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3부 : 종장終章 (1) (16/23)

3부 : 종장終章 (1)

이사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무영은 장탄식을 했다.

“조온나 지루해 돌아버리는 줄 알았네. 차트에 깨알같이 적어온 거 봐라. 누가 그걸 다 읽느냐고. 하여간 헛똑똑이들이야. 내가 예쁘게 만들어 오랬더니 유료폰트로 꾸몄습니다, 하는 거 들었어, 강 실장?”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강 실장은 무영의 손에서 자료를 받아들었다.

“나름 애썼던데요.”

“누가 그거 모른대?”

무영은 넥타이를 끄르며 핀잔을 던졌다.

“열심히 했으면 한 만큼 결과가 나와야 할 거 아니야. 입만 나불대지 말고.”

그 자신이 태생적인 핸디캡을 디디고 일어나서일까, 무영은 무능력한 사람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익히 아는 사실에 강 실장은 더는 프레젠테이션 발표자의 편을 들지 않았다.

“오늘 뭐 더 없지. 나 퇴근해도 돼?”

옷장 안에서 상의를 찾아 걸치는 무영은 강 실장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퇴근 준비에 한창이었다. 입점 매장 고급화에 따른 매출 증대 방안, 이란 제목의 프레젠테이션이 오늘 일정의 마지막이었다. 동탄에 들어설 메가 쇼핑몰 건설 현장을 돌아보기 위해 새벽 여섯 시부터 시작된 일정은 꼬박 열두 시간을 채우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러나 무영에게서 그런 과밀한 스케줄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무영은 요사이 퇴근 시간이 되면 저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주전자의 뚜껑처럼 들썩거렸다. 들떠 있는 이유가 비공식으로 기록될 다음 행선지 때문임을 강 실장은 알고 있었다. 무영에 대해서라면 강 실장은 모르는 게 없었다.

“네. 차 준비시킬까요.”

“그럽시다. 그래요.”

강 실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무영의 시선은 줄곧 거울이었다. 깃을 바로 세우고 셔츠 아래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단장丹粧에는 기대감이 한껏 묻어 나왔다. 매일을 보다시피 하면서도 그렇게 좋을까.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 실장과 거울 안에서 눈이 마주치자 무영은 눈썹을 들었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거였다.

“왜.”

“영등포로 가십니까?”

오늘로 중순을 넘은 이번 달만 해도 벌써 열 번을 꽉 채워 영등포행이었다. 누른다고 눌렀으나 너무 자주라는 뉘앙스는 기어코 묻어나오고야 말았다. 무영의 눈썹이 한 번 더 튀었다.

“뭔데.”

“요새 상태가 좋으신 건 알지만…. 너무 자주이신 것 같습니다.”

“자주라. 얼마나 되는데?”

강 실장은 휴대폰을 내밀었다.

“빨간 점이 영등포로 퇴근하신 날입니다.”

캘린더 안, 빨간 점을 달고 있는 날들은 무안스럽게도 많았다. 정확히는 두 달 동안 오십일이었다. 빨간 점으로 칠해지지 않은 날들이 출장으로 해외에 체류 중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사실상 여건이 되는 한 거의 매일 영등포에 간 셈이었다.

“뭐야, 강 실장. 이런 취미 있었어? 당황스럽네.”

그가 심심풀이로 기록을 남겼을 리 없단 걸 뻔히 알면서도 무영은 무안한 나머지 괜히 핀잔을 주었다. 두 시간 전 면도 받아 거슬리는 데가 없는 매끈한 턱을 세게 문지르며 마음에 들지 않는단 내색을 하는 무영에 강 실장은 쓰게 웃었다. 무영은 담배를 끊은 이후로 강박적으로 어딘가를 문지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도 ‘영등포’ 때문이었다. 연기라면 질색을 하는 ‘영등포’에 담배를 끊었고, 새로 돋은 수염을 깔끄러워하는 ‘영등포’에 면도를 하는 식이다. 지난한 회의를 초스피드로 끝낸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영의 세심한 노력들이 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덫을 놓듯 물어본 게 강 실장은 멋쩍었다. 하지만 중대사를 앞두고 무영을 단속하라는 전갈이 한남동으로부터 왔으니 그것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강 실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하루 쉬시고 본가로 가시죠. 기우겠지만 너무 눈에 띄게 찾으시면 흠 잡힐지도 모릅니다.”

“흠? 흠이라고?”

그 말에 발이 채인 듯 갑자기 웃음기를 지우며 되묻는 무영에 강 실장은 말끝을 흐렸다.

“그게 아니고….”

“꼭 무슨 하자가 있단 것처럼 들리네? 누가, 뭐라고 하는데.”

“아니…. 아닙니다. 대체로 저희 쪽에서 흘린 내용대로 알고 있습니다.”

뒷목이 뻣뻣해진다. 많이 물러졌다 여긴 무영을 방심한 벌인지 대신할 말은 금방 찾아지지 않았다. 강 실장은 무영이 화를 당기는 게 어떤 상황들인지를 잘 알았다.

문제? 무운제? 야, 이 씨이발아, 너 내가 무슨 문제 있어 보이냐?

단어 하나가 거슬려 차로 주차요원을 밀어붙이려던 게 고작 삼 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 일을 그만둔 주차요원이 주간지와 가졌던 고발성 인터뷰를 막느라 신문사의 경제주간과 몇 번의 저녁을 함께했었는지 강 실장의 스케줄러에는 그 횟수와 금액이 아직도 적혀 있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강 실장은 왜 자신이 무영에게 섣부르게 조언하려 들었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영은 계속 입안에서 강 실장의 말을 질겅거렸다. 미친개가 물어뜯기 직전에 어떻게 하더라. 입맛을 다시고 게거품을 물지. 자조적이 되어버린 강 실장의 고개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하하.”

그러나 뜻밖에도 다음 순간, 차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방향을 바꾸듯 무영은 갑자기 풋, 하고 짧고 경쾌한 숨을 토했다. 그러니까 웃음이었다.

“뭐라고들 해? 오메가한테 빠져서 정신 못 차린다고? 아님, 애 갖더니 사람 바뀌었다고? 배알도 성질도 다 버렸다고들 하나? 들은 거 있음 털어놔 봐. 난 요새 그게 제일 웃기던데.”

강 실장은 아연해서 얼굴을 들었다. 소년처럼 웃는 무영이 강 실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즐겁고, 그런 마음을 보이는 게 거리낌 없다는 태도가 청량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히 상실하는 순수의 편린을 거꾸로 지금에서야 획득해 누리고 있는 무영에 강 실장은 속이 거북해졌다.

사람은 잘 안 변한다는 데 김무영은 변했다. 김무영은 인간이 아닌 게 분명했다.

“강 실장, 왜 그러고 서 있어. 꼭 벌 받는 마냥.”

개심改心에도 정도가 있었다. 갈아 끼웠다고 해도 이것보다는 흔적이 남을 터였다. 어떻게 된 걸까? 진짜로 김무영은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외계인 납치설? 사망 후 대역설? 종교 귀의 후 영적인 인간으로 재탄생설? 아니, 다 아니었다.

무영이 탈바꿈한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강 실장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네 비서실에서 난리 치는 건 나도 알아. 똥줄이 타서 움직이는 모양인데 마음대로 하라고 해. 어차피 반반 나눠 가진 건 마찬가지니까.”

일 년 전, 전격적인 지분 이동으로 무영은 그룹 내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 중 하나로 부상했다. 평사원들에게 유성 그룹은 그들이 살고 욕망해야 하는 일국一國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수장의 자리가 대통령으로 비유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회사 내에 돌아다니는 풍문을 강 실장으로부터 보고 받던 무영은 웃으며 첨언했다. 대권이 아니라 왕권 아닌가? 왕은 생살여탈권을 가졌잖아. 목을 손으로 긋는 시늉이 사뭇 천진난만했다.

유성 그룹은 경쟁 구도를 통한 보다 공정한 승계, 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며 무영을 형 바로 밑의 직위로 승진시켰다. 내년도 사사분기 중 상무가 되리라는 무성한 소문을 흩뿌리면서였다.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의 비교군이 되었다는 충격에 부들부들 떨던 형과는 달리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던 무영은 발표 내내 침착했다. 승진 소식에 손뼉을 치는 무영의 옆모습은 막 첫발을 내디딘 젊은 경영인 그 자체였다.

사전에 알려진 바 없는 내용에 놀라기란 둘 다 마찬가지였을 것이었으므로 무영의 유화적이며 프로페셔널한 태도는 이사회와 대중에 좋은 인상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무영은 형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어차피 난 들러리잖아. 형. 그래도 나도 힘낼게요? 보여주기 식이지만 공정해야지.

불에 탄 비닐처럼 일그러지는 형의 낯을 보며 무영은 싱긋, 웃었다. 홍보실에서 찍어 외부에 유포한 성난 형과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무영의 투 샷은 형 쪽의 지시로 데이터베이스에서 지워졌지만 무영은 형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만족했기에 그것을 복원하려 애쓰지 않았다.

“기사 대기 시켜줘요. 십 분 뒤에 내려갈 테니까.”

“네.”

“꽤 막히네.”

이사실로 내려다보이는 강남의 구획된 차도에는 정연한 불빛의 행렬이 느린 유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걸 보는 무영의 얼굴이 오늘 처음으로 불만스러워졌음을 강 실장은 놓치지 않았다.

강 실장은 나오는 것과 동시에 전화를 찾았다. 단축키로 저장된 번호를 누르자 곧 운전기사가 불려 나왔다.

“십 분 뒤에 건물 입구입니다. 아, 그리고…. 빨리 갑시다.”

강 실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닫고 나온 이사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래, 김무영이 달라졌다. 나쁜 쪽으로는 아니다. 최대한 현재의 무영을 유지시켜야 했다. 그게 누구 때문인지, 무엇 때문이지를 아는 강 실장으로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말끝마다 쌍소리에 사사건건 시비였던 예전의 김무영보다 젠틀하고 이성적인 지금 쪽이 회사생활에 편하단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없진 않았다.

달칵.

곧이어 따라 나온 무영이 눈짓하자 강 실장은 묻기 전에 대답했다.

“차는 입구에 준비시켰습니다.”

“오케이. 그런데 강 실장, 저녁은?”

“들어가시는 거 보고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같이 퇴근하지.”

그 말을 하는 무영은 다시 씩, 웃고 있었다. 예의 그 소년 같은 웃음이었다. 짧게 쳐올리기 시작한 헤어스타일 때문에 무영은 처음 강 실장이 그를 수행하기 시작한 몇 년 전보다 더 앳되어 보였다. 강 실장은 아직도 그런 웃음을 만드는 무영이 낯설었다. 무영은 그런 심리적인 거리감을 알고 좁히듯 강 실장의 어깨를 작게 두드렸다.

“하루에 한 번은 가족하고 식사해야지.”

“아닙니다. 들어가시는 것 보고 퇴근하겠습니다.”

“됐어요. 내가 애도 아니고 번잡스럽게 그럴 필요가 있나. 내일 봅시다.”

“이사님.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강 실장.”

무영은 강 실장의 어깨에 올린 손을 내려 팔뚝께를 쥐었다가 놓았다. 신뢰와 유대가 느껴지는 제스처였다.

“내가 강 실장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 줄 알지. 뭐를 부탁해도, 어떤 일을 시켜도 다 잘하잖아. 그냥 서류만 붙들고 있는 애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김무영, 안하무인의 열등감 덩어리. 충분히 높았음에도 더 높아지지 못해서 안달을 냈던 어린애. 강 실장은 자신이 알고 있던 무영의 모습을 이제 완전히 수정해야 함을 깨닫는다.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닌데 미리 지치지 맙시다. 더 중요한 일 잘하라고 하는 거니까 마음 편하게 들어가요. 자, 그럼 나도.”

편해서, 물렁해서, 다루기 쉬워서. 아니, 솔직해지자. 강 실장은 변한 무영이 그냥 좋았다. 강 실장은 나가는 무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적으로 탈바꿈한 무영은 매력적이었다. 부드러운 포즈, 지나치지 않은 배려, 가끔의 유머, 예전의 그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바뀌었다. 무영은 해맑았으며 그것이 퍽 어울렸다. 그리고 그는 타인의 동기를 이해하고 공감했다. 그는 더 이상 우성 알파성性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하면 큰일이 난다던데.”

강 실장은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좋아할 때인가 모르겠네.”

김무영이 지금 이대로였으면 좋겠다. 무영이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 만만한 상사와 될성부른 라인을 추구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세상 편해졌네. 하. 이 시간에 퇴근을 다 하고.”

강 실장은 들었던 일지에 사인한 후 네 귀를 맞춰 서류함에 꽂았다. 자신이 진심으로 무영의 빠른 귀가를, 그럼으로써 주여래와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기를, 그래서 내일도 무영의 컨디션과 기분이 최상이기를 바란다는 것과 소년 같은 미소를 자신에게 다시 지어 보이길 원한다는 것은 업무가 아니었으므로 일지에 적을 필요가 없었다.

“저녁이 있는 삶, 좋지.”

강 실장은 가방을 챙겨 비서실을 나왔다.

* * *

삑삑삑삑, 네 자리의 도어록 버튼을 누르는 무영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계절은 가을, 차가운 바람을 몰고 들어서는 무영을 제일 먼저 반기는 건 아이였다.

“아바!”

그다음으로 따라 나온 여자가 황급하게 매무새를 만지며 인사하는 걸 무영은 심드렁하게 받았다. 여자는 일하는 아주머니였다.

“어머. 오셨어요. 여래야, 나 간다. 저 갈게요, 이사님.”

뒤뚱거리며 현관으로 나온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는 뒤로 중년 여자가 서둘러서 현관을 빠져나갔다. 무영은 다시 아이에게로만 집중한다.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하늘 위로 띄우자 아이는 자지러질 듯 웃었다. 턱밑까지 침을 흘리며 온몸으로 좋아하는 티를 내는 아이에 무영은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다 주방에서 나온 여래의 타박을 받고서야 비로소 소파 위에 아이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러다 다쳐.”

매서운 여래의 눈길을 의식한 듯 애는 양말을 신은 퉁퉁한 자신의 발을 주무르며 자긴 어디까지나 낚여서 들어 올려진 죄밖에 없고 주동자는 무영이라는 듯이 등을 지고 앉아버렸다. 꼼지락거리는 발 앞에 놓인 단감이 새로 돋은 앞니 자국을 달고 헐어있었다. 무영이 감 먹었구나, 하며 알은 채를 하는 데도 아이는 여래의 눈치를 보며 새침했다.

누굴 닮았는지, 똘똘한 애였다. 눈치도 있고 귀여웠다. 기저귀를 못 떼서 빵빵한 엉덩이를 하고 돌아앉은 뒤태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얼굴이 느슨해질 정도로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쨍한 여래 앞에서 헤벌쭉 한 꼴을 보였다가는 실랑이가 길어질 게 뻔해서 무영은 최대한 깨갱하며 자세를 낮췄다.

“아침에 보고 저녁에 또 보면서 아주 눈물겹네 눈물겨워. 이산가족 상봉하세요?”

“하루 내내 떨어져 있었는데 그럼 반갑지 안 반갑냐.”

“하이고, 얼른 손이나 씻으시죠.”

“아, 그렇지. 미안.”

무영은 얼른 정장 상의 단추를 끌렀다. 셔츠 소매를 접으며 화장실에 들어가는 무영에게 여래는 비죽 입을 내밀었다.

“맨날 까먹냐. 치. 안 그래도 감기 기운 있는데 손도 안 씻고 애를 만지면 어떡해. 누굴 생고생시키려고.”

“감기 기운? 어쩐지 좀 뜨끈하더라.”

“네가 병원 데리고 안 다닌다고 아주 편하지?”

이번에는 꼭 욕실 리모델링해야겠다. 여래를 귓등으로 넘겨들으며 무영은 생각했다. 세면대에서 한참을 고였다 빠지는 물이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시공된 햇수를 만으로 이십 년을 꽉 채운 아파트는 노쇠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그동안 집을 싹 뜯어고칠 계획을 세워보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며칠간 집을 비워야 하는 대대적인 공사에 여래는 번번이 싫은 티를 냈다. 반나절 이상 집을 비우는 걸 두려워하는 막연한 거부감이 어디서 오는지를 뻔히 아는 무영은 불안정한 여래를 더는 자극하지 않으려 먼저 손을 들어 항복을 했고 그렇게 미루고 미룬 게 지금 이 모양이다. 과식한 듯 트림을 하는 세면대에 무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래가 두 달째 괜찮잖아. 이번엔 여래도 그러려니 하지 않을까. 어디 같이 여행이라도 간다고 하고 일주일 만에 끝내버리면 어떨까.

전에 없이 길게 이어지는 안정적인 상태에 무영은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무슨 구실을 갖다 붙일까. 무영은 거품을 헹구며 머리를 굴렸다. 제일 만만하고 잘 먹히는 핑계는 역시 아이이리라.

시간을 끄는 무영에 화장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여래가 타박을 놓았다.

“뭐하느라 그러고 섰어. 얼른 나와. 밥 먹어. 늦는다고 안 해서 기다렸단 말이야.”

어째 가시가 돋쳤다 했다. 여래는 배가 고프면 쉽게 짜증을 냈다. 그걸 알아채기까지, 익숙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삼 년이었다. 지나온 세월이 뿌듯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해서 무영의 코끝이 무지근해졌다. 이럴 때는 아이를 찾아야 했다. 아이는 유화제처럼 모든 분위기에 모든 상황에 잘 녹아들었으므로.

“희원이는. 저녁 먹었어?”

희원熙原, 아이의 이름이었다. 돈푼깨나 들였으나 흔한 이름이었다.

본전 생각에 떨떠름해하는 무영 대신 무영의 몫까지 더해 두 명분으로 좋아한 건 여래였다. 흔한 이름이라서 좋다고, 누구나가 짓고 싶은 그런 이름이라서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여래는 웃고 있었다. 자긴 이름이 이래놔서 늘 싫었다고 하는 여래는 너무나도 순순히 제 역사와 과거를 드러냈다. 경계 없이 구는 태도가 지나치게 허물없었다. 오히려 무영이 멈칫하며 한발 물러나게 만들 정도로.

여래는 갓 지어 아직 따뜻한 김을 내는 아이의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이고 굴렸다.

희원, 희원이. 이름 너무 좋다, 그렇지? 어떻게 이런 이름을 지었어? 주운….

무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이 회상의 다음 장면에는 싫어하는 이름이 등장한다. 생각에 잠긴 무영을 두고 여래는 희원의 저녁 식사 메뉴를 종알거렸다.

“희원이 밥? 다섯 시에 이유식 먹였지. 걔는 간식으로 단감까지 다 먹었어. 오늘 더 안 먹어도 돼.”

“너무 이르게 먹인 거 아니야? 배 다 꺼졌겠는데. 한 번 더 먹으라고 해.”

희원과 저녁 자리를 같이하고 싶은 욕심으로 물어보는 무영에 여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여덟 시에 잘 준비해야 되니까 소화되라고 일찍 먹인 거지. 치, 야! 되게 꼬치꼬치 따진다? 내가 다 알아서 해. 넌 도와주는 것도 없음서 말만 많냐. 그러면서 밥이나 잘 먹이면 내가 말도 안 해. 저번에 네가 하도 그래서 같이 차려줬더니 너 어쨌어, 이유식 한 술도 못 먹였잖아! 희원이 저게 얼마나 까탈 부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건드렸다. 생각해보니 분한지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는 여래에 무영은 식은땀이 다 돋는다. 소파에 앉아 놀던 희원이 점점 가장자리로 굴러간다. 떨어질락 말락 하는 걸 들어다 매트 깔린 바닥에 내려놓은 무영은 아이를 방패삼아 뒤로 숨었다.

“그랬어? 몰랐네. 아이구 우리 희원이 무거워진 거 봐. 여래 네가 밥을 잘 먹여서 그런가 보다. 그지?”

“저 저. 능글거리는 거 봐. 하나도 반성도 안 해. 됐거든. 밥이나 드셔.”

“아,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콧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는 품이 제법 까탈스럽다. 희원을 낳은 후 점점 떨어지기 시작한 시력은 이제 안경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가 됐다. 그러나 끝까지 제 몸처럼 착 달라붙지는 않는 모양인지 여래는 내도록 안경을 잘 쓰고 있다가도 콧등 위에 걸쳐진 게 무엇인지를 의식하는 순간 안경을 불편해하며 당황하곤 했다.

“왜.”

“아니, 그냥.”

여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나 눈 하나는 좋았는데. 왜 이렇게 나빠졌지?”

다시 안경을 밀어 올리는 여래를 무영은 뒤에서 깊고 단단하게 안았다. 포옹은 여래를 위로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연원을 찾아 어렴풋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래가 무어라도 생각해내기 전 그를 다시 무영 곁으로 주저앉히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무영은 중얼거렸다.

“애 낳느라 고생해서 그렇지. 너무 힘들어서.”

희원을 영아시절부터 돌봐온 정 여사, 그러니까 방금 집을 나갔던 일하는 아주머니의 주장에 따르면 애를 낳고 많이 울면 눈이 나빠진단다. 나이가 몇인데 벌써 눈이 안 좋아져. 그게 다 희원이 낳구 하도 울어서 그런 거지 뭐. 핀잔을 듣는 여래의 표정은 영 아리송했다. 울었다? 울었다구? 정 여사의 말을 되뇌며 다시금 눈을 흐리는 여래에 무영은 곧장 턱짓을 보냈다. 다 좋은데 저 아줌마는 가끔 푼수 없이 군다. 언젠가 꼭 잘라버리고 말리라. 눈을 부라리는 무영에 퍼뜩 놀라 입을 가리며 개킨 빨래를 들고 나간 정 여사 뒤로 여래는 힘없이 물었다.

‘나, 그렇게 울었어? 그랬나…? 이상하게 희원이 낳았을 때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왜 그러지?’

정 여사를 마뜩잖아하면서도 그녀가 염불처럼 외던 말은 어느새 옮아와 무영의 입가를 맴돌았다.

‘애 낳느라 힘들어서 그래. 희원이 때문에 그래. 괜찮아, 여래야.’

‘그래도 이상하잖아. 왜 울었지. 희원이 낳은 건 좋은 일인데. 나쁜 일이 아닌데. 내가 왜 그랬을까. 주…ㄴ.’

옆으로,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이는 여래의 눈동자를 붙들어 고정시키며 무영은 속삭였다.

‘잊어버려, 여래야. 내가 대신 기억하잖아.’

‘그래…. 넌 다 알지. 다 기억하지. 그렇지?’

‘그러니까 괜찮아.’

무영의 강한 확신에 여래는 떠밀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정 여사가 남겨놓고 간 희원의 목수건이며 양말 따위를 주워들었다. 혼란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듯 하던 일을 하는 여래가 심상했다. 그것이 언제나의 패턴이었다. 이번도 다르지 않으리라.

코끝에 달린 안경보다 뒤에서 치대는 무영이 더 번잡스러워 여래는 허리께에서 교차된 팔을 찰싹 때렸다.

“고생은 무슨 고생이야. 다 하는 건데. 이상한 말 하지 마. 아, 진짜! 비켜.”

“이리 와.”

“성가시게!”

“와보라니까.”

정색을 하면서도 여래는 느끼하게 구는 무영을 완전히 거절하지는 않는다. 무영은 여래 머리 너머로 아이의 동태를 살폈다. 희원은 벽 쪽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벽에는 아이를 낳은 신혼부부가 흔히 그렇듯 섣부른 기대로 붙여놓은 한글 벽보며 숫자 벽보가 나란했다. 그 말인즉슨 좀 더 이러고 있어도 좋다는 뜻이었다. 마음 놓고 여래를 안으며 희원은 정말 이쁜 애라고 무영은 생각했다. 여래와 무영이 좀 더 이러고 있어도 멋쩍지 않게 마침 다른 데를 보는 희원은 천재임이 분명했다.

무영은 여래가 드러낸 부위 중에 가장 부드러운 곳, 뺨에 입을 맞췄다.

“오늘도 수고했어.”

“윽. 안 비켜?”

무영은 수그려 여래의 목덜미에 코를 박아 넣었다. 거기에서는 생활이 잔뜩 묻은 그런 냄새가 났다. 아기에게 맞추느라 죄다 슴슴해진 음식의 간, 아직 젖병을 못 뗀 희원이 보채서 서둘러 물려주다 흘린 분유 몇 방울, 몰래 사인펜 뚜껑을 열어 신나게 휘갈기던 희원을 뒤늦게 발견한 여래가 펜을 빼앗으려다 도리어 당해 옷에 그어졌던 유성펜의 자국과 유성액을 지우기 위해 동원되었던 세제, 그 모든 것들이 뒤섞인 그런 냄새가. 안정감이란 단어를 형태로 빚을 수 있다면 이러하리라 생각하는 그런 냄새가.

무영은 여래의 체취를 들이켰다. 그러나 응당 느껴져야 할 오메가의 체향은 없었다.

“정말이야. 종일 애랑 씨름하느라고 수고했어.”

“치. 웃기시네.”

무영은 여래를 뒤에서 안은 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흔들었다. 장난스러운 포옹에 웃음을 흘린 여래는 뒤를 돌아 무영을 바라보며 짐짓 엄한 시늉을 해 보였다. 엄하다고는 하지만 희원에게 이르듯이 다정한 말투에는 애정이 곧이라도 묻어나올 듯 담뿍했다.

“고마우면 들어올 때 뭐 하나 사 오기라도 해라?”

“알았어. 뭐 갖고 싶은데.”

“넙죽넙죽 말은 잘하네.”

“뭐든지 사줄게. 말만 해.”

무영은 백화점에 리본을 달아 갖다 줄 수도 있었다. 여래가 비싼 걸 말했으면 싶다. 그래서 그걸 사줌으로써 무영에게 여래란 무엇을 들어줘도 아깝지 않은 존재란 걸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이럴 때 발동되는 여래의 상상력이란 빈약하기 그지없다.

“먹을 거나 사 와. 맛있는 거.”

“에게. 고작 먹는 거야?”

“예전에 희원이 가졌을 때 네가 사 온 거. 그거 비쌌잖아. 지금도 비쌀 거야. 가을이니까.”

“뭐?”

잠복한 얼음 위에서 미끄러질 때처럼 순조롭던 둘의 사이에 급하게 브레이크가 잡힌다. 굳은 무영에게서 몸을 빼 냉장고를 향하며 여래는 어이없단 듯 덧붙였다.

“입덧 심했을 때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그것만 조금 입 댔었잖아. 백화점에서 사 온 자두, 기억 안 나?”

“…그래.”

석연치 않은 대답에 여래는 허리에 손을 올렸다.

“뭐야, 너.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냐? 내가 환불한다고 그렇게 길길이 날뛰었었잖아. 두 개에 만원. 백화점 자두.”

“아아….”

“너 정말 까먹었어?”

흐릿한 와중에도 이런 눈치만은 기가 막히는군. 떨궈진 무영 얼굴 위로 낭패감이 스치자 여래는 짐짓 토라진 양을 해 보인다.

“야, 최준혁, 너 변했냐?”

무영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최준혁.

불린 이름에 등지고 있던 희원이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희원의 이름을 지어왔을 때도, 저녁을 먹으라 부를 때도, 정 여사의 앞에서도, 아니 그저 모든 순간에 여래는 무영을 그렇게 불렀다. 그래서 희원에게 아빠의 이름은 최준혁이었다. 지금 여래에게 무영이 준혁인 것처럼.

희원이 이름, 참 좋다. 어떻게 이런 이름을 지었어? 준혁아.

왜 이렇게 시력이 나빠졌지, 준혁아?

내가 그렇게 많이 울었어? 준혁아?

나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준혁아.

준혁아.

준혁아.

최준혁.

하도 그렇게 불려서 이젠 자기 이름이 서먹해질 지경이지만 들을 때마다 언짢아지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최준혁의 이름 뒤에 숨어 그의 노릇을 하고 있다 해도 무영은 무영이었다. 짙게 어금니를 깨문 뺨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웃는 것 외에 지금을 타개할 마땅할 방법이 없었기에, 무영은 눈은 그대로 둔 채 입꼬리만을 끌어올렸다. 어색하게 웃는 무영에 여래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마구 널뛰었다. 발붙이고 있던 세계가 균열할 때의 그런 표정이었다.

빌어먹을. 무영이 수습할 새도 없었다. 여래는 보고 있는 현실과 자신이 꾸민 가상의 어디쯤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준혁아? 너 이제 웃어?”

낭패감에 돌아선 무영을 여래가 뒤에서 잡았다.

“준혁아. 너 이제 괜찮아? 머리….”

무영은 이마께를 짚어보려는 여래의 손을 붙들어 막았다. 그래. 최준혁에게는 이마부터 정수리로 이어진 긴 상처가 있었다. 제기랄. 이젠 그것마저 부러워해야 할 지경이다!

“화났어? 화도 낼 수 있어? 준혁아?”

무영도 다 해봤다. 윽박도 질러보고 구슬려도 봤었다. 전문가도 만나봤다. 최면이니 약물이니 손쓸 수 있는 범위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무영이 무영이려고 노력할수록 여래는 악화되어갔다. 무영은 여래가 의식과 현실 사이의 갭을 느끼기 전, 탈력감으로 모든 것을 놓쳐버리기 전에 얼른 반찬 그릇을 여래에게서 낚아챘다. 여래는 막 무영을 위해, 아니 준혁을 위해 저녁을 내어놓으려던 참이었다.

“상처가 없어. 그래서 너 이제 웃을 수 있는 거야. 준혁아…? 아니야. 그게 아니야.”

“주여래. 방으로 가.”

급격하게 빛을 잃은 여래의 눈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너 누구야.”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빈손이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생기를 잃은 무기질 한 눈빛에 무영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여래는 무영이 절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을 한다.

“우리 준혁이는 못 웃는데. 왜 웃어 너는. 그럼…. 넌 누구야?”

오래간다 싶었다. 이번에는 싶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여래가 마음을 열었다고 믿었다. 여래도 쪽팔려서 그렇게 단숨에 무영이 좋다고는 못 하겠지 했다.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까. 괜찮아. 상관없었다. 그렇게 모르는 척 뭉개져서 어우러져서 살다 보면, 그러다 보면 저도 어쩔 수 없겠지 싶었다. 두루뭉술한 마음이지만 예민하고 불안정한 여래에게 기대해볼 여지란 그것뿐이었다.

혼란스러운 여래에 덩달아 불안해진 희원이 발치까지 어정거리며 걷다 느린 걸음이 답답했는지 기기 시작했다. 기어온 희원은 여래의 무릎을 잡고 일어났다.

“당신 누구예요. 준혁인… 어디 있어요?”

여래는 희원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붙들지 않으면 희원마저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는 여래는 팔에 턱없이 강한 힘을 주었다. 희원이 울음을 터트릴 때까지 계속.

“흐에엥. 아야. 아야야. 떼찌야.”

“준혁이가 없어. 희원이는 있는데, 준혁이는 없어. 왜 그러지, 희원아.”

“주여래. 애 겁먹어. 그만해.”

“희원아….”

“그만하라고!”

무영은 여래의 팔에서 희원을 뺏어 들었다. 석류알처럼 구슬구슬 맺힌 눈물이 여래의 갸름한 눈 꼬투리를 붙들고 겨우 매달려있었다. 불안해하던 희원이 먼저 곡소리를 내자 무영은 여래를 향해 외쳤다.

“주여래, 정신 차려!”

아니. 정신을 차리지 말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만. 무영은 쓰게 생각했다.

“준혁아, 흐으…. 준혁아. 어디 있어. 왜, 왜 없어. 나만 두고 어딜 갔어. 준혁아.”

유리의 성城. 무영은 유리로 만들어진 성을 지키고 있다. 속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깨지기 쉬운 아름답고 섬세한 기만이 허무하다. 무영은 맑은 샘 같은 여래를 움켜쥐었다. 여래 마음속 우물은 밑바닥의 잔잔한 모래알갱이까지 손에 잡힐 듯 선했다. 이 작은 여울을 어지럽히는 건 샘 아래로 침잠하지 못하는 가볍고 허랑한 낙엽들뿐이었다.

마치 자신처럼.

주여래가 또 망가져버렸다. 오십 일 만이었다. 더 길어지나 기대했던 게 우스웠다.

* * *

삼 년 전.

병원의 20층은 조용했다. 대형병원 특유의 인간시장 같은 1층 원무과의 번잡함은 층을 높여가면 갈수록 촘촘한 필터로 거른 듯 깨끗하게 사라진다. 건물 벽을 따라 들어선 VIP 룸들을 어느 각도에서든지 관찰할 수 있도록 간호 스테이션은 층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정 간호사는 지금 막 지나간 단출한 무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옆의 이 간호사를 찔렀다.

/ㄱㅁㅇ?/

김무영을 자음으로만 쓴다. 남자들이 사라진 방향을 짧게 쳐다본 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이면지 위 자음들은 정 간호사의 볼펜 끝에서 검은색으로 뭉그러졌다. 출근하고 인계를 받은 지 십 분도 채 안 된 정 간호사는 김무영이 병원을 한 번 들었다 놓은 사실을 아직 몰랐기에 이 간호사는 이걸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입이 간지럽다. 정 간호사는 재빠르게 물음표를 그렸다.

/??/

/난리도 x/

난리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필담에 감질이 난 정 간호사가 차트를 세워 입을 가리고 달라붙었다.

“아, 왜에.”

“암튼 대박, 대박 사건.”

“뭔데 그래요. 아우. 이러고 또 별거 아니죠? 저번엔 맹장 떼러 아이돌 온 거 가지고 별 해괴한 소릴 다하더니.”

정 간호사의 핀잔에 이 간호사는 관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이 얘길 듣고도 놀래 자빠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김무영이 오메가를 데리고 왔어. 출산 임박한 오메가를. 양수 터져서 응급실로 들어왔다더라. 가만 있어봐 봐. 다 얘기해줄 거니까. 정확하게는 김무영이랑 같이 온 것도 아니야. 혼자 택시 타고 왔는데 대기실에서 어영부영하고 있는 걸 원무부장이 뛰어나와서 데리고 갔을 때부터 응급실 애들이 이상하다고 수군수군했거든? 그런데 그때 김무영이 왔데. 대박이지. 미쳤지. 그때부터 김무영이 지키고 앉았는데 분위기 살벌해가지고…. 산부인과 난리도 아니었다더라. 비상 걸리고 신 교수 퇴근하려다가 다시 차 돌려서 왔잖아. 정상 분만 시도하려고 했다는데 오메가 상태가 오락가락해 가지고…. 제왕절개 한다는 거 가지고도 말 많았어. 막 위급한 건 아니었다고 지켜보자고 할라 그랬다는데 김무영이 하도 난리 피워가지고 유도제 써보지도 못했다더라. 근데 원래 남성체들은 다 씨섹션이긴 하잖아. 신 교수가 김무영 서슬에 혹시라도 잘못될까봐 떨떠름해서 뭉갠 거겠지 뭐! 암튼 애 받고 나서 지금 막 올라온 거야. 비서실에서 특실 잡아놓으라고 지랄도 개지랄을…. 흠흠. 아무튼지 간에 야, 이거가 무슨 뜻이냐? 김무영이….

“오메가랑 애 가진 거야?”

이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박….”

것 보라니까. 내가 대박 사건이라고 했잖아. 정 간호사의 얼굴이 어이없단 듯 벙찐 걸 보고서야 비로소 이 간호사는 뭐 그런 것 가지고 놀라느냐는 투로 태연하게 업무로 돌아갔다. 사실 더 찧고 까불 꺼리도 떨어진 차였다.

“오셨습니까.”

병실 문 앞에서 의사를 만난 무영은 인사하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담배 생각으로 초조한 무영은 입술을 말아 짓씹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의지로 무영은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애는.”

“건강합니다. 몸무게 3.95, 키 55입니다.”

“다른 애들에 비해서.”

“큰 편입니다. 상위 90퍼센트 이상 됩니다. 아무래도 본부장님이 크시니까… 하하하…. 흠. 흠.”

하려던 말을 다 못 하고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애 엄마, 애 아빠들이 좋아하는 멘트란 하나같이 비슷했다. 평균이 무엇이 됐건 간에 그것 이상일 것. 그러나 입에 발린 말을 듣는 무영의 표정은 심드렁하다 못해 차가웠다. 의사는 그것이 자신의 의학적 소견이 재미없어서인지, 아니면 저 오메가의 가치가 그만 못해서인지를 정밀하게 판단한다. 특실에 넣어놓은 걸 보면 후자는 아니다. 그래야만 했다. 이건 기회였다. 김무영 애를 낳아놓은 오메가의 담당의라니, 여기서 잘하면 앞으로 뭐가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공률 높은 아부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인상을 찌푸리는 무영에 의사는 앞으로는 시키는 말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이건 못 참겠다. 이 말을 듣고 김무영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 미치겠다.

“그리고, 저…. 우성 알파입니다.”

아무 감흥이 없는 무영을 보며 이런 씹새끼. 또 졸라 포커페이스 치네, 라고 의사는 구시렁거렸다. 좋아서 날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오면 내가 뭐가 되나? 아무튼 간에 재수 없는 새끼라니깐.

무영은 의사를 무시하며 손끝으로 문을 밀어 만든 틈으로 병실을 들여다보았다. 조심스럽고 애틋한 동작이었다. 놀고 있네, 라는 생각이 두 눈에 역력하게 띄운 의사를 모른 채로 무영은 여래를 찾았다. 손 한 마디쯤 열린 사이로 엿보이는 병실은 어두웠다. 낮은 진동음을 내는 가습기 너머 뿌옇게 흐려진 여래를 노려보는 무영은 아침의 상황을 떠올렸다.

새벽에 양수가 터져 택시로 병원에 들어온 여래의 상황을 알린 건 미리 언질을 해 둔 원무부장이었다.

주여래, 이 지독한 새끼. 무영은 이를 갈았다. 애를 품고 있는 내내, 응급실에 실려 들어갈 때까지도 주여래는 연락 한 번을 안 했다. 우연이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단 듯 대학병원에서의 진료도 보지 않았다. 최준혁이 실종된 이후 주여래가 집 밖으로 나와 볼 때란 일주일에 한 번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하는 십 여분이 전부였다.

준혁이 사라진 후 여래가 자신을 찾을 줄 알았던 무영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답답함에 집 앞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준공 이십 년이 다 된 영등포의 아파트 입구에서 믿을 수 없으리만치 느리게 플라스틱 물병에서 비닐을 떼어내는 여래를 보았다. 여래는 녹고 있는 듯 작았다.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붙였다. 삼일에 한 번씩 보고가 올라왔다. 한 줄 또는 두 줄 분량이 고작이었다.

강 실장이 조달한 인력사무소에서는 주여래가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아 보고할 것이 딱히 없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가끔은 두 번 아이 용품이나 장을 본 먹거리 정도가 택배로 배달되는 게 전부라고도.

하이, 모시모시. 탈탈 털어도 그게 전부인디 그럼 나가 지어서 보내야 쓰겄소? 소설 한 번 써 볼까 으쩌까. 그르지 말고 뭐 샀는지는 안 궁금하시오, 사장님? 송장 찍은 거랑 담보루 포장이랑 사진으로 찍어는 놨는디. 중년 남성의 때 낀 목소리에 무영은 그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대신 화살받이가 된 건 강 실장이었다. 이번에도, 저번에도 같은 업체를 접촉한 게 강 실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건을 들먹거리며 ‘저번’의 지시 역시 제대로 해결했는지 모르겠다고 괜한 트집을 잡는 무영에게 강 실장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틀림없이 처리했습니다. 그쪽으로는 특화된 업체입니다. 사진 보여드릴까요.’

‘…됐어.’

휴대폰을 내미는 강 실장을 거절한 건 무영이었다. 최준혁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무영은 치워 달라 부탁했고 강 실장은 그걸 했다. 모든 건 예상대로 잘됐다. 여래를 빼고는 전부.

그 후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무영은 궁금했다. 여래는 아무도 집에서 혼자 오도카니 도대체 뭘 하는 걸까? 여래 집의 베란다는 새벽녘까지 켜져 있었다. 주차된 차 안에서 무영은 불 켜진 창을 노려보았다.

주여래. 빨리 나를 찾아와. 최준혁이 또 없어져 버렸잖아. 빨리. 어서. 나를 찾아. 달리 누구도 없잖아! 어서!

그러나 여래는 전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영은 깨달았다. 여래에게 무영은 없는 사람이었단 걸, 차선의 선택지조차 되지 못했단 걸.

원무부장에게 미리 언질을 해두지 않았더라면 무영은 여래의 출산 소식을 끝끝내 몰랐을 것이다. 일수를 보면 산달이 임박했는데 병원 검진에 통 오질 않는다는 게 며칠 전 원무부장의 보고였다. 그러던 중에 오늘 느닷없이 원무부장에게서 콜이 온 거였다. 강 실장을 거치지 않은 직통 전화로 연결된 무영의 음성에 원무부장은 놀라면서도 더듬거리며 주여래의 등장을 알렸다.

‘대강 주수가 찬 건 알았지만 갑작스럽네요. 본부장님. 듣고 계세요? 택시 기사가 들고 있던 수첩 보고 저희 병원으로 데려온 모양입니다. 양수 터져서 출산 대기실 지금 막 들여보냈습… 본부장님? 본부장님!’

그것이 오전, 병원을 뒤집어 놓았던 사건의 전말이었다. 무영은 벽에 걸친 팔에 이마를 기댔다. 의사의 과장된 리액션을 물리치며 무영은 물었다.

“애는 됐고. 주여래는 상태 어때.”

“컨디션은 나쁘지 않습니다. 혈압, 체온 모두 정상 범위입니다. 회복실에서 좀 오래 있긴 했는데 그래도 다 잘 됐습니다. 오늘은 못 움직이고요 내일부터 슬슬 일어나면 됩니다. 병동 안을 조금씩 걸어 다녀야 됩니다. 유착 방지 때문에요.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쁘지 않아?”

“네.”

“그런데.”

무영의 주먹이 벽을 내려쳤다.

“그런데 왜 저래!”

의사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승진의 꿈이 날개를 달고 하늘거리며 사라지는 걸 그는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어둑한 병실 안, 가느다란 울음이 흘러나왔다.

“준혁아….”

여래는 누운 채 팔을 뻗어 침대를 더듬었다. 불 꺼진 병실은 최소한의 조도를 유지하기 위해 머리맡의 안전등만을 켜두었다. 그 아래로 아이를 하나 뽑아내 형편없이 망가진 몸이 상처받은 짐승처럼 사위를 살핀다. 미닫이로 구분된 접객 공간과 병실의 사이에 선 무영은 그런 여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래는 무영이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심해의 물고기처럼 옅은 빛에 의지해 침대를 하염없이 쓸어내렸다.

“준혁아. 준혁아…. 어디 있어.”

주여래를 일인실로 들이는 데에 큰 수고는 들지 않았다. 병원은 무영 아버지 회사가 소유하고 있었고 오너 가나 오너 가가 편의를 제공하고 싶은 VIP를 위해 공실로 유지 중인 특실은 항시 대기 중이었다. 모든 것은 쉬웠다. 언제나처럼.

“준혁아…. 왜 없어?”

어려운 것은 여래의 마음이었다.

절개 부위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오늘 내일은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멀쩡하다면 주여래가 또 어디로 어떻게 튀어버릴지, 스스로를 감금해버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여래는 지금 여기 있다. 무영의 손아귀에 들어온 줄도 모르는 채로 무력하다.

안심해도 될까. 무영은 망설이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걸음 소리에 여래의 뿌연 시선이 그쪽을 향하자 무영은 찔린 듯 멈춰 섰다. 끝까지 연락이라곤 없던 여래가 자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준혁아? 준혁아?”

“주여래. 나는….”

“이리 와 봐. 잘 안 보여.”

최준혁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감히 그깟 것과 나를 동일선상에 두지 말라고도 일러두어야 했다. 그러나,

“준혁아 얼른 와. 나 무서워, 준혁아…. 나 아파.”

그러나 여래의 연약한 부름은 무엇보다 강력하게 무영을 침대 앞으로 이끌었다.

여래는 죽을 수도 있었다. 남성체 오메가의 출산율은 낮다. 수정에서부터 착상, 임신 기간 중 질병 발병과 출산 자체의 어려움에 이르기까지 전부 생명과 직결되는 위험을 수반한다. 그 사실의 무거움이 무영의 입을 다물게 만든다.

그렇게 센 척을 해대더니 꼴좋다. 여래를 보면 실컷 비웃어 주리라 다짐했었다. 지금까지의 지난한 기다림을 한 번에 보상받고야 말겠다. 무릎을 꿇려야지.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야지. 여래 따위가 무영에게 튕겨댄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리라. 하지만 위험한 순간을 혼자서 애써 넘기려고 했던 여래를 보자 결심은 무너지고 무영은 한없이 물렁해진다. 마르고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알 수 없었다.

세팅된 시간에 맞추어 수면 모드에서 깨어난 공기청정기가 세차게 공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약해진 탓인지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란 여래는 열없이 베개에 머리를 비볐다. 무영은 땀에 전 여래의 앞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눈을 감은 채로 할딱거리는 여래의 이마에서는 열감이 느껴졌다. 의사를 불러야겠다 싶던 그때였다.

“준혁아….”

주여래가 정상이 아닌 건 분명했다. 열에 들뜬 여래는 이마를 짚은 무영의 손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영은 여래에게 눈을 뜨라고, 자신을 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눈을 떠서 보면? 무영을 알아채면?

“준혁아. 애기, 애기는?”

열과 잠을 헤매면서도 찾을 사람들을 잊는 법은 없구나. 무영은 목 안에 고인 쓴 말을 그대로 삼켰다.

“애기….”

“잘 있어.”

네가 원하니까. 아니, 내가 그런 널 원하니까 지금은 넘어간다. 당장이라도 네가 이 병실을 기어서라도 빠져나갈까 봐 그게 무서워서. 피와 진통과 애원 속의 분만대기실에서 너를 건져 올리던 순간부터 이러리라고 결심했으니까.

무영은 손가락에 얽혀드는 머리카락을 차근히 쓰다듬었다. 손길에 따라 얼굴이 따라오는 순진한 여래와 이 평화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여래 또한 마찬가지였다. 흐릿한 눈으로 무영 얼굴 언저리를 더듬는 여래는 틀린 그림 찾기 중이었다. 눈의 모양, 귀의 생김새. 만지는 손길. 왜, 왜 이렇게 다 낯설까. 이상하다. 그러나 더 파고들기에는 힘이 부친다.

준혁이었다. 준혁이어야만 했다. 준혁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여래는 그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준혁아 너 봤어? 우리 애기. 다… 멀쩡해?”

봤다. 간호사들이 애를 들어다 여래의 심장께에 가져다 대는 것까지 봤다. 호흡을 검사하려 애를 울리자 여래는 같이 울었다. 눈물 한 방울 없을 것처럼 쌀쌀맞게 굴 때는 언제고 아이를 보자마자 헤퍼져서 훌쩍거리는 여래는 꼭 어린아이 같았다. 아이가 두 명인 분만실에는 울음이 가득했다.

“어디 갔었어. 준혁아….”

여래는 다시 흐느꼈다.

“나 혼자… 어떡하라고…. 나 너무 미칠 것 같은데… 너, 너는 없고…. 경찰서에도 갔었어. 그런데 다, 아무도, 아무도 내 얘길 안 들어줘. 실종이 아니라 가출일 거래. 그런 일은 너무 많데. 흔하데.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아무도 너를 안 찾아줘서 난, 나는…. 애기를 또 흘릴까 봐서. 잃어버릴까 봐서 돌아다닐 수도 없었어. 그럼 나한텐 정말 아무도 없는 거잖아.”

“울지 마.”

“우리는 갈 데도 없으니까. 집뿐이니까….”

그래서 집에 틀어박혔었구나. 최준혁이 돌아올 장소여서.

여래는 금방 태어난 아기보다 많이 울었다. 울면서도 그걸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여래가 퇴행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보고 있는 것이 김무영이 아닌 최준혁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영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이제 왔잖아.”

“준혁아. 정말, 여기 있는 거지?”

“….”

“안아줘.”

들어 올린 팔이 힘없다. 무영은 여래의 등 뒤로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준혁아.”

시큼한 냄새가 나는 주여래는 누가 토해놓은 덩어리 같았다. 그런데도 무영은 안긴 여래가 아픔으로 신음할 때까지 팔에 준 힘을 풀 수가 없다. 여래는 금방 꿰맨 자리가 거북한 듯 뒤챘지만 무영은 놓아주지 않는다. 무영은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렸다.

“준혁아. 준혁아.”

이건 최준혁을 부르는 주여래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이 얄팍한 순간은 언제라도 부서지기 위해 준비되어있었다. 그러나 아직 붕괴의 조짐은 없다.

“준혁아.”

그렇다면 조금쯤 이용하면 어떤가. 여래 입술에서는 마른침 냄새가 물큰했다. 침입한 혀를 맞아 유순하게, 또 익숙하게 제 나름의 방법으로 혀를 얽어오는 여래에 무영은 정말로 제가 준혁이 된 것만 같았다.

“사랑해.”

누구의 입에서 나온지 모를 고백이었다.

* * *

방 안에 모인 의사들 중 가장 흰머리가 많은 쪽이 입을 열었다.

“일종의 지각 방어, perceptual defense랄까요.”

의사들 얼굴에 학위자들 특유의 여유가 참기름처럼 반지르르 돌았다. 무영은 말을 잘랐다.

“용어 쓰지 말고 쉽게 말해.”

“아아…. 그게 전문적인 내용이라.”

“이해시키는 것도 실력 아닌가? 내가 지금 대학생 과외 받으러 온 거야? 문제집 읊어주면 끝이냐고. 교수씩이나 돼서 교수입네, 하려면 문외한한테도 알아듣게 설명해야 할 거 아니야.”

흰머리는 입안에서 혀를 튕겼다. 싹수 노란 새끼, 지가 뭐나 된 줄 알고 거들먹거리기는. 흰머리 뒤에서 환자들이 하던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게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닌 것을 잘 알겠다. 속을 눌러 참은 흰머리는 내색 없이 온화하게 말을 풀었다.

“회피하고 싶은 현실에서 소구하는, 그러니까 원하는 대상만을 보고 싶은 뇌가 인지 왜곡을 일으키는 겁니다.”

나대기로는 지기 싫은 안경이 재빠르게 이어받는다.

“인간 뇌가 본디 가진 기제機制입니다. 즐거운 자극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싫은 자극은 무시함으로써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현상이죠. 괴로운 상태에서 도망가고 싶은 욕구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하는 겁니다. 주여래 씨, 죄송합니다, 주여래 님의 경우 심리적인 방어를 넘어 적극적으로 상황을 자기 입맛에 맞게 보고 있는 겁니다.”

병원 내는 금연입니다. 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무영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는 무영에 안경은 설명을 하던 목소리를 점점 줄이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신경외과, 신경과, 정신건강의학과의 과장급 이상이 모여 내린 결론을 하찮아하는 무영의 표정이 서늘했다.

그러니까 주여래가 최준혁이랑 나를 착각하는 이유란 게, 최준혁은 없고 나는 싫은데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겠으니까 차라리 나를 최준혁으로 보겠다는, 그런 의미라는 거야?

창에 기대선 무영은 다시금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게….”

마주 보는 소파에 나눠 앉은 의사들의 눈이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부딪쳤다.

“현재 환자가 매우 불안정합니다. 체력도 많이 떨어졌고요. 회복실에서 나오는 과정도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혈압이 안 잡혀서 다른 환자들보다 오래 걸렸단 건 들어 아시고 계실 겁니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우울감도 있습니다.”

“섣불리 교정을 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심각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고려해 봐야 하구요.”

“일시적일 수도 있습니다.”

“혈청 치료가 색다른 방향으로 간섭했는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그…. 본부장님께서 받았다고 하시는 혈액 주입 시술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페로몬의 교란이나 간섭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곡을 일으키는 대상이 혈액 도너와 동일하시다고 하셨잖습니까.”

“체내 혈액 재생 주기가 있으니 그 문제라면 자연적으로 해결될 겁니다.”

“추이를 지켜보시죠.”

결국은 지금 손쓸 수 있는 방법은 없단 이야기였다. 무영은 물고 있던 필터를 잘근거렸다. 장황하게 썰 푸는 걸로 월급 받아 처먹는 무능력한 새끼들.

쾅!

재떨이를 집어 던지자 쉴 새 없이 쏟아지던 전문지식과 사견의 주절거림이 단번에 수그러들었다. 허공을 천천히 유영하는 재들 사이로 무영의 눈이 번득거렸다. 분노의 방향이 올바르건 그렇지 않건 무영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주춤대며 입을 연 흰머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찾는 사람을 데려다 놓는 게 제일 쉬운 방법입니다.”

무영은 창에서 몸을 틀었다.

“누가 고쳐 놓으래?”

“…예?”

무영은 여래가 끌어안아 잔뜩 구겨진 자신의 슈트를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 오른 담뱃재를 툭툭 털다가 만다. 여래는 담배를 싫어했다. 이 옷은 그냥 버려야겠다.

“주여래 현상 유지시켜. 방법 연구해 보고.”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돌아선 무영 뒤로 의사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좋아.”

김무영이 이거 완전히 돌았구만? 의사들은 서로가 하고 있는 생각이 너무나 빤해서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조차 않았다.

* * *

“준혁아, 나 육 인실로 가면 안 돼?”

의식을 회복하고 난 후로 여래는 줄곧 입원한 병실을 불편해했다. 그러나 무영에게서 궁상 좀 떨지 말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최준혁이 할 법한 대사가 아니었다.

“준혁아. 여기 불편하다…. 너무 조용해. 사람도 없고. 비싸 보이고…. 나 이런 데 있으면 안 될 거 같아.”

잠자코 선 무영의 손을 여래는 살짝 쥐었다. 여래는 최준혁에게서 늘 이런 식으로 원하는 걸 졸랐나 보다, 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손을 잡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겼는지 여래는 엄지로 무영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벌레 하나도 눌러 죽일 수 없는 형편없는 힘이었으나 그 연약함이 다정으로 오해될 만한 동작이었다.

“여기 하루 병실 값이 토스터기 백 개는 되겠다, 그치?”

토스터기를 말하며 여래를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무영은 왜 물건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 단위가 토스터기인지 이해할 수 없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최준혁은 이럴 때 여래에게 어떻게 말할까. 어떻게 여래를 만질까. 왜 지금 자신은 여래를 두고 최준혁처럼 생각하고 그를 흉내 내지 않으면 안 되는가.

“병원비 많이 나오겠어. 내가 다시 말해볼게. 육 인실 있을 거야. 바꾸자. 아님, 빨리 퇴원시켜달라고 할까 봐.”

“가만있어.”

“준혁아. 그래도 돈….”

모르겠다. 최준혁이 어쨌건 간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영에게는 늘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번번이 눈앞에서 여래를 놓칠 때마다 하고 싶었던 말이.

“넌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가만있으면 돼.”

여래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시간의 고삐는 여래가 쥐고 있는 듯 느리게 흐른다. 여래가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발각의 순간을 기다리는 초조함이 무영의 혈관을 채웠다. 모르겠다. 나는 무얼 원하는가. 여래가 자신을 최준혁으로 여기기를? 아니면 무영으로 보아주기를? 무영은 차라리 눈을 감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돈보다 아기보다 네가 제일 소중해.”

이것이 옳은 대답인지는 알 수 없었다. 딱딱한 음식처럼 무영의 말을 곱씹던 여래는 무영이 하자는 대로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웃으려 애써 노력하는 여래가 다시금 무영의 손을 고쳐 쥐었다.

“넌 어쩌면 항상 그대로니, 준혁아.”

속삭이는 여래의 말을 못 들은 척을 하느라 무영은 블라인드 너머의 풍경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최준혁 노릇은 성공인 모양이었다.

여래가 한숨을 자고 일어날 때까지 무영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지루할 줄 알았으나 누운 여래를 보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눈을 뜬 여래는 무영에 흠칫, 놀랐다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그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준혁아.”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익숙해져야 할 이름이었다.

“우리 애기, 손가락 몇 개야?”

“열 개.”

“발가락은?”

“열 개.”

의식을 회복한 후로도 거동이 불편했던 여래는 아직 아기를 안아보지 못했다. 일수로는 사흘째였다. 올려 보내라고 얘기를 해야겠군. 그러나 어딘지 여래의 표정이 걸렸다. 이건 기쁘고 들떠서 묻는 게 아니라 걱정과 염려의 느낌이다. 그렇게 바라던 아기였으면서 이제와 내외야? 하는 빈정거림도 없진 않았다. 단답으로 대꾸하며 뚱한 무영에 여래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렸다.

“다… 다 괜찮지?”

뭐가 궁금한지 모르겠다. 물끄러미 보는 무영에 이불 끄트머리를 쥔 여래의 손가락이 오무라들었다.

“나 때문에 혹시 뭐라도 잘못됐을까 봐서.”

무영은 여래가 덮은 이불을 당겨 내렸다. 이불 때문에 잘 들리지가 않았다.

“저번에도…. 나만, 나만 우성이었으면 유산도 안 되었을 거잖아. 그렇게 허무하게 애를 흘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주여래.”

“내가 열성이라서 그랬겠지?”

“….”

“그치? 준혁아.”

열성이라서. 열성. 열성! 예민한 단어가 무영을 마구 할퀴고 지나간다. 동류의 상처에서 맡아지는 피 냄새에 무영은 여래의 뺨에 구멍을 낼 듯 시선을 박아 넣었다. 무영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자신 마음을 온통 헤집는 여래가 뭐를 알고 저러는 것인지, 아니면 기가 막힌 우연들의 조합이 여래를 필연으로 느끼게 하는 것인지.

“몇 번이나 초음파 했어도 불안했어. 혹시… 혹시 잘못될까 봐.”

“나 때문에. 내 탓이니까.”

“엄마 아빠도 날 버렸잖아. 은애원에서도 날 싫어했잖아. 그러니까…. 항상 무서웠어. 난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 너도 나를 힘들어할까봐서….”

아니, 여래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무영의 가슴을 찢어발기는 이상한 힘이. 무영을 부드럽게 어질러 놓는 알 수 없는 힘이. 강력하지는 못해도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준혁아. 네가 없어진 꿈을 꿨어.”

여래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집에 네가 안 들어오는 거야. 연락도 안 받고, 찾을 수도 없고. 넌 갈 데도 없는데. 내가 싫어졌나.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러다가 깼어. 너무… 기분이 이상했어. 너도 날 버렸다고 생각하니까, 아, 드디어 이렇게 되어 버리는구나. 너도… 없어지는 거구나 싶으니까…. 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그런 일은 없어.”

탁한 여래의 눈빛은 무영의 얼굴을 느리게 훑어보지만 그것뿐이었다. 여래는 무영을 발견하지 못했다. 제왕절개로 봉합한 부위가 아픈 여래 대신 무영은 진통제 투약 버튼을 누르며 몸을 낮췄다. 여래의 이마 위에 짧은 입맞춤이 떨어졌다.

“내가 널 버리는 일 같은 걸, 어떻게 해.”

그런 일은 결코 없다. 오지 않을 것이다. 진짜 최준혁이 다시 나타나는 일도, 이제 최준혁이 된 무영이 여래 앞에서 사라지는 일도, 무영이 설계한 미래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아, 그냥 꿈이잖아.”

“더 자.”

“응….”

여래는 눈에 힘을 주었다. 자꾸만 준혁의 모습이 흔들거렸다. 너무 울어서일까? 이중으로 겹쳐진 상에서 초점을 맞추기를 포기한 여래는 그냥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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