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준혁 (5)
아침에 일어나 나가는 준비를 하는 내내 여래는 이불 안에 있었다. 조금의 미동조차 없는 굳은 자세에 오히려 그가 깨어있단 걸 알았다. 최대한 소리 없이 걸어 방 밖으로 나왔다.
“하….”
내쉰 호흡이 하얗게 허공에서 깨어졌다.
휴대폰을 확인해도 여래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오늘은 뭘 먹으라거나 언제 들어온다거나 하는 안부가 없다.
“춥다.”
계절을 실감하게 하는 것은 사방에 포진한 추위보다 여래의 쌀쌀맞음이다.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고인다.
* * *
요사이 여래는 전에 없이 늦는다. 읽지 않은 메시지와 남겨놓은 음성들은 쌓여 벽을 만든다. 초조하다. 그러나 내가 이 지리한 자투리 시간을 소모하는 방법이란 침대에 앉아 마주 보이는 한 걸음 앞의 문을 노려보며 그것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의 허락도 없이 그의 개가 된 나는 혼자 방을 지킨다.
차라리 여래가 나를 때렸으면 좋겠다. 욕을 했으면 좋겠다. 발로 걷어차도 좋다. 조리도구나 공구를 원래의 목적을 벗어난 용도로 사용하여 내게 회복할 수 없는 상흔을 입힌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로 인해 그가 내게 죄책감과 의무를 가져도 좋고, 그 행위 자체에 중독되어도 좋다. 불명의 이유로 나를 멀리하려는 그의 시도가 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상처와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아도 여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나의 이 비뚤어진 관계 개선에의 욕망은 실현될 길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쓸어 올린 머리카락 안에서 나는 아버지가 내게 입힌 상처를 더듬는다. 남을 때리거나 구속하는 데에도 학위가 필요하다면 아버지는 그 분야에서 박사가 되었을 전문가였다. 매를 맞던 엄마의 팔이 힘없이 바닥 위로 널브러지고 나면 내 차례였다. 옷장 안, 납작 엎드려 숨어있는 나를 찾으려 서성이던 그의 그림자는 문틈 사이로 밖을 엿보는 나의 얼굴을 엉망으로 더럽혔다.
무섭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이제는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내가 두렵다. 범죄와 집착의 교집합 외엔 타인을 머무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못한 아버지가 밉다.
* * *
자정이 가까워서야 겨우 여래는 들어온다. 손의 봉투를 책상 위에 던지고 그대로 바지를 벗어 건 후 침대에 든다. 밥 먹었느냐고, 뭐로 먹었느냐고 묻던 며칠 전의 다정한 여래와 지금 등을 보인 그의 닮은 점은 아랫도리를 헐하게 입는 평소의 습관뿐이다.
“여래야. 씻어야지.”
“…씻었어. 그냥 잘래.”
“왜? 어디서?”
“마트 헬스장에서. 됐지?”
뭐라고?
“나 좀 내버려둬.”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여래의 벗은 몸을 누가 봤을까?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와 같았을까? 여래의 흰 발, 살집이 있는 엉덩이, 마른 허리, 빼곡한 음모와 사이가 붙지 않는 허벅지를 보았을까? 최악이다.
“왜 거기서 씻어.”
“고기 비린내 싫어서. 점점 더 못 참겠으니까.”
“일하지 마. 하지 마. 내 카드 써. 예금도 있어. 일 그만둬. 여래….”
저번에도 같은 이야기를 했었고, 여래는 싫다고 했었으므로 결론은 이미 나 있었지만 한 번 더 말해보는 건 그만큼 나의 의지가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뭔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든 건 여래가 이불을 젖히고 일어난 후였다.
“내가 왜?”
쾅!
말소리가 너무 컸다. 옆방의 하숙생이 책으로 벽을 내려치며 항의했다. 그러나 여래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았다.
“내가 왜 그만둬?”
“내가 너를 보살핀다고 했잖아. 너랑 계속 같이 있을 거니까. 나는 센터를 나올 거니까. 집도 구할 거야. 다, 다 됐어. 여래야. 말했잖아. 우리 이제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집을 구했다구?”
“으, 으응.”
“너 혼자서? 네 멋대로?”
“우리 집이야.”
그러나 여래는 결코 기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놀라워하고 기뻐하는 여래만을 기대하던 나는 지금 실제 그의 반응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우리라니… 너랑 나랑 무슨 사인데! 넌 내가 뭘 원하는지나 알아? 내가… 내가 뭘 포기하고 여기 있는 줄은….”
쾅!
대답 대신 들리는 건 옆 방 남자가 벽을 치는 예의 그 소리뿐이었다.
여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넌 아무것도 몰라.”
아니.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단 걸 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서 여래를 더 화나게 하고 싶진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싶다. 여래가 알려준다면 나는 듣겠다. 기억하겠다. 그것이 내 세포 하나하나에 깃들만큼 곱씹고 받들겠다. 그러나 여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축적되어야 내가 여래를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
* * *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파란색이다. 열려 진 겨울의 문으로 한 걸음 들어가 내디딘다. 뒤에서 입구의 걸쇠가 잠기고, 계절은 완전히 얼어붙는다.
학교에서는 시험을 보고 배부된 동계 훈련 일정을 수령한다. 어제저녁 늦게 들어왔으면서도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간 여래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 적어도 왜 화가 났는지만이라도 알려준다면 나는 최선을 다할 텐데, 여래로서는 그 어떤 힌트조차 없었다.
밤. 열 시 반. 여래를 마중하러 밖으로 나온다. 여래가 궁금하고 아르바이트만으로도 피곤할 그의 손에서 짐을 뺏어 들려고 서두른다. 오늘도 마트에서 씻고 왔는지를 빨리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가로등의 개수를 세며 걷는 내 앞으로 긴 그림자가 겹쳐진다. 작은 재채기와 함께 콧물을 훌쩍이며 들이켜는 소리는 여래였다. 그 옆을 눈에 익은 차가 느리게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게도 무영이었다.
“에취!”
“거봐, 타라니까. 왜 사서 고생이야.”
“…됐어요. 별로 안 멀어요.”
“하이고, 그래. 좋아. 안 타는 건 그렇다 치고.”
춥다. 추웠다.
“그럼 그런 놈하고는 왜 사서 고생이야?”
여래는 발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내린 차창에 팔을 걸친 무영을 쏘아보았다. 무영은 팔을 내밀어 늘어진 여래의 손을 건드리며 웃었다. 대단히 자신감 있는 태도였다.
“고생이 취미면 난 이름도 못 내밀겠다. 그지?”
“….”
“난, 너한테 되게 잘해줄 거니까.”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종류의 충만한 자기애가 압도적일 정도로 골목을 가득 채운다. 여래는 무영에게 잡힌 손을 빼 주머니에 넣어버린다.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잠깐 멈칫했던 무영은 차 문에 팔을 괴고 얼굴을 기대며 올려다본다.
“여래야, 좀 웃어라.”
“느글거려, 이 새끼야. 꺼져.”
“역시 화가 나게 하는 게 먹히는 스타일인가봐. 응?”
“어제 주신 거, 저 분명히 되돌려 드렸어요. 더는 볼 일 없어요. 이제 갑니다.”
“그까짓 것 버려도 상관없어. 어차피 너 볼 구실로 들고 온 거니까.”
“….”
“여래야.”
무영은 차에서 내려 여래 앞에 섰다.
“너, 최준혁 버틸 수 있겠니?”
여래는 앞을 지나치지 않는다. 무영은 여래의 어깨를 잡았다. 대담할 정도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무영은 여래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최준혁한테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겠냐는 말이야. 최준혁은 근본적으로 우리랑 달라. 뇌 구조가 다르다고. 알잖아.”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여래는 그 모든 동작 동안 달아나거나 피하지 않았다.
“여래야.”
“최준혁이 줄 수 없는 걸 줄게.”
“학교든, 아기든, 뭐든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랑 하자, 여래야.”
무영은 손을 내렸다. 만지는 무영의 손끝이 뺨을 쓸어내리다 입술에 닿기 직전 여래는 고개를 돌렸다.
“준혁이랑 너랑 하는 거. 연애 같은 거 말이야. 최준혁 미치게 하는 거.”
무영은 주머니에서 여래의 손을 찾아 조르듯 앞뒤로 흔들었다. 마치 밥을 먹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달라는 아이와 같이 천진한 태도다.
“최준혁이 애는 싫다고 했다며.”
여래가 무영과 만나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 그 둘이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여 경험을 나누었다는 것은 엄정한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다. 부정하거나 회피할 수는 없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것은 도래할 결과다.
“최준혁이랑 섹스, 너무 많이 하지 마. 나중에 내 거 될 거니까.”
무영은 아주 빠르게 여래의 입술에 입을 대었다 뗐다. 여래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것이 나의 바람인지 객관적인 사실인지 파악하기 전에 눈에서 불이 튀었다.
그 후로는 기억이 드문드문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무영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숨이 가빴다. 무영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드는 데에는 어떠한 교재나 학습도 필요하지 않았다. 무영은 입술을 얇게 만들며 웃고 있었다. 저 입술이 여래의 입술에 닿았단 걸 떠올리자 무영을 죽이고 싶었다. 짓누른 목덜미에서 대동맥이 쿵쿵 뛰고 있었다. 턱밑으로 지나는 혈관을 세로로 길게 그으면 된다. 여기를, 이렇게. 어둠이 시야를 잠식한다. 아버지한테서 배웠잖아. 알고 있잖아. 쿵쿵.
“컥…!”
“준혁아!”
무영의 목을 누르고 있는 팔을 여래가 붙들었다.
“준혁아, 제발!”
“놔.”
“최준혁!”
그리고, 내 손에서 여래의 뺨이 뭉그러졌다. 무영 대신 얻어맞은 여래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여래는 그대로 찻길로 쓰러졌다.
“최준혁 이 미친 새끼가!”
무영이 내 어깨를 밀치자 나는 그대로 차에 부딪혔다. 내가 밀린 것은 내 힘의 양과 질이 낮아서가 아니었다. 문득 자각했을 뿐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어리둥절했을 뿐이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아야야….”
아스팔트에 쓸린 손바닥을 들어보는 여래가 이마를 찌푸렸다. 넘어진 여래가 나를 올려다보는 자세는 내게 은애원에서의 그 날을 떠올리게 했다. 원감이 우리 방으로 들이닥쳤던 그 날을.
내가 여래를 때렸다. 미친 유전자. 폭력의 성향. 끊어낼 수 없는 대물림이 드디어 이겼다. 아버지처럼, 원감처럼 나는… 나는…
지상의 모든 불빛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지울 수 없는 어둠뿐이었다. 비유로서가 아니라 정말로 눈앞이 깜깜했다.
“괜찮아, 여래야?”
여래는 손을 내민 무영을 물리치고 스스로 일어났다.
“세게 넘어진 거 아니니까 오버하지 말아요. 쪽팔리게. 준혁아.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그러나 등을 돌린다. 나는 걷고 있었다. 아니 뛰고 있었다. 내가 여래를 다치게 했다. 내 모든 것이라고 했으면서 그걸 먼저 부서트린 건 나다. 그런 나는 필요 없다. 그런 나는 없어져야 한다.
“최준혁!”
여래가 나를 부르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준혁아, 잠깐만.”
“따라가지 마. 저 새끼가 너 친 거 몰라?”
“일부러가 아니잖아!”
무영이 여래를 붙들었다. 무영과 여래는 서로를 잡고 떼어내느라 거의 부둥켜안은 듯 보였다. 겁먹은 중에도 화가 나는 게 이상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 여래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 그 공포에서 나는 도망친다.
눈앞에서는 반복 재생을 누른 듯 계속해서 여래가 넘어지던 그 장면이 거듭 되풀이된다. 핏방울이 배인 손바닥을 내게서 숨기며 일어나던 여래가 끝도 없이 계속해서. 멍든 자국을 자리기 위해 한여름에도 스카프를 두르던 엄마와 밝게 웃는 여래가 겹쳐진다.
달린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정작 가장 벗어나고 싶은 나 자신에게서는 한 걸음도 멀어질 수 없었다.
조용한 밤을 배반하듯, 달군 쇠를 머릿속에 단번에 밀어 넣어지는 격렬한 두통이 인다. 밤거리를 쏘다니며 방금 본 광경을 거듭해서 생각했다. 부족한 장면의 개연성에는 상상력이 개입했다. 여래가 무영에게 공부며 아기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그러는 동안 무영은 여래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던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해냈을까? 사람들이 ‘이해’라고 부르는 것을? ‘교감’이라는 간지러운 단어를? 그래서 둘은 가까워졌을까? 갑자기 무영이 입맞춤을 시도할 정도로? 깊숙이 묻혀있던 폭력의 뇌관이 터질 것 같아 머리를 세게 누른다.
“야! 조심해!”
“미친… 술 처먹었나, 애새끼가.”
“눈 풀렸다. 그냥 가자.”
“퉤! 똑바로 보고 다녀라, 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투덜거린다. 내가 지나치게 똑바로 전진해온 탓이었다. 손톱 끝을 강박적으로 물어뜯으며 직선으로 걸었다. 막다른 길에서는 오른쪽으로 돌았다. 다행하게도 서울의 길은 무한에 가깝게 뻗어 있었으며 자해에 가까운 행군에 모자람이 없었다. 걷는 동안 행인 여럿과 부딪혔으며 욕지거리를 들었다. 여래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패스트푸드 점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떨리는 손에 검은 커피가 잔을 넘었다. 그것이 면역 없는 카페인 때문인지 아니면, 심장을 찢어발기는 고통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아침이 되어 일어난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울 때까지 나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의 배터리가 꺼지기 직전, 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영은 두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곧 전화를 받았다. 조용한 수화기 너머 혹시 여래의 기척이 들릴까 귀를 곤두세우는 내가 비참했다.
“…말해.”
“센터로 돌아가겠습니다.”
“아하.”
“여래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도시가 깨어나는 소음 속에서 나는 부탁한다. 무영은 말이 없었다. 웃고 있을 그의 표정이 보지 않아도 그려졌다.
* * *
여래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고도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방으로 간다. 책상 위에는 말라붙은 귤껍질이 뒹굴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그가 먹은 저녁과 아침의 전부인 듯했다. 이미 머릿속으로 정리해 둔 꼭 필요한 물건들의 목록을 불러와 방 안에서 찾아 챙긴다. 두꺼운 겉옷 하나, 위아래 여벌 옷 한 쌍, 속옷 두 장, 칫솔과 치약, 휴대폰 충전기. 반대로 두고 가야 할 것도 있다. 그의 명의로 전셋집을 계약하기 위해 몰래 가져갔던 신분증 같은 것들이 그렇다.
신분증을 내려놓다가 사진과 눈이 마주친다. 사진 안의 여래는 낯선 카메라를 응시하며 앳된 웃음을 짓고 있다. 언제나 나를 특별한 장소로 데려가던 미소를 본다. 눈물을 참기 위해 힘을 주고 그의 사진을 노려본다.
하지만 역시 미워할 수는 없었다.
미안해. 너를 좋아해서 미안해. 너를 좋아하면서도 나의 공포와 아집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비겁함이 미안해. 네가 원하는 건, 하나도 들어주지 못하는 내가 너무 미안해.
미안해. 네 행복에 그렇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해서.
하지만 내가 미안해한다고 해서 여래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아니,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전세 계약서를 꺼내 비닐 홀더에 넣어 책상 위에 올렸다. 내 신분증과 위임장, 인감도장도 함께 넣은 채다. 그 집에 살든, 전세금을 빼서 가지든 그것은 이제 그의 처분에 달렸다. 이것으로 충분히 나의 의사를 표시한 것이리라고 믿는다.
휴대폰을 끄고 센터로 가는 고속버스의 표를 사러 터미널로 간다. 재활용과 일반쓰레기 중 일반쓰레기 앞에서 초대장을 찢어서 버린다. 여래가 센터의 주소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이로써 없어졌다.
여느 때와 같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대합실에 앉아서 틀어진 텔레비전 화면을 본다. 눈앞이 흐려져서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혀를 뻗어 입술을 핥자 흐릿한 소금물의 맛이 난다. 나는 울고 있었다.
주변이 조금 웅성이더니 옆자리가 하나둘 비기 시작한다. 고독의 자기장이 타인을 밀어내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익숙한 슬픔이 친구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 * *
벌레는 수리연구실에 앉아 산 중턱의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처음 나타났다. 물의 혼탁도가 낮은 산의 호수는 겨울이 옴과 동시에 얼기 시작해 1월경에는 거대한 빙판이 된다. 아직 성긴 얼음 덩어리가 한낮의 햇볕을 강렬하게 반사하며 번쩍거린다. 살얼음이 얇게 벼려진 겨울의 호수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눈이 부시다.
벌레는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날아다녔다. 겨울인데 잘도,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번식 연구를 위해 쓰이던 초파리가 탈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시하고 싶지만 눈 바로 앞을 날아다니는 작은 점을 아예 외면하기란 쉽지 않았다. 손을 휘둘러 쫓아내본다. 날벌레는 도망가지 않고 도리어 눈 위를 기어올랐다.
의미 없는 실랑이에 약이 잔뜩 오른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얼얼한 얼굴의 감각을 무시하며 죽어있을 벌레를 손바닥에서 찾는다. 그러나 눈 안의 작은 점은 나를 비웃듯 다시 시야의 한구석에서 스멀거리며 기어올랐다. 그 사이 새끼라도 친 것인지 수를 늘린 점들은 한꺼번에 부상하며 앞을 떠다닌다.
벌레가 아니었다. 환상이다.
“아….”
눈 안에서 먼지가 보이는 시지각의 오류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증세라고 생각하면서도 덜컥 겁부터 먹는다. 닥터에게 물어보려고 주위를 둘러본 순간 내가 앉은 테이블에 서먹한 침묵이 끼어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챈다. 그룹원들은 입을 약간 벌린 채 반은 경직되고 반은 눈을 치뜨며 나를 보고 있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부끄럽고 슬픈 느낌이 든다. 센터로 다시 돌아온 지 며칠째, 삶은 송두리째 달라져 있었다. 세상과 나의 사이에서 손잡아주던 여래는 이제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따뜻했던 감각을 기억하고, 그러므로 나는 더욱더 이 차가운 센터에서 유리遊離된다.
센터원들이 나를 향해 혀를 찬다.
“발전이 없구나, 발전이….”
“센터로는 다시 왜 온 거야.”
“나간다고 설레발 칠 때부터 알아봤다.”
“주제에 무슨.”
“내버려 둬.”
“모르는 척해.”
그래. 이것이 내게 걸맞은 세계다. 무관심과 경멸로 엮어진 철조망은 나를 여기에서 나가게도, 누구를 내 안으로 들이게도 하지 못한다, 흘끔거리는 시선을 피하며 앞에 놓인 과제를 들여다본다. 수열과 패턴, 미학적으로도 거의 아름답다고 칭할 수 있을 세계에 골몰한다. 도피에 가깝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 혼나기 싫은 아이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식의 엉뚱한 집중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들의 집합 속에서 나는 안전하다.
식을 마치고 답을 적는다. 그동안 국기 게양대의 그림자는 두 걸음 정도만이 길어졌을 뿐이었다. 조원들은 아직도 문제의 2번 항에서 연필을 멈추고 있다. 제출을 위해 손을 들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 뒤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따라온다. 찢어진 종잇조각처럼 예리한 단면을 가진 소리다.
“괴물.”
환청일까? 진짜일까?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하게 군다.
손을 들어 휘저으며 그 소리를 쫓아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에 양손을 들어 귀를 막는다. 지구과학 시간에 우주와 별에 대해서 배웠을 때 소리는 입자 간에 전해지는 파동이므로 진공 상태인 우주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다고 배웠다. 하지만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리는 있다. 진공으로 단절된 세계에서는 귓속 혈관으로 혈액이 혈관벽을 때리며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우주의 소리.
고독한 진공이 부르는 노래.
그 어느 날, 여래가 내게 들려주었던 그 소리다.
나는 미쳐가고 있는 걸까?
그럴까 봐 무섭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두려움과 함께 안도감을 느낀다.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을 거란 패배자의 만족감.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좋다는 자유. 여래를 위해서 더 이상 애써 보통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그러나 이때의 좋음은 나쁘지 않다의 동의어일 뿐으로 결코 보통 이상의 즐거움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래는 달랐다. 언제나 좋음, 이었다. 이제는 안다. 극도의 행복은 깨어지기 쉽고, 지켜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귀를 막고 걷는 내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다.
캡슐로 돌아와 쌓인 종이 상자를 피하며 침대 한구석에 앉는다. 열다섯의 언젠가와는 다르게 이제 나는 그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 자고 있는 여래를 몰래 찍은 것이다.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음에 일어난 여래는 잠깐 짜증을 내다가 화면을 보고는 나쁘지 않다며 웃었다. 여래는 카메라에 서툴러서 스스로를 찍든 남을 찍어주든 전부 초점이 빗나간 사진만을 생산한단 걸 그 자신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웃음이 흔한 사람이었다. 기억 속에서 그는 여러 가지 모습이지만 마지막에는 늘 웃는 모습뿐이다.
“아….”
종결을 맺지 못한 모든 문장에서 그를 부른다. 그가 보고 싶다. 잃어버린 나의 웃는 얼굴, 나의 여래. 하지만 그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없어야 한다. 이 모순의 명제에서 나는 기꺼이 희생을 선택했으나 물은 먹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그 무게가 점점 힘이 든다. 부르르, 떨고 있는 진동음과 함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수신된다.
[최준혁]
[어디야.]
[밥은 먹었어?]
[추운데]
[왜 그래 정말!]
[너,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
[내가 며칠 너한테 뭐라고 했다고 그래서 그러는 거지.]
[무슨 오해해?]
[최준혁]
[준혁아]
[전화 받아.]
도망쳐온 첫날에는 더 많은 문자가 왔었다. 하루가, 또 하루가 지날수록 그가 보내오는 메시지의 양은 줄어들었다. 여래는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감에게 얻어맞았던 일을 복기하다가 둔감해져 나중에는 그 일들을 가지고 농담을 했듯 나의 부재에도 그렇게 무감각해지는 지도. 휴대폰을 끄자 화면은 검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춘다. 그를 두고 왔으면서도 마지막의 끈을 놓지 못하는 스스로가 싫다.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답은 보내지 않는다.
* * *
오늘은 홈커밍데이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좌석에 앉은 연구원 한 명이 크게 기지개를 켜자 오전 학술 회의의 종료 알람이 울렸다. 스크린에 쏘아지던 프로젝터가 멈춰지고 밝은 불이 앞에서부터 네 쌍을 이뤄 켜진다.
탁, 탁, 타닥, 탁.
힘겹게 몸부림을 치던 형광등 하나는 채 켜지지 못하고 검게 죽어버린다.
“퇴장하셔도 좋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마이크가 꺼지자 케이터링 업체와 연계된 서비스 용역 직원이 연단과 의자를 치우고 원형 식탁을 들여왔다. 테이블별 좌석은 총 열여섯 개로 신분과 위계에 따른 이름표의 배열은 완벽하게 계산되어 놓인다. 거의 공학적이라고 칭해도 무리가 없다. 사전에 배부된 이름표를 휴대 단말기를 확인하며 알맞은 자리에 놓는 손들이 바쁘다. 생화를 공수해 오고 얼음조각을 입장시키는 플래너는 쉼 없이 볼펜을 돌리는 것으로 그녀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귀에 끼워진 블루투스형 송수신기가 파란색으로 빨간색으로 점멸한다. 그 규칙을 따라 허벅지에 올려진 손가락을 두들겼다.
톡, 톡, 토독.
점심을 위해 공용식당으로 가는 연구원과 자신의 캡슐로 돌아가는 센터원들이 그런 나를 흘끔, 보다가 귓속말을 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문 밖으로 나가는 그들에게서 안부의 인사는 없었다. 한창인 겨울에 개화한 개나리나 해류에 휩쓸려 해안가로 떠밀려온 덜 떨어진 고래가 된 기분이 든다. 센터로 도망쳐 왔지만 여기에서 역시 있어도 좋다는 당위성은 발견하지 못한다.
평소라면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가 제일 빨리 문 밖을 나서야 했겠지만, 퇴소를 위해 챙겨 두었던 기록물과 자료, 짐을 모두 싸서 탑처럼 쌓아놓은 방 안은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조차 없어서 갈 곳이라고는 여기뿐이었다. 쌓인 종이 박스를 해체해 되돌려줄 것과 정리해 꽂을 것을 구분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방문이 많은 이때, 접객실로 쓰이는 라운지는 머무르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포옹을 나누거나, 높은 톤으로 나누는 이야기들로 이미 과포화 상태인 데다, 나는 그런 광경에 전혀 면역이 없다. 동물성과 금속성으로 공격적인 알파의 페로몬과 교태부리는 듯한 오메가의 그것이 합쳐지면 역겨운 기분 그 자체가 된다. 연회장의 입구에는 페로몬 억제를 위한 조립식 에어샤워 장치가 세워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행 요원이 끝에서 두 번째 테이블 내 이름 옆에 여래의 이름을 놓았다. 여래의 이름을 발음해 보려고 노력하는 순간마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불참 의사를 접수하러 간 행정실에서 번번이 돌아왔다. 혀에 묶여 있는 그 이름의 중량은 아직 내가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지지 않았다. 어차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옆에 앉는 것보다 빈자리로 남겨둔 편이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기에는 더 나았다.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전화 받아.]
공부에 흥미가 없는 고등학생처럼 진동이 울리자마자 메시지를 확인하는 나를 보고 매니저가 김이 빠지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어 한동안 올려다보는 내게 매니저는 웃으며 아니라고 했다.
“그 사람?”
대명사로 지칭해도 나는 그것이 여래임을 안다.
“네.”
“거의 왔니? 음, 그러니까 여기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고 있는 거야.”
“아, 저… 저… 아프다고. 아파서. 아픈 것 때문에 못 온다고.”
거짓말에 식은땀이 솟는다. 우왕좌왕하는 나를 매니저는 금방 알아챌 것 같다. 매니저는 눈꼬리를 내리고 눈썹을 모으며 걱정하는 표정이 된다. 사회성 학습 교재에 실려 있는 예시 사진과 닮은 모습을 판별해 내는 건 쉽다.
“어디가 아픈데? 독감? 유행이라던데.”
“자… 자꾸 토하고 입맛도 없고.”
“체했을까? 아… 혹시.”
변명에 최대한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나는 며칠 전의 여래를 기억하며 대답한다.
“체온은 평상시보다 1도 높았지만 더 이상 오르지는 않았어요. 먹은 건 별로 없는데 계속해서 신물이 올라온다고도 했고요. 하지만 먹을 수 있는 건 귤, 유자차, 차가운 얼음뿐으로 위염이나 장염을 의심했지만 약을 복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아픈 게 아니라, 그거 아니야?”
“…?”
“이거 축하해야 한다고 해야 하나.”
그의 표정을 읽어내기가 힘들다. 사회성 교재에 실렸던 사진들은 다소 극적으로 과장되어 있어 실제 사람들이 지닐 법한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까지를 다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가 모든 스펙트럼의 감정이 담긴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이해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그에게서 움츠러든다. 어깨를 두드리려다 내가 손을 피하자 머쓱하게 걷어 올린 팔을 팔짱으로 끼우며 매니저는 밖으로 나갔다.
“그렇다면 오늘 더욱더 봤어야 하는데 아쉽게 됐네. 하긴 초기엔 쉬는 편이 나으니까.”
매니저가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회장은 소란스러워지고 그는 바깥으로 나갔다.
“여기, 이쪽으로.”
“이렇게 일찍 오실 줄 모르고.”
“의전 준비 안 된 거야!”
“아, 뭐. 편하게들 계세요. 이러면 내가 둘러보기가 불편스러워서.”
카펫에 묻힌 구둣발 소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모르고 앉아있던 나는 말소리에 놀라 펄쩍 뛰어오르며 뒤를 돌았다. 가벼운 핑거푸드 위주로 차려진 트레이를 밀고 가는 종업원을 손을 들어 멈춘 무영이 그중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 먹었다. 크래커 위에 참치 샐러드가 올려진 카나페를 먹으며 장내를 둘러보던 무영은 나를 발견하고는 멈춰 선다. 반입 베어 문 카나페를 통째로 입에 집어넣고 무영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성벽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무영의 진행방향에 발맞추어 움직였다.
“최준혁.”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내 어깨에 문질러 닦으며 무영은 인사한다. 그에게 타인의 옷 따위는 행주나 냅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고개를 들어 무영을 바로 보자 무영의 성벽들이 나를 근엄하게 내려다본다. 내가 그를 해치기라도 할 듯 걱정 어린 표정들이다. 허가 받은 소형 화기가 들어있을 시큐리티의 왼쪽 가슴이 불룩해지며 내게 경고한다.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무영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조금 뒤로 물렸다. 벌떼처럼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한 발자국의 거리를 띄운다.
“잘 있었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이 뒤가 네 자린가?”
무영은 어깨너머로 장난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서로 마주치지 말자?”
자리를 뜨려는 무영의 팔을 잡는다. 수행원과 비서들이 술렁거린다.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있을 뿐이다. 무영을 주목시킨 순간 나는 즉시 그의 팔에서 손을 뗀다. 시큐리티의 얼굴이 종이처럼 구겨졌다가 펴지지만 그 자리에는 지워지지 않는 주름이 남았다.
“내가 부탁한 건.”
“아, 그거.”
그거가 아니다. 그렇게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다. 고쳐 말한다.
“주여래야. 그거가 아니다.”
무영은 다시 한 번 다가오려는 사람들을 물린다.
“이거나 저거나.”
“말해줘.”
“주여래가 진짜로 물어보러 오긴 하더라. 너 어딨냐구.”
“그래서?”
“모른다고 했어. 네 말대로. 아! 아니다.”
희미하게 웃는 입술은 단번에 휘두른 칼금 같다. 어긋나는 단면이 차갑게 흘러내린다.
“벗으면 가르쳐 준다고 했다. 하나에 하나씩.”
뇌의 개입 없이 근육이 멋대로 움직인다. 무영에게 달려들자 시큐리티는 단번에 제압해 내 목덜미를 강하게 붙든다. 붙들린 채로 건물의 현관까지 끌려나가 문 앞에서 내동댕이쳐졌다. 무영은 폭력과 경호의 미묘한 경계에 있는 움직임을 삼 미터쯤 떨어진 위치에서 감상했다. 로열석에 앉아 발레를 보는 듯 아주 우아하고 고상한 자세였다. 나는 반대다. 내 앞머리는 헝클어지고 옷깃은 구겨진다.
뜨거운 물줄기가 코에서 흘렀다.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도 멈추지 않는 그것에 비로소 내려다보자 소매는 이미 코피로 붉게 번진 후였다. 무영은 손을 활짝 벌리며 관대함의 제스처를 취한다.
“그만하지. 일방적이니까 영 재미가 없네.”
무영의 말에 시큐리티는 손에 묶인 줄이 당겨진 인형처럼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 셔틀이 도착했습니다.”
대기실에 있을 센터원과 연구 인력들에게 알리는 내부 방송이 울려 퍼졌다. 터미널과 정류장을 돌아 산 중턱의 센터까지를 왕복하는 버스는 천천히 출입구 앞에서 멈췄다.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에어프레셔가 자동문을 열자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온다. 내리는 사람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무언가가 들려있다. 여래는 거기 없다. 없단 걸 안다. 그러면서도 기대하고 그 기대에 배반당한다. 기대도 배반도 모두 내게는 자격이 없는 것들이다.
승객들 뒤로 모자와 유니폼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60대 운전사가 내리고 나자 정말로 끝이었다. 서서히 흩뿌리기 시작하는 눈발을 피하며 사람들은 버스에서 건물로 총총히 뛰어들어온다. 연말의 부드럽고 다정한 분위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다.
“뭘 멍청하게 보고 있어? 바보같이.”
무영은 손등으로 콧방울을 누르며 코피를 멈추려 하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왼쪽 가슴 포켓에는 행커치프가 꽂혀 있지만 그가 코피를 닦으라며 그걸 내밀어 주는 일은 없다.
“주여래는… 두어 달 지나서 진정이 되면 데려올 거야.”
콧방울에서 뭉근한 핏덩어리가 왈칵 쏟아진다.
삼키면 안 돼. 차라리 뱉어.
머리가 띵했다. 은애원에서도 지금도 나는 늘 피를 삼키기만 한다. 코를 틀어쥔 손가락 사이로 피는 싫은 예감처럼 누수되었다.
“머리가 식으면 주여래도 알겠지. 뭐가 최선인지.”
무영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는 더듬거린다.
“…아픈 데는 없어?”
“지랄하네.”
“속이 안 좋다고 했는데.”
“신경 꺼. 멍청아.”
“몸이 좋지 않았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 후에는 확인을 못 해서.”
그저 한 마디면 좋겠다. 여래가 더 이상 토하지 않는다는, 한 마디면.
“아웃 선언한 건 너야. 메이트 없는 오메가 따위가 나대는 걸 내가 참아주는 게 행운이란 걸, 너도 주여래도 알아야 해.”
자신만만한 내용과는 다르게 무영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 * *
“안 들어가시고 왜 나왔어. 추운데.”
“아니, 좀. 확인할 게 남아서!”
승객이 전부 내린 버스의 주변에서 서성이는 기사를 보고 건물 안에서 교대조의 누군가가 따뜻한 김이 오르는 종이컵을 들고 그를 부른다. 기사는 손사래를 치며 그만두라고 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까. 길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빼 물던 그가 아래를 향해 학생, 이라고 부른다.
정수리와 어깨에 하얀 눈송이가 달고 있는 작은 그림자가 천천히 산길을 올라온다. 하얀 숨결이 그의 주위에 등나무 꽃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다. 이상하게도, 정사각형의 상자를 들고 새근거리는 숨을 뱉는 사람이 익숙하다. 그는 마치 길을 잃은 꼬마 눈사람인 듯 비틀거리며 열심히 걷는다. 봄에서 도망치기라도 하는 걸까? 옷은 형편없이 얇고 얼굴은 파리하게 희다. 추운 날씨에 드러난 귓바퀴는 몹시 붉다.
눈썹에도 입술에도 흩날리는 눈발이 그에게 키스하기 위해 멈춰 선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의 끝으로 내 입술을 가져가 매만진다. 불러일으켜지는 입맞춤의 감촉.
아아… 이제야 그가 누군지 안다. 길었던 머리카락을 잘라 낯설지만, 그가 맞다.
여래였다.
“어떻게….”
환각일까? 환영일까? 여기 없을 여래를 보는 나는 정말로 미쳤을까? 코피가 묻은 손등을 들어 눈을 비비자 시야가 붉게 번졌다. 내 앞에 나타난 그가 진짜임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귀밑머리에 서리를 단 초로의 기사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달려가 여래의 손에서 짐을 받아들었다. 늙은 기사는 젊은 사람과의 대화가 즐거운지 몇 마디의 말에 아주 크게 웃었다. 여래는 나이든 사람들과도 아주 잘 지낸다. 담배와 노인의 냄새도 개의치 않는 착한 태도를 한다.
확실히, 그다. 그가 맞다.
“이… 미친 것들.”
무영의 잇새에서 으깨어진 말이 즙을 흘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여래의 팔을 붙든 운전기사는 건물로 안내하며 부산스러웠다.
“학생, 왜 이렇게 안 올라오나 한참을 기다렸네! 짐이라도 태워 보내라니까.”
“케이크가… 흔들리면 망가질 거 같아서… 하아…. 이렇게 먼 줄 알았으면 멀미를 참을 걸 그랬나… 봐요. 하.”
“눈이 내려가지고 길이 보통 된 게 아닌데.”
“그러게요.”
녹아 질척해진 눈이 회색의 진창을 만든 길은 엉망이었다. 그곳을 건너온 여래의 운동화는 짙은 색으로 젖어있다. 주차장 입구에서 허리를 짚으며 건물 전체를 둘러보던 여래의 눈이 드디어 건물에까지 이른다. 무심하게 훑어 내려오던 시선이 내게 걸려서 넘어진다. 시큐리티에게 얻어맞은 뺨보다 무영의 오만함보다 여래의 당황한 눈이 더 아프다. 흙과 피가 엉겨 붙은 뺨을 어깨로 닦는다. 나아지려고 해본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조금이라도 단정해지려고 해본다. 단정한 무영과 초라한 나의 대비를 의식해서만은 아니다.
깨끗하게 씻어.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나의 계율, 여래의 말이 떠올라서다.
여래는 기사에게서 다시 짐을 받아 들고 목례를 했다.
“고맙습니다.”
“얼른 들어가 봐. 땡땡 얼었구만.”
“네.”
눈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바람은 북동풍이었다.
발밑에 엎드려 용서를 빌든, 달려가 끌어안고 정신없이 입 맞추든, 어쨌든 격정의 재회를 흉내 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다. 다만 그가 걸어오는 직선의 동적 변화를 본다. 내가 그에게로 움직이면 그가 내게 걸어오는 이 벡터의 공식이 깨어질까 두렵다.
여래는 곧장 로비와 이어진 건물의 현관으로 들어온다. 호드드, 몸을 떨어 눈을 털어 내는 그에게 명치의 통증을 참으며 겨우 말한다.
“어떻게, 여기에.”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으나 여래는 그저 초승달처럼 입술을 당겨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어두운 밤의 직전에서 아침을 기억하게 하는 그런 미소였다. 사라질 듯 희미하지만 분명 거기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빛.
“어쩌다가 여기에.”
“너는 정말… 왜 그렇게 똑같아. 준혁아.”
이번에도 나는 실패한 재회를 한다. 목은 잠겨 제대로 말을 할 수 없고, 꼬락서니는 그때보다 더 엉망이었다. 여래는 내 턱밑까지 다가온다.
“도서관에서 논문을 뒤져봤어.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논문을. 연구기관을 모조리 적어서 석진이한테 부탁했어. 기말고사 중이라서 미안했지만 내 사정이 급하다니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으면서 같이 전화를 걸었지.”
“그 사람이.”
윤석진. 여래의 친구. 나이는 동갑. 베타 남성. 아무리 보아도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람. 어쩌면 좋은 사람.
“전화를 무지무지… 많이 했어야 했어. 그리고 부탁도 많이 했어야 했고. 아마 내가… 내가….”
기다린다. 여래는 힘들게 침을 삼켰다. 눈을 옆으로 길게 만들며 보는 그 끝에 무영이 걸렸으나 여래는 곧 시선을 바로 했다.
“아마 내가, 조금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와준 거 같아. 보기보다 냉정하거든, 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하긴 언제라도 그를 이해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여래는 손을 올려 들고 있던 것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눈에 젖은 케이크 상자였다.
“생일 축하해. 준혁아.”
놀랍게도 여래는 내게서 어떤 처분이 내려지길 기다리는 듯 입술을 떤다. 그도 나만큼이나 두려워하고, 길을 잃고, 상처 입었을까? 그도 나의 거절이 무서운 걸까? 정말로, 착각이나 과대망상에서가 아닌, 그도 나와 같은 걸까? 달걀 껍질이 바수어지듯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지고 내부를 감싸던 얇은 막이 벗겨진다.
나는 나 자신이 된다. 여래도 나와 같다.
“최준혁.”
여래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기억하는, 내가 사랑하는 그 미소였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
그래,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안다. 언어의 불완전한 그릇으로는 이 충만한 사랑을 담을 수가 없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대신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눈을 채 뜨지 못한 어린 새끼 짐승처럼 냄새만으로 더듬어 그의 입술을 찾는다. 젖을 빨듯 그의 입술을 마신다.
그를 껴안고 숨을 쉬어본다. 끼어있던 색유리와 분열 직전의 만화경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비로소 선명하다. 어긋나 있던 사물들이 제 자리를 찾는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아슬하게 서 있는 나에게 만질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타인의 존재가 손을 내민다. 나는 여래를 느낄 수 있다. 닳은 옷의 느슨한 조직의 질감과 따뜻한 우유의 숨결의 그를.
인간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나에게 그 책은 오로지 여래라는 언어로 쓰여 있다. 내가 이해하고자 하는 유일한 말인 너.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인간인 너. 그런 그가 나를 좋아한다. 거의 우주적인 기적의 순간에 나는 불신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거듭해서 확인한다.
“좋아해, 나를?”
“그래.”
“나를 좋아해?”
“그래. 그래. 그렇다고 하잖아. 몇 번이나 물어볼 거야?”
“몇 번이고, 몇 번이든.”
동쪽 하늘에서부터 어둠은 불치의 병처럼 찾아오고, 스러지는 겨울의 태양은 산 중턱의 호수에 주홍의 빛을 뿌리고 자멸한다. 얇게 얼어있을 호수의 표면은 붉은색으로 물들다 마침내 회복할 수 없게 검어진다. 여래를 떠나올 때 나는 센터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나는 호수의 밑바닥으로 갈 생각이었다. 깨어진 얼음 사이로 불완전한 생의 완전한 마무리를 매듭짓고 싶었다. 죽으려고 했다.
그러나 여래는 나를 다시 발견했고, 물고기들의 사체와 오염된 진흙탕에서 나를 길어 올렸다. 그러니까 나는 여래의 것이다. 목숨도 미래도 전부 그에게 주겠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이제 여래의 주관에 따르겠다.
“아….”
짧아지는 호흡에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여래의 안색을 살핀다. 영하의 날씨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 온 여래의 손마디는 펴지지 않을 정도로 곱아 있다. 하얗게 김을 토해 덥혀 보지만 얼은 손가락은 좀처럼 녹지 않고 거미의 다리처럼 제각기 움직인다. 급한 마음에 그중 하나를 잡아 입에 넣고 빤다. 손톱에서는 얼음의 맛이 났다. 달라붙는 나에게 쓴웃음을 보이며 여래는 물었다.
“이제 들어가자. 응? 나 추워.”
그러고 보니 무영과 그의 비서진들과 여래를 데려온 운전기사는 이제 로비에 없다. 언제 무영이 퇴장했는지 모를 정도로 여래에게만 골몰해 있었다. 등을 떠밀며 재촉하면서도 눈에 젖어 미끄러워진 대리석 바닥을 디디는 여래의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달걀 바구니라도 안고 걷는 듯 뒤뚱거리기도 하고 종종거리기도 한다.
“나, 할 말이 있어. 짐도 무거워. 어서.”
“아, 어. 응.”
할 말? 뭘까? 켕기는 게 많은 나는 그 예고가 즐겁지 않다. 허둥지둥하는 나를 알아챈 여래는 다시 한 번 당겨 우리의 거리를 줄인다. 평소에는 밖에서 손잡는 것조차 인색한 그가 어째서인지 너그럽다. 이게 가출의 덕분인지 아니면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짧게 자른 머리는 힘 있게 위로 솟아 있어서 여래의 머리카락은 포옹할 때마다 내 뺨을 간질였다. 웃고 싶다. 정말로 웃고 싶다. 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 웃음으로써 내가 너를 다시 만나 얼마나 다행이라고 여기는지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눈가는 경련할 뿐 기쁨으로 접어지지는 않는다. 여느 때처럼 나를 대신해서 웃는 것은 여래였다.
“방 구경 좀 시켜줘. 어디야?”
“그럼. 여기. 이쪽으로 와.”
“얼굴이 엉망이다. 어떻게 너는 멀쩡할 때가 없냐.”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떨궜다. 목재소에서 화재 사고로 멍들었던 이마가 나은 지가 얼마 안 됐는데 오늘 또 코피가 터지고 뺨이 붓도록 얻어맞았으니 여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얼마나 떵떵거리고 잘 사는지 보려고 왔는데, 꼴좋다.”
여래는 소맷부리를 당겨 내 코언저리를 닦았다. 검붉은 핏자국이 묻어 나온다. 그의 옷이 더러워질까봐 고개를 돌려보지만 턱을 붙잡으며 흙과 피를 쓸어내리는 손이 단단했다.
“다 닦으면 가자. 피 흘리는 거 못 보겠어. 이상한 데야. 이렇게 다쳤는데 아무도… 와서 말 한 마디를 안 섞어.”
무영이 그랬으니까. 나를 싫어하니까. 이유는 많다. 여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제 가자.”
캡슐에서 제일 먼저 여래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건 침대다. 탄력을 시험하듯 튕기는 엉덩이에 맞춰 베이지에 가깝도록 짙은 아이보리 색의 침구가 바스락거렸다. 몇 번을 아이처럼 침대에서 구르던 여래는 그 다음으로 메모지에 써 놓은 짧은 단어들이나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화랑의 그림처럼 둘러보았다. 대부분을 빠르게 넘어가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오래 머무르며 주의 깊게 살핀다. 그가 보는 것은 나의 방이 아니라 그 위에 흔적처럼 남은 나의 버릇들이고, 나 자신이다. 책상 위를 정리하는 구도, 베개를 놓는 방식, 읽은 책에 접힌 귀와 사용하는 소형 전자기기. 내가 좋아했던 여래의 방처럼 여래 역시 나의 방을 좋아해 주었으면 한다. 방을 훑던 시선이 문득 멈추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여기 있어도 돼?”
물론이다. 아니라면 들이지도 않았다. 애초에 여래에게 내가 무슨 거절을 한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래는 앞니로 입술을 깨물었다. 희게 질렸던 입술이 다시 발그레해지는 잠시간의 동안 침묵이 흘렀다.
“너는 나 보기 싫어서 여기로 왔는데, 내가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건가 해서.”
“아니. 난.”
“왜 그랬어?”
곧은 시선이 아프다. 벗은 옷은 죄가 없는데 손은 그것만 힘껏 구긴다.
“내가 여래를 다치게 했으니까.”
힘의 방향으로 멋대로 비틀린 손 위로 여래가 자신의 손을 겹쳤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거기에 고인 말들을 밀어 올렸다.
“여래가 넘어질 때 은애원 생각이 났어. 원감같이 되어버렸어. 다음에는 아버지처럼 될지도 모르지. 그런 나는 없는 게 나아. 너를 아프게 하는 나는 없어져도 돼. 없어져야 돼. 그리고… 그리고….”
질투가 났다. 무영과 여래가 함께 있는 장면이 주는 안정감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획득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다 해도 좋은지는 알 수 없었다. 여래는 가만히 팔을 내밀어 나를 안았다.
“미안해. 준혁아. 내가 잘못했어.”
“아니야, 여래는 잘못 없는데….”
“내가 잘못했어.”
“….”
“그러니까 화해하자.”
반항할 도리는 없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곁을 맴도는 나를 여래는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뭐 해, 얼른 씻어. 흉하다 너.”
“여기 앉아 있어. 어디 가면 안 돼.”
“가긴 어딜 가. 여기가 어딘지 안다고. 빨리하고 나와.”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튼다. 그 와중에도 의심투성이의 나는 화장실의 문을 살짝 열어놓은 채였다. 여래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엉겨 붙었던 피와 흙이 물에 쓸려나간다. 배수구에서 소용돌이치던 희부연 물이 삼켜지자 거품을 내고 몸을 닦는다. 구석구석을 신경 써서 문지른다. 여래에게 더 이상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다. 문틈으로 여래가 물었다.
“너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어?”
샤워기의 물줄기에 그의 말소리가 끊어진다. 되묻는 나에게 그가 톤을 올려 다시 말했다.
“우주 같은 거, 별 같은 거 말이야.”
여래는 허블 망원경이 찍은 천체의 사진을 인화해 붙여놓은 벽면 앞에 서 있다. 오리온자리나 말머리성운, 가장 최신으로는 토성과 그 고리 같은 것들. 목성의 대적점도. 어린애 같아 보이는 걸까? 과학소년이나 뭐 그런 류의 치기를 떠올릴까? 곤충 채집통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피부가 까맣고 무릎에는 딱지를 올린 초등학생.
“의외네….”
거품을 전부 씻어내고 수전을 돌려 물을 잠근다. 뭉근해진 수증기 사이를 더듬어 찾은 수건으로 몸을 닦는다. 얼굴의 상처를 확인하려 거울을 보자 신음이 날 정도의 몰골이 비친다. 입가가 찢어졌고 광대 부근이 쓸렸다. 콧대가 약간 부어 있어 입으로 쉬는 숨이 헐떡거린다. 거짓말로라도 매력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곧 있을 행사와 행사장을 채운 잠재적인 경쟁자들에 대한 가능성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지금은 무영 하나이지만, 복수複數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연회장의 카펫 위에 선 알파의 숫자를 어림하자 나지막하게 욕지거리가 뱉어진다.
시발.
“준혁아, 뭐라고?”
“…아, 아니야. 아무 말 안 했어.”
“그래? 난 또 사진 가지고 뭐라고 하는 줄 알고. 이거 되게 멋있다.”
“전문적인 건 아니야. 나도 잘 몰라. 그냥, 예뻐서. 인터넷에서 보고 내려 받은 거니까. 누구나 볼 수 있는 거야. 별거 아니야.”
“하하… 멋있다는 데 왜 변명을 해.”
“….”
“이 바보야.”
솜사탕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여래의 목소리에 척추가 삐죽거리며 바로 선다. 벗고 있는 몸 위를 부드러운 음성이 핥아 올리며 간지럽힌다. 거의 반사적으로 발기한 스스로가 비참할 정도로 솔직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아직, 멀었어?”
화장실 문에 기대어 서서 아래를 가라앉히는 내 뒤로 노크가 울린다. 잘못을 들켰을 때처럼 서둘러 뭐라고 변명하는 소리가 화장실 벽에 왕왕거린다. 뺨이 바늘로 찔리듯 콕콕대며 쑤셔온다. 부끄럽다.
“조금. 조금만 기다려!”
“나, 옷 갈아입고 싶어. 찾아 줘.”
“응. 조금만.”
핑크빛으로 부풀어 오르는 망상을 그릇에 넣고 뚜껑을 닫는다. 그리고 그 망상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다른 생각을 한다. 1부터 100까지를 세며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떨어지는 양의 정수를 찾는다. 기억력에 의존해 외우지 않고, 하나씩 되새기며 검증하려고 노력한다.
1, 2, 3, 5, 7, 11, 13, 17, 19…
약수가 1과 자기 자신인 소수의 나열은 그와 나를 떠올리게 한다. 서로로 밖에 분해되지 않는 완전성이 아름답다. 이런 걸 로맨틱하다고 말하면 여래는 질색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욕실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습기로 축축해진 새 옷을 꿰어 입고 나가자 여래는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친 채인 그는 일상적인 경계심마저 허물어뜨려버리고 무방비한 그대로였다. 추운 날씨에 걸어오느라 피곤한지 여래의 눈이 자꾸 감겼다.
“졸리다.”
저녁의 메인 디쉬는 고기다. 드라이에이징한 소고기를 치즈 풍미가 나게 구웠다. 먹으면 힘이 나고 얼굴에 혈색도 돌 테다. 게다가 디너 중의 식순에서 모의주식투자대회에서 입상한 나는 시상대에 오르기로 예정되어 있다. 연구 그룹의 누군가가 대신할 수도 있지만 일단 수상자는 나다. 여래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 일어나야 한다. 행사장에 가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는 있는데, 나는 망설인다. 목젖이 섰다 내릴 정도로 크게 침이 삼켜졌다.
이런 나를 모르고 여래는 그저 졸리는지 이마에 손등을 가져다 대고 가물거린다.
“꼭, 식빵 위에 누워있는 거 같아. 푹신푹신해서 기분 좋아.”
“…옷, 갈아입어야 해. 눈 때문에 단이 젖어서 추워.”
“침대 더러워지겠지? 미안.”
“그런 건 상관없어. 감기에 걸릴까봐 그러는 거야.”
“나… 할 말이 있는데… 잠 온다.”
“아직은 괜찮아. 여유 있어. 조금 눈 붙여도 돼.”
저녁 식사는 여섯 시부터다. 흘긋 올려다본 시계의 바늘은 다섯 시 십오 분을 지났다. 하지만 나는 눈을 비비는 여래를 좀 더 침대 위에서 뒹굴도록 내버려둔다. 짧아진 머리카락 덕분에 드러난 갸름한 얼굴선이, 가파를 정도로 수척하다. 여윈 몸은 풍만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지만 야하다. 급격한 온도차로 제련당한 얇은 눈가가 붉어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침대에 앉아 그를 내려다본다. 체중에 맞춰 스프링이 반항하듯 삐걱거리지만 무시한다.
지금 이래도 좋은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이러지 않기가 힘이 든다. 섹스, 하고 싶다.
옆에 눕자 몸을 들썩여 자리를 내어 준 여래에게 바싹 붙었다. 나는 어디에서 근거한 자신감으로 그에게서 부재했던 걸까? 코를 그에게 대고 비벼 냄새를 맡는다. 맞은 데가 눌리자 찡하고 아프다. 의도를 담고 만지는 손에 여래가 반짝 눈을 떴다.
“뭐 하는 거야.”
옷을 벗기고 있다. 아까 갈아입으라고 했던 말과 달리 다시 입혀주지는 않겠다. 이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의 그가 부족하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지만 몸은 다른 증거를 원한다. 벨트의 버클을 푸르고 바지를 끌어내려 속옷 위로 말랑한 성기를 혀끝으로 누르고 싶은 것이다.
애가 탄다. 정말이야?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 그렇다면 어서 보여줘. 나를 네 안에 들어가게 해 줘. 나의 냄새로 너를 흠뻑 적셔 나를 이 불안에서 해방시켜 줘.
“야. 야아. 너.”
셔츠의 단추를 아래서부터 끌러가다 앞선 마음에 양쪽으로 잡아 뜯는다. 마른 가슴팍이 놀라 들썩거렸다. 핑, 튕겨 나간 단추가 바닥을 구르다 멈춘다. 미안하지만 저 옷을 다시 입기는 어렵겠다. 여래는 나보다 작으므로 내가 예전에 입었던, 입은 지 아주 오래되어 내 냄새가 배어있는 옛날 옷을 줄 생각이다. 그것은 은애원의 첫날을 떠올리게 했다. 여래가 나를 씻겨서 그의 옷을 입혔던 그 날을.
다리 사이에 힘을 줘 그를 가두고 샤워를 마치고 갈아입은 옷을 팔을 들어 올리며 도로 벗었다. 채 닦지 못한 물기가 남은 나의 몸을 올려다본 여래는 당황하며 허리를 틀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다. 팔 사이에 그를 가두자 나의 그늘 안에서 그가 떤다.
“최준혁 너 뭐 해! 갑자기! 너, 이상해.”
“그런 말은 익숙해.”
“아니. 나, 할 얘기가 있는… 있다고 했잖아.”
“나중에.”
“정말 중요한 얘기야!”
무어라 재빠르게 말하는 여래를 무시하고 뇌의 어딘가에 있을 밸브를 연다. 방 안에 가득 나뭇가지를 부러뜨렸을 때의, 엽록소의 냄새가 난다. 나의 페로몬이다. 이때까지 침대 위에서 페로몬을 방사한 적은 거의 없어 면역을 기를 새 없던 여래는 금세 취해 무너진다. 필사적으로 도리질 치며 베개에 얼굴을 묻는 그에게서 억눌린 신음이 토해졌다.
“싫어… 아…!”
“거짓말.”
벗겨낸 상체는 겨드랑이에서부터 가슴까지가 도탑고, 젖꼭지가 약간 부풀어 있다. 몸을 꼭 붙인 채로 타고 내려가 솟은 돌기를 빨아들인다. 여래는 팔을 엇갈리며 얼굴을 가렸다. 쥐어짜듯 가슴을 움켜쥐며 누른 채로 입술을 아래로 가져간다. 팔이나 다리와 다르게 지방이 끼어있는 배는 곡선의 윤곽을 그린다. 손에 익은 그 모양이 아니다. 이상하다. 그리고 다른 냄새가 난다.
어째서?
낯설지는 않으나 익숙하지도 않은 냄새에 손아귀에는 살점이 움푹 파일 정도로 힘이 들어간다. 허리를 잡으며 배에 얼굴을 가져 다 댄다. 코를 처박고 냄새를 들이켠다. 달군 부지깽이가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밀어 넣어진 것처럼 지끈거리며 아프다. 본능적인 적의에 불이 켜진다.
“누구지?”
“….”
“누구의 냄새지?”
“아….”
머뭇거리며 열리는 입술이 얄밉도록 느리다. 누구의 이름이 소환되더라도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수 있도록 어금니에는 침이 끓어오른다. 무영일까? 그를 다그치는 와중에도 맞붙인 아래는 분노인지 정욕인지로 단단해져 있다. 약간의 울음기에 화가 부채질된다. 여래는 웬만한 일로는 절대로 울지 않는다.
누구냐?
그를 이렇게 연하고 약하게 만든 것이.
“아, 아기….”
“똑바로 얘기해.”
여래가 올려다보는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아기를 가졌어.”
이상하다. 왜 죄처럼 고백할까. 혹시 나 때문일까. 내가 그를 추궁하듯 몰아붙였나.
“아기가… 생겨버렸어.”
“뭐?”
귀를 믿을 수 없다.
“테스트기는 해봤어. 병원에서는 아직 이르기 때문에 확인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고. 수능 날부터 몸이 이상해서….”
수능을 망친 여래. 계속해서 찾던 유자차. 설렁거리며 달력을 넘기다가 의미심장하게 멈추던 손가락. 축하할 일일지도 모르겠다던 매니저. 그전부터 감귤류만을 찾던 입맛.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여래는 티셔츠를 끌어내려 배를 덮었다.
“너랑 같이 오라고 했단 말이야.”
다행히도 누구와의 아기냐고 묻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어서 어딘지 부자연스럽게 살이 붙은 마른 몸을 다시 관찰한다. 외부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벌써부터 도톰해져 있는 배와 엉덩이는 벌어진 목련 꽃잎처럼 흐드러져 있다. 배꼽 아래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살며시 눌러본다. 발생학적으로, 심장의 소리가 확인되는 것은 6주차 정도이다. 아직은 어떠한 징후도 피부를 통해 전달되는 바는 없다. 깜짝 놀라는 것 외에 어떤 제스처를 취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굳은 나로부터 여래는 이불을 팩, 끌어다 덮으며 몸을 가렸다.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멍청아! 밝히기만 하는 바보!”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그 말만으로 이런 내용을 유추할 천재적인 지능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