 왜, 왜 저러고 살까? 세탁기에 막 빨아도 되는 옷이나 입고 거기에 온갖 생활의 냄새를 묻혀가며 왜 저러고 살까.
“주여래 씨.”
“아, 네!”
“또 그러고 있네. 정말 뭐 걱정 있어요?”
여래는 처진 어깨를 추스르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없는 사람도 있나요?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이 쓰이는데.”
“준혁이랑 정말 친하신가 봐요.”
“왜 얘기가 그렇게 돼요?”
여래는 안전벨트를 당겨 눌린 배 부분에 여유를 둔다. 마치 거기에 뭐라도 든 것처럼 구는 태도가 무영은 못내 신경 쓰였다. 벨트를 늘이던 여래는 조심스럽게 무영을 마주 보았다.
“저한테까지 덩달아 잘해주시잖아요. 준혁이랑 아는 사이란 이유로.”
“여래 씨가 그런가 보죠?”
“네?”
“내가 최준혁이랑 아는 사이라니까, 내 차도 타주고 그러는 거잖아요.”
최준혁이 무슨 구두점이야, 주여래? 말끝마다 최준혁, 최준혁. 지겹다고. 무영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나 따위야 관심이나 있겠어요? 여래 씨가? 우성 알파랑 파트너잖아.”
“네…?”
생각보다 재미없네. 무영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오메가치고 곰살맞은 데가 없는 주여래는 웃는 편이 낫다. 지금처럼 눈만 크게 뜨고 놀라기만 하는 건 별로다.
주여래, 웃어. 최준혁한테 그러는 것처럼. 웃어 봐. 예쁘게. 환하게. 하지만 여래는 갑갑할 정도로 눈을 피하며 무영을 마주 보지조차 않았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무영은 짧게 혀를 찼다. 그럼 또 수가 있다. 익숙한 길을 만나서야 겨우 입을 연 여래에 차가 멈췄다.
“저기서 내려주시면 됩니다.”
“그래.”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고마우면요, 가끔 내 차나 탈래요?”
느닷없는 제안이 당황스러운지 눈이 커다랗게 여래를 보며 무영은 여유롭게 웃었다.
“아까 쓸데없는 소릴 한 게 미안해서.”
잠시 정차를 위해 켜진 비상등이 틱톡틱톡 소리를 냈다.
무영은 자신이 있었다. 오메가란 게 뻔했다. 안 가봤던 데 데려가고 차 몇 번 태워주고, 그러다 보면 지금 사는 게 구질구질해질 거고. 그러다 보면 둘 사이가 삐거덕거리고 아귀가 안 맞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주여래한테 헛바람 좀 넣으면 최준혁이 차일 거고, 그럼 최준혁이 별수 있나? 다시 센터 와야지. 그것이 무영의 계획이었다.
“저, 준혁이 아이를 가질 거예요.”
하지만 뭐 하나 그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뜨악해서 보는 무영에 여래는 손을 휘저었다.
“황당하고, 이상한 소리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다 알고 계시다고 하시니까 굳이… 아닌 척하기도 우습고 해서요. 임신에 파트너가 아닌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안 좋다고 들었어요.”
주여래, 너 꼭 사람을 배기가스나 환경호르몬처럼 얘기한다. 누가, 누가 너한테 뭐래? 미안한 듯이 뭘 그렇게 보는 거야? 난 그냥, 그냥 오며 가며 차나 얻어 타라고 나는 호의를 베푼 거야. 그걸 몰라? 내가 너한테 얼마나 후하게 굴고 있는데. 시발, 강 실장 데려다가 내가 방금까지 무슨 개지랄을 떨었는지 한 마디 해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아이에게 좋지 않은 건 조심하려고 하고 있어요.”
네 꼴을 봐. 주여래. 무영은 중얼거렸다. 너한테 가장 해로운 건 최준혁이야.
네가 하고 싶어 한다는 명목으로 너를 날 비린내 속에 내버려두는 최준혁. 저녁거리나 고민하게 만드는 최준혁.
검은자위가 큰 주여래의 눈이 순진하게 깜빡거렸다. 또다시 믹스가 떠올랐다. 믹스랑 정말 닮았다. 눈만이 아니라 한 번 정해진 건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는 단단한 심지마저도 그렇다. 왜 이런 종들은 처음 각인한 주인만을 좋아할까? 그것이 변하는 일은 영원히 없는 걸까? 무영은 입을 열었다.
“최준혁도 그러자고 해?”
“….”
“아이 갖자고 하더냐고.”
주여래, 빨리 대답해. 내가 멋대로 이 침묵을 해석해버리기 전에.
“…들어가세요.”
인사를 남기고 차 문을 닫는 여래에 무영은 깨어진 듯 가파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 * *
지이잉.
울리는 휴대폰을 뒤집어 본 여래는 익숙하게 휴대폰의 화면을 엄지만으로 넘긴 후 다시 그것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하자 여래는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무슨 일 있어? 계속 연락이 와.”
여래는 부리나케 물음을 잘랐다.
“별거 아냐.”
“계속 연락이 오는데.”
“아니라구.”
어깨를 으쓱해 보인 여래는 다시 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능이 바로 며칠 뒤로 다가와 있었다. 집중하려는 여래를 방해하지 않으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래는 모의고사를 풀면서 몇 번이나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마침내 마지막 문제가 끝나자 나는 곧바로 나가 편의점에서 사이다를 사 왔다. 저번 돼지갈비를 먹던 날 그가 소화에는 사이다라고 말하며 시켰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여래는 차가운 캔을 손안에서 굴리며 곰곰 했다.
“고마워.”
“너무 긴장하지 마, 여래야.”
“응?”
“시험 때문에 긴장해서 자꾸 체하는 것 같아서.”
“…아닌데.”
“아니야?”
“아니야.”
그런데 왜 저렇게 여래가 계속 핼쑥한지 모르겠다. 여래는 문득 생각난 듯 문제집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아, 그런데 김무영 씨 있잖아.”
“김무영?”
싫어하는 이름에 반사적으로 소릴 높이자 옆방과 우리 방을 나누는 벽이 쿵, 울렸다. 여래는 어깨를 움츠렸다.
“으휴, 진상. 우리 뭐 하는지 궁금해서 죽지, 죽어.”
타악! 다시 벽이 후려쳐지자 여래는 소리 없이 혀를 빼 물며 책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김무영에 대해 왜 묻는지 궁금했으나 떠든 죄가 있는 나는 저녁 내내 조용히 있길 결심하고 무영은 그렇게 화제에서 잊힌다.
* * *
대학수학능력 시험은 십일월의 두 번째 주 목요일이었다.
수험표와 마킹용 사인펜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교문 안으로 들어가던 여래는 응원을 나온 고등학생들 앞에서 멈춰 섰다. 비장하게 유자차를 청하는 여래에게 얼떨떨한 표정의 고등학생이 주전자에서 따뜻한 물을 부어 컵을 내밀었다.
여래는 컵을 입에 문 채로 뒤를 돌아 내게 브이자를 그려 보였다. 여유가 넘치고 있었고 그다지 긴장한 듯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래는 시험을 망친다.
아니, 제대로 치르지조차 못한다.
“나야.”
오후 네 시쯤 하숙집을 출발해서 여섯 시쯤 아침의 시험장 정문 앞으로 도착하는 스케줄을 짜고 그사이의 시간 동안은 기말고사의 준비를 하려던 내게, 여래가 연락을 해 온 것은 첫 교시를 마치고 났을 오전 열한 시 경이었다. 오한에 어지럼증이 생겨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이어졌다. 라면이 들어있던 냄비를 엎고 난 후의 참담한 침묵이었다. 수습보다는 가만히 그 광경을 애도하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종류의 침묵 말이다.
“다 토했어. 전부 다. 시험장에 다시 들어갈 수도 없게… 다.”
“지금은.”
“그냥 앉아있어. 지하철역.”
“내가 갈게, 기다려. 어딘지. 아니, 지하철역 알아, 데려다줬으니까. 거기서….”
“아니, 오지 마. 나 울었어.”
울었다고?
“보여주기 싫으니까 오지 마. 진정되면… 들어갈게.”
내가 아는 한 여래는 눈물이 흔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울면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뒤에서 끌어안아 심장의 박동을 겹쳐준다. 몸을 타고 전해지는 일정한 리듬에 난폭해졌던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가 내 안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아니야. 여래는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갈 거야.”
“멍청이 같아. 보여주기 싫어.”
“그러지 마. 나는 항상 그러는데. 늘 바보 같은데.”
여래를 위해서 여래에게 반항하는 모순이 어렵다.
“기다려.”
하지만 무엇보다 여래가 소중하다.
여래는 플랫폼의 제일 끝, 10-4 앞에 앉아있었다. 가방을 치우고 옆을 차지하는 나를 보며 여래는 기운 없이 웃었다. 말린 꽃잎보다 더 시들한 웃음이었다.
“어차피, 공부 하나도 못 했었으니까.”
“했잖아, 공부.”
“이렇게 포기하게 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어중간한 점수로, 어중간한 대학에 취미로 다닐 수도 없고. 잘 됐어.”
들어오는 기차가 밀어낸 공기에서 보호하듯 여래는 손을 배에 올렸다. 다시 울렁거리는지 몰라 다가가자 여래는 움찔거리며 어깨를 모았다.
“아직도 아파?”
“조금. 아니, 아픈 건 아니고. 아직 확실하지가 않아서… 나중에 말할게.”
나중에 무엇이 확실해진단 건지 모르겠지만 나가는 기차의 뒤꽁무니를 보는 여래는 가만히 자신의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 * *
“우웁…!”
하숙집에 돌아오자마자 여래는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복도는 텅 비어있었기에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할 수 있었다. 문턱에 서서 방 안을 한 바퀴 돌아본 그는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를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여래가 없는 동안 먹으려고 했던 점심이었다. 샌드위치는 먹고 아메리카노는 마셔서 없애버리는 동안 여래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음식을 보는 것조차 힘겨운 듯 등을 돌린 채였다.
“이상한 냄새 나….”
토사곽란의 원인은 유자차다. 분명히 유자차 때문이다. 아침을 함께 먹고 출발한 그가 혼자 먹은 메뉴는 고사장의 정문 앞에서 나눔 받은 유자차뿐이었다. 나의 추측에 그렇지는 않을 거라며 손사래를 치던 여래는 한 시간에 한 번꼴로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고 마지막으로 시큼한 액체를 뱉고 나서야 겨우 수긍해 주었다. 구토 증세가 시험을 망치게 한 원인이었는지, 시험을 망치고 나서 예민해진 신경이 위염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안타까운 건 공용변기에 얼굴이 붙이고 속을 게워내는 여래였다. 비닐봉지를 구해다 그의 입에 대어주는, 고속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라도 충분히 할 법한 대수롭지 않은 친절이 할 수 있는 전부란 게 절망스럽다.
아무리 애써도 스무 명이 함께 사용하는 화장실은 새것처럼 깨끗해지지 않는다. 더러운 변기를 붙잡고 토하는 여래가 안타까워 나는 졸졸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물수건을 이마에 올리고 겨우 눈을 붙인 여래를 두고 밖으로 나와 부동산으로 갔다. 세 군데를 돌며 전세 매물이 있는지 살피고 각 부동산의 명함을 챙겨 지갑에 넣었다. 오는 길에는 은행에 들러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계좌의 잔액을 보통예금 통장에 전부 모았다. 펀드와 ELS의 수익률은 예금 금리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지만 주식을 합하면 그럭저럭 아슬아슬한 금액으로 전세금을 맞출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섰다.
돈은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필요조건이기는 했다. 처음으로 센터에 감사했다.
여래는 다음 날도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며 미열에 시달렸다. 며칠을 앓을 여유 같은 건 없어서 시험을 본 다음 날에도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나 약해진 비위에 생고기 비린내는 무리였다. 거의 사색이 되어 돌아와 누운 여래는 책상 위의 탁상 달력으로 손을 가져갔다. 날짜를 세는 손가락이 허공을 디딘 발자국처럼 비틀거리는 열기를 띠었다.
“뭐를 보는 거야?”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걸 왜 그렇게 골똘하게 보는 걸까? 꼭 무얼 계산하는 것처럼 손을 꼽아가며.
“그럴 리가 없는데….”
여래의 뺨이 홍조를 띠었다.
“나… 대학 안 갈래.”
“또 그 얘길….”
“아니, 이젠 못 가. 그렇게 됐어.”
공식적인 수험 포기 선언이었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구식의 표지가 군데군데 닳아있는 수험용 교재와 참고서, 문제집과 오답 노트가 슈퍼마켓에서 구해온 종이 상자 안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오천사백 원과 맞바꾼 참고서를 모두 처분하고 나니 좁은 방은 덜 좁은 방이 되었다. 참고서를 팔아 받은 오천사백 원으로 여래는 유자차를 샀다. 여래는 유자차를 빵에다 발라도 먹었고 시원한 물에도 타서 마셨다. 뜨거운 김이 싫어졌다고 하면서 여래는 얼음을 띄운 잔을 들이켰다. 이천 밀리미터 유리병의 절반이 일주일 만에 비워졌다.
말끔하게 세수를 마치고 온 여래는 등을 보이고 서서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 김 한 장 크기의 거울을 보며 귓바퀴부터 이마까지를 꼼꼼하게 더듬어 물기를 지운다. 매무새를 다듬던 그를 바라보다 거울 안에서 눈이 마주친다. 사냥개처럼 땅바닥에 코를 킁킁거리며 언제나 뒤를 쫓고 있는 시선을 들켜 부끄럽다. 가늘어지며 흘겨보던 눈이 새치름하게 웃는다. 기분이 과히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수건을 펴서 의자의 등받이에 널며 여래는 내게 물었다.
“뭐 가지고 싶은 건 없어?”
가지고 싶은 것이라니 무슨. 맥락 없는 질문에 나는 갸웃한다. 귓바퀴를 닦는 여래가 뒤를 돌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아님, 필요한 거라든가.”
참고서를 치웠으니 새로이 뭔가 들여놓으려는 걸까? 그가 물어봤으므로 최선을 다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가지고 싶은 것이라. 가지고 싶은 것. 없다.
필요한 것? 역시 없다.
그가 납득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났기를 바라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 다시 한 번 나를 추궁한다.
“그럼 생일 선물은 어떡해.”
“응?”
“생일 선물!”
여래는 달력을 가리켰다.
“그날, 받고 싶은 거 없냐구. 생일 선물로.”
주민등록증상의 일련의 숫자가 물건의 포장에 붙어있는 바코드보다 의미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날이었다. 뺨을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에 눈이 감겼다. 긴 꼬리를 흘리는 손을 따라잡아 손톱과 손등과 손금에 입을 맞췄다.
“너무 비싼 건 안 돼. 지금은 돈을 아껴야 되니까….”
여래는 걱정스럽게 부동산에서 받아온 전세 매물의 주소와 금액, 이사 기한이 적힌 메모지들을 본다. 금액이 맞다 싶으면 집에 문제가 있었고, 집이 좋다 싶으면 대출을 받아야 할 정도로 비쌌다. 머리를 맞대고 공통의 목적을 나누는 게 즐거워서 이미 가계약을 한 방이 있다고 여래에게 말하지 않았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 장난기 정도는 내게도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당하는 건 나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나 돈 조금 모았어. 그러니까 생각해 놔. 생일 선물 사줄게.”
강인하게 담금질 되었다고 생각한 마음이 달걀 흰자처럼 호들호들 하게 벗겨지고 연약해진다. 나는 이미 컸는데, 손도 발도 키도 여래보다 큰데 그는 나를 다시 퇴행시킨다. 어리고 작아지게 만든다. 벌레나 먼지 나부랭이가 되어버린다, 나의 건강에 썩 이로운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를 때때로 위기의 벼랑으로 몰아넣는 그는 나의 생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가 채 닦아내지 못한 남은 물기를 입술로 대신 훔친다.
“뭐야, 징그럽게….”
날아오는 숨결에서는 전분과 달걀노른자로 만든 커스터드 크림의 향기가 났다. 히트사이클은 아니었다. 저번 달 초 이후로 히트사이클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가 맛있어지는 날의 도래를 떠올리며 혀를 내밀어 윗입술을 핥는다. 굵게 돋아나는 성기가 불편해 자세를 고치며 앉는데도 미묘한 데서 순진한 여래는 이런 내게 무지한 채, 그대로였다. 오메가라기보다는 배타에 가까울 여래의 호르몬 체계는 불규칙하고 제멋대로여서 일정한 주기랄 것 없는 들쭉날쭉한 양상을 보였다. 그래서 가끔의 히트사이클은 더욱 격렬했고 아슬아슬했다. 첫 섹스 이후로 안정화되었다고 생각했던 히트사이클이다. 어서 다시 왔으면 좋겠다.
여래는 내 머리카락 속에 손을 넣어 거기 숨겨진 길고 얇은 상처를 단숨에 찾는다. 엄지로 흰 실금 같은 자국을 어루만지는 손이 상냥하다.
“그리고 케이크도 먹을까? 내가 사 올게.”
“응.”
“치즈, 초코, 생크림 중에서 골라. 직원 할인으로 살 수 있다더라. 마트에서.”
“케이크, 내가 다 먹어도 돼? 다 내 거야?”
“당연하지, 네 생일인데.”
다정한 사람.
“너무 좋아.”
“단 걸 그렇게 좋아했었냐.”
케이크 말고 여래가 좋아. 여래가 너무 좋아.
나의 부모. 나의 형제. 나의 연인이며 친구. 나의 주인. 나의 모든 것. 네가 허락한다면 나는 너의 개가 되겠다. 컵 주둥이에 매달려 있던 액체가 부피를 참지 못하고 넘치듯 용량 이상의 감정은 기어코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만다.
“네가 원하면 너의 개가 되겠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낚아채 단단히 붙들고 올려다보자 곤란한 듯한 여래의 눈이 데굴데굴 옆으로 굴렀다. 볼이 미어지게 음식을 삼켰을 때, 그가 이런 표정을 했던 기억이 있다. 여래는 입 안 가득 머금은 내 말의 맛을 꿀꺽 힘들게 삼켰다.
“케이크 하나에 너무 싸구려로 넘어가는 거 아니냐. 너….”
“그런 뜻이 아니야. 너는 알잖아. 너는 전부 알잖아.”
“알지.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여래는 티셔츠의 단을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개랑은 이렇게 못 하는걸….”
팔꿈치에 걸쳐진 티셔츠를 벗겨내기 위해 위로 들어 올려진 팔에 유두가 함께 위치를 높였다. 내려다보는 두 젖꼭지가 웃고 있다. 참지 못하고 여린 살덩이를 세게 빨아올린다. 흡반吸盤과 촉수로 무장한 연체동물이 되어서 지나간 자리마다 그의 몸 위에 자국을 남겼다. 허벅지 안쪽에서 엉덩이 아래로 이어진 가장 부드러운 살은 나만을 위한 것, 나의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알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내 등을 어루만지며 여래가 속삭였다.
“아기.”
손으로 턱을 감싸고 복숭아의 껍질처럼 조심스럽게 피부의 한 꺼풀을 벗겨나간다. 다리가 야하게 벌어지고 몸은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붙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미래는 조금 달랐다. 여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기 생기면 어떡할래?”
스르륵 미끄러지던 자의식이 화들짝 놀라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어째서일까… 이렇게 꽉 끌어안고 있는데 그가 너무 멀다. 담담한 여래의 낮은 목소리가 한 번 더 말한다.
“그렇잖아. 맨날 하고 있으니까 혹시… 생기면.”
“그 애도 생일이 있어?”
“있지, 그럼.”
“그 애의 생일, 축하해줘야 해?”
“…당연하지, 그럼.”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해도?”
짙어지던 애무가 긴 브레이크를 잡으며 멈췄다. 눕혀진 채 올려다보던 여래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나를 봐. 나를 봐. 너를 안고 있는 나를 봐. 결점투성이의 불완전한 나를 봐. 너를 가진 행운 외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나를 봐. 빠르게 회전하는 중심축으로 모든 걸 집어삼키려 드는 광기를 억지로 누른다.
“나같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준혁아.”
“아니. 나와 같지 않아서, 보통이라서, 보통이 아닌 나를 부끄러워하면, 어떡하지.”
“최준혁.”
“불행한 아이는 나만으로도 충분해. 너무 많아.”
여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앞니로 문 부분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였다. 그러나 계속한다.
“자신, 없어. 확률상으로도, 나빠. 그렇다면 낳지 않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가장 마지막의 순간에 그에게서 빠져나오자 눈물 같은 정액이 뚝뚝, 하얗게 떨어졌다.
“최준혁.”
“응.”
“너, 정말 이기적이야.”
여래가 그렇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이기적인가 보다. 그렇군. 수긍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여래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너는 왜… 아무것도 포기 안 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나는… 너 때문에… 대학도, 공부도… 그만뒀는데 넌… 그렇게.”
여래는 팔로 빗장을 지른 얼굴을 끝내 보이지 않았다.
“대학, 가지 않은 건 좋지만 그만두라고는 하지 않았어. 공부도 마찬가지야. 여래가….”
“…됐어. 네가 어떻게 알겠어.”
여래는 등을 돌렸다. 끌어안으려 팔을 내밀었지만 완강한 등은 말없이도 나를 거절한다.
“잘 자. 여래야.”
답은 없었다. 손을 잡고 자고 싶지만 마지막으로 여래가 한 말이 걸려 나는 멈춘다.
네가 어떻게 알겠어.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여래가 왜 화가 났는지 왜 등을 돌리고 자는지 왜 손을 허락해주지 않는지 오늘 우리 둘 사이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감도는지, 도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