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준혁 (7)
다음 날, 아침.
내가 슈퍼에 다녀오고 수도를 쓰며 기척으로 부스럭거려도 여래는 10시가 넘도록 일어나질 못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늦잠 중인 여래 대신 아침을 준비한다. 미역을 불리는 동안 사온 소고기를 참기름에 볶는다. 고기의 겉면을 눌러 단단하게 느껴질 때쯤 물을 붓고 불린 미역을 넣어 다시 한참을 끓인다. 간장을 반 수저쯤 넣고 모자란 맛은 소금으로 보충한다. 그것만을 하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중간중간 집게로 싱크 선반에 집어 놓은 핸드폰으로 요리법을 확인하며 한 꼬집, 같은 단어들을 검색하느라 느린 손이 더욱 느려졌다.
아직 냉장고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센터에서 받아온 동치미는 베란다에 내어놓은 채였다. 용기의 뚜껑을 열어보니 한겨울 날씨에 살얼음이 자박자박하다. 질게 지은 밥과 미역국, 도시락 김과 동치미를 박스를 뒤집어 만든 상에 올리고 여래를 깨웠다. 동치미를 한 입 떠 마신 수저가 그대로 멈춘다.
“어제만큼 맛있지가 않아.”
시고 시원한 국물을 맛있게 마셨던 건 그 애였다. 여래가 아니었다. 알았더라면 상에 올리지 않았을 텐데 나는 그걸 몰랐다. 여래는 다시금 그 애의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드문드문한 수저질 사이로 잠시 멈춤이 이어진다.
피부가 하얗고 때때로 서늘하리만치 생각에 잠겨 겨울이 어울리는 여래에게 의외로 두꺼운 겨울옷은 많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은 모두 길이가 어색스레 길어 그에게 맞지 않았기에 얇은 내의와 터틀넥과 플리스 잠바와 코트를 덧입혀 단단하게 무장시킨 후 집을 나선다. 제일 가까우면서도 규모가 큰 전문 병원까지는 버스로 여섯 정거장 정도였다. 걸어가다 가끔 멈춰 바지 뒤편을 확인하는 모습에 혹시 모를 출혈을 걱정하는 듯 어두운 표정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버스에 올라타 마침 하나 남은 자리를 보고 부르는 데도 동작이 빠르지가 못하다. 그가 앉은 옆에 서서 손잡이를 위와 아래로 잡는다. 여래는 손을 허벅지 아래 밀어 넣고 어깨를 오므린 채 창밖만을 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밖을 보고 나는 그런 그를 본다.
‘이럴 때 차가 있으면 좋겠지.’
앉을 자리를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대화의 내용이 아주 사적이고 큰 소리여도 되니까. 과자 부스러기를 흘린다거나 음료를 쏟아 좌석도 더럽혀도 괜찮으며 조느라고 정류장을 지나칠 걱정 따윈 안 해도 되니까. 사람들과 부대끼느라 굳어진 여래가 자동차 안에서라면 조금 더 편했을까? 혹시 무영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근사한 차와 여러 시설을 제멋대로 부릴 수 있는 무영이라면 말이다. 순간 얻어맞은 듯 턱, 숨이 막혔다.
집이라든가 차라든가 욕구해 본 적이 없는 나 스스로가 미안하다. 편의, 라는 게 대부분 그렇듯 없어도 살 수는 있으나 있으면 크게 생활을 향상시키기 때문이었다. 나는 주로 내 생각만 한다. 그를 편하게도 행복하게도 해주지 못한다. 그를 어떻게든 가지는 데는 성공했으나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에는 형편없다. 안내방송을 듣지 못한 나를 여래가 작게 건드리며 주의를 끌었다.
“다음이야.”
산부인과는 우리가 우리의 가난함을 맨살로 부딪힌 장소였다. 그곳에서 누구나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만 없었다. 아이라는 이름의 것이.
“소윤아, 이리로 와!”
“시러, 시러!”
“아유, 엄마 힘들어!”
산부인과의 대기실은 만원이었다. 아까의 버스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란 걸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앉을 자리조차 없이 사람들로 빼곡한 공간이 약간 후덥지근하다. 네다섯 살, 혹은 더 어린아이들이 아장거리며 소파 위를 밟고 지나갔다. 아이들의 울음과 동생을 가진 엄마들의 지친 고함과 누군가의 웃음과 졸림에 겨운 칭얼거림으로 북적대는 대기실에서 우리만이 녹아들지 못하고 붕 떠 있다. 화면 위에 띄워진 진료 순서의 리스트에는 좀처럼 여래의 이름은 올라오지 않았다. 아이를 가진 사람은 정말로 많았다. 우리만을 제외하고 모두 아이와 실랑이하고 부대끼고 있는 것 같았다.
따뜻하다 못해 더운 병원의 실내 온도에 여래는 약간 땀을 흘렸다. 겉옷을 대신 받아들고 겨우 난 자리 하나에 앉으라는 턱짓을 보내자 여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일종의, 소외감이 우리를 벽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우리는 벽 구석에 멀뚱하게 서 있으며 아이의 장난감이 굴러오거나 그걸 쫓아 아이가 달려올 때마다 화들짝 놀랐다.
점심이라도 근처에서 먹고 올까라고 말을 꺼냈을 때 제일 마지막으로 여래의 이름이 떴다. 화면에 이름을 올리고서도 그러고서도 사십 분 정도를 기다려서야 겨우, 의사의 진찰실로 안내된다. 어두운 방에는 인조가죽으로 만들어진 괴상한 의자가 놓여있었다.
“힘 빼시고요, 힘주면 아프니까. 숨 후, 내쉬고. 옳지.”
여래는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하의 탈의까지는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으나 길고 차가운 막대가 진료를 위해 아래를 밀고 들어오는 감각까지는 낯설고 어려운 모양이었다. 배 위에 깍지 껴 올린 손을 힘주어 잡으며 나는 검은색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이 방은 보호자 출입 금지였지만 어느 선생님을 원하세요, 라는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헤매는 우리 둘에 안내 데스크의 직원은 한숨을 내쉬며 메모를 해 전달해주었다. 어느 선생님을 원하느냐는 말은 학위나 경력, 기술이나 이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여자 선생님을 원하느냐, 남자 선생님을 원하느냐, 그것을 물어본 모양이었다.
남자도 여자도 싫어서 대답을 망설이는 나를 대신해 여래가 말했었다. 아무나 제일 빨리 진찰 가능한 분으로요, 라고. 이런 순간에마저 여래는 똑똑하고 유연하다.
달그락.
삽입했던 내시경 초음파가 빠져나가자 여래는 벌려진 다리가 춥다는 듯, 떨며 오므렸다.
“유산이네요, 엄마.”
배반적인 문장이었다. 유산의 순간에 엄마라는 호칭이라니. 이제 엄마라고 불러줄 아기는 이미 없어지고 난 후인데.
의사는 흑백의 화면을 보여주며 우리가 가졌던 의심과 기대를 송두리째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자세한 말씀은 조금 이따 드릴까요. 그럼.”
일회용 라텍스 장갑을 벗고 손소독제를 펌핑 한 의사가 진료실과 진찰실 벽 끝의 좁은 틈으로 넘어가자 간호사는 여래가 누운 의자를 버튼을 조작해 일으켰다.
“이제 나가셔서 잠시 기다리세요.”
여래는 탈의를 위해 간이로 쳐진 커튼 뒤에서 티슈를 뽑아 아래에 묻은 젤을 닦고 다시 바지를 입었다. 오랜 대기에 이은 생경한 진료과정에 진이 다 빠진 모양인지 던진 티슈는 쓰레기통에 골인하지 못했다. 대신 주워 쓰레기통에 넣고 밖으로 나오자 토요일 오후 마감이 멀지 않은 시각에 이제 아이들과 진짜 엄마들이 벌여 놓았던 소란은 자취 없이 사라져 있었다. 여래는 터틀넥을 올려 그 안에 턱을 묻었다.
달칵.
문을 열자 의사는 차트를 들여다보던 눈을 들어 우리를 맞았다. 손을 뻗어 책상 앞의 의자를 가리키고 앉을 때까지 기다린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다르다. 단도직입적이다.
“초산인가요, 경산인가요. 아, 이번이 초산이시네. 음.”
“네?”
“출산 경험이 있으시냐고요.”
“없습니다.”
여래에게는 특수한 장치라도 달렸나 보다. 아기, 출산, 임신 등의 키워드만 입력되면 얼굴이 파드득거리며 놀라기 일쑤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요. 그럼, 많이 속상하셨겠네. 당황도 되시고, 그죠?”
“….”
“기다렸던 애기면 더 힘들 거예요. 하긴 기다렸건 아니건 힘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안 했으면 좋을 경험이지만 아주 없는 일은 아니니까요.”
“뭐 때문에… 왜 그랬을까요. 선생님.”
“에구구… 이유는 딱히 없어요. 그냥 그 애가 너무 약했던 거예요. 초기 유산의 대부분은 이유가 불명이에요.”
“제가 나빠서요? 제가… 제가 모자라서요? 제가, 이렇게 이상하니까. 보통 경우가 아니니까.”
설마, 그가 나쁘다니. 어째서? 뭐라고 대꾸하려는 나보다 의사가 빠르다.
“아이고. 엄마, 엄마. 엄마 탓이 아니에요.”
의사는 웃지 않고 곧장 말한다. 여래가 진지한 만큼 어중간한 미소 따위로 그를 위로할 수 없단 걸 아는 모양이었다.
“호칭 어색하시겠지만 제가 엄마라고 부르는 게 익숙하니까, 계속 그렇게 부를게요. 한번 유산되고 나면 이 부위 깨끗해져서 오히려 착상이 잘 될 수도 있고요. 아직 엄마 아빠 젊으니까 기운 내서 다시 아기 맞을 준비하세요.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맘 편하게 가지시고 운동하시고. 엽산 챙겨 드시고. 다 알죠?”
“아뇨….”
“그럼 출산 준비 교실 같은데 부지런히 따라다니세요. 저희 병원에서도 목요일 오전에 강좌가 있으니까 이용해 보시고요.”
“감사합니다.”
나가려고 일어서는 나를 향해 의사가 한 마디 덧붙인다.
“아빠, 아빠도 엄마 힘드니까 신경 많이 써주고요?”
“어떻게.”
“음?”
물음표 없는 질문에 눈썹 산이 치켜 올라가며 나를 본다. 이해 없는 시선에 당황해 더듬는다. 너무 짧게 이야기했다.
“저, 저는 잘 모르니까. 어떻게… 어떻게 해 줘야 할지 알려주시면.”
“그저 마음 편한 게 최고예요. 그렇게 해주세요. 엄마는 아빠가 제일 잘 알잖아요?”
의사는 그제야 싱긋, 웃는다.
그렇구나. 그래. 어떻게 그것을 모를 수 있었는지. 여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다. 여래에게는 내가 있어야 한다.
여래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이제 여래도 내가 필요하다.
밖에서 외식이라도 할까 싶어 초원가든이니, 한식뷔페니 하는 음식점 앞을 빠르게 지나가지 못하는 나를 보고 여래가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피가 나왔으니 뭔가 보충해야 할 것 같은데, 라고 말하자 그럼 떡볶이에 순대라도 먹자며 사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여래는 씩씩하게 간이며 매운 떡을 열심히 먹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채워진 것이 허기가 아니라 아기가 떠난 자리인 듯, 여래는 기운을 차렸다.
* * *
연말이 가까워 오는 분위기에 거리에는 화려한 장식이 내걸렸다. 병원에 다녀온 후 집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컴퓨터로 재생해 놓은 라디오 어플에서는 그맘때쯤이면 공기처럼 익숙한 캐럴이 흘러나왔다. 소파가 없었기에 랩톱 컴퓨터를 허벅지에 올리고 등을 벽에 기댄 내 앞으로 여래가 무릎을 꿇으며 눈을 맞춘다.
“초밥, 초밥을 먹어야겠어.”
“초밥.”
무슨 맥락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검색 창에 타이핑한다.
“육회도.”
“육회.”
검색어가 추가된다.
“초밥이랑 육회, 갈비 뜯고, 콜라도 잔뜩 마시고. 방탕하게!”
길어지는 주문에 쓰고 있던 안경을 올리며 다시 보자 여래는 녹을 듯한 미소를 지으며 졸랐다.
“선생님이 내 기분 맞춰주라고 했잖아. 사 줘. 먹고 싶어.”
“응.”
“그리고 좋은 데로 가자.”
“좋은 데?”
“아주아주 비싼 데로.”
“비싼 데.”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호텔 체인인 뷔페의 이름이 화면의 상단에서 굵은 글씨를 뽐내며 손을 들어 보인다. 여래가 어리광부리는 희귀한 상황에 예산이니 어쩌니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금액 같은 부분은 전혀 무시하고 장소를 선정한다. 주소를 외우고 교통편을 익힌다. 그 사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던 작은 주전자에서는 보리차가 김을 내며 끓어 여래는 불을 줄였다.
칙칙.
“우와… 크다.”
무슨 바람에서인지 접시를 연거푸 바꿔가며 음식을 입 안에 쓸어 넣는 여래에 덩달아 속도를 맞춰나갔더니 뷔페에서 나올 때 우리는 명치끝까지 차도록 실컷 먹은 후였다. 양고기는 질겼고 달팽이는 짜서 익숙한 연어 초밥과 LA갈비, 우동만을 먹고 있는 나를 보고 여래가 쯧쯧, 혀를 찼다. 가득 찬 배 때문에 뒤뚱거리면서 느리게 걷던 우리는 호텔의 로비에 꾸며진 커다란 트리 앞에 멈춰 꼭짓점인 위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짙은 초록색의 트리는 금색과 은색의 술과 빨강과 초록의 공, 그리고 노란색 메모지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트리 왼쪽 앞에 마련된 테이블에는 내년의 소원을 적어 매달아 놓는 이벤트가 진행 중으로 몇몇의 커플과 가족이 멈춰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건강, 취업, 합격, 연애 같은 일들이 노란색 메모지 위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연말은 연말이었다.
“떨어질 거 같네….”
아슬아슬하게 가지 끝에 매달린 하프를 든 아기천사를 고쳐 다시 건 여래는 잠깐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작은 천사는 그대로 날아갈 듯 흔들리며 높은 시선을 천상天上으로 향했다. 컨시어지에서 울리는 전화벨과 구두가 바닥에 부딪히며 걷는 걸음걸이, 톤이 높은 대화들 속에서 여래는 아이를 떠올리고 있다. 나는 그 생각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느낀다.
영혼이란 게 있단 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 아이가 죽어 어둠을 헤매고 있다는 가능성을 주는 영혼이란 것은. 그러므로 인간은 유기적 신체가 사라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편이 차라리 좋다. 그 후도, 나중도 없는 세계는 차가워도 슬픔은 없다. 차가움은 피부의 감각일 뿐이다. 옷을 껴입으면 사라지는 감각.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마음의 아픔인 슬픔보다는 처리하기 쉬운 불편이다. 그래, 그러니까 그편이 좋다.
“여래야.”
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전에 나는 서둘러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
“맨날 이런 데서 외식하고 싶단 소원.”
여래는 혀를 빼꼼, 내밀며 웃었다. 가짜인 대답이지만 내가 아는 거짓 중에 가장 예쁘다. 나도 나름의 농담을 해 본다.
“노력할게.”
“거짓말이야 바보야. 너무 비싸. 분기에 한 번이면 돼. 아니, 일 년에 한 번.”
“자주 오자.”
“아니라니깐. 됐고. 넌 무슨 소원 빌었는데, 준혁아?”
“비밀.”
기가 차서 나를 보는 여래의 어깨를 당기며 앞으로 이끈다. 시간은 이미 충분히 늦어 있었다.
“어….”
그러나 우리는 바로 로비를 빠져나갈 수 없다. 뒤를 돌자 영하의 날씨에도 짧은 치마를 입은, 추위를 모르는 강인한 여자와 팔짱을 낀 무영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풍경은 페이드 아웃되고 무영이 보는 시선만이 강렬하게 조망된다. 각자가 짝을 이뤘는데도 마주 본 네 명은 각자 엇갈리며 삐거덕거렸다. 먼저 입을 연 건 무영이었다.
“안녕.”
“….”
“기분 내러 왔나 보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인사에 무영 옆의 여자만이 우리와 그를 번갈아 본다. 밝은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은 짧았다. 목이 길고 피부가 하얗다. 맡은 페로몬에서 그녀가 열성 오메가임을 알았다. 우성만을 상대하는 무영의 고상한 취향이 바뀌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민주주의가 좋긴 좋네. 돈만 있으면 이렇게 차별이 없다니까. 이런 데도 다 들여보내주고.”
“준혁아, 가자.”
여래는 내 팔을 붙들었다. 그러나 무영의 높은 목소리에 우리는 멀리 가지 못한다.
“그래서, 소원도 빌었어? 무슨 소원 빌었어? 세계평화? 국가통일? 민족화합? 되게 멋있는 뭔가지? 그치?”
“가겠습니다.”
“아… 돈으로도 못 산다는 아기는 이미 생겼으니 패스고.”
예의상으로 서 있을 만한 시간은 이미 지났다. 한 손으로 새로 사 입힌 여래의 겨울용 오리털 잠바의 깃을 정리한다. 잠바는 빨간색이고 아주 두툼하다. 옷에 완전히 파묻힌 그를 확인하자 이제 나갈 준비는 끝이다. 밖은 아주 춥고, 우리는 굉장히 많이 먹었으므로 몸이 따뜻하지 않으면 체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래서는 여래의 말마따나 너무 아깝다. 지나치는 나를 막아서는 무영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길게 말다툼하고 싶지 않다.
“비켜.”
“이제 센터 나왔다고 완전, 막 나가네?”
“비켜달라고 부탁하고 있어.”
“주여래, 애는 잘 커?”
여래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무영은 한층 더 분한 듯 악을 썼다.
“내가 묻잖아!”
아이는 이제 없다.
유산했어. 죽었어. 사라졌어, 기타 등등. 어떻게도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 아이에 관련한 답변의 목록 중에서 나는 겨우 한 마디만을 고른다.
“아기는… 잃어버렸어.”
그 말에 어리둥절해진 건 무영뿐만이 아니었다. 무영의 팔을 흔들던 여자도 조르는 걸 멈춘다. 여래는 멍하게 나를 올려다본다.
“무슨 개소리야. 태어나지도 않은 애를 왜 잃어….”
여래의 낌새에 무영의 표정 역시 서서히 깨어나다가 굳어져버린다. 눈치 빠른 여자가 짧게 입 안에서 혀를 찼다. 민망하고도 슬픈 순간이었다.
“너희 설마.”
“우리는 꼭 다시 찾을 거야. 그 애를.”
나는 신도 지옥도 천국도 영혼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경험해 보지도 못했고, 직관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인간은 단백질이 혼합된 유기체인 편이 깔끔한 결론이어서다. 육체의 소멸은 정신의 종말과도 같으며 죽음은 끝 이상의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 더 간명하고 날렵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너머의 세계가 있고 내가 아직 그것을 탐구하지 못한 것뿐이라면…
‘그 애를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그래, 나는 그 애를 다시 만나고 싶다. 다시 찾겠다. 여래에게도 말하지 못한 트리 앞에서의 소원과도 같이. 소란에 놀란 천사가 다시금 여래의 뒤에서 흔들렸다. 나는 매듭을 고쳐 단단하게 가지 위에 매달았다. 이제 안심이다. 천사는 영원히 그곳에 머무를 것이다.
* * *
“눈이네….”
여래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 하늘에서는 점점이 흰 눈이 뿌려지고 있었다. 싸라기처럼 나리던 눈발은 곧 크기를 더하며 여래의 머리 위로 흩어졌다. 약간의 곱슬기를 가진 머리카락은 눈썹까지 올 정도로 길어 이마를 덮었다. 그 아래로 지난 며칠간의 마음고생으로 뚜렷하게 깊어진 쌍꺼풀이 뜨였다 감긴다. 가끔 아래를 내려다볼 때 겹치는 속눈썹이 짙고 어두웠다. 생각에 잠긴 도톰한 입술이 움튼 봉우리처럼 조금 벌어져 나긋하게 휘어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간 눈 망막의 원추세포와 간상세포의 수는 대략 1조 3천억 개. 이들이 임의의 한순간에 처리하는 데이터는 무려 1조 비트에 달한다. 물론 시각피질에 도달하여 유의미한 기억으로 기록되는 정보는 일부에 불과해 허무할 정도지만 그래도 나는 본다. 아니, 선택 이전에 필연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방대한 양의 ‘그’라는 정보가 내게 밀려들어 오는 순간이 나는 좋다. 시설에서부터 센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와 나 사이에 자리한 수많은 결절들을 메꾸는 방법은 그를 보는 법뿐이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여래의 옆모습을 흘끔대며 걷는데 갑자기 걸음이 멈춘다. 눈이 내리는 겨울, 하얗게 얼어붙은 남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준혁아.”
박제해버리고 순간, 시간과 에너지의 물리적인 흐름은 속눈썹에 올라앉은 눈송이가 그대로 녹아버리는 것으로만 감각된다.
“다른 누군가를 좋아해보도록 해봐. 이렇게 나 한 명만 좋아하는 건 정신 건강상 좋지 않아.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뭣하지만.”
내가 걸음을 멈추자 깍지를 끼고 있던 여래가 덩달아 나의 인력에 붙잡혀 멈춘다. 왜인지를 묻는 의아한 표정에 부연 설명이 따른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교류를 하고 인간관계를 넓히는 그런 거 있잖아. 친구도 사귀고, 후배나 선배나, 매니저 같은 어른도 만나보고 그래 봐.”
알 수 없었다. 다른 누군가? 누구? 누구를 사랑해야 하지? 인간은 넘쳐나고 있다.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거기에서 사랑해야 할 누군가를 발견한 적은 단 한 번, 너뿐이었다.
“왜 그래?”
인적이 드문 길의 벽에 그를 밀어붙이고 팔로 막아 가둔다. 멈칫거리며 올려다보던 여래가 가라앉는 눈송이처럼 살그머니 눈을 감았다. 오랜만의 입맞춤이었다. 아이가 가고 나서 신체적인 접촉이 어색해지고 여래 몸 상태가 걱정스러워 하지 않았던 게 삼 주를 넘었다. 탐욕스럽게 입술을 맛보고 혀를 문질러댄다.
침이 섞이다 넘쳐 입가에 번져갈 무렵 겨우 떨어져 나왔다. 정욕과 당혹이 섞여 불그스름해진 눈가를 한 채 여래는 나를 올려다본다.
“내 아이를 낳아. 그러면 그 애를 사랑하지.”
“준혁아.”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대로 된다. 사랑할 누군가가 다시 생기니까.”
“너는 정말이지….”
여래는 내 가슴을 밀어내며 앞서 나갔다. 얼른 뒤따라가 손을 잡는다. 이리저리 빼돌리려는 손을 강하게 잡아 다시 내 주머니에 넣고 걸어간다. 행복하다. 하지만 지금의 이 행복에는 엄마가 시설에 나를 데려다주기 전 사주었던 햄버거와 소프트아이스크림의 맛이라던가, 여래가 떠나기 전 몰래 건네주던 주먹밥의 맛이 났다.
가슴이 미어지게 행복한 순간 다음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행의 맛이 말이다.
새해와 구정을 넘기며 겨울방학은 지나갔다. 여래와 나에게 찾아갈 고향이나 부모는 없었으므로 우리는 명절과 연휴를 대비하여 먹을거리를 잔뜩 마트에서 산 다음 내도록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여래가 영화를 다운 받는 동안 나는 소시지와 자투리 채소를 찾아 냉장고를 뒤졌다.
팬에 기름을 두른 후 소시지와 채소를 볶아 내고, 김이 가시기 전 치즈를 올린 후 전자레인지에 1분 정도 돌리면 완성이다. 하는 일에 비해 지나치게 웅장하다 싶은 전자레인지의 소리를 가만히 감상하고 있노라면 여래가 손을 들어 나를 재촉했다. 이불 옆에 간식 접시를 놓고 비워진 자리에 앉았더니 여래는 배를 깔고 엎드린 채로 움직여 내 무릎에 머리를 올렸다.
“하하하하….”
웃고 있는 여래와는 달리 나는 줄거리의 대부분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배우들의 연기를 파악하기도 전에 장면은 전환되어 다음의 시퀀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여래의 머리를 받힌 다리마저 저려와 집중을 방해했다. 하지만 잠자코 있었다. 삼십 초에서 일분 단위로 분절되는 시간의 흐름에서 여래가 가끔 웃고 깊이 공감하는 시시각각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쩔쩔매는 나를 보고 미안해하며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 또한.
그렇게 영화를 열 몇 편을 보는 동안 연휴는 덧없이 흘러갔다.
그동안 둘 다 이 키로가 넘게 살이 쪘다. 여래는 정상 체중의 범위에 한참을 못 미치는 몸무게였으므로 연휴 동안 붙은 살집이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을 하면 여래는 입맛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젓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식탁에 내려놓기 일쑤였다.
“차라리 그만 먹으라고 해. 돌려 말하지 말고.”
딱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종일 여래와 보내는 시간은 놀랍도록 지겹지 않았다. 나는 가끔 학교에 나가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사격 훈련에만 참가했다. 기초 체력이 필요한 종목은 아니었기에 합숙이나 기타 별도의 소집은 없었다, 라고 여래에게 말한 건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땡땡이였다.
겨울 전지훈련, 이라는 명목의 술자리에 집을 비우고 싶지 않아서 전달받은 공문을 무시했다. 여래는 학사 일정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대충 둘러댄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빈둥거리며 뒤만 졸졸 따르는 게 전부인 나에게 공부는 하지 않느냐며 한심해하는 여래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래와 나는 줄곧 집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가끔 외출을 하기도 했다. 우리 집, 아, 기분이 이상하다 우리 집이라니. 여래와 나를 같은 항목으로 분류하는 집합 명사가 생기다니. 아무튼 간에 우리는 우리 집을 채워 넣을 물건을 사기 위해서 가끔 외출을 해야 했다. 여래와 내가 소유한 가장 비싼 물건은 침대였다. 별다르게 야한 의도에서는 아니고 충동구매를 해서다. 여래가 목재소에서나 고시원에서나 늘 불편하게 몸을 구기고 잤던 게 마음에 걸려 침대만큼은 비싸고 그 가격이 품질의 훌륭함을 보증하는 물건으로 고르고 싶었던 이유도 있긴 했다.
가구점에서 직원의 설명에 건성으로 끄덕거리며 이 침대 저 침대를 눌러보는 나와는 달리 여래는 커버를 쓰고, 베개를 놓고, 쿠션으로 꾸며진 디스플레이용 침대에 한 번 누워본 게 고작이었다. 직원의 파상 공세를 등진 채 가격과 사양을 비교하는 내가 한참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여래가 조용했다. 주변을 지나는 한 쌍의 모녀가 그런 침대 위를 갸웃거리며 들여다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저 사람 잠 들었나봐, 엄마….”
“귀엽다, 야.”
뭐라고? 아연해서 직원의 말을 끊을 새도 없이 달려갔다. 태평한 건지 무방비한 건지 여래는 아까 눌러본 침대 위에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침대 하단, 신발용 커버 위에 올린 발이 나란했다. 흔들어 깨우자 배를 덮은 이불을 끌어당긴 여래가 그 안으로 파고들며 투정을 부렸다.
“아, 대충 해에.”
“일어나. 이런 데서 잠이 들면 안 돼. 어떤 모델을 고를지 결정도 해야 하는데….”
“아무거나 사. 아무거나 사라구….”
“그래도 비교해보지 않으면 안 돼. 제대로 앉아 있어. 일어나.”
“다 좋아 보이는데 뭐얼. 고를 때까지 깨우지 마. 으하아암.”
결국 여래가 그대로 삼십 분을 더 자는 사이 나는 내게 달라붙어 있던 매장의 직원과 급하게 계약서를 쓰고 사본을 전달받았다. 계약한 모델은 물론 여래가 내내 잠들어 독차지하고 있었던 그 침대였다. 여래를 단숨에 꼬박꼬박 졸게 만들 만큼 보드랍고 푹신하며, 안락 그 자체인 모델은 유감스럽게도 아주 비쌌다. 가장 최신의 고급 사양의 침대는 대기조차 길어서 일주일 뒤에야 겨우 배송 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통장의 잔고는 마치 누가 훔쳐가기라도 한 듯 사라졌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누워 뒹구는 여래의 행복한 얼굴은 내내 충분한 보상이 되었기에 아깝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센터에 소속된 실험체로서 더 이상의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이상 절약해야 할 때이긴 했다. 아이가 생기면 지금의 소비에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빠르게 숫자를 계산하고 랩톱을 닫았다. 지금은 골치 아픈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장학금 지급 말소의 건.]
그러나 골치 아픈 일은 통장의 잔고 하나만이 아니었다. 학교로부터 문자를 받은 것은 내가 창가에 서 있던 바로 그 때였다. 이미 수여가 확정되었던 장학금의 지급이 반려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말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것이 오후의 강렬한 햇볕에 반사된 휴대폰의 화면 때문인지 아니면 내용의 황당무계함 때문인지 헷갈렸다. 도착한 메시지를 들여다보느라 거실 한가운데에 우뚝 선 나를 방에서 나온 여래가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얼른 휴대폰을 꺼서 주머니에 넣으며 얼버무렸다. 다시 입을 다문 채 커튼을 사다 달을 거실창의 길이를 재는 나를 보고 여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주방으로 가 물을 따라 마셨다. 엽산과 종합영양제도 함께였다. 한 번 아기가 떠난 후 여래는 성실하게 임신을 준비했다. 가려지지 않은 창문 너머로 햇살이 눈부셨다. 빨리 커튼을 사서 달아야겠다 싶다. 동 사이의 간격이 좁은 아파트는 창문으로 옆의 동이 훤히 보였다. 그 때문에 밤이라 슬며시 다가앉는 나를 여래가 밀치는 게 예사인 요즘이라 더 안달이 났다. 그러나 동시에 방금 받은 문자에 대한 문의도 해야 했다. 학교와 커튼. 커튼과 학교. 어떡할까.
고민하다 치수를 메모한 종이를 들고 어색한 연기를 시도했다. 그 때까지 보아왔던 영화들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건 비밀이다.
“커튼 사러 나가면서 잠깐 학교에 들러야 할 거 같아.”
“왜?”
“보…. 볼일이 있어. 행정적으로.”
“행정?”
여래는 다행하게도 무슨 볼일이냐며 캐묻지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자기가 간섭할 수 없는 세계가 있으려니 한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그는 대학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자존심을 상해하는 데가 있었다. 관련된 화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도 그냥 묻어두고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여래는 챙기려던 겉옷을 식탁 의자에 다시 걸었다. 오늘은 외출을 해서 저녁을 사 먹기로 했었다. 메뉴는 피자였다.
“여래는 집에 있어. 혼자 다녀올게.”
“커튼 봉 혼자 들고 오기에 무겁지 않겠어?”
“괜찮아. 그리고 피자는 내가 가는 길에 사 올 테니까. 학교까지 너무 멀어. 피곤할 거야.”
“그럼 그러든지.”
여래는 순순히 포기해주었다. 그의 약점을 자극했단 데에 양심의 가책이 들었으나, 장학금 거절에 대해 알게 해 걱정을 전염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여래가 이런 일들로 골머리 앓길 원하지 않는다. 사소하고 실무적인 일들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 여래는 그냥 침대 위에서 뒹굴면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지하철을 타고 방학 중인 학교를 찾는다. 한산한 교정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사람도 차도 적었다. 이런 분위기는 싫어하지 않는다. 번잡스러운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계절학기를 수강하는 학생마저 빠져나가 한가로움의 극치로 가장 큰 고민이란 점심 후 마실 차의 종류에 불과했던 교직원들에게 나의 등장은 재난과도 가까웠다.
“아유, 그건 제 소관 업무가 아닌데…. 어쩌지….”
“그럼 담당자분을.”
“어쩌지. 아이, 참. 자리에 안 계신데.”
“언제 돌아오시는지 알려주세요.”
“그, 그게. 외근이라.”
“현황판이 비어있는데 어디서 이름을 찾으면 될까요.”
학사 지원실의 상담 교직원은 난처하게 서류를 뒤적였다. 사무실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다 싶게 난방을 하고 있었다. 초여름처럼 땀이 그녀의 귀밑머리를 타고 맺혔다. 과장해서 거듭 말하며 부산스럽게 같은 서류를 뒤적이는 태도에서 그녀가 바로 그 담당자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장학금 지급 거절의 사유와 회복 방법의 문의 어디에서도 사적인 괴롭힘으로 여겨질 만한 구석은 없었다. 그녀가 이토록 당황하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기 학생, 언제까지 거기 그러고 있으려구요.”
“시간 내기가 어려우니 온 김에 뵙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휴, 어쩌지. 나도 잘 모르는데.”
그녀는 입버릇처럼 어쩌지를 중얼거리며 끝까지 어찌 된 영문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대치가 소파에 앉은 나와 책상 너머로 앉은 그녀 사이에서 이어졌다. 결국 진 건 나였다. 시계가 4시에 가까워오자 그녀에게 나의 연락처를 메모해 주길 부탁하고 나왔다. 소득이 없는 하루에 지하철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동네로 돌아와 잡화점에 들러 커튼 봉을 사고 피자를 포장 주문했다, 슈퍼 슈프림 라지 사이즈, 치즈 크러스트와 디핑 소스 추가, 콜라 큰 거까지 포함하니 짐이 많기는 하다. 평소에는 걷지만 양손이 무거워 마을버스를 탄다. 좌석에 앉아 허벅지 위에 피자를 올리니 박스 아래가 곧 따뜻해졌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작은 버스 안에 풍기자 여기저기서 출처를 찾는 사람들의 눈길이 따가워 눈을 아예 감았다. 잡다한 상념이 동시다발로 튀어 올랐다.
상담 직원의 눈에 띄는 동요가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왜, 어째서 장학금 지급이 중지되었는지에 대해 원인을 찾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걸 풀어나갈 해법이 문제였다. 해답은 간단했다. 대학을 그만두는 것이다.
전공에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전공을 통해 성취할 미래가 밝은 것도 아니었다. 대학을 두고 기회비용을 저울질했다. 대학은 돈이 많이 든다. 그렇다면 다니지 않는 편이 맞다. 그러나 그만둔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학 중퇴, 정확히는 고졸이겠지, 의 학력에다 친화적인 성격도 아닌 내가 어딘가에서 금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겹치는 고민에다가 피자 박스의 훈기에 졸음이 온 탓에 나는 내릴 정류장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 벨을 누르고 뛰어내리듯 버스에서 탈출하자 아까의 몽롱함을 비웃듯 너무나 춥다. 모르겠다. 지금 여래에게 피자를 사 줄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한다. 커튼 봉과 피자를 사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손에 잡히는 확실한 행복만을 생각하기로 한다. 피자가 식기 전에 집으로 가기 위해 빨리 걷는다.
그러나 내가 안일하게 피자 따위를 사나르며 뿌듯해 하는 그 순간에도 불행은 눈덩이처럼 제 몸집을 불리며 서서히 굴러 들어오고 있었다. 인생을 직조하는 거대한 틀은 철컥거리는 기계음을 멈추지 않으며 정확하게 움직인다. 그것의 동작에는 어떠한 동정이나 이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흘러갈 뿐이었다.
일을 구해야 했다. 학교에 대해 여래와 의논을 해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여래와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와 멀어질 줄은 모르고.
* * *
바깥을 돌아다니면 곧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거나 어깨가 굳어져 올 정도로 날씨였으므로 우리는 추위를 피해 종종 데이트 삼아 마트를 들리곤 했다. 데이트, 라는 단어의 간지러운 어감과 마트, 라는 공간이 주는 실용주의는 정확히 반대지점에 서 있었지만 갈 곳이 없는 우리들은 곧 적응해 어느 코너에 무엇이 있는지를 전부 외울 때까지 그곳을 찾았다. 여래가 마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층은 가전코너가 있는 8층이었다. 일단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육십 인치짜리 곡선 텔레비전이라든가 CPU와 RAM의 속도가 어떻다고 하는 컴퓨터의 사양을 구경하는 데에 정신이 팔린 걸음이 느려지기 일쑤였다.
어차피 충분한 것은 시간뿐이었으므로 선명한 화질을 자랑하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느라 넋이 나간 여래를 내가 재촉하는 법은 없었다. 대신 카트를 밀며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외국의 대사를 맞이하듯 우리를 환영하러 나온 판매직원들과 여래는 제법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래는 심각하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소비전력이나 무상 수리 기간, 다음 버전에서 이루어질 기술적 성취 같은 것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이어지지만 마지막은 늘 똑같았다.
“둘러보고 올게요.”
이것은 여래의 단골 멘트였다. 그 말이 띠는 자기장은 강력해서 내뱉는 순간 영업사원들은 우수수 흩어졌다. 둘러보고 온다는 여래가 다시 그 매장에 걸음 하는 일은 물론 없었다. 둘러보나 마나 대형 세탁기와 양문형 냉장고, 커브형 텔레비전은 열아홉 평짜리 우리 집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달구어진 철판에 지글거리며 표면을 익히고 있는 고깃덩어리라든가, 색의 조합이 섬세하고 조밀한 개화 시기의 꽃이 번갈아가며 고화질을 뽐내는 화면 위의 정경 역시 누추한 색으로 바랜 벽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란 마찬가지였다.
대형 화면 위로 눈요깃거리에 지나지 않는 무의미한 화려함이 연속된다. 시각정보를 사진처럼 찍어내 기억하는 나에게 이런 종류의 영상물은 과잉의 데이터를 제공했다. 퇴적된 정보가 피로했다. 눈을 감아 공격적이리만치 달려드는 이미지들에서 도망친다. 수동적으로 도피하는 나를 여래가 팔을 붙들며 물었다.
“피곤해?”
“약간.”
이럴 때의 여래는 다정하다. 엄마 닭처럼 나를 날갯죽지 안에 품으려고 든다. 나보다 키가 작은 주제에 힘껏 발돋움을 해 팔을 뻗어 이마를 짚어보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한다. 그런 그가 좋아서 나는 부러 더 힘껏 눈을 질끈 감았다. 여래는 투덜거리며 다시 물었다.
“약간 피곤하다는 게 얼마만큼의 분량이야 도대체?”
“오 분 정도, 눈을 감고 쉬면 괜찮을 거 같은 수치.”
“놀구 있네….”
“놀고 있지 않아. 경험적인 근거에 기반해 알려주는 거야.”
“어휴, 이걸 말로 어떻게 이겨.”
“….”
“나 잡고 따라와.”
텔레비전의 정글, 그 안에서 갓난아기를 발견한 탐험가마냥 여래는 나를 곤혹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여래는 내 손에 제 티셔츠의 자락을 쥐여주고는 따라오라고 말했다. 어느새 카트의 손잡이는 그가 밀고 있다. 눈을 감고서 전적으로 그에게만 의지해서 걷는다. 주변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뭐야, 라고 수군대며 지나갔다. 더듬더듬 느릿느릿. 그러다가는 쿵. 멈춰 선다.
영상 가전 코너를 돌아 나오는 길에 멈춘 그의 등에 부딪혀 나의 시각 장애 체험은 그것으로 끝나버린다. 의아해 눈을 뜬다. 멈춘 자리에서 여래는 소형 가전 매대 위의 토스터기를 보고 있었다. 여래는 아까와는 다르게 선뜻 다가가 들여다보거나 묻지 않았다. 아주머니 판매사원은 이십 대의 청년 둘을 매력적인 고객으로 보지 않은 데다 토스터기 자체가 고가이거나 높은 마진 또한 아니었던 탓에 여래가 뚫어져라 토스터기를 보든 말든 내버려둔 채 재고를 확인하러 창고로 가버렸다.
여래에게 권유해본다.
“사려면, 사.”
“뭘?”
“토스터기.”
“왜?”
“계속 보고 있잖아.”
“됐어.”
“필요하면 사. 카드 줬잖아. 네가 알아서 해.”
“필요 없어.”
여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그 어깻짓은 지금부터 하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신호 같은 것이었다.
“식빵은 프라이팬에 구워 먹으면 되고…… 그냥 저런 물건은 얼마나 하나 궁금해서 봤어.”
“그럼 있으면 편하다는 말?”
“없어도 상관없다는 말.”
그럴까. 좀 더 권해보려는 나보다 여래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어, 저 게임기! 자리 비었다!”
나를 뒤로 두고 여래는 카트를 민 채 웬일로 비어있는 콘솔 게임기 앞으로 달려가 버렸다. 여래는 두 명분의 컨트롤러를 쥐고 흥분해 나를 불렀다. 뒤에서 얼쩡거리는 초등학생들이 투덜거리자 애가 닳은 여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오라고 성화를 부린다. 내가 다가가 여래의 옆에 서며 초등학생을 쳐다보자 그 애들은 단숨에 눈을 돌리며 제 엄마들에게로 뛰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래가 내 팔을 툭, 하고 밀며 주의를 시켰다.
“애들 겁주지 마.”
“별로. 뭐라고 한 건 아니야.”
“그게 무서운 거라고.”
여래는 게임 플레이를 누르며 종알거렸다. 게임은 아주 재미있었다. 여래가 권하는 활동이나 체험은 대부분 유익하고 흥미롭다. 그럴 때 그는 연장자로서 멋있다. 나보다 많이 살고 많이 경험했다. 그를 형으로서, 연상으로서 의식하는 때는 이런 때이다.
“우와, 또 이겼다. 힛.”
“흠.”
“이번엔 내기라도 걸까?”
“나도 잘해. 이번은 연습이야.”
“아, 패배자의 변명은 잘 들었습니다.”
반짝반짝, 개구쟁이처럼 웃는 얼굴이 빛났다. 그런 그에게 이른 단념을 가르친 건 누구일까? 삼만구천팔백 원짜리 토스터 기마저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만든 사람은…. 그 생각은 움직이는 손가락을 번번이 빗나가게 만들었다. 여래는 컨트롤러를 옆구리에 낀 채 손뼉을 치며 웃었다. 마음대로 사라고 하지 못하는 내가 미안해서 나는 계속 졌다.
돈을 벌어야 겠다. 돈을 벌어야 했다.
며칠째, 여래에게는 연습으로 학교에 간다고 말하고 나와 구 도서관으로 가 디지털정보 이용실로 향하는 날이 이어졌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메일함을 여는 것이다. 혹시 장학금에 대해 답변이 도착한 게 없는지를 먼저 확인하지만 오늘도 새로운 메일함의 숫자는 1이다. 사기업 산하의 연구소에서 온 피실험체 모집에 대한 메일이었다. 알파, 초고소득 보장, 이란 단어들이 강렬했다. 센터를 퇴소할 때 비밀 보호 서약과 동종 업계 취업 금지 각서에 서명했으므로 클릭해보지 않고 바로 휴지통에 넣는다.
다음으로는 구직 사이트를 열람했다. 집에서 가깝고 근무시간이 적당하다 여겨지는 몇 군데의 전화번호와 상호를 메모한다. 그러나 이력서에는 쓸 말이 없다.
나는 공백에 가까운 인간이며 특수한 조건에서만 살아남았다. 이를테면 센터나 은애원 같은 곳 말이다. 그것을 서술하는 데에는 아주 많은 문장이 필요하지만 이력서에는 숫자와 키워드로 조합할 수 있는 단순 명료한 사실만이 중요했다. 켜 놓은 문서 편집 프로그램의 흰 창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관리비, 통신비, 식비, 가스 사용료, 의복 및 이미용비 기타 등등.
로맨틱하게 그 후로도 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의 문장으로 책을 덮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동화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왕자이거나 공주인 이유는 세수 수입을 통해 생활 안정을 꾀할 수 있는 신분을 가져야만 해피 엔딩이 성립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점심으로 선택한 도서관의 정식은 양이 많은 대신 지방과 탄수화물의 비율이 높았다. 생선가스를 앞니로 씹으니 질펀하게 배어 나오는 기름기가 느끼했다. 입술이 번들거리고 속이 약간 메스껍지만 어찌 됐든 삼천 원의 한도에서 배를 채울 수 있는 데에 만족한다. 양 이외의 질에까지 까다롭게 굴기 힘든 가격인 걸 안다. 국까지 전부 마시고 깨끗하게 식판을 비운 다음 곧바로 일어서니 시간은 고작 십여 분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커피도 마시지 않는 자신이 이 때만큼은 대견하다. 나는 유지에 그다지 비용이 들지 않는 사람이다. 취미도 기호도 없다. 다시 컴퓨터의 화면 앞에 앉아 검색을 한다.
많은 직업들. 그중에서 내가 필요한 곳은 없었다. 열이 오른 눈동자에 손을 덮는다.
“하아….”
며칠째 인재채용 사이트만 보느라 안면을 익힌 컴퓨터실의 사서는 한숨을 크게 내쉬는 나에게 따로 주의를 주지 않고 모른 체를 해준다.
집에 돌아오자 불은 꺼져 있었다. 시계를 확인한다. 시간은 일곱 시를 막 지났다. 잠이 헤픈 여래는 안방에서 벌써 꿈나라였다. 침대에 온통 파묻혀 거의 발굴해내다시피 한 여래는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북풍으로 가득한 길을 걸어 다니느라 지치고 우울하다. 지금은 여래가 필요하다. 차가워서 미안하지만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만진다. 부드럽던 유두가 손길에 손길을 더할수록 저도 모르게 단단해진다. 잠에 취한 여래가 다리를 교차해 꼬며 오므려댔다.
목덜미에서부터 귓불까지 빨아 당기듯이 키스하며 올라간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찾는 여래가 허리를 비틀어 몸을 돌렸다. 단단해진 아래를 쓸어주자 맞붙은 허벅지 사이가 더욱 단단해지며 긴장한다. 사타구니 사이를 힘주어 잡으며 다리를 벌리자 잠이 완전히 깨어버린 여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나.”
“싫어. 갑자기….”
“싫어…?”
“아, 몰라.”
어깨를 으쓱하며 팔로 얼굴을 가리는 여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거짓말이란 사인에 안심한 나는 다시 그의 다리 사이로 파고 들어간다. 그의 허벅지에 내 것을 문지르자 숨이 거칠어진다. 곧 일어서며 딱딱해진 물건에는 굵게 핏줄이 서 있다. 마치 키스라도 시키듯 두 개를 동시에 잡아 문지르며 다시 묻는다.
“싫어?”
“…으… 나빠, 너…. 윽.”
아래로 위로 쓸어올렸다 내릴 뿐 좀처럼 강하게 압박해주지 않는 내 손에 안달이 난 여래가 허리를 비틀며 어쩔 줄 모른다. 늘 욕구를 풀어주는 쪽은 나였기 때문에 스스로 만져 해소하려 들 줄 모르는 점이 순진했다. 슬며시 허리를 다리로 감아 조이는 여래가 낮게 속삭였다.
“해 줘.”
“어떻게?”
“한 방울도 낭비하지 말고…. 안에다가 해 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 귀는 새빨갛게 타고 있을 것이다.
“아…. 살살.”
삽입을 위해 따로 입구를 풀어주는 배려는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매일 하고 있다. 양쪽 엄지로 잡아 벌린 구멍 안으로 바로 인서트 하면 안에서 밀리며 내벽이 쓸리는 감촉에 억눌린 신음이 뱉어져 나온다. 배와 가슴을 붙이고 달라붙은 채로 허리만을 움직여 흔들자 등을 끌어안은 손에 손톱이 세워진다.
“할퀴지 마, 여래야.”
“아…. 아앗…. 흐으.”
널려진 이불을 대강 그러모아 허리를 받히고 무릎을 들어 올려 어깨에 걸친다. 적나라하게 벌려진 안이 구부려진 자세와 같이 휘자 삽입한 페니스가 흘러나온다. 벗겨져 나온 기둥을 타고 안에서 스며 나온 애액이 윤활유처럼 번지르르했다. 조르는 듯 움찔거리는 엉덩이를 손잡이로 잡아 붙들어 다시금 깊게 들어간다. 쓸리는 피부의 감촉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른다. 울음기 어린 여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파…!”
달래주고 싶지만 달래주지 않는다. 이 때만큼은 조금, 괴롭히고 싶다.
“더 꽉 조이지 않으면 흘러내려.”
여래의 안이 꼭 맞게 내 것을 감싸 쥐었다. 순간 눈앞이 핑, 돈다. 참기가 힘들다. 빌어먹을. 사정감을 참을 때면 항상 욕을 하고 싶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에 참는다. 이를 악물어 참은 욕지거리만큼의 허리 짓이 더해지며 끝으로 끝으로 그를 몰아붙인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두 명분의 체중에는 침대도 덩달아 신음 소리를 냈다.
“아…….”
노팅한다. 분부대로 한 방울도 낭비하지 않는다. 꽉 끼인 아래가 아파 오는 듯 여래는 내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정액이 안에 모두 스밀 때까지 페니스는 빠지지 않았다.
선잠에서 깬 데다가 난데없이 격렬하게 섹스한 탓에 여래는 내 팔 안에서 곯아떨어져 버렸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헤치며 이마에 키스하자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든다. 잠을 더는 방해받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순한, 미지근하고 달콤하게 데운 우유 같은 잠에 나도 전염된다.
잠은 꿈의 정거장을 거친다. 그 역마다 나는 혼자였다.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먹고 마시고 자는 것, 생존 외의 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영양소가 풍부한 음식을 먹거나 보송한 잠자리에서 잠들기를 희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당장의 허기와 졸음을 없앨 수만 있으면 됐었다. 잠들기 전 내일이라는 단어는 영원과도 같이 멀리 있었고 다시 눈을 뜨면 해치워야 할 오늘이 닥쳐왔다. 자극에 반응하는 단순한 뇌의 구조가 파충류를 닮아있다고, 센터에서는 놀림을 받았다.
수긍했다. 내가 이토록 혼자인 것은 내가 다른 종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논리적이었다. 시설에서도, 센터에서도 외톨이인 게 당연하고 익숙했다. 나는 혼자다. 파라프레트의 원생동물처럼 그저 생존하고 있는 나. 과거도 미래도 없이 단지 현재라는 시점만을 사는 나. 꿈은 그렇게 시작도 끝도 없이 종료된다.
그러나 다음 날의 아침, 새로운 오늘을 위해 눈꺼풀을 열면 꿈과는 다르게 곁에서는 느껴지는 체온이 있다. 나를 들여다보던 여래와 눈이 마주친다. 여래는 엎드려 자는 버릇이 있어 베개에 기댄 얼굴은 반쯤 파묻혀있다.
“준혁아.”
“…응.”
잠자는 동안 가라앉은 목소리가 메여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투명한 갈색이 섞인 눈동자로 여래는 조금 웃었다.
“좋은 아침.”
꿈의 나쁜 뒷맛에 시달리고 있던 나를 그의 인사가 일으켜 세운다. 미소를 만져보고 싶어 손을 가져간다. 그것의 결은 부드러웠다.
* * *
대학을 그만두는 방법은 간단했다. 등록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래에게 그 사실을 통보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떳떳하지 못한 입장은 가시처럼 목에 걸려 뱉어지지 않았다. 모아 놓은 돈으로 절약을 하면, 그냥 먹고 살기만 하면 일 년쯤은 버틸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여래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죄책감이 겹을 더해갈 때쯤 도서관에 가려 집을 나서려는 나를 그가 불러 세웠다.
“준혁아.”
현관에 앉아 신발을 신다가 올려다본 얼굴이 기묘했다.
혹시, 알아챈 걸까. 학교나 장학금에 대해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돌아다니고 있단 것도. 학사 지원실에서는 단순 통보 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지금까지 집을 나서서 간 곳이 학교가 아니라 도서관이었단 것도. 거짓말은 나쁘다. 나쁜 짓은 하면 안 된다. 여래는 나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
긴장해 굳어진 채 잠자코 코너에 쌓인 먼지만 보고 있는 나를 향해 여래가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저기… 같이 병원에 가봐야 할 거 같아.”
삼월을 코앞에 앞둔 어느 날이었다. 목련은 아직 그 희고 부드러운 꽃잎을 마른 가지에 숨기고 있지만 곧 겨울이 끝날 것임을 예감하듯 무럭무럭 줄기에 물을 길어 올리고 있는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