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부 : 종장終章 (3) (18/23)

3부 : 종장終章 (3)

한식당 수라水刺

희원을 옆방 강 실장에게 맡기고 내실로 들어온 여래는 오랜만에 아이가 주는 무게감을 벗어난다. 하지만 그 감각은 자유로움이 아니라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위태로움이었다.

“앉지.”

의자를 빼주는 무영의 태도는 정중하다. 아까의 다툼을 찾아볼 수 없게 배려가 넘친다. 여래는 필요 없다는 말을 포기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여래는 무영의 이런 과시적인 친절들이 주변에 대한 신호임을 알고 있었다. 여래를 케어하고, 보호하는 것이 무영이므로 여래에 대한 도전은 무영에 대한 선전포고가 되리라는 무언의 언어 말이었다. 미리 건너편을 차지하고 앉아 여래와 무영이 방 안에 들어서는 내내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던 여자는 여래가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기어코 한마디를 던지고야 말았다.

“꼬챙이 같구나.”

인사도 생략한 직설이었다. 여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어요.”

“보낸 보약은 먹고 있니?”

“네….”

“우울증약은. 꼬박꼬박 복용하지?”

“….”

“왜 이렇게 대답을 우물거려.”

무영의 어머니는 반년에 한 번, 많으면 분기에 한 번 여래의 근황을 살폈다. 여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일부러 만든 자리가 이 어색한 점심이었다. 내리뜬 눈에 드리운 속눈썹의 그림자를 보며 무영 모는 입천장에 혀를 튕겼다. 장갑을 낀 손을 모으고 앉은 여래는 제 나이보다 훨씬 앳되어 보였다. 애를 한 번 뽑아낸 몸이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나잇값 못 하는 것도 품위가 없는 거지.

되뇌는 말이 차다. 특별히 여래를 미워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폄하였다. 집안에서 개를 재우지 않는 사람이 침대에 남은 개 발자국을 언짢게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불쾌 말이었다. 무영 모에게 여래는 절대로 동석할 수 없는 열성 오메가였으며 그랬기에 지금 함께 점심을 위해 모여 앉은 이 순간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고 있는 셈이었다. 속생각을 참는 것만 해도 많이 봐주는 것이었다.

코트를 벗은 여래가 헐렁한 목 주변을 가리려 니트를 당겨 쇄골께를 덮자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무영이 눈썹을 들었다.

“추워?”

“아뇨.”

“그런데 왜 그래.”

“그냥…. 허전해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도통 내색을 안 하는데. 빨리 얘기해. 온도 맞춰줄 테니까.”

“괜찮아요. 앞에 봐요.”

그런 무영이 무영 모는 언짢다. 저렇게 눈을 못 떼. 품위 없게. 아주 코를 빠트리고 다닌다니까. 무영 모가 입술을 앞니로 깨물자 아침에 받고 나온 단단한 화장이 조금 일그러졌다. 중졸로 목재소에서 일하다가 애를 낳았다는 오메가를 무영이 데리고 들어왔을 때 무영 모는 기함하기보다 안도했다. 사회, 경제적인 위치가 변변하지 못한 오메가였다. 결혼 전까지 욕구처리용으로 쓰고 버리기에 맞춤이었다. 게다가 우성 알파를 낳았다니, 붙어 살다 보면 무영의 애도 똑같이 낳아 놓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무영이 제법 똑똑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처음에는.

무영 모는 여지껏 여래 주위를 맴도는 무영의 걱정을 자르며 나섰다.

“약은 어쩌냐니까? 어른이 말씀을 하시면 먼저 대답을 해야지. 쯧. 가정교육이 이래서 중요해.”

“네. 둘 다 잘 먹고 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손을 모은 채 잠자코 있던 여래는 떨구었던 시선을 들어 무영 모를 바라보았다. 말라서 도드라진 콧날은 밝은 조명에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단정한 이목구비는 음영을 만들며 홍조 없이도 작은 얼굴에 부감俯瞰을 더했다. 창백하고 하얀 것. 살아온 이력을 모르는 사람에게라면 거의 기품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여래는 고왔다. 무영 모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깝다, 아까워. 아까워 죽겠네.

여래에게 아쉬운 거라면 우성 오메가가 아닌 점, 변변치 못한 배경을 가진 점, 기타 등등 손에 꼽을 수 없게 많았으나 제일 마음에 차지 않는 건 감기는 맛이 없는 저 무뚝뚝한 성격이다. 차라리 돈에 눈이 뒤집어져서 탐욕을 주체 못 하는 애라면 귀여웠겠다. 무영 모에게는 어떤 깊이와 너비의 욕망이든 채워줄 수 있는 재력이 있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줄 수 있었다. 대신 생색을 내야 했고, 여래도 저 자신을 갖다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세상 다 산 듯 구는 여래는 거의 모든 것을 거절했다. 집도, 차도, 폐물 나부랭이도 전부. 그런 여래에게 무영 모가 내밀 카드는 많지 않았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결핍이란 감정을 일깨우는 여래가 무영 모는 가소롭고 짜증스러웠다.

어디서 굴러먹은 줄도 모르는 오메가 주제에 청승은.

초장부터 여래의 기를 죽여 놓자 무영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이만하면 됐으려나. 무영 모는 새침하게 수저를 들었다.

“식겠다. 어서 들자.”

드디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하얀 잣가루를 올린 전복초, 시원한 서울식 김치, 씹을 필요도 없이 혀 놀림만으로도 녹아버리는 육전. 그러나 그 접시 어디에도 여래는 손이 가지 않았다. 무심히 젓가락을 놀리던 무영 모는 망설이는 여래에 다시 따끔하게 훈수를 둔다.

“왜 안 먹니? 맛이 없어?”

수면 아래의 네 주제에, 라는 단서가 가시처럼 박힌다. 떠밀리듯 얼른 집어 든다는 게 탕평채였다. 매끄러운 청포묵이 자꾸만 젓가락 사이에서 도망갔다. 여래는 진땀이 다 났다.

여래는 정말로 이 자리가 어려웠다. 다들 뭐든 말하라고 한다. 속시원히 털어놓으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원하는 걸 요구했을 때 그걸 들어주는 법은 결코 없다. 주춤대는 여래에 무영 모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들과 똑 닮은 표정이었다. 여래는 그 표정 앞에서 자꾸만 작아졌다.

“싫으면 타락죽이라도 하련? 소화가 안 돼서 그래? 여기!”

“아닙니다. 맛있어요. 새로 부르지 마세요.”

“젓가락질이 영 시원찮으니까 하는 말이잖아. 당기는 게 그렇게 없어?”

“먹겠습니다. 먹을게요.”

여래의 손에서 가죽 장갑이 뽀드득, 맑은 소리를 냈다. 무영 모는 생기 없는 수저질을 노려보았다. 나쁜 뿌리에서 좋은 열매가 열릴 수 없는 법인데. 어떻게 저런 것에서 희원이 같은 애가 나왔을까? 비난 중인 무영 모는 우성 알파인 자신에게서 무영이 나온 모순은 잊은 채다. 묻은 것도 없는 입술을 잘근잘근 눌러 닦는 무영 모에 무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말을 꺼내놓을지 벌써부터 뻔했다. 수저를 내려놓는 소리를 부러 크게 내 시선을 집중시킨 무영 모는 여래를 향해 당부했다.

“잘 먹어. 먹어야 낫지. 우울증약도 끊구. 몸도 좋아지고.”

“네에…. 감사….”

“그래야 무영이 애도 낳을 거 아니야.”

헤매던 여래가 겨우 동치미에 수저를 담갔던 참이었다. 수저가 기울어 놓친 국물이 여래의 허벅지를 적셨다.

“우성 알파를 낳아.”

무영 모의 눈이 불꽃을 튀겼다. 아주 뜨거운, 파란 불꽃이었다. 가뜩이나 방 안 전체에 뻗친 무영 모의 페로몬에 질식할 것 같던 여래는 수저를 쥔 채 파들거렸다.

“무영이 형이라면 더 확실했겠지만 너도 무영이도 그렇게 기겁을 하니 내가 참는다. 그래도 생각해 봐라. 무영이 형은 우성이니까,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 않겠니?”

“이런 씨발. 지금 누구한테 누굴 들이대요!”

“김무영, 넌 입 다물어! 어디 앞이라고 쌍소리야.”

무영과 무영 모, 둘의 눈빛이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내가 벌써 몇 년을 기다리는 줄 알기나 해? 처음에는 몸 핑계 다음에는 우울증 핑계. 약 끊은 다음에 시도한다고? 그게 도대체 언젠데! 언제까지 봐 줄 거야. 어?”

“엄마!”

“다음 애를 낳아. 무영이 애로. 우성 알파를 낳으라고. 희원이 낳은 영광으로 여즉 자리보전하는 거 서로 민망하지 않니?”

무영은 냅킨을 구겨 상 위로 던져버렸다. 어머니는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상대였다.

“무영이 애를 낳아. 우성 알파로 낳아 놓으라고. 그럼 내가 너 더 이상 귀찮게는 안 하마. 애만 내놓고 가면 돼, 넌. 그럼 뭐든지 들어주마. 뭐든지.”

여래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먹은 것도 없는 가슴이 꽉 막혔다. 생산성만이 중시되는 기계가 된 느낌이었다. 그래, 딱히 다를 것도 없었다. 무영 모에게 이미 한 번 우성 알파를 낳은 여래는 이력이 검증된 씨받이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무영 모가 여래를 싸고도는 무영을 봐준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무영은 와들거리는 여래의 팔을 붙들었다.

“일어나.”

“아직…. 드시고 계세요. 앉아요. 무영 씨.”

“일어나라고!”

무영은 여래의 팔을 당겼다. 허랑한 낙엽처럼 한들거리던 여래는 팔을 쥔 억센 힘에야 눈의 초점을 돌이켰다. 여래는 벌려 놓은 음식들과 그걸 앞에 두고도 행복할 줄 모르는 두 명의 고상한 인간들이 지긋지긋했다.

무영 모에게는 손주가 필요했다. 우성 알파이기만 하면 되었다. 무영이 가진 배태적인 결손을 인정하지 못해 다음 세대의 아이에게까지 뻗쳐나간 어머니의 집착에 무영은 진저리를 쳤다.

“엄마, 여래는 이만 들여보내요. 희원이는 다음에 보세요.”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둘째 아들, 끝까지 속을 썩이는 무영을 무영 모는 원망에 차서 노려보았다. 누구 잘 되라고 이러는 건데 지금 주여래 편을 들어? 감싸고 돌아? 무영 모는 여래와 무영 둘 다가 괘씸했다. 벌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무영 모는 여래를 불렀다.

“여래야.”

“…네.”

“무영이 결혼한단다.”

“어머니!”

무영은 거의 달려들 듯 테이블을 짚으며 나섰다. 그래,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김무영 네가 뭐라고 내 앞에서 되바라지게 굴어? 무영 모는 빙긋 웃었다. 주여래도 정신 차리게 할 겸, 무영이도 혼쭐을 내줄 겸 무영 모는 아직 증권가 찌라시에도 돌지 않은 신선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대단한 집안이랑 결혼시킬 거다. 금방이야, 내년 봄으로 날도 받았다. 혼전계약서부터 언론에 풀 첫 만남, 러브 스토리까지 다 준비됐단다. 무영이도 물론 오케이 했고. 내년 봄이라고는 해도 금방이야. 세밑이 코앞이니까. 결혼한 무영이 마음 잡아두려면 애 하나는 필요하지 않겠니? 희원이가 무영이 애도 아닌데 언제까지 그렇게 미적거리기만 할 거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도 이제 그렇게 넋 놓고 있을 여유 없다.”

무영이 결혼한다면 주여래가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걸 깨달은 여래가 어서 수그리고 나오길, 무영과 무영 모 앞에서 쩔쩔매길 무영 모는 기다렸다. 그러나,

“김무영 씨, 정말이에요?”

주여래 저건 속도 없을까? 왜 저렇게 듣던 중 반가운 말이란 표정일까.

“결혼해요?”

혹시, 설마 주여래 저게 우리 무영이를….

그럴 리가 없었다. 무영 모는 몸서리쳤다. 여래가 무영을 싫어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조각조각 나 있던 둘의 관계가 모두 맞춰진다. 식욕이 싹 가셨다.

무영은 여래를 끌어당겨 일으켰다.

“나와!”

이상해.

무영 모의 뇌까림은 여래를 데리고 일어난 무영이 인사도 없이 나가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으득거리며 살점 많은 고기를 씹는 뺨이 불룩거렸다. 주여래, 주여래를 어쩐다? 김무영 이 얼빠진 새끼. 요 몇 년 잘 한다 싶더니만, 이상한 것한테 물려 가지고선!

무영 모가 이 순간 어금니로 바수고 싶은 것이란 갈비찜 덩어리가 아니라 주여래였다.

무영 일행을 끝으로 손님을 받지 않은 한식당의 복도는 조용했다. 무영은 겨드랑이 사이에 끼운 여래를 안은 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가자.”

“놔요.”

“가, 그냥.”

“놔!”

비틀어 품을 벗어난 여래는 장갑을 벗어 복도에 던져버렸다. 드디어 맨손이 된 여래는 손을 그대로 눈으로 가져가 거침없이 눈알을 짚어냈다. 딸려 나온 소프트 렌즈가 희끄무레했다. 검지를 엄지에 비벼 렌즈를 떨궈낸 여래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차라리 이편이 편했다. 너무 선명한 적의, 너무 선명한 욕망, 너무 선명한 구속이 렌즈를 끼운 채로는 지나치게 여과 없이 보였다.

“그 말, 정말이에요? 김무영 씨 정말 결혼해요?”

무영은 여래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어조에 원망과 분노가 담겨 있길 바랐다. 하지만 무영의 바람과는 다르게 여래는 한없이 가볍고 산뜻했다. 익숙한 그 냉담에 살얼음 낀 마음이 다시 부서졌다.

“그래. 결혼해. 선 봤어. 어른들이 정하신 일이야.”

“그럼요? 난, 나는….”

무영은 여래의 말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무영이 결혼하게 된다면 겉으로 보기에 스폰서, 기껏해야 내연 관계였던 자신은 어떻게 되느냐는 뜻이었다. 무영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목소리가 자연 낮아졌다.

“내 결혼 너랑은 상관없어. 애건, 후사건 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지금이랑 똑같아. 결혼하는 쪽이랑 애 낳을 거야. 그게 서로 간에 깔끔하겠지. 혈연 문제로 시끄러워지는 거 그쪽에서도 원하지 않으니까 밖에서 들여오는 애 따위야 달갑잖을 테고. 어차피 어머니는 보험 삼아서 너한테 난리인 거니까. 넌 그대로 있으면 돼.”

“결혼한다면서요.”

“왜, 너를 버리기라도 할까 봐서?”

“결혼한다면서요!”

“너랑 상관없어!”

여래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영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죽어있던 여래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이었다. 여래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여래를 보며 무영은 정말 나쁜 새끼라고 중얼거렸다. 여래는 지독한 구두쇠였다. 마음 한 조각도 무영에게 나눠 주지 않는 자린고비.

“무슨 말이에요? 결혼하면 이런 이상한 관계도 나도, 희원이도, 다 정리해야 하잖아요.”

“아니. 내가 왜?”

“김무영….”

“전부 그대로 가.”

결혼과 여래는 무영에게 있어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결혼이란 이해타산이 맞는 집안끼리의 공적인 계약이다. 여래는 무영의 사유물이므로 배우자와 여래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결혼 상대방도 그것에는 이미 동의한 바였다.

“그런 이상한 일이 어디 있어. 김무영 씨. 한 달에 몇 번을 영등포로 오는데요. 저녁은 자기 집에서 자기 식구랑 먹는 거예요. 그런데…. 나랑 희원이가 왜 필요해. 말도 안 돼.”

“그럼 널 들여다 앉힐까? 너, 나랑 결혼할래?”

“…네?”

“희원이 정식으로 내 밑으로 들이고 너, 나랑 살래?”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무영도 그게 안 돼서 이러는 것이었다. 여래는 왜 그 간단한 사실을 여태 모르는지 무영은 거의 화가 날 지경이었다. 무영의 말이 의외를 넘어 충격이었는지 여래는 흠칫 떨었다.

“결혼 같은 거 다 관둘 테니까. 나랑 살자, 여래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그러면 넌 나한테 이런 것들을 다 받았어. 아무 마음도 생각도 없으면서 왜 가만히 있었어!”

“지금까지 받은 것들 전부, 전부 돌려드릴 테니까. 몇 년이 걸리든 갚을 테니까. 나 좀 가게 해줘요. 희원이랑 둘만 살게. 제발. 네?”

“그래서. 최준혁 찾으려고?”

“아…!”

무영은 여래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거칠게 부닥쳐오는 무영에 여래는 주먹을 쥐고 몸을 비틀어보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헤어나지 못하게 파고드는 힘은 올무처럼 여래를 온통 얽어매었다.

덫, 덫이다. 무영에게도 여래에게도 서로는 서로에 대한 덫이었다.

“멀쩡하던 새끼가 갑자기 어디로 증발돼서 사라져. 모르겠어? 최준혁은 널 버린 거라고. 아니면 죽었거나!”

“놔! 그만. 그만해! 아니야!”

“넌 나한테서 못 벗어나.”

“제발…. 놔!”

“절대로.”

무영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던 여래는 숨통이 끊어지듯 천천히 몸에 힘을 뺐다. 발버둥 쳐 봐야 완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경험으로 얻은 체념이었다. 틈을 벌리려 가슴을 밀치던 손을 잡아 무영은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입술 아래 꿈틀거리는 각인을 혀를 내어 핥는다.

“가, 이제. 강 실장 기다리겠다.”

“….”

“다음 주쯤 간다. 쉬어.”

여래의 입은 힘없이 뻐끔거렸다. 뭍에 오른 물고기처럼 익숙한 호흡법을 찾지 못해 괴로워한다.

“다음 주쯤이면 다 잊을 수 있지?”

차라리 자신을 최준혁이라고 생각하길. 그편이 여래에게도 무영에게도 최선이다.

“그동안 다른 생각 마. 자살도 도망도 한 번이면 족해. 더는 안 봐줘.”

여래는 그것들을 각각 시도해본 적 있었다.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그러니 무영 곁에 아직 머무르는 것이겠지만.

무영은 복도에 떨어진 장갑을 주워 내밀었다.

“끼워.”

손목을 가로로 자른 흔적은 여래가 희원을 낳은 아랫배의 수술 흉터보다 새것이었다. 여래는 제가 낸 그 상처가 싫었다. 희원을 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미안해서였다. 장갑은 최준혁의 흔적을 지우고 싶은 무영과 죄책감을 숨겨야 하는 여래의 이해가 닿은 결과물이었다. 무영은 장갑을 여래의 손에 단단히 끼웠다. 우스운 일이지만 어떨 때의 무영은 편하기마저 하다. 여래의 바닥과 심연을 전부 알고 있어 그 앞에서는 어떤 가장도 꾸밀 필요 없이 망가진 채로 있어도 좋았다.

“난 어머니한테 가. 그 난리를 부리고 혼자 들어가시게 할 수 없어. 그럼 정말 사달 날 테니까.”

무영은 여래를 부드럽게 밀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돌아온 길을 되짚어간다. 복도를 혼자 걷는 여래의 걸음이 느렸다. 소금으로 만든 인형처럼 점점 녹아내리던 여래가 풀썩 무릎을 꺾으며 아래로 쓰러진 건 코너를 돌고 나서였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 실장이 무너지는 여래를 받아들었다.

탁.

무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사를 거진 끝내가던 무영 모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별이 길다?”

“엄마. 그만해요.”

“뭘 그렇게 길게 작별인사야? 언제든지 가서 보면 될걸.”

“몸도 성치 않은 애예요. 아시면서 왜 이렇게 몰아붙여요.”

무영은 여래가 수저를 담갔던 동치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중에 강 실장더러 여기 동치미 좀 여래에게 넣어주라고 말해야겠다. 생각에 잠긴 무영을 불러일으킨 건 무영 모였다.

“넌 주여래한테 너무 광적이구나.”

핀잔인지, 아니면 거기 무슨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낱낱이 읽히는 기분이 언짢다. 노려보는 무영에게 무영 모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영아, 내가 힌트 좀 줄까?”

무슨 쓸데없는 이야길 늘어놓으시려 저러실까. 짜증이 앞선 무영이 표정을 숨기질 못하는 걸 보며 무영 모는 혀를 찬다.

“너 여래 못 버리지. 좋아, 그럼 끼고 살아. 그게 흠도 아닌 세상이니까. 그런데 있잖니. 주여래 데리고 살려면 걔한텐 휘둘리진 말아야 네가 편할 거 아니야. 주도권은 너한테 있어야지.”

“어쩌라구요.”

“희원이 뺏어와.”

무영은 이마를 찌푸렸다.

“어머니.”

“희원이 뺏기면 여래 난리 나겠지.”

“아시면서 그래요?”

“너 지금 그게 무서워서 못 하는 거야? 정신 차려, 김무영!”

무영 모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영은 자신과 똑같이 닮은 얼굴을 노려보았다.

“왜 이래요. 여래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요. 어디까지 참견하실 거예요.”

“주여래가 감히 반항 못 하게 하란 말이야. 어디서 대거리며, 어디서 싫은 양이야. 나 그 꼴은 못 봐. 주여래 따위가 너한테 뻗대는 꼴 따위!”

무영 모는 물 잔을 들어 카랑한 목을 적셨다. 안 그래도 키우면서 서운한 데가 많은 무영이었다. 열성 알파, 자신의 오점. 하지만 그것을 포함해 모두 그녀의 자식이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감히 오메가 따위가 내 새끼를 얕봐.

“희원이 한남동으로 데려와라. 여래가 무릎 꿇고 싹싹 빌 때까진 소식도 들려주지 말고.”

“…여래 죽는 꼴 보려고 그래요?”

“김무영. 여래한텐 네가 거꾸로 굿을 해도 똑같아. 애면글면해도 똑같고 인륜 저버리는 짓을 해도 똑같다고. 이 등신 같은 자식아. 어쩌다 한 번 보는 나도 눈치 챈 걸 왜 너만 몰라.”

“엄마.”

“걔 너 좋아 안 해. 내가 틀렸니?”

할 말이 없다. 오늘로 벌써 몇 번째 확인사살인지 모르겠다.

“그럼 더 뺏어와야지. 너한테 붙들어 놓으려면.”

그래. 여래는 무영을 사랑하지 않는다. 무영이 무슨 짓을 하든 여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무영은 깨달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여래가 도망치거나 자신을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편이 무영에게는 더 효율적인 일일 것이란 것을.

“오랜만에 애기 재롱 보겠구나. 아유, 기대돼.”

무영 모가 읊조리는 한가한 타령을 무영은 귓등으로 흘렸다. 새삼스럽게 여래가 할퀴고 간 가슴이 지끈거렸다. 아직도 아플 심장이 있다니, 펴지지 않는 미간을 문지르던 손이 무영의 눈을 덮었다.

* * *

나른한 햇살을 흩트리는 여래의 뒤에서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정 여사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가만 좀 있어.”

“….”

“그냥 가만히 누워있으라고. 사람 곤란하게 왜 이러니, 여래야.”

안절부절못하던 정 여사는 여래 손의 걸레를 빼앗아 던져버렸다.

“아, 왜 그래 정말! 다 죽어가게 생겨 가지고는 하는 게 청소야?”

거실에 둘러진 체리색 걸레받이 위가 반짝반짝하다. 여래는 제 손을 빠져나간 걸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속상해, 정말. 속상해 미치겠어.”

정 여사는 뺏은 걸레로 썩썩 거실을 닦아 나갔다. 흐린 정신이 되돌아올 때면 유난스럽게 청소를 해대는 여래였지만 이번에는 아주 집을 다 뒤집어 놓는다. 그 뒤치다꺼리에 정 여사 힘이 부칠 지경이었다. 큰 사모님까지 만나는 날은 늘상 이랬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강 실장이 희원을 데리고 나간 후 여래는 아예 혼이 나가버렸다. 밑에 층 자기 집에 있다가 소란에 계단으로 올라와본 정 여사는 여래를 뜯어내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강 실장에 심장이 터질 뻔했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열린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여래를 일으키며 정 여사는 중얼거렸다. 발자국이 어질러진 거실이 섬뜩했다. 그러니까 김무영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살살거리라고 입맛에 맞게 굴라고 했는데. 김무영이 뿔나서 뭔 짓을 해도 할 줄 알았다고 정 여사는 여래에게 자랑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애를 빼앗아갈 줄이야. 어휴, 독해빠진 인간들.

“여래야 식탁에 앉아. 미음이라도 먹자. 응?”

답은 없었다. 다 늙은 아줌마를 애먹여도 유분수다. 속으로는 늙었다 생각도 안 하면서 정 여사는 괜히 그렇게 자길 칭하며 치미는 부아를 돋웠다.

“밥 먹으라고!”

겨우 식탁으로 불러와도 여래는 알갱이가 간간한 희원의 이유식을 헤집기만 했다. 아기용품이 눈에 띌 때마다 곡소리를 내는 여래에 보이는 대로 작은 방에 밀어 넣어둔 희원의 물건 중 정 여사가 미처 치우지 못한 이유식이 식탁 구석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정 여사는 아차 싶었다.

“여래야 이리 줘.”

여래는 이번에는 빼앗기지 않겠단 듯 이유식 그릇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저었다. 필사적이고 애처로운 동작에 정 여사는 차마 더는 밥을 재촉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정말 일 치르겠어. 정 여사는 걸레를 앞치마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휴대폰이 걸레 끝에 밀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무슨 수를 내야지. 정 여사는 호들갑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이고. 맞아. 보일러 켜 놓고 그냥 나왔네. 빈 집에 무슨 보일러야. 호강이 넘쳐 요강에 받치는 것도 아니고. 여래야 나, 잠깐 아래층 좀 내려가.”

여래는 베란다를 통해 쏟아지는 햇살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대답할 기운도 없어 고개만 깜빡 수그렸다 드는 여래는 정 여사를 그대로 보내준다. 추궁하지도 않는데 괜히 켕긴 정 여사는 앞치마 속 휴대폰을 움켜쥐고 엄포를 놓았다.

“갔다 올 때까지 여기 그릇 싹 다 비워놔. 알았지? 안 먹기만 해봐라 그냥.”

역시나 답은 없었다. 저 답답이, 멍충이! 정 여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상구 표시가 간당간당하다. 그 앞에 선 정 여사의 심경도 딱히 다르지 않다.

“흠흠, 아이. 이거 뭐라고 해야 돼. 성질에 안 맞게 진짜 뭐 하는 짓거리야.”

내려가는 층계참에 서서 휴대폰을 노려보던 정 여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정 여사는 차라리 받지 말아라 하며 눈을 질끈 감고 저장된 번호를 누른다. 그러나 상대방은 오래 정 여사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었다.

“여보세요?”

-네. 저, 여기 영등포인데요….

성북동, 한남동, 청담동으로 자기 소개의 첫 문장을 시작하면 참 좋겠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소망을 품었던 기억도 희미하다. 여래가 멀쩡해야 성북동 한남동 청담동도 시도를 해볼 게 아니냔 말이다. 정 여사는 마른 목에 침을 삼켰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아뇨. 아니요. 저희 안녕 못 해요.

어제 받았던 전화를 오늘 받는 듯한 김무영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정 여사는 휴대폰을 고쳐 쥐며 숱하게 봐왔던 드라마들을 떠올렸다. 이럴 때 도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하더라? 콱, 야코를 죽일 말솜씨의 부재가 아쉬워서 정 여사는 죽겠다.

“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무 일 없다 못해 느긋하기까지 한 무영에 분통이 터진다. 이 개새끼가! 무슨 일이 있었냐니, 너희들이 애 뺏어갔잖아! 하지만 정 여사는 최대한 누그린 채 조곤하게 고해바친다.

-저기, 김 이사님. 둘러 말 안 할게요. 다 아시잖아요. 여래 죽게 생겼어요. 제가 엔간하겠으면 전화 안 드리는데. 제발 데리고 가서 수액이라도 맞춰주세요. 이러다가 큰일 날까 봐 무서워요.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여기 들여다보는 사람도 통 없고 와주시지도 않으시면 어떡해요. 희원이까지 데려가시고 연락 한 통 없으시면 여래보고 죽으라는 거잖아요. 이러시지 마세요. 여래가 정 없이 군 건 알지만 원래도 정신 온전치 못한 거 아시면서 너무 심하시….

“여래가 나한테 전화해 보라고 했어요?”

-…네?

싸늘하다. 그 냉기에 정 여사는 잠시 수화기를 뗐다가 붙였다. 건너편의 무영은 쓰인 대사를 읽는 듯 담담했다.

“여래가 시켰느냐고요.”

-예? 아뇨. 그게 무슨 상관이….

“여래한테 직접 전화하라고 하세요.”

-저기, 김 이사님. 여래 상태가요 그럴만하지가 못해서요. 애 다 죽게 생겼어요.

코웃음이 가볍다. 정 여사는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하, 여래가 아직 급하지가 않은가 봐. 희원이 없이도 버틸 만한가 보네. 직접 나서지도 않는 걸 보면.”

-이사님. 상무님. 전무님. 아이고, 하나님! 있어 봐요. 여래가 뭘 어쩌라고요?

“끊겠습니다.”

뚜, 뚜.

“야, 이…. 죽일 놈아! 내가 희원이만 데리고 와 봐라, 이 씨부럴 새끼. 너는 사람을 죽어나는 꼴을 봐야 아, 진짜 힘들었구나 하냐?”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층계참을 왕왕 울렸지만 이미 끊어진 휴대폰 너머의 무영은 정 여사의 악에 받친 욕지거리를 들을 수 없었다.

* * *

부르르. 몸을 떠는 휴대폰에 무영은 보고 있던 서류에서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던 전화였지만 바로 받지는 않는다. 서류의 마지막 구두점까지 읽고 나서야 무영은 휴대폰에 손을 뻗었다.

-…저예요.

“네가 누군데.”

-….

“내가 너라면 알아들어야 하나?”

어깃장이었다. 스스로의 유치함이 부끄럽지만 이젠 그걸 숨길 노력조차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기는 했다. 여래는 되쏘아 오지 않았다. 벌써부터 순종적이다. 여래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무영은 의자에 깊게 기댔다. 어차피 굴절된 관계였다. 정상적인 대화 같은 건 불가능하다.

-…죄송합니다. 주여래입니다.

무영은 눈두덩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정 여사가 전화를 걸어온 지 꼬박 하루만의 일이었다. 제법 쓸 만한 여자였다. 무영이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여래에게 전해주었다. 해고는 보류하도록 하자.

-건방지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김… 이사님.

“할 말이 뭐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희원이 보게 해 주세요. 희원이 데려다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제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뭐든지 할게요. 제가, 제가….

“사무실 알지.”

정적이 흐른다. 수화기로 넘어온 여래의 숨이 간헐적이었다. 살이 얼마나 더 빠져있을지, 빠질 살이 남아있기는 할지 무영은 며칠 동안 보지 못한 여래를 눈 안에서 그려보았다. 곧은 어깨, 도드라진 쇄골, 마른 가슴, 예리한 칼로 저며낸 듯한 가파른 허리. 무영이 미칠 듯이 원하는 그 몸을.

“그리로 와.”

-그걸로 용서해 주실 건가요?

이걸로 나는 원하는 걸 얻었을까. 무영은 발아래 주단처럼 펼쳐진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여래는 끝까지 무영이 보고 싶었노라고, 무영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웠노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무영은 희원과 등가교환 될 무엇에 불과했다.

“너 하는 거 봐서.”

무영은 한쪽 입꼬리만으로 웃었다. 이제 최준혁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 여래에게 쩔쩔맬 필요도, 애달아 할 필요도 없다. 한동안은 그게 재미있었다. 무영은 믿었다. 최준혁처럼 굴면 최준혁에게 주던 사랑이 자신에게 옮아올 거라고. 하지만 여래는 멈춘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무영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걸 인정하기까지가 삼 년이 걸렸다. 긴 시간이었다.

“어디 한 번 잘해 봐. 내가 살살 녹게.”

무영은 휴대폰을 내던졌다. 원하는 대로 됐는데 기분은 최상이 되질 않는 게 이상했다.

똑똑.

서랍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무영은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비서의 안내 없이 여래는 바로 무영을 찾는다. 여래도, 무영도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무영이 뭐라기도 전에 옷을 벗는 여래는 허물처럼 코트를, 카디건을,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어 내리며 앞으로 걸어왔다. 셔츠만이 남았다. 여래는 단추에 손을 댔다. 마른 허벅지가 셔츠 단 아래로 뻗어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책상 너머로 여래를 보고 있던 무영은 몸을 일으켰다.

여래가 무영을 좋아했더라면, 사랑했더라면 일은 얼마나 쉽고 편했을까. 옷을 벗은 여래는 담담했다. 분노도 수치도 없었다. 그저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카드를 내미는 정도의 실용주의가 여래가 띈 감정의 전부였다. 그 무상한 눈빛에 무영은 증오를 느꼈다. 삼 년을 기다렸다. 여래가 부서질까 봐 마음 졸이며, 애타 하며 자신을 봐주기를 기도했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 긴 시간 동안 그렇게 괴로워하지 말 걸 그랬다.

“키스해.”

그럼에도 사랑했다. 문제는 그 지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온통 다른 알파에게 마음이 빼앗겨 그가 사라진 후로도 내내 사로잡혀 있는 이 오메가를 한심하다 여긴 그 방식과 똑같이, 무영은 사랑하고 있었다.

“하….”

여래는 무영과 유리창 사이에 끼어 어깨를 비틀었다. 닥쳐오는 무영을 받아들이며 서서히 힘을 빼는 여래의 뒤로 도시의 야경이 자욱했다.

* * *

평일 낮에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북적이는 백화점의 통로를 지나며 정 여사는 투덜거리다가 앞선 여래를 불렀다.

“저…. 여래야.”

정 여사는 여래를 더 이상 작은 사모라고 부르지 않았다. 유치한 놀이는 끝났다.

졸면서도 여래 손끝을 놓지 않은 희원이 멈춰선 여래의 기척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잠시간이라도 여래를 놓치면 다시 헤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희원은 집으로 돌아온 후로도 통 혼자 있질 못했다. 발이라도 닿아있어야 안심을 하는 희원 때문에 여래는 화장실도 못 갈 지경이었지만, 여래 또한 희원을 품에서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기란 마찬가지였기에 한 몸처럼 뒹구는 여래와 희원을 보며 한숨짓는 건 정 여사의 몫이 됐다. 뒤에서 유모차를 밀던 정 여사는 멍하니 쇼윈도를 보는 여래에 속이 시끄러웠다. 김무영에게 연락해보라고 볶아댔을 때 정 여사가 바란 건 멀쩡해진 여래였다. 저렇게 흐리멍덩해진 여래가 아니었다.

“여래야. 힘들면 들어갈까?”

“아뇨.”

“피곤하지 않아? 오랜만에 나왔는데.”

앤티크 주얼리의 소장전이 열리는 백화점은 관람객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유리관 안의 전시물들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채 고고했다. 보석들을 스쳐 지나가는 여래의 시선은 무심했다. 이미 여래의 손목에는 백금줄에 자잘한 다이아몬드가 무수히 박힌 팔찌가 걸려있었다. 일곱 개의 줄이 중간에서 한 번 꼬인 모양의 팔찌는 섬세하면서도 중후했다. 전시회를 연 브랜드에서 하이 주얼리로 새로 출시한 작품이었지만 무영은 전시관에 걸리기 전 입수해 여래에게 그것을 채웠다.

더 이상 여래는 희원을 핑계로 사양하지 않았다. 무영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았고 그걸 순순히 걸쳐 꾸몄다. 오늘도 여래는 오려 붙인 듯 쨍한 빨간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것 또한 무영의 취향이었다. 쇼윈도를 바라보는 여래의 얼굴 위로 유리 상자 안에 갇힌 보석들이 덧씌워진다.

나 꼭 왕관 쓴 토마토 같네. 멋쟁이 토마토. 희원이가 좋아하는 노랜데. 흥얼거리던 여래는 제 얼굴 위로 오른 보석들이 반사하는 빛의 유희들에서 고개를 돌려 정 여사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 뭐 좀 사세요.”

“내가 사긴 뭘 사. 그냥 들어가.”

“김무영이 그러래요. 뭐든 사드리라고요. 카드 줬어요. 여기요.”

“아휴. 내가 언제 그런 거 바랬니.”

“그 사람이랑 부닥치기 싫어서 그냥 받았어요. 또 혼나니까.”

정 여사는 가슴을 쳤다. 여래를 여기 땅에 붙들고 있는 건 여래의 손가락을 잡은 희원뿐이었다. 희원이 저 작은 주먹을 놓으면 여래는 풍선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다.

“아주머니. 천천히 보세요. 전 괜찮아요. 희원이랑 있을게요.”

여래가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 * *

“어잇, 씨. 사람 되게 많네.”

투덜거리는 케이를 스치고 지나간 커플이 서로의 귓전에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킥킥거리다 다시 앞을 향하는 커플에 케이는 괜히 크게 중얼거렸다.

“윤주만 안 바빴어도.”

듣는 사람도 없는데 같이 올 사람이 있다는 변명을 한다. 오늘도 윤주는 예약이라며 나들이를 거절했다. 윤주에게는 이것저것 신세를 진 게 많아서 뭐라도 사주고 싶었던 케이로서는 마음의 빚만 쌓이는 일이었다. 케이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먹을 거나 사갈까? 고기? 옥탑에서 휴대용 버너 놓고 고기를 구워 먹으면 맛있다. 그럼 무슨 고기를 살까? 한우, 맛있고 비싼 것. 입력되어있는 지식을 탐색한다. 백화점 지하에서는 한우를 판다. 그것이라면 윤주에게 충분히 보답이 되리라. 살까? 아니다, 저번 윤주는 이 돈을 주고 요만큼이 말이 되냐며 녹차먹인 돼지 삼겹살을 사간 케이에게 타박을 퍼부었다. 게다가 소고기는 돼지고기보다 비싸다. 위한답시고 소고기를 사갔다간 이번에는 욕만으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음, 그럼 옷이나 그런 걸 사줄까? 아님, 화장품? 케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제대로 포맷되지 않은 대뇌 피질의 어딘가, 무작위로 남은 숫자들 중 그것이 계좌정보와 접속 비밀번호를 의미한단 걸 알게 된 건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우회해 접속한 페이지에서 개인 보안 코드를 넣고 나자 조회한 계좌의 잔액은 케이가 그동안 상상해 본 일조차 없던 액수였다. 탈세를 위해 페이퍼 컴퍼니와 차명계좌를 전전하던 돈은 다국적은행의 스위스 본점에서 최종 마무리되었다.

케이는 돈을 바로 인출하거나 이체하지 않았다. 대신 메일을 썼다. 계좌주의 탈세를 당국에 신고하기 전 미리 고지해드린다는 내용이었다. 입막음을 위한 비용으로 세금의 약 십 퍼센트, 계좌 전체로 해당한다면 일 퍼센트에 불과한 액수만을 제시한 케이는 대단한 양심가였다. 금액은 곧장 입금되었다. 협회는 기뻐했다.

“무슨 전시회야. 보석? 우와.”

쇼윈도에 달라붙은 케이는 윤주를 떠올렸다. 아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윤주뿐이기도 했다.

“보석은 받으려나, 윤주.”

여러 번은 통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케이에게 갈취당한 계좌주들이 피해 신고를 하고 정보 누수의 원천이 은행 계좌였음을 알기 전 손을 떼는 게 현명했다. 케이는 이용했던 계정을 말소시키며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런 것들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졌다. 어쩌면 기억을 잃기 전, 케이는 그다지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생명의 위협을 받을 만한 입장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 케이가 상처투성이로 버려졌던 삼 년 전의 일도 설명이 된다.

“아아, 몰라아.”

그렇다면 이렇게 대낮에 얼굴을 내놓고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한 번 없어졌던 목숨이었다. 케이에게는 소중한 것도 지켜야 할 것도 없었다. 살아있어야 할 강렬한 이유 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

“죽이려면 죽여보라지.”

번 돈의 육십 퍼센트는 협회로 돌아갔다. 협회는 엉망진창이 된 케이를 주워다 고쳐놓은 일종의 재활용센터였다. 협회 임원들은 케이에게 거듭해 그 당시의 정확을 주입시키려 애썼지만 케이는 그 이야기를 전부 믿지는 않았다. 뇌의 역진을 통해 손상된 뇌를 초기화하여 재분화시켜 고친다는 획기적인 기술이 왜 전두엽 일부에만 적용되었는지부터가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탈세를 위한 다국적 은행의 계좌 정보 같은 것들만 선택적으로 남겨둔 이유도 뚜렷했다. 협회에게 금전화 할 수 없는 않는 정보란 폐기 대상일 뿐이었다. 협회는 케이를 기계의 부품처럼 여겼고 케이는 그런 취급에 익숙해져 있었다. 각인에 대해 의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느 밤, 케이는 계좌를 해킹해 번 돈을 세어보다 그것마저 지루해져 다운로드한 정보를 뒤적거리던 중이었다. 이북의 페이지를 무작위로 넘기던 케이는 손끝이 멈춘 단어에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각인刻印, 새기는 행위. 알파와 오메가가 상대방에게 절대적인 대상이 된다는 표식. 기하학적이거나 동심원의 패턴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나 개체 차이 있음. 대개 상대방과 패턴을 공유하며 신체 일부를 합쳤을 때 완성형의 표식이 드러나게 된다.

케이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등부터 손목으로 이어진 긴 덩굴손의 무늬는 잎사귀를 완성하지 못한 채 끝나있었다. 문신치고는 이상한 그림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강한 예감이 케이를 휘몰아쳤다. 이건, 각인이었다.

각인을 하자. …야.

헤어지지 않는다는 약속을.

케이는 진열장을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윤주, 이런 거는 하려나.”

백금 귀고리가 예뻤다. 어제 본 드라마에서도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에게 작은 상자에 넣은 비싼 물건을 주었다.

윤주는 착했고, 입도 무거웠다. 일정을 까다롭게 검열하는 협회 몰래 케이가 기억을 찾기 위해, 과거의 단서들을 건져 올리기 위해 확보한 낮 시간 동안의 알리바이가 되어준 것도 윤주였다. 협회 내에서는 케이가 피부과 치료를 위해 오후 오프인 것으로 처리되어있었다. 케이는 손등의 각인을 쓸어보았다.

각인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윤주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었다. 떠오르지 않는 과거에 얽매인 존재, 기억의 덫에 갇힌 수인. 그것이 케이였다.

각인의 대상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는 모르겠다. 어떻게 하고 싶다는 계획도 없었다. 그것은 명령과도 같은 명제였다.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듯 케이는 그를 만나야만 했다. 케이는 자신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만나 스스로를 회복하고 싶었다. 케이가 살아있는 무엇임을, 따뜻한 체온과 두 팔, 그리고 키스할 입술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죽어있는 기계의 부품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란 것을.

“아, 데이트하고 싶다.”

중얼거리는 케이를 피하며 팔짱을 낀 여자 두 명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뭔가 또 자신이 이상한 소릴 한 모양이었다. 케이는 물건을 가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 얼굴에 익숙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거울을 들여다보았었던가.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들을 충혈된 눈으로 지새웠어야 했는가. 부모도, 친구도, 연인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없었던 텅 빈 공백의 사람. 케이.

조금 어려워야 실력이 느는 거야.

그렇게 가르쳐 준 넌, 누구야?

이 바보. 멍청이. 난 너 싫어.

나를 싫어해도 좋아. 뭐라고 불러도 괜찮아. 다만 알려줘. 이렇게 그리워도 결코 기억나지 않는 너는 누구야.

치, 넌 내 이름은 아냐?

이름을 알려줘. 제발. 백화점의 복도에 케이는 혼자 서 있었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 머리 안쪽 깊숙이 숨겨진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막은 채인 케이를 사람들은 결코 참견하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게 좋아. 내가 모은 거야. 너만 보여줄게. 자.

빌어먹을. 제발 나타나. 나타나 줘. 너를 그리워하는 내게로 와.

케이가 마주 오던 누군가와 부딪친 건 바로 그다음의 일이었다.

그것은 부드러운, 잔잔한 바다의 수면을 할퀴는 파도와도 같은 진동이었다.

“죄송합니다.”

멍하니 백화점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게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며 케이는 얼른 부딪친 쪽을 향해 사과했다. 아이를 대동한 일행이 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멈춘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유모차 안의 아이가 작게 칭얼거렸다. 남자 하나와 중년 여성 하나, 그리고 유모차다. 기묘한 조합이었다. 케이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젊은 남자를 향해 머쓱한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세게 부딪친 건 아닌 것 같았는데.

“괜찮아?”

부딪친 상대방보다 동행인 중년 여성 쪽이 먼저다. 여자는 남자를 살피며 케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엄마와 아들인지도 모르겠다. 남자를 살피며 싸고 도는 여자가 안절부절못했다.

“잘 좀 보고 다녀요! 어휴. 눈을 어디다 뜨고 다니는 거야.”

“아니, 그게.”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구?”

피할 수 있는 기회는 그 쪽에게도 있었다. 뭐라 쏘아붙여 주고 싶은 걸 참으며 케이는 방어적인 미소를 띄웠다. 일부러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상대방의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팔찌가 팔뚝으로 기울었다. 남자가 차기에는 화려한 스타일이었다. 흠. 사회적인 함의에 대해 무지한 케이가 보기에도 그것은 엄청나게 눈에 띄는 장면이었다. 중년 여자가 한 번 더 남자를 붙들어 흔들었다.

“여래야, 괜찮으냐고.”

오메가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 케이는 상대방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초리가 긴 눈이 천천히 깜빡이며 케이를 마주 봐오다 걸려 넘어진 듯 우뚝, 멈췄다. 남자는 케이를 향해 빠르게 눈꺼풀을 떨었다. 남자는 색이 묻어날 듯한 빨간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싸구려는 아니었다. 사회 경제적인 활동이 제한된 오메가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알파에게 점유된 오메가가 되는 것. 케이는 한 걸음을 물러섰다. 치정 관계에 엮이는 건 질색이었다.

“어, 어떻게….”

남자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케이가 부딪친 코트를 그러쥔 여분 없이 바싹 마른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길 가다가 스친 것뿐이다. 그게 그렇게 큰 충격이었나? 케이는 슬슬 당황스러웠다. 짜증이라도 내고 빨리 지나가는 게 차라리 개운하다. 이렇게 빤하게 보기만 하는 건 조금….

사람 눈을 보고 이야기해야지.

갑자기 끼어든 음성은 제발 빠져라. 혼자 있을 때만 나왔으면 좋겠다. 이런 데서 두통이 생기면 곤란해. 케이는 이마를 눌렀다.

착하게 있어.

착하게 있으라고? 그런 말을 하는 너는 어디로 가는데? 어디에 있는데? 머리가 아파온다. 망했다. 시발. 여기에는 약을 건네줄 윤주도 없었다. 눈알이 뽑힐 것 같다. 압력으로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다. 더는 말하지 마. 머릿속의 너, 입 다물어!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하지.

다음엔 내가 널 찾을게.

긴 술래잡기를 하는 거야. 응?

준혁아.

“준혁아.”

자신을 부르는 것이 머릿속의 음성인지, 아니면 저 오메가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짓누르던 압력은 이제 심장으로 옮겨간다.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준혁아….”

그가 왜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가 부르는 이름 또한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는 천천히 걸었다. 마치 처음 걸음마를 배운 아기나 병석에서 방금 일어난 환자처럼 느리고 서툰 동작이었다. 케이는 속이 메슥거렸다. 두통 때문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강렬한 기시감이 관통하며 현재와 과거로 케이를 찢어발긴다.

“어쩌다가, 여기에.”

넌 누구야. 케이는 통증에 유린당하는 정신을 붙들려 애썼다. 자신을 아는 듯 나서는 저 오메가를 똑똑히 보아두어야 했다. 저 오메가는 나를 알고 있나? 그는 과거의 단서일까? 다른 이의 것임이 분명한 저 오메가가?

“왜, 여기에.”

예리한 단면을 드러내며 산산조각 나는 심장이 아프다. 오메가는 드디어 케이의 앞까지 왔다. 케이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정말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두통 때문은 아니었다. 케이를 못 박은 건 그리움이었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꼭, 이런 일이 있었다.

그와 내가 마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같은 일들이.

기억하지 못해도 감각으로는 남은 그 순간들이.

오메가는 자신 없는 듯 입술 새로 겨우 말을 잇는다.

“내가, 내가 이번에도 잘못 보는 건가? 내가 정말로 미쳐버렸나? 아니야. 아닌데. 정말인데. 너 정말 준혁이가 맞아?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정말로… 너야?”

느리게, 조심스럽게, 식물이 잎사귀를 틔우듯 서서히 움직이는 남자의 손의 케이의 뺨에 와 닿았다. 섣불리 만졌다가는 그 동작이 케이를 흩트리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는 손이었다. 누구도 케이를 이렇게 조심스럽게 만진 적이 없었기에 케이는 이상하게 구는 남자에게 반항할 수가 없다.

그 순간 팔찌가 난반사한 빛이 어지러웠다. 팔찌를 채워놨을 알파의 접근 금지의 신호는 케이에게 유효하게 먹힌다.

다른 알파의 오메가.

케이는 엊그제 레이저를 받아 테이핑한 손을 들어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을 쳐냈다. 가죽 장갑이 찰싹, 소리를 낸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준혁아.”

“제 이름이 아닙니다.”

의외로 자연스럽다. 몇 번이고 연습해왔던 상황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케이는 자기 전 한쪽 팔을 괴고 누워 상상했었다. 자신을 아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부터 해야 할까. 불면의 밤들 동안 프로토콜을 세웠다. 이건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나를 아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해야 할 일. 그 첫 번째. 긍정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정체와 의도를 파악하는 게 먼저다. 케이를 아는 인물과 과거의 케이와의 관계성을 알아내야 한다. 그가 케이에게 가진 감정은 무엇일까. 호의일까? 적의일까? 케이를 죽이려고 했던 사건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 의심은 소거법으로 제거해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완전히 믿지는 않겠다고 케이는 다짐했다. 케이는 과거를 상실했고, 기만이 끼어들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준혁아. 준혁이잖아.”

그러나… 자신의 과거에서 온 인물이 이렇게 온통 마음을 헤집어 놓을 만큼 아름다운 누군가이리란 것은 케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일이었다.

오메가는 세차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 아니야. 여기 봐봐. 머리에, 여기에 상처도 있어.”

이마부터 시작해 정수리를 향해 그어진 상처를 가리키는 오메가에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다치지 마. 그건… 나쁜 거니까.

“만지지 마!”

이 오메가는 나를 알고 있다.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 희미한 상흔마저 꿰뚫을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였다. 그렇다면 각인의 상대다.

남의 것임이 분명해 보이는 오메가. 그리고 케이의 오메가. 오히려 케이가 묻고 싶을 지경이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케이는 주변에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상하리만치 보는 눈이 많다. 지나가는 행인들뿐만이 아니다. 백화점의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입을 가리고 이쪽을 살핀다. 왜지? 그러나 오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시선을 끌어서는 곤란했다. 윤주와 약속한 시간도 촉박했다. 자리에서 벗어나려 케이가 몸을 돌린 그때 가슴팍이 시원하게 적셔졌다.

“이게…. 무슨!”

“어머. 미안해요.”

오메가의 동행이었던 중년 여자는 빈 컵을 들어 보였다.

“애기 컵을 들고 있는다는 게 다 엎질렀네, 어쩜 좋아.”

끈적한 주스에 아연한 케이를 두고 여자는 오메가를 자기 쪽으로 당겨 뭐라 일렀다. 넋을 잃은 오메가에 비한다면 여자는 거의 기능적이었다.

“세탁비라도 물어드려야 할 텐데, 번호 어떻게 되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이 먹어놓으니까 이제는 별 실수를 다 하네.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지. 어휴.”

“아니….”

“번호 여기요.”

케이는 대거리를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건 실수가 아니었다.

“꼭 연락 주세요.”

전화번호를 올린 케이의 손바닥을 접어 봉하며 여자는 손을 꽉 쥐었다 놓았다.

“꼭이요.”

* * *

시선들이 새삼 소름 끼쳐와 정 여사는 카디건의 앞섶을 여몄다.

“여래, 너 빨리 이리 와.”

“아줌마. 저기, 저기 준혁이….”

백화점이었다. 보는 눈이 많았다. 저게 여래가 말하던 그 준혁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래가 다른 누구에게 울며 매달렸다는 소문이 난다? 그럼 김무영이 어떻게 나올까? 희원을 데려갔던 무영이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주여래, 똑똑하게 굴어.”

희원을 데려갔던 무영에게 이제 정 여사는 마음이 떴다. 개새끼. 어디 애를 두고 장난을 쳐. 정 여사는 허부적거리는 여래를 붙들어 귓가에 속삭였다.

“너 또 애 뺏기고 싶니? 동네방네 소문낼 거야?”

청담동, 한남동, 성북동. 아, 이젠 안녕. 살아생전에 입성하긴 글러 먹었구나.

“나한테로 전화 올 거야. 너네 준혁이면 꼭 전화 올 거야. 그다음에 만나면 돼. 기다리자.”

사라지는 남자의 모습에서 끝내 눈을 떼지 못한 여래가 그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준혁이 맞아. 준혁이가 확실해. 준혁이에요. 준혁이라구요. 머리 안쪽에 아직도 그 애 아빠가 때렸던 상처가 있는데요. 내가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

“살아는 있었네. 니미럴.”

“그런데 있잖아요 아줌마.”

“왜.”

“준혁이가 이젠 웃어요. 아까, 웃었어요. 꼭….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가다 부딪힌 사람한테 하듯이 웃었어.”

여래는 얼굴을 가렸다. 어둠이 눈을 덮었다. 그 안에서 떠오르는 준혁을 기억하려는 여래가 필사적이었다.

“준혁이는 못 웃는데. 어떻게 그러지?”

내가 어떻게 아냐?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밀고 한 손으로는 여래를 끌면서도 정 여사는 부아가 치밀어 죽을 노릇이었다. 일 났네. 일 났어. 골치가 지끈거렸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다시 나타나. 여래가 겨우 김무영한테 몸이든 마음이든 열려는 찰나에 어떻게 이래! 미워죽겠어도 발붙이고 살려는 이 때 하필!

정 여사는 까드득 소리가 나게 어금니를 물었다.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었다.

* * *

“오늘 왔었다며.”

쨍그랑!

손에서 놓친 코렐 접시가 저희들끼리 부대낀다. 희원을 안아 올리려던 무영은 갑작스러운 소음에 그 방향을 쳐다보았다. 늘 하던 질문인데 유난스러웠다.

“괜찮아?”

“…네.”

“아직도 안 좋아? 눕든지 쉬든지 해. 보는 사람 불안하게 그릇 들고 왜 난리야.”

“네.”

깨진 그릇을 치우려는 정 여사가 여래를 비키게 하자 주춤거리며 물러난 여래는 팔뚝을 쓸었다. 손바닥에 걸린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여래는 조심스럽게 무영을 살폈다.

“팔찌 번잡스러운데…. 벗어도 돼요?”

“왜.”

“그냥요. 집에서만이라도 풀게요. 아까도 무거워서 실수한 거 같아서.”

“놔둬.”

무영은 희원의 뺨에 코를 비볐다.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태도였다.

“네가 조금 조심하면 될 거 아냐. 그렇지, 희원아?”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무영은 일견 평온해 보였으나 여래는 알았다. 그가 그런 식으로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섣부르게 말을 꺼내지 않는 건데 그랬다. 입술을 깨무는 여래 앞으로 희원을 안은 무영이 다가왔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

“안 하던 소릴 다해. 나한테 치떨려서라도 부탁이라고는 요만큼도 안 하더니 무슨 바람이야?”

“아니에요.”

“말도 많고 혈색도 돌고. 왜 그러지? 정말 무슨 일 있어?”

뺨을 타고 손등을 흘리며 묻는 무영에 여래는 고개를 피하며 손을 비꼈다.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 두려웠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다면 무영은 어떻게 나올까. 무슨 짓을 할까. 오싹해진 여래에게 다가선 무영이 꼭 둘에게만 들릴 만큼의 볼륨으로 속삭였다.

“임신, 아니야?”

그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는 신 침이 고였다. 빳빳하게 굳은 여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싫었다.

“아니에요.”

“어머니 기다리셔.”

“김 이사님 결혼한다면서요. 금방 소원 푸시겠네요.”

하지만 가장 역겨운 것은 정욕인지 집착인지 모를 김무영의 감정에 기생해 살아가는 비굴한 자기 자신이다. 여래 얼굴에 복잡한 혐오감이 불처럼 너울거렸다. 무영은 피식, 한숨을 흘렸다.

“내 결혼에 관심도 없으면서 그런 척하지 마. 뭐가 그렇게 또 마음에 안 들어. 며칠 누그러져 있나 했더니만.”

“왜요. 언짢으세요?”

“그 얘기가 아니잖아.”

“희원이 얼굴이나 잘 봐 둬야겠네요. 언제 데려가셔서 주제 파악시켜주실지 모르니까.”

“주여래.”

오늘따라 도발적이다. 무영은 빤히 흘러내릴 듯 큰 여래의 눈을 쳐다보았다. 며칠 고분고분하다 싶었다. 다시 고개를 치켜든 여래에 무영은 이를 악다물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좋다.

무영은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또 뭐 때문에 화가 잔뜩 올랐어? 어떻게 풀어줄까. 이번엔 뭐 살래. 차는 이미 했고, 팔찌며 반지며 있는 것도 싫어서 빼니까…. 그래. 기왕에 쇼핑하는 거 비싼 거 쇼핑해라, 여래야.”

불안한 활기였다. 여래는 팔뚝을 쓸며 무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사 준비해.”

“네?”

“너도 안정됐고, 우리도 이렇게 됐으니까 더 이상 여기 살 필요 없잖아. 여기 올 때마다 기분도 더러워. 애 교육상도, 보안상도 후지고. 원래부터도 마음에 안 찼어. 너 때문에 참은 거지.”

“무슨…!”

“어디 살고 싶은 데라도 있어? 어디든지 좋아. 찍어와. 내일이라도 옮겨 줄 테니까.”

밝아진 무영에 희원이 덩달아 방긋거렸다. 여래는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싫어, 내가 왜 이사를 가요. 난 안 가. 난 여기가 좋아요. 여기서 희원이 낳았어요. 이때까지 키웠구요. 이 집에서요!”

“주여래. 너 아직도 기다리니?”

여래의 눈이 흔들렸다.

“최준혁 말이야. 아직도 기다리느냐고.”

무영은 장난처럼 희원의 눈을 가렸다가 풀었다. 없어졌다 나타난 무영에 희원은 놀랐다가 까르르, 밝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영은 이번에는 귀를 막았다. 입내로 벙긋거리는 무영의 장난에 희원은 소리가 없어진 줄 알고 또 놀란다. 무영은 희원을 어르며 코를 살짝 쥐었다 놓았다. 희원은 이번에도 방긋 웃었다.

“하나만 확실히 할까. 최준혁이 돌아온다고 해도, 너는 최준혁에게 못 돌아가.”

“무영 씨, 그만해요. 이 얘기는 그만…. 제가 죄송합니다. 김 이사님.”

“너, 나랑 잤잖아.”

와들와들 떠는 여래는 추워 보인다. 하지만 무영은 다가가 어깨를 안아주지 않았다. 여래는 어차피 거절할 터였다. 무영은 거절이 지겨웠다. 그러느니 차라리 냉정을 가장하는 게 낫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 너는 나랑 잤고, 희원이는 나를 아빠로 알지. 네가 먹는 거, 숨 쉬는 거, 디디고 선 땅 한 뼘마저도 내 지갑에서, 내 호의에서 나온 건데 그걸 어떻게 설명할래. 아니, 최준혁이 그걸 이해할까? 그러는 넌 최준혁을 이해하니? 그 새끼는 네가 아파도, 애를 낳을 때도, 네 정신이 들어왔다 나갈 때도 여기 없었어. 넌 그걸 용서해? 갑자기 떠났다가 훌쩍 돌아온 그 새끼를?”

무영은 팔찌가 걸린 여래의 손목을 잡아 가슴께로 당겼다.

“이제 와 뭘 어떡하겠단 거야. 여기서 최준혁 기다리는 거? 좋아. 천분의 일, 만분의 일로 최준혁이 돌아온다고 해. 그래도 너희 둘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일은 없어. 너희는 이제 좁은 골방에서 시시덕거리던 애새끼들도, 연인도, 아무것도 아니야. 멋대로 해. 여기서 최준혁 기다려 봐.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데.”

“그만…. 제발 그만.”

“다 끝났어. 너희들 감정이란 것도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눈물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겨울, 소담한 눈발같이 여래의 뺨을 흩트리며 나리는 눈물을 보며 무영은 생각한다. 신비로울 정도로 느닷없는 이 결정의 근원은 어디일까. 하늘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그 근원을 찾을 때처럼 무영은 뚝, 뚝,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는 여래를 보는 데서 싫증을 느끼지 못한다.

“울고 나면 저녁 먹자.”

어차피 최준혁과 살아 재회하는 일 같은 건 없을 거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무영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비밀도 물론 털어놓지 않는다. 여래를 단념시키기 위해서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영과 여래가 이야기하는 동안 세탁기가 들어간 좁은 베란다에 서 있던 정 여사는 앞치마에 넣어둔 휴대폰 진동에 화들짝 놀라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숨통이라도 끊어놓을 듯한 손아귀 속에서 발신자 알 수 없음, 이라는 문구가 요동쳤다.

“칫. 뭐야.”

발신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

“왜 안 받아.”

케이는 휴대폰을 침대로 던지며 함께 그 위로 쓰러졌다. 맥이 탁 풀렸다. 하루 내내 고민한 것치고는 힘 빠지는 결과였다. 뒤를 밟으려 했지만 백화점 지하에서 고운 선물처럼 차에 넣어진 오메가는 요금도 지불하지 않고 주차장 입구를 빠져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그쪽에서 연락을 받지 않는다면 케이 쪽에서 그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놓치다니, 어이없는 일이었다. 내일부터 백화점에서 진이라도 치고 있어야 하나? 다시 우연에 기대서 발견되길, 발견하길 기다리며?

케이는 휴대폰의 화면을 두드렸다. 사진이나마 건진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중년 여자에게 끌려 사라지는 그… 뭐라더라 이름이, 뭐라고 불렀었는데 그게.

“여래야.”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무슨 이름이 이런 줄 모르겠다. 들으면 잊을 수도 없게.

여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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