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준혁 (8)
산부인과의는 또 다시 그 호칭을 쓴다.
“엄마.”
그녀는 우리 쪽은 건너다보지도 않은 채 피검사 결과가 나와 있는 차트를 넘겼다.
“열성 오메가는 원래 임신 힘든 거 아시죠?”
여래는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다시 한 번 고쳐 쥐었다.
히트 사이클이 한 달 넘게 오지 않아 와 본 병원이었다. 아침에 본 저출산의 뉴스가 무색하리만치 붐비는 임부와 아이들로 우리는 또다시 작게 위축되어 있었다. 의사의 말에 여래는 변명하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열성 오메가로 태어난 건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네. 알아요. 그래서 노력하고 있….”
“축하드려요.”
“네?”
여래와 의사 둘 사이를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하며 번갈아 보지만 의미를 종잡을 수 없다. 설명해 주어야 할 여래는 얼떨떨하게 의사만을 보고 있다. 의사는 종이에서 눈을 떼고 싱긋, 여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기가 다시 와줬네요. 기특하게.”
임신의 소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신문이나 우유를 권유하듯 앞을 막아섰다.
“이제 막, 6주차 정도 된 거 같아요. 아직 초음파 해봤자 심장 소리 안 들릴 때니까 그건 다다음주에 와서 합시다.”
심장 소리.
누군가가 살아 숨 쉬는 강력한 증거. 내 가슴의 박동이 그 단어에 빠르게 반응한다. 여래는 주먹을 풀었다 말았다 하며 어쩌지를 못하고 얼떨떨하다.
“이번에는 우리 잘해 봐요? 습관성 유산이 되지 않게 조심합시다. 일하시나요?”
“아, 아뇨.”
“잘됐네요. 그럼 당분간 안정기까지는 집에서 신경 쓰세요.”
“당분간이란 게 얼마만큼인가요?”
“대체로 12주에서 16주 정도가 되면 초기 계류유산은 피했다고 보죠. 정상적으로 하시던 거 하시되 주의만 하시면 돼요. 부부관계도 조금 조심하시고.”
부부, 만으로도 이미 한계치인데 관계, 까지 나오자 여래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반대로 내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진다. 의사는 무심하게 주의 사항을 나열했다.
“깊게 삽입하는 자세만 되도록 조심하면 돼요. 그렇지만 성행위의 흥분감 자체가 아기집을 수축시키니까요. 조심해서 할 바에는 아예 피하시는 편이 나을 거 같지만 본인 성향에 따르시면 되겠고요.”
“네…. 네에. 네에.”
“그리고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처치에는 한계가 있어요. 아무래도 남성체의 경우에는 분만 시에 응급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 초기부터 대형 병원으로 옮기시는 게 어떠세요?”
“알겠습니다.”
바람에도 휩쓸려가 버릴 수 있는 비눗방울같이 가벼운 아기가 다시 우리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여래의 점퍼도 함께 집어 팔에 걸치고 진료실 바깥으로 나온다.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린 것처럼 여래를 내 뒤에 숨겼다. 산부인과 대기실에 유독한 물질이나 위험한 사고가 있을 법하지는 않지만 혹시 모른다. 몇몇의 아이들이 까르르 웃다가 서로 다투다가 울음을 터트렸다가 하며 우리 앞을 뛰어갔다. 나는 여래를 등으로 막은 채 아이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여래는 내 뒤에서 눈만을 내밀며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
“그냥. 애기들하고 부딪힐까봐.”
“야.”
“혹시 모르잖아.”
눈길을 혼자 걸을 줄도 알고, 그라인더를 능숙하게 다룰 줄도 아는 여래는 자신을 유리그릇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다루는 내 말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기의 등장으로 갑자기 겁쟁이가 된 내가 우스운 눈치다. 이럴 때 그는 나보다 더 무신경하다.
“뭐야, 진짜. 웃기지도 않아. 산만한 게 겁만 많아가지구.”
“아니야.”
“아니야?”
“나, 나는, 항상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생기기 때문에 이번에는 어떤 나쁜 일이 생길지 무서워.”
수납 영수증을 검사하던 여래가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를 본다. 나는 더듬거렸다.
“좋은 일 하나에 나쁜 일도 하나야.”
여래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나쁜 일이 생길 거야.”
이어지는 침묵에 그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며 무시하거나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러나 여래는 내게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나쁜 일 하나에 좋은 일도 하나잖아. 어차피 번갈아가면서 온다면 상관없잖아. 좋은 일 다음에 항상 나쁜 일이기만 하겠어.”
나의 논리는 그에게로 가 전혀 다르게 다듬어진다.
“그런….”
“어차피 나쁜 일은 많았어. 우리는 고생이라면 질리도록 했잖아. 그럼 이젠 좋은 일이 있을 차례야.”
“여래.”
“나는 네가 아기를 좋은 일이라고 말해 준 것만 해도 기뻐.”
아이들이 다시 한 번 술래잡기인지 도둑놀이인지를 하며 와르르 몰려갔다. 여래는 돌진하는 무리에서 비켜서며 잔잔한 시선을 던졌다. 어두운 구름의 끝, 빛나는 은색의 실선처럼 폭풍의 끝에서 희망을 보는 여래가 예쁘다.
“잘 될 거야. 틀림없어.”
* * *
대형병원의 복도는 동네 산부인과보다 더욱 붐볐다.
안정을 위해 조도를 낮춘 진료실은 어두웠다. 프로브를 든 의사가 의자를 당겨 앉은 후 젤을 짰다. 배를 누르는 감촉에 여래가 흠칫 떤다. 벽에 기대고 있던 내가 등을 떼자 의사가 비웃었다.
“위험한 거 아니에요, 아빠.”
아빠라니, 그 말이 내 입을 풀 발라 붙인다.
“음… 보이세요?”
화면 위로 하얀 점을 찾은 의사는 한 지점을 향해 멈춘다. 몇 번 각도를 달리해 본 의사는 긴장한 여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심장 소리 들어볼까요?”
“네?”
“처음이세요?”
“임신 확인한 게 얼마 안 돼서.”
“소리 켤게요.”
스위치를 누르자 진료실 안에는 얼떨떨하리만치 강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아기의 심장 소리라기보다 차라리 흡착반이 물을 열심히 빨아들이고 내뱉는 소음처럼 들렸다. 쓰윽 빨리고 재빨리 내뱉고 그걸 쉼 없이 계속한다. 가냘프고 꺼질 듯하기는커녕 요란스럽고 시끄럽다. 아기는 손톱만 하다. 그러나 살아있다. 그것도 매우 우렁찬 소리를 내며 말이다.
“잘 있네요. 그렇죠?”
검은 화면의 이물질처럼 끼인 아기를 여래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고개 한 쪽을 기울이며 집중한 모습은 꼭 그 애가 여래에게 심장의 소리로 말을 건 듯 하다.
센터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은 말소되었기에 공제받는 금액 없이 진료비 전액을 납부해야 했다. 한 번의 유산 경험으로 겁이 많아진 여래를 비싼 상급의 대형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원무과에서 그를 따돌리는 일은 어려워서 나는 그에게 앉아있으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준 후에야 겨우 결제를 마칠 수 있었다.
수납을 마치고 나오는 우리를 막아서는 인파는 종합병원의 로비를 기준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퍼레이드의 행렬을 구경하는 듯 통로를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여래를 막아서며 보호한다. 꽉꽉 눌러 담은 내용물이 넘치듯 밀려 나온 사람들에 여래가 떠밀릴까 걱정이 된다.
“뒤로 와.”
“무슨 일인지 궁금하잖아. 드라마 촬영인가? 가보자. 응?”
“뒤로 오라니까….”
“아!”
“여래!”
일렬종대로 늘어선 사람들 어깨 너머로 기웃거리던 여래는 발을 헛디딘다. 넘어지기 직전 팔을 붙들지만 여래를 잡은 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오랜만이야.”
슈트의 상의에서 한 팔을 뺀 채 걸치고 있는 무영은 여래와 그 옆의 나를 쳐다보다 붙든 여래의 팔을 던지듯 놓았다. 튕겨 나간 여래가 어설프게 물러나는 걸 무영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매에 꿰어져 있지 않은 팔을 늘어뜨린 무영은 무기력했다. 배를 가린 여래가 눈을 내리깔자 입 안의 살을 씹는 무영의 뺨이 실룩거렸다. 무영은 여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줄곧 쳐다보지만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내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나선다. 무영은 그의 옆을 위성처럼 선회하는 시큐리티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기다리지. 할 말이 있어서.”
“본부장님. 바로 일정입니다.”
짜악!
무영이 시큐리티의 뺨을 내려치자 걸친 채인 양복의 한쪽 소맷자락이 반동으로 펄럭거렸다.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
“…네.”
험악해진 분위기에 여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영이 휘두른 손이 곧 배를 때리기라도 할 듯 팔로 보호하듯 몸을 가린 여래는 내 옷깃을 당겼다.
“가자, 준혁아.”
그러나 갈 수는 없다. 무영의 시큐리티들은 우리에게서 등진 채로 우리를 둘러쌌다. 한 손으로만 라이터를 튀기는 무영의 손짓이 서툴렀다. 주사를 맞은 팔에는 밴드를 붙이고 있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를 대신한 누군가가 오늘 이 병원에서 무영을 위해 피를 뽑았나 보았다.
“존나 짜증나게.”
그러나 무영은 기어코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만다. 금연구역인 병원에서 무영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은 이 병원이 그의 아버지 소유이기 때문이다. 담배 연기에 여래는 반사적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끼쳐오는 냄새가 싫어 모르는 척하는 우리를 무영은 모르는 척했다.
“애 생겼니?”
“….”
“빠르네. 너네들은 애도 잘 들어서는구나. 열성은 그게 영 힘들다고 하는데.”
킥킥거리며 웃는데도 무영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웃는 그는 파괴적으로 보인다. 무영도 수정률이 낮은 열성 알파였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자기 비하적이다.
“아니면 너희 둘이… 임상 보고된 수치를 무시할 만큼 붙어먹었던 건가?”
무영은 머금고 있던 담배 연기를 길게 여래의 얼굴을 향해 뱉었다. 여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콜록거렸다. 옅은 회색의 담배 연기가 거슬려 눈썹을 모으자 무영은 기가 찬 듯 하, 하고 헛웃음을 쳤다. 네가 감히, 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담배는 아이에게 좋지 않아. 비켜.”
“그러라고 하는 거야….”
눈앞의 불꽃을 손바닥으로 움켜쥔다. 담뱃불의 온도는 약 오백도. 나보다 먼저 여래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무영의 손가락에는 부러진 담뱃대의 필터 부분만이 들려있었다. 쏟아져 나온 담뱃가루가 겨울바람에 실려 쓸려가 버린다.
“미친 새끼, 쇼하고 있네.”
무영의 얼굴에 스친 감정은 두려움이나 혐오가 아닌 아쉬움이었다. 내 손바닥에 직접 담배를 비벼 끄지 못한 아쉬움 말이다. 내 손을 감싸쥐고 그를 노려보는 여래를 향해 무영은 콧등을 찡그렸다.
“너희 둘은 항상 나만 나쁘게 만들지. 참 이상해.”
“너야말로 미쳤어. 사람 손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지지는 너야말로 이상하다고!”
“그래. 맞아. 여래야. 나는 별짓 다 할 수 있어.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따지는 여래의 말을 자른 무영은 빙긋 웃었다.
“그래서 내가 최준혁 대학도 그만두게 했잖아.”
점점 커지는 여래의 눈을 무영은 재밌단 듯 본다.
“몰랐었구나, 여래야?”
여래는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리에는 봄이 물씬했다. 지나는 사람들은 봄에 항복하며 옷을 팔에 걸쳐 든다. 가벼워진 사람들이 부드럽게 떠다니는 사이를 헤치고 걷는 두 명이 있다. 여래와 나다.
“여래야.”
병원 밖으로 나온 여래는 앞만을 보고 직진한다.
“여래야. 화내지 마.”
빠른 걸음이 위태롭다. 넘어지거나 하면 위험하다고 생각하자 조급해진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상실을 맛보지 않았던가. 앞뒤로 흔들리는 여래의 손을 잡아챈다. 우리의 각인이, 사라지지 않을 넝쿨의 타래들이, 서로에게 성실하겠다는 불멸의 약속이 깍지 속에서 얽혔다. 여래는 잡힌 손을 뿌리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표시였다.
“여래.”
“너 어떻게 그런 걸… 그런 걸 숨겨!”
멈춘 여래가 지르는 소리에 버스 정류장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힐끔거렸다. 흐드러진 목련 그림자 아래 여래의 얼굴이 어둡다. 당황한 내가 내젓는 손을 보며 여래는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미안해. 돈은 금방 벌 거야. 일할 거야. 구하고 있어. 불편한 건 없을 거야. 저금도 아직 남았어. 여래야, 그러니까….”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럼 왜일까.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돈이다. 돈이 있어야 여래에게 가장 중요한 아기를 지킬 수가 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왜 혼자서 결정을 해. 좀 더 알아볼 수도 있었잖아. 꼭 학교 그만두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었잖아. 네 미래가 달린 일이야. 너에 대한 거라고. 앞으로 네 인생이 어떻게 풀릴지도 모르는데.”
내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지는 여래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나의 절반은 여래, 나머지 절반은 아이로 되어있다. 학교는 그 중 어느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머뭇거리는 내게 여래는 손을 뻗었다.
“바보 같아.”
고개가 뎅겅 떨어진다. 바보 같다는 말을 오랜만에 듣는다. 쏘아붙이며 따라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던 어린 여래가 떠오른다.
이 바보 멍청이! 따라오지 마!
다시 그가 나를 저어하면 그때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
“너를 탓하는 게 아니야. 내가, 내가 바보 같아서 그래.”
여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풍처럼 물드는 여래의 입술은 계절을 잘못 찾았다. 지금은 벚꽃잎 색이 어울리는 봄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침대를 사라 마라, 피자를 사라 마라 했잖아. 너는 혼자 또 고민했겠지.”
따뜻해지는 계절을 담은 그 말에는 온기가 묻어있다. 하지만 옳지는 않다. 그는 잊었을까? 토스터기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고도 그걸 카트에 넣지 못했던 자신을? 여래는 여래의 최선을 다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최선이 꼭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지 못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네가… 너 혼자 그렇게 다 책임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건 너무 이상해. 우리는 이제 둘이잖아. 나도 입덧만 가라앉음 일할 수 있어. 무리하지 마.”
착한 여래. 착하게 생각하고 착하게 행동해서 타인의 나쁜 의도나 어두운 내막 따위는 상상하지 못하는 여래. 나는 나 혼자 책임지려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구속이다. 너를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려는 음침한 시도다. 여래가 무능력해지고 아둔해져서 나와 우리 집 이상의 세계를 꿈꾸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그랬다. 하지만 항상 나를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는 여래는 그걸 모른다.
“가자, 준혁아.”
여래는 이번에도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 * *
새벽 네 시. 진동으로 알람을 맞춰놓았던 휴대폰이 울리자 곧장 눈을 뜬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 사이 깬 여래가 부스스하게 기지개를 켜며 화장실 문턱에 기대어 섰다.
“깼어?”
“시끄러워서.”
내려가는 물소리가 컸나 보다. 낡은 배수관은 자주 막히며 게트림을 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이물질이 고여 타고 올라오는 냄새도 냄새였다. 아기 때문에 후각이 민감해진 여래는 화장실에 들어올 때마다 크게 숨을 참곤 했다. 삼일에, 사일에 한 번씩 내가 청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쉬는 날에 반드시 손을 봐둬야 할 항목이다. 머릿속에 저장한다.
“오늘도 가?”
“응.”
“…가서 밥 챙겨 먹어.”
“응.”
마뜩잖은 시선을 이겨내며 운동화를 신는다. 잠도 많으면서 여래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나가는 나를 배웅했다.
일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메일함에는 여전히 실험 관련 협회의 구인들만이 드문드문 들어왔다. 뇌와 신경망, 알파의 신체적 특성 등에 대한 연구 내용들을 설명하는 메일들은 열어본 뒤 모두 휴지통에 버렸다. 그러고 나니 비숙련 노동자로서 수요가 있는 일자리는 육체노동뿐이었다. 자판기에 음료수를 넣는 일이나 택배 배달도 지원해보았지만 소유한 차량이 없어 쉽지 않았다. 그때 매니저를 떠올린 건 여래였다. 부탁드려보라는 말을 듣지 않자 여래는 내 휴대폰을 빼앗아 대신 멋대로 문자를 작성했다.
[전화 드려도 될까요?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발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나서야 여래는 휴대폰을 되돌려주었다.
“이 다음부터는 네가 직접 말해.”
이런 상황은 배워본 적 없다. 싫었다. 망설이며 우물쭈물하는 나의 등을 여래가 세게 쳤다. 절로 말이 튀어나왔다.
“…여보세요?”
매니저는 귀찮아하지도, 그렇다고 어쩌냐며 큰일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영등포에서 가까운 순서로 정렬한 일자리의 리스트를 엑셀로 보내주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건설현장이 일 개월째였다. 건설현장 일은 뒤풀이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만이 곤욕스러웠을 뿐 생각보다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다. 말을 별로 할 필요가 없단 것이 무엇보다 편했다. 그러나 매일 새벽마다 여래는 아침 식사를 거르고 나가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입덧 때문에 음식이라곤 냄새도 맡질 못하는 처지에 나의 끼니를 걱정하는 여래가 작고 소중했다.
“점심도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대충 때우지 말고. 식대 나온다며.”
“돈 아끼려고 그런 거 아니야. 새로운 맛이 나왔다고 해서 궁금해서….”
“이게 자꾸 거짓말을 해.”
“정말이야. 간식도 줘. 음료수도 줘. 나는 잘 먹어. 여래야말로 신경을 써야 해. 종일 아무것도 못 먹으니까.”
“그렇다고 덥석 백화점에서 자두를 사오냐?”
그것은 어제 내가 사온 자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직은 사월, 제철이 아닌 새파란 자두는 두 알에 만원이었다. 여래는 랩 포장 위에 붙은 가격표를 한 번, 그걸 담은 백화점 마크가 찍힌 종이봉투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텔레비전을 보던 여래가 지나가는 말로 먹고 싶단 말이 기억나서 사온 자두에 여래는 끝끝내 입을 대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나오는 냉기마저 힘들어하는 여래를 위해 세탁실에 빼놓은 자두는 하룻밤을 묵어도 여전히 푸릇한 채 그대로였다.
“자두, 먹어. 뭐든지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 문자 해. 사올게. 작업 중에는 휴대폰 금지니까 바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끝나면 꼭 볼 테니까.”
“돈으로 바꿔 올 거야. 백화점 거 맞지? 그럼 환불 되니까.”
“그냥 둬. 나중에 먹고 싶어질지도 몰라. 그때 바로 먹을 수 있게 둬. 백화점까지 가는 것도 힘들잖아. 그러니까 환불하지 마.”
“치. 너 지금 나 가르치려는 거야? 신났구나, 아주 이래라저래라 하고 말이야. 건방져졌어. 최준혁.”
어떻게 알았지. 내가 조금은 즐거워하고 있단 걸 여래는 눈치챈다. 역시 방심할 수 없게 똑똑하다. 혼자 생각하는 나를 두고 여래는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다.
“잘 다녀와.”
아직 잠든 채인 새벽을 향해 나간다. 여래와 아이가 나의 등을 밀어주고 있는 듯하다.
잘 다녀와.
돌아갈 장소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래를 이제는 믿는다. 그래서 그를 두고도 나올 수가 있다.
잘 다녀와.
그 말이 닻을 내린 자리에서부터 서서히 행복감이 퍼져나간다. 여래의 웃는 얼굴을 떠올릴 때의 따스한 감촉이었다. 뺨을 눌렀다. 행복했다.
그러나 그날 나는 잘 다녀오라는 여래의 말을 지키지 못한다.
* * *
끼이이익!
푸른 안개를 잡아 찢으며 차선을 이탈해 달려오던 차가 거의 코앞에까지 올 때까지도 나는 그것이 내게 부딪치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생각의 속도보다 비틀거리는 차가 더 빨랐다. 범퍼와 충돌하자마자 날아간 나는 아스팔트 위를 두 바퀴 굴렀다. 부러진 무언가가 그대로 몸 속 깊숙이 박힌 듯한 통증에 격렬하게 배를 찔렀다.
“커억… 큭….”
입에서는 터져 나오는 신음은 이질적이다. 내 것 같지 않다. 나는 다쳤다. 그래서 아팠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뼈를 갈아내는 듯한 통증이 옆구리를 찔러왔다. 연결된 신체의 각 부분들이 자그마한 동작에도 격렬히 반응하며 가만히 있을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나는 움직여야 했다. 작업반장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사인 일조로 이뤄지는 작업은 한 명이라도 빠지면 하루 치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무어라고 말하려 입내를 하자 압력에 밀려 올라온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피가 역류했다. 나는 곧 내가 말은커녕 휴대폰조차 꺼내 들 수 없는 상태임을 깨달았다. 과도한 출혈로 의식은 희미해지고 있었다. 눈이 자꾸만 감겼다.
타악,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귀를 땅에 대고 있는 나는 걸어오는 사람의 발자국을 들을 수 있다. 아마도 운전자일 그는 서두르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걸어온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모시모-시.”
낄낄대는 그가 수화기 건너편을 향해 인사했다. 119에 전화를 건 게 아니었다. 다가온 구두코의 광택이 눈 바로 앞에서 번들거렸다.
“어떻게 사장님, 사진 찍어서 보내드려?”
남자는 발로 명치를 걸어 힘주어 나를 넘겼다. 뒤집히는 자세에 통증은 새롭게 갱신된다. 경련하는 나를 두고 남자는 말을 이었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여명을 등진 그의 얼굴은 역광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어두운 빈자리를 여래로 채워 넣는다. 점점 눈이 감긴다.
여래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머릿속이 고장 난다. 의미 없는 노래 가사가 거듭 되풀이된다. Sans toi ma mie, Sans toi ma mie 내 사랑, 당신이 없다면. 내 사랑, 당신이 없다면. 무수한 약속들이 스친다. 다음 생일도 딸기생크림 케이크야. 응. 뷔페에 가자. 매일매일 가자.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너와 네가 낳은 아이를 사랑할게. 각인을 하자.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절대의 맹세를. 피자 먹자. 치즈 크러스트를 넣은 슈퍼 슈프림으로. 난 반짝거리는 게 좋아. 부자가 될 거야. 이거 봐라? 내 보물이야. 너한테만 보여줄게. 여길 나갈 거야. 너를 버리는 게 아니야. 긴 술래잡기를 하는 거야. 꼭꼭 숨어라를 하자. 나를 찾아. 나를 찾아줘. 어떻게, 여기에. 어쩌다가 여기에. 이 새끼 케이라고 부르자. 어차피 인간 같지도 않으니까. 표정도 없고 감정도 없잖아. 실험이나 하는 동물이지 뭐. 그렇지? 케이. 케이. 케이. 차가운 말들이 메아리친다.
여래야, 나를 구해줘.
나의 Axis mundi.
여래.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그.
적대적이고 혼란한 이 세계에 나를 닻 내리게 하는 유일한 중심.
내가 사랑할 존재를 잉태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의 희망.
나의 모든 것.
잘 다녀와.
어떡하지, 여래야. 네 말 듣지 못할 거 같은데, 어떡하지. 너는 아침으로 무얼 먹을까. 냉장고 냄새가 싫어 열지 못하는 여래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여래야 자두 바꾸러 가지 마. 그거 먹어. 난 오늘 들어갈 수가 없거든.
“이 대가리에 걸린 돈이 얼마라고요, 사장님? 하이고야, 여기에 그게 다? 그럼 여기서 돈 받고 저기서 돈 받고 나만 노났네? 나 같은 빡대가리는 도시 이해가 안 되는구만. 머리라고 다 같은 머리가 아니라야. 아이, 시벌. 그러니까 대가리는 말짱혀야. 그러니까 사진 보낸다고! 니미럴. 책상머리에 퍼질러 앉아서 주둥아리만 살아가지고, 카악, 퉤!”
아직 봄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보다. 길바닥에 뺨을 붙이고 누워있기에는 충분히 따뜻하지가 않다. 춥다. 근육은 경련하며 체온을 유지하려 해보지만 소용없다. 여래의 웃음을 떠올린다. 나를 데우는 온기의 다른 이름을.
세면대를 고치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것이 의식이 끊어지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 3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