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 준혁 (6) (13/23)

2부 : 준혁 (6)

며칠 전.

“아, 그래. 그래.”

수화기의 상대편에게 지금 띈 웃음기를 숨기려 무영은 주먹을 입가로 가져갔다.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가 새의 날갯짓처럼 귓전에서 파닥거렸다. 상대방은 거리의 소음을 헤치며 서둘러 걷는 게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절박한 속내를 위장할 꾀조차 없는 태도는 냉소적인 무영마저도 허술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하마터면 말해버릴 뻔했다.

어서, 빨리 내게 오라고.

“도착하는 대로 사무실로 올라와. 미리 이야기해둘 테니까. 헤매면서 물어보고 자시고 하지 말라고. 그냥 이름만 대.”

빨리 너를 보고 싶다고도. 그러나 무영은 잘 참는다.

무영은 전화를 끊고 의자를 밀어 유리창을 향했다. 반 바퀴 회전해 마주한 유리창은 서서히 깃든 어둠으로 진한 회색이었다. 이르게 찾아오는 밤을 신호로 계절은 정확하게 겨울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무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여래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사실이 무영의 기분을 고조시켰다. 달리 부탁할 사람 없는 여래가 궁지에 몰려 꺼낸 최후의 수단이 무영이라 할지라도, 어쨌거나 여래가 전화를 걸어온 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살아있다기보다는 죽어있기에 가까운 최준혁을 흔들어 녹여놓은 인물이 누군지 궁금했었다. 예상보단 별거 없었다. 주여래는 잘 웃고, 실없고, 적당하게 밝았다. 그 자신이 오메가인 걸 무기로 약게 굴지 않는 점만이 특이했다.

그러자 바로 불쾌해졌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최준혁에게 쓸데없는 자의식을 불어넣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형? 임원진? 누구의 수작은 아닌지 의심해 보기도 했다. 무영은 우성 알파가 되어야 했다. 그럴 수 없다면 가능성을 붙들고 있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최준혁만이 유일한 수단은 아니었으나 억눌려 있는 자아를 해방하면 우성과 열성의 전환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최면 요법이나 심리 상담보다야 이사회를 설득하기에 백배 나은 선택지였다. 물론 무영은 혈청 주사로 우성 알파가 되리라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우성 알파의 물리적 실체를 보유, 이용할 수 있다는 여지만으로도 형에게 견제구 정도는 되었다. 파워 게임을 위해서라도 무영은 손아귀에 최준혁을 쥐고 있어야 했으므로 그런 그가 이탈하려 한단 걸 알았을 때 무영이 형이나 그룹 내 계보도를 먼저 떠올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런 것들과 관계없이 계속 여래가 떠올랐다.

주차장을 나오는 무영에게 사고처럼 부닥쳐왔던 조용한 얼굴이, 정적과 무관심을 파괴하듯 무참하리만치 밝던 여래의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흡사 위치 에너지와도 같은 그 낙차에 마음이 끌렸다.

계속해서 여래가 무영을 위해 웃어준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싶었다. 여래가 무영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건 얼마나 또 흥미로울 지도. 그러나 여래는 거절했고 갈망은 갈증을 불렀다. 눈앞에서 티끌처럼 떠도는 여래는 세게 눈을 비벼도 없어지지 않았다. 화가 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왜 최준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번의 배웅을 통해 주여래가 오메가로 살고 싶지 않아 한단 걸 깨닫자 더 그랬다. 그렇담 베타인 척하고 살지 그랬어? 알파와 결합하고 싶지 않은 주여래에게 최준혁은 이상한 선택지였다. 설령 고른다고 해도 다른 알파는 많았다. 무영도 알파였다. 훨씬 더 고급스럽고 안락한 생활을 보장하는 알파.

페로몬 농도 때문에? 우성이 아니라서? 아님, 정말… 사랑이라도 하는 걸까?

그것이 무영의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무영은 내부 회선을 눌러 바깥 데스크와 연결했다.

“손님 와. 음료는 됐고, 안으로 바로 안내해.”

삐.

버저가 울린 건 다음 몇 분 후의 일이었다. 비서는 간결하게 여래의 도착을 알렸다.

-주여래 님 오셨습니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 내가 너에게 왜 집착하는지를. 궁금하고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유를 알지 못해도 괜찮다.

무영은 형을 떠올렸다. 무감각하고 무감동한 형의 눈동자는 파충류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형, 알고 있어? 사랑, 이란 명사를. 물론 본 일이 있겠지. 그 말이 낭비되는 시대이니까. 종이컵처럼 흔해 빠진 지금이니까. 나는 줄곧 그게 가지고 싶었어. 왜냐하면 내가 아는 누구도 그걸 가진 사람이 없었거든. 형을 포함해서 말이야.

우리가 발을 디딘 이곳에서는 마음이 없는 부류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 형도 나도 똑같아. 우리는 심장을 꺼내고 엔진을 대신 넣어놓은 디엔에이의 기계장치에 불과하다. 알파와 우성 알파, 알파와 오메가의 우주를 진행시키기 위한 부품들. 그런데 있잖아. 나는 아주 우연히 사랑을 발견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타인의 소유였지. 하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가질 수 없다면 빼앗으면 되거든. 약탈이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 할지라도.

권력의 본질은 희귀한 자원에의 접근성이다. 무영은 지금 그걸 가질 참이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똑똑.

원목의 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빗방울처럼 튀었다. 비서에게 여래를 곧장 안내하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영은 바로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소한 데에서부터 중대한 사안까지 모든 결정권은 무영에게 있고, 그걸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고는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달렸음을 여래는 지금 문 너머에서 몸으로 깨닫고 있을 것이었다. 무영은 깍지 낀 손을 비틀어 가볍게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장식장을 열어 문에 달린 거울을 들여다보며 옷의 주름을 폈다. 수많은 협상 테이블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의 분위기와 인상은 얼굴이 아닌 자세에 달려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곧은 자세와 바른 척추는 품위나 지성, 그리고 와인만큼이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시간이야말로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원이었다.

“들어와.”

비서가 문을 열자 머뭇거리며 고개를 수그려 감사를 표시하는 작은 형체가 두어 발자국 무영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잠시 멈춘 후, 숨을 들이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리둥절함이 오십 퍼센트 경계가 오십일 퍼센트. 백 퍼센트를 넘은 감정의 과부하에 여래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비틀거렸다. 얇은 쌍꺼풀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으로 그가 울었음을 무영은 알 수 있었다. 엉덩이 아래로 내려오는 기장의 더플코트는 모직 소재로 시간의 풍화에 잔뜩 눌리고 실컷 닳아져 있었다. 같은 시간이 어디에서는 숙성이 되고 어디에서는 부패로 작용한다. 여래는 후자 쪽이었다.

쓰레기 같은 걸 잘도 입고 있는 여래에 무영은 잇새로 혀를 찼다.

“안녕, 하세요. 죄송합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하지만 달리 물어볼 데가 없었어요. 저 ….”

오래도록 바깥을 헤매고 다녔는지 여래는 차갑게 얼은 손가락을 팔뚝에 비볐다. 최준혁 때문에 저녁 길거리를 헐한 차림으로 쏘다닌 여래를 생각하자 기분이 앵돌아졌다.

“인사 따윈 됐어. 안녕한지 안 한지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애새끼처럼 투정부릴 생각은 없었는데. 곧바로 나가버린 말에 무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넌 좀 어떠냐고 묻고 싶었는데도 그렇게 말을 하지 못한다. 밖에서 코끝이 빨개지도록 얼어붙었던 여래는 봄의 온실 같은 무영의 사무실에서 녹아 귀를 붉혔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됐고. 뭔진 모르겠지만 이리 와봐. 주여래. 일단 구경 좀 해.”

“….”

“아무한테나 보여주는 거 아니야.”

무영은 여래의 등에 손을 얹고 창가로 밀어붙이듯 뒤에 섰다. 갓 태어난 어린 짐승의 목덜미를 들어 올릴 때처럼 부드럽지만 확실한 동작이었다. 수맥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수은의 강처럼 신경을 마비시키고 저항을 무력화하는 이 야경을 여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욕망과 번뇌가 모두 발치 아래 있는 아찔한 높이를 기억시킬 것이다. 맛보면 중독되리라. 자신이 그렇듯이, 누구나가 그렇듯이.

자아… 어때. 여래야.

“어때? 멋지지?”

“네.”

자존심 따위를 내세우기보다 솔직하게 감탄하는 여래가 귀여워 어깨를 붙든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주억거리는 고개에 맞추어 귀밑으로 길어진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얌전한 결이 순했다. 만지고 싶은 욕망을 주먹을 쥐어 참는 무영 앞으로 창문에 붙였던 이마를 뗀 여래가 바로 섰다.

“김무영 씨.”

“말해 봐.”

“센터가 어디예요?”

“글쎄? 센터가 뭐지?”

“기부금을 내고 있다고 했잖아요. 식당에서 그렇게 말했잖아요.”

“난 몰라. 안다 해도 가르쳐주고 싶지도 않고.”

“준혁이가… 없어졌어요.”

이미 알고 있었다. 따분해지려는 걸 참으려 무영은 주먹으로 괜히 허벅지를 내려쳤다.

“준혁이는 갈 데도 없어요. 친구도 없고, 부모님도 안 계시고…. 센터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거기라도 가봐야 해요. 내가 아는 유일한 단서는 김무영 씨 당신뿐입니다.”

“지금까지 모르는 척했던 거 보면 모르겠어?”

“김무영 씨.”

“최준혁 찾지 마. 여래야. 도망갔잖아. 도망갔으면 간대로 내버려둬.”

싱긋 웃는 무영에 여래는 고개를 떨궜다.

“부탁합니다. 제발.”

무영은 손을 뻗어 여래가 입고 있는 더플코트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부탁하지 마. 일방적인 거 싫어. 나 이용하는 거 같고 그래서 말이야. 나 그런데 예민하거든.”

“그럼….”

“내가 좋아하는 대로 해야지. 나랑 거래하자. 여래야.”

여래 눈 밑 그늘이 거무스름했다. 무영은 두 번째 단추를 풀었다. 여래가 코트 안에 입고 있던 얇은 군청색의 티셔츠는 솔기 부분이 희끗희끗 닳아있었다.

하, 무영은 짧게 한숨을 토하며 손을 멈췄다. 데리고 다닐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쪽이 팔렸다. 나가면서 한 벌 쫙 빼줘야지. 그러려면 일단 벗겨야겠고. 무영은 싱긋 웃었다.

“거래는 서로가 교환할 게 있을 때 성립하는 거야. 규칙은 단순해. 네가 주면 나도 주지.”

“…이렇게 가진 게 많으신데, 제가 드릴 게 있나요?”

여래의 눈빛이 혼탁하게 흔들렸다. 그건 그 나름대로 보기 좋다고 생각하며 무영은 입을 열었다.

“벗어.”

무영은 옷깃에서 손을 털고 일어나 충돌 방지등이 깜빡거리는 창을 향해 등을 돌렸다. 건물의 옥상에 세워진 첨탑에서는 빨간색의 신호가 계속해서 눈꺼풀을 감았다 뜬다. 충분하게 내린 어둠은 거울처럼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검은 창은 여래의 망설임을 아주 작은 흔들림마저 생생하게 그렸다. 여래의 손이 세 번째 단추에서 망설이듯 배회했다.

“벗어봐. 어서.”

무영은 여래의 목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모든 게 노골적이고 명확해졌으므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벗고 나를 사랑해 봐.”

“김무영 씨.”

“그럼 원하는 거 뭐든 줄게. 어서.”

안고 싶다. 이 오메가를. 흥분을 향해 빠른 상승 곡선을 그리는 박동이 손에 잡힐 듯한 그 때였다.

“그건… 준혁이가 이미 줬어요.”

무영은 미간을 접었다. 여래한테 최준혁 얘긴 그만하라고 해야겠다. 초장부터 길을 들여놔야 한다. 예쁘다 예쁘다만 하다 보면 버릇을 망치는 법이니까. 그래. 여래가 모를 수도 있다. 한 번은 봐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래에게 확실히 알려줘야 한다. 이게 얼마나 무영이 아량을 베푸는 일인지를. 유예를 준다는 것, 다음이 있다는 것이 무영의 짧은 인내심에 얼마나 대단스러운 것인지를 여래는 차차 배워야 할 터였다.

무어라 이르려 무영이 막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저, 아이를 가졌어요.”

여래는 알아야 했다. 무영이 그 말을 하는 여래마저도 미워할 수 없었단 걸.

“…뭐?”

여래는 당혹스러움과 그걸 숨기려 도리어 분노한 무영에게서 아직 손톱만 할 아이를 숨기려 몸을 움츠렸다.

“이, 이런 식으로 대하시는 거 불쾌하고 성미에도 안 맞아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헛걸음을 했네요.”

“…주여래.”

코트 단추를 다시 끼우며 문으로 향하던 여래가 무영의 부름에 뒤를 돌았다. 그 어느 날의 똑같이 아무런 감정도 깃들지 않은 초연하고 서글픈 타인의 얼굴이 무영을 바라보았다. 아직 무영은 여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고 싶었다고도, 좋아한다고도, 가지 말라고도.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이란 부들거리며 격노하는 추한 언어뿐이었다.

“너, 후회하게 될 거야. 너도 최준혁도. 너네 둘이 낳을 애도.”

여래는 설핏 이마를 찌푸렸다. 무영은 허벅지 위에 올린 주먹을 터져나갈 듯 세게 쥐었다.

“우성 알파가 좋긴 좋네? 정신이 나가도, 쥐어박아도 들러붙는 오메가가 있으니까 말이야?”

여래야.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 누구도 그렇게 두질 않았어. 난 이등의, 모자란 존재였거든.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하고, 하라는 대로 했어. 그럼에도 태생적으로 획득하지 못한 형질은 늘 내 발목을 잡았고 나를 소외시켰다. 그렇게 나는 엉망이 되어버렸지. 난 내가 휘두를 수 있는 것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걸 용납 못 해. 분노를 느껴. 모욕하고 싶고 굴복시키고 싶다.

최준혁에게는 잘하잖아, 여래야. 고장 난 라디오처럼 단답만 외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최준혁에게는 잘도 웃어주면서 왜 나한테는 그렇게 쌀쌀맞아. 말이 안 되잖아. 이등은 뒤로 꺼지는 거야. 결격사유가 많은 최준혁은 내 뒤로 서야 되는 거야. 내가 널 가져야 그게 맞는 거야!

그게 나를 옥죄어오던 세상의 논리고 법칙이다.

그러나 무영 속에서 이글거리는 생각은 토해지지 않았다. 여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검은 창문 안 뿌려진 빛 속에서 무영은 혼자 남아있었다.

* * *

다시 지금.

1층과 2층을 터서 높게 기둥을 올린 회랑을 따라 서먹하게 걷는다.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오는 내도록 여래는 말이 없었다. 여래는 내가 고등학생 때 입었던 흰 셔츠의 소매를 걷어서 입고 있다. 눈발이 축제처럼 나부끼는 창문 너머를 말없이 응시한다. 체리색 나무로 된 컨벤션 홀의 문을 열기 전에 여래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무엇을.”

무엇을, 어떻게, 왜. 여래는 눈꼬리를 내리며 망설였다.

“네가 아기는 싫다고 했잖아.”

“여래는 아니잖아.”

“그래. 낳고 싶어.”

“그렇다면 됐어.”

“그걸로 됐어…? 그렇게 간단히?”

맥이 풀어진 얼굴로 여래는 나를 본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여래가 선택했으니 나는 따를 것이다. 믿지 못하는 여래를 위해 말해두기로 한다.

“나는 아기가 싫어. 두려워. 그 애가 불러일으킬 미래도 알 수 없어. 하지만 그건 실현되지 않은 확률이고, 네가 아기를 가진 건 일백 퍼센트의,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지.”

“…그래서?”

“그러니까, 바꿀 수 없는 사실은 받아들인다. 이미 생긴 아기는 낳는다. 내 기호나 판단이 개입할 여지는 없어.”

서빙 카트를 밀고 들어가던 용역직원이 캐주얼하다 못해 무례하기까지 한 우리의 차림을 보고 갸웃거렸다. 열렸다 닫히는 느린 문 사이로 벌린 틈에서 사람들이 뭔가를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보건 시간에 배운 바로, 임신을 유지하는 데에 인간 두 명분의 열량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모체는 태아를 우선하므로 흡수하는 영양의 대부분을 태반을 통해 흘려보낼 것이다. 유입되는 영양이 없다면 태아는 모체에게서 그것을 강탈해간다. 여래가 바싹 말라비틀어져 가는 지금도 아기는 게걸스럽게 성장하고 있었다. 어서 여래에게 무언 갈 먹여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감정에 나는 여래를 에어워셔 앞으로 밀어 넣었다. 여래의 체향은 옅지만 페로몬 세탁을 잊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네가 좋다면 나도 좋아. 하고 싶은 대로 해. 다만, 하나만 약속해줘.”

“무슨 약속.”

“위험한 경우, 아기를 포기해.”

“뭐?”

남성체의 오메가는 임신율에 대비해 출산율이 낮다. 몸의 형태 자체가 출산에 적합하게 디자인되어 있지 않은 남성의 경우 그 시도 자체가 모험이며 많은 변수를 감내해야 한다. 임신성 합병증과 조산의 가능성, 장기의 적출로도 이어질 수 있는 전치태반, 태반 조기 박리. 자연분만이 어려운 골반의 구조상 필수적인 제왕절개와 후유증. 그와 결부시키고 싶지 않은 무서운 이야기들이 바닥에 떨어진 고무공처럼 위협적으로 튀어 오른다.

“나는 여래가 제일 소중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정색하지 마. 의외로 괜찮을 수도 있잖아.”

“단 일 퍼센트라도, 너무 많아.”

“….”

“약속해줘. 위험하게 되면 아이를 포기한다고. 없애겠다고.”

“…그래.”

문을 열고 들어선다. 조도를 낮춰 전면의 스크린에 집중토록 한 실내에는 은은한 어둠이 깔려 있다. 자리에 앉아 서빙을 기다리며 한 줄씩 올라가는 글귀를 읽는다. 홈커밍데이의 저녁에는 늘 같은 시를 띄웠기 때문에 제목과 내용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방문객, 이라는 시다.

매년의 행사에서 그 시를 읽을 때 나는 늘 혼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두 명, 아니 세 명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여래는 익은 정도를 의심하듯 포크로 찍은 고깃점을 이리저리 살피다 용기를 내어 한 입 깨물었다. 그러나 애써 한 결심이 아깝게 여래는 한 번을 우물거렸을 뿐인 고깃점을 바로 무릎에 깐 냅킨 위로 뱉어버렸다. 그리고는 겨울무로 담근 동치미를 그릇째로 들이켰다. 새큼하고 시원한 맛 정도만 겨우 먹을 수 있는 임신의 초기였다. 내 몫의 동치미 그릇과 그의 빈 그릇을 바꾸어놓는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찰랑이는 그릇에 여래가 나를 보며 웃는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테이블 아래로 더듬어 여래의 손을 쥐었다. 그의 생의 무게와 그가 가진 아기의 미래의 무게가 나를 지구 위에 단단히 못 박았으므로 더 이상 진공의 그늘을 동경할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 * *

까치밥으로 남겨둔 홍시에 부리를 박고 있던 이름 모를 새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조류 특유의 표정 없는 눈은 거울처럼 풍경을 반사했다. 입가에 주홍색 감 건더기를 묻힌 새는 갑자기 두고 온 것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새는 날갯죽지를 펴고 그대로 가지 위에서 뛰어내렸다. 차가운 풍경을 찢고 날아가는 새의 뒤로 긴 바람이 분다. 비행을 업으로 타고난 새는 나무를 흔들고 눈발을 나부끼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홀로 날아갈 뿐이었다.

“무슨 생각해?”

작은 물음이 어두운 바깥에서 따뜻한 회장 안으로 나를 되돌렸다. 여래는 허벅지 위에 주먹 쥐어 올려놓은 내 손을 선물의 포장인 양 끄른다. 그래서 나란 나란하게 펼친 손가락을 살며시 쥐며 그는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해? 라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아아… 여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질문만을 던진다. 마치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보잘것없고 조잡한 나의 생각 따위가 그에게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니, 현기증이 인다. 최선을 다해 주어진 질문의 답을 떠올린다.

나는 내가 저 새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 없는 눈을 한 채 고독이라는 천형을 온몸으로 부딪치고 있는 새. 밤을 날아서 돌아갈 곳이라고는 고작 딱딱한 둥지뿐인 새. 비가 내리지 않길 기도하며 상처 입은 깃털에 얼굴을 묻고 홀로 잠드는 새. 그래, 나는 그런 것이 어울리므로 검은 밤을 가르고 나는 새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나 겨우 생각해낸 답을 여래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아깝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다.

“아니, 아무 생각도.”

내게는 여래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 새와 다르다. 새와 나 사이에 있었던 등호는 치워진다. 같지 않다.

“그랬어? 그런데 왜 혼자 또 심각하고 그러냐. 치.”

솜사탕의 결처럼 부드럽게 흩어진 숨이 어깨에 내렸다. 앞에서 식순을 진행하는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어 왕왕 떠드는 멘트를 방해하기 않기 위해 여래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예의 바를 정도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웃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으므로 나는 또다시 부정의 답을 한다.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싱겁다니까. 키만 커가지고. 애같이… 멍해져가지고… 혼나야 돼.”

종알종알, 작은 곡식 같은 말들이 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이미 흥미를 잃고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손을 재빨리 낚아채 깍지를 끼웠다. 테이블보 아래에서 잠시 실랑이가 오고 가지만 완력으로 여래는 나를 이길 수가 없다. 늘 그렇듯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내버려둔다. 그의 손의 온기가 나를 현실에 정박시킨다.

“하하.”

사회자가 무어라 멘트를 던지자 여래는 금방 웃음을 터트렸다. 햇살을 담뿍 찍어 크게 한술 뜨기라도 한 듯 따뜻한 얼굴이 된 여래에 지금이 밤이고 철새마저 깃털을 세워 공기를 품는 추운 날씨라는 실재하는 사실은 잊힌다. 너무나도 오랜만인 기분에, 그래 봤자 우리가 헤어져 있었던 것은 이 주일 남짓 동안이지만, 나는 그를 줄곧 들여다보았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회자의 진행에 흠뻑 빠져있던 여래는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알아채자 새침하다 싶을 정도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따끔거릴 정도로.

“그만 봐.”

“그럴 수가 없어.”

“그만 보라니까.”

“노력하고 있어.”

무의미한 노력이지만.

“앞은 저쪽이잖아. 진짜… 사람 곤란하게.”

하지만 그를 보고 있는 편이 더 즐겁다. 여래의 눈은 거울 같아서 그를 보고 있는 내가 고스란히 비친다. 거울의 발명과 세련화로 사람들이 자아를 인식하는 범위와 영역이 넓어졌다는 교양수업을 기억한다. 그에 따르자면 나를 의식하기 전에 나는 없다. 그를 통해 나를 봄으로써 나는 ‘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있고서야, 나는 생겨난다. 태어난다. 껍데기뿐인 육체 안에 영혼을 불어넣어 준 것은 여래다. 여래는 지나치게 보고 있는 나에게 고개를 갸웃, 한다. 그에 발맞추기라도 하듯 눈동자 안의 나도 갸웃, 한다.

“왜 그래?”

네가 나를 창조해 냈다는 불경하고 독신瀆神스러운 생각을 했다. 네가 나의 세계의 전부이며 그 속에서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여래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과도한 집착과 광기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가 나를 두려워할까 봐 두렵다.

여래의 눈동자 안에서는 무영의 시큐리티에게 얻어터진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진지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눈 주변은 검푸른 멍이 번져있고, 코는 코피를 흘린 후 점막이 부어 원래의 크기보다 커져 있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목재소의 화재에서부터 나는 줄곧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애교 없는 개가 주로 당하는 그런 꼴이 말이다. 존중받지 못하는 대접에 익숙해진 그런 모습. 초라하고 비참하다는 태그가 주렁주렁 달린 몰골.

불현듯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며 앞을 본다. 앞에서 두 번째, 정중앙 테이블에 앉은 무영이 흘긋 어깨 너머로 넘겨다보는 걸 의식한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다 끝내는 재만 남은 듯한 건조한 눈길이 무참하게 여래를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을씨년스러운 온기가 아직 꺼지지 않은 시선으로부터 고개를 틀자 이번엔 왼쪽 대각선 방향의 누군가도 자주 여래를 훔쳐보고 있단 걸 깨닫는다.

여래는 그런 그들을 모른다.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더부룩한 속에서 오르는 신트림을 참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식거림을 인내하는 여래는 더러운 연못을 디디고 피어난 우아한 꽃처럼 보인다.

그래. 여래는 아름답다. 입덧으로 고생 중인 여래는 턱이 몹시 뾰족해지고 목선이 기다랗게 드러나 포유류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밀림에 숨어 잊힌, 진화의 족적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그저 고결한 무언가로 보인다. 그런 이종의 생물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흘끔대는 눈들이 짧게 자른 앞머리 때문에 드러난 이마와 단정한 코, 목과 입술을 샅샅이 보고 지나간다.

이해하는 동시에 분노한다. 시선이 내포한 침범의 가능성에 화가 나는 것이다. 여래는 내 것이다. 얼씬거리지 마. 보지 마. 여래는 이를 전혀 모른 채, 접시 위의 정육면체의 고기를 주사위처럼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생목이 올라오는 걸 참으려 가슴을 손으로 누르기도 한다. 들여다보는 나를 향해 여래는 변명했다.

“아니야. 이거.”

“뭐가?”

“애기 때문…. 아니라고. 그러니까 나 괜찮아. 다른 생각 하지 마. 아무 문제없으니까. 알았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위험한 경우 아이를 포기해. 아이를 없애.

여래는 아까의 이야기를 떠올린 게 틀림없었다. 계속해 강조하는 여래가 필사적이다.

“하나도 힘들지 않아, 정말로. 버스 멀미가 남아서 그러는 거야.”

식사 시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회장은 치워지는 식기들이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분주했다. 나온 배를 느지막이 내민 사람들이 의자에 기대거나 한담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렸다. 안색을 뻣뻣하게 굳힌 채 탄산수만을 연신 들이켜는 여래에게 참지 못하고 말한다.

“일어나자.”

지루한 행사에 그가 용무가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다. 무영과 다른 알파들이 나를 초조하게 한다. 안전하고 밀폐된, 작은 방으로 가고 싶다. 그 안에서 여래를 좀 더 만지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공유된 시간만큼을 끌어안고 싶다. 먹지 않아 묻은 것도 없는 입가를 괜스레 냅킨으로 눌러 닦으며 여래는 작게 말했다.

“너 상 받는다며. 중요한 거 아니야?”

상? 중요하다? 여래 외에 소중한 것을 가질 만큼 내 인생은 풍요롭지 못하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고쳐야 할 이유는 없다. 높게 트여있는 천장과 울면서 녹아내리는 유리 조각, 샹들리에가 난반사한 조명과 환영처럼 몽롱한, 군중이 만들어내는 실체 없는 분위기 역시 좋아해 본 적은 없다.

“그런 재주 있는 줄 몰랐는데. 상도 받고 말이야. 짜식.”

“아무것도 아니야. 작은 거야. 상금도, 명예도.”

“그래도.”

모의투자대회에서 입상한 내가 단상에 올라갔을 때 여래는 정말이지 힘껏 손뼉을 쳤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의아해할 정도로. 여래는 몇 번이나 내가 받은 상장과 봉투를 자랑스럽다는 듯이 펼쳐서 보았다. 칭찬을 받는 어린아이처럼 뿌듯해진 나는 일 없이 괜스레 상장을 펄럭여 보기도 하고, 봉투 안의 상금을 헤아려보기도 했다. 자기가 먼저 시작했으면서도 내가 따라하는 걸 보자 여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내 머리를 헝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스럽게 웃었다.

-식순에 따라 행사가 종료됨을 알려드립니다.

두 번째 열의 중앙인 상석에 앉아 있던, 별처럼 멀리 떨어져 있던 무영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지나가도, 마지막 한 명이 퇴장해도 여래와 나는 멀뚱히 자리를 지켰다. 대화가 끊겨도 조명이 탁, 탁, 탁 소리를 내며 꺼져도 우리는 언제나 둘뿐인 것이 익숙했으므로 아무렇지 않았다.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여래는 상장 커버를 덮으며 일어났다.

“갈까?”

“응”

“우리 생일 축하하자.”

“응.”

방 안에서는 연기 탐지기가 작동했기 때문에 초에 불을 붙일 수 없었다. 여래는 휴대폰으로 촛불의 이미지를 검색해 내밀었다. 연습해 본 적 없는 동작을 흉내 내는 나는 어색해 하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후, 하고 불어본다. 플라스틱 포크로 케이크를 조금 허물어 입에 넣자 우유로 만든 크림과 살짝 시든 딸기의 맛이 난다. 아주 맛있다. 그렇지만 여래는 이번에도 역시나 한 입만을 먹고 그만둔다.

“생일 축하해, 준혁아.”

“응.”

“그게 끝?”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여래가 당황스러웠다.

“넌 고맙지도 않냐. 여기까지 이걸 들고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부탁한 적은 없어.”

“야!”

“왜.”

“그런 말이 아니라! 엎드려 절 받기지 진짜. 그냥 고맙다고는 못 해?”

“고마워.”

“치.”

듣지 않겠다는 듯 생크림을 부수는 포크가 무정하다. 당황하여 덧붙인다.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할지. 익숙하지가 않아서.”

은애원에서는 한 달에 한 번 합동 생일잔치를 했다. 센터에서의 생일은 기념이 아닌 식별의 번호에 불과했다. 케이크를 하나 전부 다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그걸 아는 여래는 케이크를 처참하게 망가뜨리던 손을 멈춘다. 앞머리를 쏟아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나의 턱을 쥔 여래가 눈을 맞춰왔다. 여래는 오늘 내내 다정하다.

“내년에도 케이크 먹자. 딸기생크림케이크, 괜찮아?”

“괜찮아.”

“그럼 그 때는 그냥, 고맙다고 말해줘.”

내년에 다시, 라니. 그렇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 전기에 스친 듯 놀랄 필요는 없다. 내게는 내가 태어난 것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여래가.

살짝 스위치가 눌린다. 뭐라고 더 말하려는 여래의 입을 입술로 틀어막는다. 비벼지는 혀와 혀 사이에서 아직 입 안에 남은 딸기가 으깨졌다. 까슬한 씨가 입술의 옆으로 흘러내렸다. 혀를 내밀어 깨끗하게 닦아주어도 돌아오는 감사의 말은 없다. 케이크로 그렇게나 생색을 냈으면서 여래 역시 예의바르지 않은 점을 정중하게 지적한다.

“내가 닦아줬으니까 다음에는 여래도 그냥 고마워, 라고 해줘.”

“야!”

여래는 새빨개진 얼굴로 씨근대며 나를 밀었다. 케이크는 옥신각신하는 우리의 사이에서 흔들리다 결국 판 채로 침대 위에 뒤집혔다.

“뭐 하는 거야, 정말! 기껏 사왔더니만!”

여래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혼나서 침울해져야 하지만 이상하게 행복했다.

* * *

“추우니까 겉옷 입어. 복도는 난방을 많이 하지 않아.”

“코 시려….”

겨우 두 조각을 먹고 망친 케이크를 상자에 담아 바깥으로 나온다. 손을 깍지 끼워 단단히 잡자 여래는 빼려고 허둥거린다. 놓아 주지는 않는다. 센터 내에서 폭력 행위는 일절 금지되어 있으나 여래를 보던 다른 놈들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한 관찰 행위에 불과하다고 해도,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보호하고 싶다. 아니,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의무다. 그를 보호해야만 한다. 격리해야 한다. 다른 이들의 관심과 주의로부터. 그리고 그 자신의 불신으로부터. 그는 자주 마음이 약해지며 도망가고 싶어 하니까.

“추워….”

중얼거리는 여래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가득 채운 물잔을 옮기듯 부르지도 않은 아랫배를 손으로 감싼 채 살금살금 걷고 있는 여래는 느렸다. 문득 이런 속도로는 여래는 내게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아이가 있는 한이라면 뛰기 어렵다. 아이가 배 속에 있든, 태어나 손을 잡고 있든 여래는 짐을 매달고 있는 셈이니 행동에는 제약이 가해진다. 그렇다면 아이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인 셈이다. 나는 잡은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 힘에 여래는 으음, 앓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 배출하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는 식탁 두 개 분만큼의 전등이 켜진 채였다. 하루 일을 마치고 믹스 커피며 과일을 놓고 수다를 떨던 직원들이 우리의 기척에 부스럭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위생모를 쓰고 있던 식당의 아주머니가 내게 물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어요?”

“아뇨, 이걸 버리려고.”

돈보다 먹을 걸 버리는 걸 죄악시하는 오십 대 초반의 여성이 탄식한다.

“아유, 아까워라.”

“떨어뜨려서요.”

“어쩌다가. 조심 좀 하지. 이리 주고 가요.”

“감사합니다.”

“아까 보니까 이쪽 학생은 접시에 손도 못 대던데. 뭐라도 좀 챙겨줄까요?”

“아뇨….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학생이라는 호칭에 여래는 귀를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여래는 학생이라고 불릴 때마다 늘 그런 반응이다. 획득하지 못한 사회적인 신분을 훔친 기분이 들어서 멋쩍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런 고결한 여래가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이 언니나 사장님이라고 불리는 사회 전반의 기만적인 호칭 체계에는 어떻게 적응했는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어물어물한 여래에 아주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팔을 조심성 없이 잡아 품평했다.

“아유, 바싹 마른 거 좀 봐. 잘 챙겨 먹어야지 안 그러면 늙어 고생이야.”

“요새는 남자애들도 그 뭐냐 연예인들처럼 비쩍 마르고 싶어 한다는데 그런 건가?”

“모르지.”

“아, 아닌데. 원래는 잘 먹어요. 오늘은 좀 속이 불편해서….”

대답이 곤궁한 여래 대신 내가 나선다.

“아이를 가져서.”

“네?”

“임신했기 때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입덧하고 있어서 그래요.”

아주머니와 여래가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냐는 표정들이었다. 아이, 임신, 입덧. 세 번이나 고쳐 말했는데 아직도 이해하기가 어려울까? 나는 다시 한 번 되풀이해 강조한다.

“아이를 가져서 임신 초기 입덧 때문에 오늘 저녁을 잘 먹질 못했어요. 평소에는 고기도, 밥도 잘 먹어요.”

“야… 야…!”

“그러니까 걱정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영양에 대해서는 제가 보살피고 있어요.”

여래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숨기지도 못하고 당혹해 내 소매를 끌었다. 식탁에 앉아있던 초로의 기사는 마시던 커피를 고스란히 컵에 뱉었다. 단란하던 분위기를 망친 우리를 좌중은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혹시 동치미 남는 게 있다면 받아 가고 싶은데요.”

“아… 그… 그래요.”

“그것만은 잘 먹었습니다. 두 그릇이나.”

위생모를 쓴 아주머니는 개수대에 올려져 있던 고구마 껍질 색깔의 용기를 탁탁 털어 물기를 없애고 그 안을 키친타월로 다시 닦았다. 국자를 들고 무청 줄기와 배를 옮겨 담은 후 통을 통째로 들어 국물을 부었다. 비닐 한 장을 덮은 후 뚜껑을 꼭 닫은 다음 겉면에 흐른 게 없는지 둘러본 후 쇼핑백에 담아 내민다. 아주머니는 장하다는 표정과 이상스럽다는 표정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지도 못하고 여래를 본다. 그동안 여래는 당근처럼 익어있었다. 대신 쇼핑백을 받아들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건물은 중앙의 공간을 비워 두고 둘러싼 모양으로 지어져 있다. 위에서 보면 미음(ㅁ)자 형태의 네 개의 건물은 코너를 끼우고 연결되어 있으며 네 부분의 건물이 모두 합쳐 하나의 동이 된다. 가운데 비워진 공간은 각 동의 구성원들이 좋을 대로 꾸며지나 대부분 방치된 채 듬성듬성 자란 잡초밭이거나 흡연 공간이 되기 일쑤였다. 내려앉은 눈으로 정원의 의자는 삭아 떨어져 나간 모서리에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손으로 대충 눈을 훑어 치우고 내 옷을 벗어 그 위에 놓았다. 여래가 닭살돋는, 이라고 칭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여래는 평소답지 않게 거절의 말도 없이 벤치 위에 깔린 옷에 가만히 앉았다. 아마도 아이 때문이리라고 합리적인 유추를 한다.

여래는 쇼핑백을 넘겨다보며 군침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내게 버럭, 성질이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거짓말도 아닌데.”

“하… 하지만 좀 그렇잖아.”

“부끄럽거나 싫어졌어?”

여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밤은 춥다. 그가 입은 옷의 깃을 세워 바람을 막아주고 바싹 달라붙어 체온을 나눈다. 속삭인다.

“그렇다면 없애도 좋아.”

“뭐….”

“네가 원하는 대로 해.”

“….”

“아기 말이야.”

아이라는 추를 겨우 매달았다 좋아했는데 아깝게 됐지만 여래가 싫다면 나도 싫다. 그런 넓은 도량으로 보인 게 자랑스러워 가슴을 펴고 그를 올려다본다. 그러나… 여래는 기쁘지 않다. 슬픔으로 빚은 눈동자에 내가 어린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겠다는데 어째서 눈물이 젖어드는지, 나는 궁금했다. 여래의 입이 희박한 공기를 찾듯 뻐끔거렸으나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끝끝내 문장이 되지 못한다.

“그런 일은 없어.”

“어떤 일?”

“아이도… 너도….”

“….”

“아무것도 그만두지 않아.”

“어째서?”

여래는 희게 웃었다.

“사랑하니까.”

고작 육 주 남짓 정도의 세포 분열 중인 덩어리와 육 년도 넘게 아는 사이인 나는 동일 선상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불만이었으나 화는 내지 않는다. 그가 입에 올린 사랑, 이란 단어가 나를 벌거숭이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일어난 여래는 내 손을 잡아 나를 일으켰다. 들어가자는 신호였다.

그래. 겨울의 산책은 짧은 편이 좋다. 그에게도, 아이에게도. 추위는 건강을 해친다.

* * *

방 안. 여래는 종이컵에 담긴 동치미 국물을 입맛을 다시며 조금씩 마셨다. 연적을 기울여 벼루에 물을 붓듯 조심하는 태도에 속이 답답하다. 덥석덥석 잘 먹기만 한다면 허벅지 살이라도 잘라 주고 싶다. 하지만 비위가 약한 그가 그런 걸 먹을 리가 없으므로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여래는 종이컵 위로 달그림자같이 웃었다. 흔들리며 조용히.

“맛있어.”

“더 먹어. 무라도. 배라도.”

“그냥 이거면 돼.”

“국수라도, 같이 먹으면? 말아서. 주방에 가 볼 테니까.”

“밀가루 텁텁해서 싫어. 번거롭기도 하고. 피곤해. 이젠 가만히 있고 싶어.”

“….”

그는 왜 이런 힘든 임신을 애써 유지하려는 걸까. 벌써부터 좋은 아이는 아닌 배 속의 태아에게 불끈 화가 치민다. 나 역시도 착한 아이였던 적이 없었으므로 그런 부분에서 우리는 닮아있다. 나의 아이와 나는 당연히 닮을 것이다. 나의 아이니깐.

나의 아이. 작은 씨앗처럼 여래의 안에 심어진 아이가 움트는 소리를 들으려 그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물론 방금 마신 동치미가 꾸르륵거리며 장을 통과하는 멋없는 소리뿐이다. 그래도 들어본다. 무릎 위에 누운 셈이 된 나의 귀부터 뺨을 어루만지며 여래는 푸념했다.

“너는 늘 두들겨 맞느라 바쁘구나.”

“미안.”

“미안하다면 다음부터는 조심해.”

“미안해.”

“네가 다치면 나도 걱정이 돼. 그건 알지?”

“미안해.”

덮어두고 사과만 하는 내게 질렸는지 여래는 벽에 붙여 놓은 우주의 사진을 보며 흥얼댄다. 자장가같이 단조로운 리듬과 멜로디가 오늘의 여정과 고단함을 부드럽게 위무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너무 많은 유혹과 너무 많은 인내가 그 앞을 도사리고 있다. 그 속에서 촛불을 손으로 감싸고 풍랑의 사이를 걷는 듯한 여래가 위태롭다. 그를 좀 더 내게 잡아두지 않으면 곤란하다.

무영은 오늘은 갔지만 내일 또한 그럴지 알 수 없다. 보여주어야 한다. 잠재적인 경쟁자들이 아무리 군침을 삼켜도 나의 염색체의 절반이 여래의 것과 섞여 이 안에서 잉태되고 있다는 걸. 그것이 고정불변의 사실이라는 걸. 나는 몸을 일으켜 여래의 팔을 꽉 잡았다.

“각인을 하자.”

여래의 눈에는 그가 보고 있던 토성의 고리가 걸려 있다.

“뭐?”

“영원히 헤어지지 않도록.”

“어어?”

“절대 각인을.”

“갑자기….”

“이젠 아이가 생겼으니까.”

아이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나는 나쁘다.

“여래는 보통으로 사는 걸 좋아하지만, 오메가라는 낙인을 달고 사는 거 싫어하겠지만.”

“….”

“나와 계약을 하자.”

알파와 오메가에게 각인이란 서로에게 영원히 종속되는 계약이며 절차이다. 각인된 알파와 오메가는 다른 상대를 찾을 수 없다. 그에게만 발정하며 그에게만 귀속된다. 각인의 유효기간은 일방이 죽을 때까지다. 속눈썹이 생각에 잠기며 가라앉는 걸 초조하게 바라본다. 말할 수 있는 단어의 한계가 원망스럽다. 여래의 입술이 가만히 열린다.

“…좋아.”

여래가 고개를 끄덕이는 데도 믿을 수 없는 나는 메아리처럼 그의 답변을 반향反響했다.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아니, 아니… 네가 아니라고 하여도, 손목을 묶고 발목을 잘라서라도, 나는 너에게 표식을 남겼을 것이다. 정복욕과 지배욕이 날뛰는 사랑을 장미의 가시로 엮어 장식한 나의 구애를 그는 의심 없이 넘겨받았다. 너는 바보야… 너는 후회할 거야… 너는 울지도 몰라…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다. 비탈길에 굴러떨어져 파멸을 맞이해도 우리는 하나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춘다. 옷을 벗긴다. 젖꼭지를 애무하고 성기를 빤다. 시들지 않은 엉덩이와 말라붙은 허리의 선을 동시에 움켜쥐었다. 나의 수줍은 연인에게… 그의 연인은 오로지 한 명, 나뿐이었다.

여래의 유두와 유륜의 색은 짙게 변색되어 있었다. 아마도 임신 후 호르몬의 영향인 듯했다. 가슴 주변의 감각은 민감하고 더 부드러워져 있어 만질 때마다 덩달아 여래의 허리가 비틀렸다. 작은 열매 같은 젖꼭지를 검지와 엄지로 집어 볶은 땅콩의 껍질을 벗기듯 마주 모아 비비자 여래는 팔과 다리를 길게 늘이며 신음했다.

“아… 으읏!”

좀처럼 소리를 내지 않는 편인 여래가 오늘만은 다르다.

낭창하게 휘감겨 오는 몸을 끌어안은 그대로 엉덩이만을 움직여 왕복으로 운동했다. 기대치 이상의 쾌락에 여래는 원망 섞인 신음을 뱉으면서도 더 크게 다리를 벌려 나를 맞는다. 깊게 찌르는 남성에 맞추어 여래의 턱 끝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흔들리다 마침내 떨어졌다. 어느 때보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나에게 화답하듯 그 역시 진하게 아래를 빨아들인다. 쾌감의 끝에서 사정하자 넘쳐흐르는 정액이 허벅지 위로 탁하게 번져나갔다. 이미 절정은 막을 내렸어도 여래의 안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 뒤로 안은 채 그대로 팔을 죄어 그를 구속했다.

육체적인 접촉에 있어 산뜻한 편인 여래는 둘러싼 팔을 떼어내려 이리저리 몸을 뒤챘지만 오늘은 우리가 맞은 공식적인 초야이므로 놓아주지 않는다. 생의 대부분은 서로에게서 독립되어 있으므로 지금만이라도 완전한 하나가 되고 싶다. 나를 품은 채로 움직이느라 물렁해진 해면체를 넣은 그대로 주무르게 된 구멍이 본의 아니게 야하다.

살짝, 다시 발기한다. 당연히 여래는 항의한다.

“이…이! 야, 그만 못 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못 들은 척을 하자 기운이 빠져 있는 탓인지 더는 보채지 않고 스르르 잠든 여래가 순했다. 어제도 오늘도 함께 있었지만 반려로서의 여래는 내가 평생을 알아온 그와 질감이 다르다. 조금 더 무르고 분명 더 사랑스럽다.

밑바닥이 두껍고 넓은 접시에 담긴 따뜻한 음식처럼 안정감이 있어진 그를 관찰한다. 달라졌다면 알아야 하므로. 내가 모르는 그는 있을 수 없으므로. 무릎이나 갈비뼈같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부분을 문질러보다가 팔을 겹치며 어깨부터 손목까지를 죽, 하나의 선으로 이어서 본다. 그런데 어딘지 팔 부분의 피부의 색이 이상하다.

알지 못했던 반점이 있다. 혹시 어디에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싶어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휴대폰의 불을 밝혀 들여다본다.

“아아… 역시.”

여래의 손목 안쪽에는 희미한 푸른색의 긴 흔적이 돋아나 있었다. 그것은 가느다란 실타래의 모양으로 섬세한 실처럼 엉긴 줄기들은 몇 갈래로 흩어졌다 꼬이기를 반복했다. 줄기의 첨단에는 어린잎의 모습을 딴 물방울 같은 매듭이 두어 개 남짓 엉킨 채 매달려 있다. 덩굴손을 닮은 흔현痕現은 분명 각인으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기르는 동물과도 같은, 명백한 주인 있음의 목걸이다. 상대방 어느 한 편이 소멸할 때까지 이 표식은 지속된다.

팔을 뒤집어 확인하자 나에게도 같은 흔적은 피어나 있었다. 각인은 단지 맹세나 서약 같은 부질없는 말의 의식이 아니었다. 물리적인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다. 티슈를 뽑아 젖은 아래를 닦은 후 여래의 옆에 다시 누웠다. 부스럭거리는 침구의 소리가 거슬린 여래가 내게서 등지며 싫은 양을 한다. 그것이 서글퍼 응석을 부리듯 등을 끌어안자 잠결에도 내 손을 토닥이는 여래가 다정했다.

긴 술래잡기는 이제 끝이 난 걸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무리가 인사를 하며 헤어지는 저녁 풍경이 우리에게도 드디어 낯설지 않아진 걸까? 우리에게도 돌아갈 어딘가가 생긴 걸까?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장소가 되어주는 걸까?

그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며 숨을 들이켠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행복감은 슬픔과 마찬가지로 견디기가 힘들단 걸 나는 천천히 받아들인다.

* * *

다음 날.

어제 내린 눈이 길 위로 얇게 얼었다. 택배로 부칠 수 있는 옷가지를 뺀 나머지의 자질구레한 짐을 스포츠 백에 넣어 어깨에 멘 나를 매니저가 굳이 배웅하러 나왔다. 지급품인 센터의 영어 약자가 쓰인 바람막이 잠바를 입은 매니저는 급하게 뛰어나온 듯했다. 매니저는 팔을 손으로 비비며 소름을 쫓는다. 사무적이고 기능적인 그는 어제 난동으로 무영에게 맞아 새로이 부풀어 오른 내 뺨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못이 박히듯 곧장인 시선에 여래는 서둘러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내 팔을 풀러냈다. 그러고는 어쩔 줄을 모르고 손을 허벅지에 비볐다. 잘못을 들킨 양 불편하게 시선을 오가는 여래를 쳐다보던 매니저는 볼펜을 딸각거리더니 약관이 빼곡한 서류에 사인을 했다.

“잠자리가 편했을지 모르겠네요. 잘 주무셨나요, 주여래 씨.”

그는 배달 인수증 같은 서류를 우리에게 확인시킨 후 비닐 홀더에 넣어 전달했다. 여래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자 어색한 기운이 세 명 위에서 원을 그리며 빙빙 돈다. 의례적으로 통장 사본을 검토한 접견실에서의 십오 분을 제외하고 그와 여래는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산 중턱, 게다가 한겨울의 혹독하다 싶은 날씨에도 매니저는 미적지근하게 시간을 끌었다. 매사가 정확한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답지 않은 일은 또 있었다. 한숨을 내쉰 매니저는 내 손을 붙들어 여래에게 건네주었다.

“최준혁 씨를, 잘 부탁합니다. 아시겠지만 여러모로 손이 가는 타입입니다. 잘 데리고 다녀주세요.”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당치도 않다. 여래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나다. 여래는 그저 내게 기대고만 있으면 된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앞으로의 고민도 전부 내게 맡기면 된다. 매니저는 모르는 걸까?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의무인지를? 반려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응당 지불해야 하는 정당한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 역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딸의 더 나은 교육을 위해 휴일까지 반납하고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것 정도는 당연히 깨닫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매니저는 그 정도의 상식도 없는 사람이었나?

매니저의 말에 여래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최준혁 씨가 조금 특수한 상황인 건 아시죠. 힘든 일이 있을 겁니다. 경제적인 문제만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머리로는 알지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준혁 씨의 공감 능력은 매우 낮고 표정과 감정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는 손상되어 있죠. 일이 년 정도는 괜찮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다음은? 어떡할까요. 벽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 같지 않을까요? 아니면 영원히 평행선을 걷는 기분이거나?”

“….”

“생각하고 현실은 많이 달라요. 겁주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여래는 덤덤했다. 그의 인생에 멋대로 침범하고 예측 불가의 미래를 만들어 낸 나를 원망하지 않는 투로 여래는 입을 열었다.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데요, 뭐. 이때까지 제 생각대로 풀리는 것도 없었구요.”

여래의 열네 살쯤의 꿈은 회사원이었다. 학교에서 조사차 나눠 준 설문지에 그가 작성한 인생 계획을 훔쳐보아서 안다. 여래가 가지고 싶었던 건 그저 평범한 가정. 귀여운 부인과 그 두 배쯤 더 귀여운 아이와 출근해야 할 직장과 안온한 집이었다. 지금 그가 계획했던 것 중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창한 진로나 포부 같은 건 없었음에도 그랬다. 내가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제 여래의 영원한 짝은 뇌의 어딘가가 고장 난 채 굳어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 나이며, 심지어 임신을 하고 있는 건 그다. 우리의 집은 시장 골목이 끝나는 지점의 지어진 지 십이 년 된 아파트로 불안스럽게도 2년 만기 전세이다. 나는 아직 학생이고, 그는 직업이 없다. 학력도 신분도 어느 것 하나 미래를 보장해줄 만큼 단단하지 않다. 무섭도록 불안한 현실을 불러오는 배처럼 끌어안은 그가 농담으로라도 핑크빛 내일을 꿈꾼다고 말하지는 못하리라.

“견딜 만해서 같이 있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하세요.”

매니저는 여래를 아직도 내가 가진 푼돈을 노리는 그런 사람으로 의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다, 우리는 각인을 했다. 이제는 헤어질 수 없다. 무어라고 입을 열어 그가 가진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찰나, 여래는 다시 한 번 상냥하게 웃었다. 왜일까? 매니저가 가진 비호감의 감정을 그는 모르는 것일까? 낭비되는 그의 미소가 아깝다.

“끝까지 준혁이 걱정이시네요.”

“….”

“준혁이에게 그동안 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관리 학생을 지도하는 수준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여래는 군데군데 딱지와 멍을 얹은 나를 가리키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나마라도 멀쩡한 건 많이 도와주셔서인 걸 알아요. 나중에… 자리를 잡게 되면 다시 인사를 드리러 올게요. 꼭이요.”

“그러세요. 재방문 양식은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으시고요.”

“준혁아, 너도 인사드려야지.”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매니저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니 무슨 일이든지 간에 연락해 주세요. 센터원의 사후 케어는 매니저의 소관이니까요. 반드시 연락 주세요.”

매니저는 손을 흔들어 보이곤 건물로 곧장 들어가 버렸다. 아시다시피 그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에게는 여섯 시에 퇴근해서 돌아가야 할 집에 있었기에 나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도 나를 알고 나도 그를 안다. 길게는 인사하지 않는다. 다만 여래만이 자꾸 뒤를 돌아 매니저가 가는 길을 확인했다.

* * *

전셋집은 역에서 시장이 이어진 골목을 따라 주택가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다 보이는 일곱 동짜리 아파트였다. 여래는 물론이고 나 역시 짐이랄 게 없는 살림이었다. 여래는 이미 방을 빼 짐을 옮겨놓았지만 집은 대부분이 비워져 있었다. 옷가지와 세면도구가 전부인 우리의 상자들은 마치 일박 이일의 야유회라고 향하는 듯 가벼웠다.

휑뎅그렁하게 썰렁한 기운이 감도는 거실과 방은 누레진 벽지를 감추지 못했다. 도배만이라도 하고 싶냐고 묻자 여래는 고개를 저었다. 센터에서 고시원으로 고시원에서 짐을 정리해 다시 전셋집으로 이어지는 강행군에 피곤이 잔뜩 눌어붙은 눈을 비비는 여래에게서는 잠이 묻어나왔다.

“아까워, 2년 뒤에 살게 될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여래는 깨끗한 걸 좋아하니까.”

“청소하고 가구가 들어오면 나아질 거야.”

“그럴까.”

여래는 방금 배달이 와 먹음직스러운 김을 올리는 자장면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어떻게 창문을 닦을지를 고심하며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바쁜 여래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턱을 어깨에 문지른다. 여래가 내게 푹 파묻히지만 나 역시 그에게 깊게 기댄다.

“뭐 좀 먹어.”

“조금만 있다가.”

“먹어야 해. 그게 제일 바쁜 일이야.”

“일단은 네가 좀 떨어져야지 가능하지 않을까?”

“싫어.”

“너는 너무 달라붙어. 올라오는 버스에서도 내내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는 줄 알기나 해?”

“너무, 라는 부사는 어울리지 않아. 지금 전력으로 참고 있는데.”

“뭣?”

“섹스, 해서 질척질척하게 만들고 싶어. 쑤셔 넣고 흔들고 싶어. 엉덩이 만지고 싶고, 가슴도 주무르고 싶다. 그런 걸 전부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너무 달라붙어 있는 게 맞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참고 있어.”

“뭐라구….”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눈을 배반하기란 어렵지만 줄곧 불만이었기에 솔직하게 말한다.

“이럴 때 쓰는 거야, 너무, 라는 건. 너무 참고 있어. 너무너무 참고 있어. 어제 했지만 또 하고 싶어.”

“…그만 못 해?”

“어째서,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거야? 각인도 했는데”

“그거…ㄴ….”

“어젯밤은 너도 적극적이었고 나는 신선했어. 좋아, 그런 건….”

“진짜! 너! 입 좀 다물어!”

여래는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집어, 내게 던졌다. 피해봤지만 단무지는 이미 어깨에 붙은 후였다. 겨울옷이라 두 번은 더 입을 수 있었을 텐데 아깝다. 아직 세탁기를 들여놓지 않은 탓에 손으로 빨아야 하는데.

불만을 여래가 남긴 자장면을 먹으며 함께 삼킨다. 발그레해진 뺨을 하고 등을 돌린 그는 무릎을 모은 채 얼굴을 그 위에 올렸다. 희미하게 흐르는 페로몬이 주변을 감싸며 떨고 있다. 여래는 아직도 나의 이야기를 곱씹는 듯 뺨을 우물거렸다.

“혹시 너무 느껴서 그래? 그 날도 여래 몇 번이나 사정했….”

“다음번에는 자장면 그릇이 날아갈 거야. 입 다물어 너.”

험악해진 분위기에 바로 접시에 코를 박고 먹기 시작한다. 여래의 것까지 거의 이 인분을 채워 넣은 배가 많이 부르다. 먹고 싶지 않다며 배를 문지르는 여래가 수척했다.

“안 당겨. 이상하네.”

피곤한 탓인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일이 한 번에 있었다. 바닥을 닦은 안방에 여래를 밀어 넣었다.

“들어가 있어.”

방 두 개짜리 열아홉 평의 집은 손 볼 곳이 많았다. 기본적인 청소는 물론이거니와 보수할 데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싱크대의 수전이라든가 욕실의 샤워기 헤드라든가는 나중에 사서 교체한다 해도 당장의 검은 곰팡이가 핀 화장실과 베란다는 염소계열 세제로 닦아내야 했다.

아까 자장면을 먹을 때 깔았던 신문지에 락스를 적셔 붙이고 여래를 안방으로 몰았다. 비질을 하고 걸레로 대강 훔쳐놓은 안방 앞에서 머뭇거리며 신발을 벗은 것과는 달리 금방 자리에 누운 여래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몸이 좋지 않은 눈치였다. 독한 냄새는 아이와 그, 둘 다에게 나쁘다. 모체에게서 흡수된 영양소와 유해 물질은 태반을 통해 아기에게로 바로 전달된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다.

여래는 졸고 있으면 된다. 꾸벅꾸벅.

춥지만 창을 한껏 열어 냄새를 뺀다. 신문지를 떼어낼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 숫자를 천팔백까지 세고 있을 때였다. 안방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느리게 열렸다. 나중에 방청용 윤활유라도 뿌려야겠다. 해야 할 일의 리스트에 철물점 가기를 적어 놓으며 그에게 주의를 준다.

“아직 청소 안 끝났어.”

“준혁아….”

돌아본 그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머릿속의 프로세서가 전면 활동을 중지한다. 여래가 더듬거리며 아래를 가리키는 순간 나는 경악에 찬다.

“피 나와.”

여래가 비틀거렸다.

“어떡하지.”

여래가 매니저에게 말했다. 예상되는 일은 하나도 없더라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그에게 너무 가혹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래가 빨갛게 젖은 그대로 서 있는 그에게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마치 바지에 그대로 흘러내려 있는 듯 여래는 꼼짝도 못 하고 떨고 있었다. 말 그대로일 것이다. 아이는 빨간 세포의 덩어리에 불과할 테니까.

“…왜 그러지? 내가 뭘 잘못했지? 너무… 피곤했나? 돌아다녔나? 아님, 내가, 나 때문에.”

“병원에 가보자.”

“….”

“괜찮을 거야.”

임신 팔 주차까지의 초기 유산의 대부분은 수정된 염색체의 이상이다. 태어나지도 못할 만큼 연약한 개체를 출산 전에 도태시키는 자연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애매한 희망의 말을 한다.

“괜찮아.”

아이는 괜찮지 않을 것이다. 이미 흘러나와 버렸으므로 당연히. 괜찮은 것은 여래다. 앞으로도 그는 살아야 하므로. 어차피 살아나갈 것이므로. 아니다. 위로의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여래가 내게 기대서 울고 있으니 그래야 하는데… 내가 가진 사전에는 활용할 문장이 없다. 무력감에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여래는 내내 울었다.

락스 냄새가 밤새도록 코를 찌르며 풍겨왔다. 나 역시 잠이 들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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