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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 종장終章 (4) (19/23)

3부 : 종장終章 (4)

무영이 고른 숨을 뱉는 걸 확인하고 여래는 눈을 떴다. 일으킨 몸이 추워 무어라도 입고 싶지만 무영은 잠자리에서 여래에게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모으고 턱을 기대자 팔 안에는 잔잔한 체온이 고였다. 커튼 너머로 옆 동 거실 등이 넘실거렸다. 동 간격이 좁은 아파트였다. 밖에서 보일까봐 키스를 망설이는 여래에 준혁이 커튼을 달아야겠다고 말했던 날을 기억한다. 그 날, 준혁은 커튼 봉과 피자를 사 왔다. 몸에 좋지 않다면서 콜라를 거절한 준혁은 아메리카노를 끓여서 혼자 마셨다. 괴팍한 입맛이라고 아무리 여래가 놀려도 소용없었다. 여래는 얼굴을 팔에 묻었다.

여기 있는 동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 한 시절, 준혁이 자신 곁에 있었고 넘치게 사랑받았으며 그 속에서 행복했었노라고. 그러나 마음을 위로하며 지켜왔던 사랑의 기억은 날의 방향을 바꿔 여래를 할퀴어댔다. 아물어 굳은살이 올랐을 법도 한 마음이 다시 들쑤셔지는 건 낮에 부닥친 남자 때문이었다.

분명, 준혁이었다. 손등에 습포제와 붕대를 붙이고 있어 각인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했다. 가르마처럼 정수리를 향해 곧게 뻗은 상처, 쇼윈도를 쳐다보던 무심한 표정,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윤곽과 느낌들. 모든 것이 다 준혁이었다. 여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내 애를 낳아, 그럼 그 애를 사랑하지.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 두 명이 돼. 너와, 아이.

그러나 그때의 준혁은 이제 없다. 여래는 피를 흘리는 상처 속에서 숨을 크게 쉬기마저 어려웠다. 무영이 옳았다. 준혁이 돌아와도 준혁과 여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비어있는 시간들이 너무 많다. 둘 사이의 결락을 메꾸기에 여래는, 또 준혁은 돌이킬 수 없이 멀리 와버렸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흐으….”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부딪쳐 놀라면서 준혁은 무심결에 웃었다. 준혁은 지금 행복한 걸까? 웃을 수 있게 된 걸까? 그를 짓밟았던 아버지를 잊었을까? 원감도, 폭력의 기억들도, 그리고 여래도?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크게 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받힌 울음을 참는 여래의 등이 희미하게 떨렸다. 무영은 아는 체하지 않았다. 청승도 병이었다. 체념에는 시간이 드는 법이니까, 하고 마는 무영이 돌아눕는 척을 하며 여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 *

주말, 오피스가 밀집된 도심. 주로 인근의 직장인들을 상대로 하는 커피숍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시간과 장소를 골라 연락을 취한 건 여래였다. 사람 눈을 피해야 할 이유는 케이만큼이나 여래 쪽에도 많았다.

“자몽티요.”

여래는 망설임 없이 메뉴를 고르고는 케이를 위해 자리를 비켰다. 케이는 산더미 같은 메뉴들을 보며 위축된 어깨를 끌어올렸다 내렸다.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마다 케이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공백으로 비워져 있는지에 대해서 깨달아야 했다. 어휴, 뭐가 저렇게 많아. 그런데 저 사람은 저 중에서….

시고 떫고 단 걸 좋아하는구나.

케이는 여래를 흘끗 훔쳐보았다. 여래가 자몽티를 고르는 취향을 획득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궁금했다. 저 사람은 자신 안에 취향 시간들을 채워 넣고 있다. 텅 비어있는 자신과는 다르다. 케이는 가난하고 초라해진 기분을 감추려 메뉴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자몽티를 마시는 여래의 과거 중에 자신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그 시고 떫고 단 향기를 여래와 함께 마셨을까?

생각하는 케이가 주문을 망설이자 여래는 한 번 더 물었다.

“그쪽은요?”

“핫 ㅊ… 가 아니라 아메리카노.”

“핫 아메리카노, 따뜻한 아메리카노 말씀하시는 건가요, 손님?”

“네. 그거요.”

케이는 단 걸 좋아했다. 사실은 핫초코를 주문하고 싶었으나 그 이름이 주는 유아적인 느낌이 부끄러웠다.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먹을 때마다 윤주가 번번이 그걸 놀려댔던 게 떠올라 급하게 아메리카노로 선회한 케이는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슬쩍 여래의 눈치를 살피는 케이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감정이 곤란했다. 여래 앞에서 미성숙한 애새끼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근사해 보이고 싶은 이 마음은 도대체 무얼까. 허세? 과시? 케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여래는 골똘한 케이를 전혀 모른 채 조용히 위층을 가리켰다.

“이층으로 가요. 사람 적은 데로. 괜찮나요?”

그 말을 듣고서야 그러면 좋겠구나 싶다. 케이는 먼저 그 말을 하지 못한 게 분하기도 하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사람은 뭐든지 능숙하다. 모르는 게 없다. 케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메뉴를 주장하는 것조차도 서툰데 말이다.

“저기?”

따라오지 않는 케이를 향해 여래가 멈추며 뒤를 돌았다. 기억나지 않는 모습이었으나 가슴은 턱없이 일렁거렸다. 우스운 일이었다. 떠오르지 않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자신이 이상하다.

차는 천천히 식어간다. 묘연한 여래를 두고 안절부절못하던 케이는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팔찌가 예쁘네요.”

케이의 말에 손등께까지 흘러내려 온 팔찌를 흔들어 다시 코트 소맷부리 안으로 넣는 여래는 그때까지의 침착함이 무색하게 성급했다. 짤각이며 잔과 부딪친 팔찌에 자몽티가 튀었다. 못 보일 거라도 보인 듯한 여래의 태도에 케이는 괜스레 빈정이 상했다.

달라고 할까봐 그러나, 왜 저래.

케이는 삐죽거리는 입을 숨기려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나 어린아이 같은 입맛에 커피는 너무 써서 그는 그만 세게 컵을 테이블에 내려놔 버리고 말았다

“칭찬인데. 예쁘단 거.”

그리고 그쪽도 예쁘고. 결이 고운 코트를 입은 여래를 보며 케이는 중얼거렸다.

그래. 여래는 예뻤다. 그리고 부자처럼 보였다. 굳이 커피숍까지 그가 몰고 온 차종을 들먹거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맑은 안색과 손질된 머리카락만 봐도 여래는 보호 속에서 가꾸어진 태가 흘렀다. 여래는 지금의 케이와는 절대로 인연이 없을 부류였다.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꾸 손목에서 흘러내리는 팔찌를 의식한 여래가 아예 팔을 탁자 밑으로 내려버리는 걸 본 케이는 부루퉁해진다. 유난스럽다 싶은 여래에 불쑥 화가 치밀었다. 이유도 원인도 없는 감정이었다. 케이는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예쁘다고요.”

“아, 이건 저기….”

“제가 준 건 아니에요?”

괴롭히고 싶다. 물이 든 잔 같은 여래의 눈이 떨려 흔들리는 걸 더, 더 보고 싶다. 저 팔찌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내용은 아닌 게 확실했다. 케이는 과장스레 기지개를 켜며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아쉽다. 역시나 내가 준 건 아니었구나. 혹시나 돌려받을 수 있나 했죠. 지금은 제가 완전 빈털터리거든요.”

입술을 즈려 문 이가 하얗다. 그것마저 예쁘다. 케이는 삼분의 일쯤 줄어든 커피에 더 이상 손대지 않았다. 커피는 맛이 없었다. 새롭게 자신의 역사가 한 줄 쓰인다.

케이는 아메리카노를 싫어한다. 다음엔 절대 아메리카노를 시키지 않으리라.

“아님, 주여래 씨. 제가 기억 못 한다고 아닌 척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준 건데 돌려 달랄까 봐서요. 그래서 숨기는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찌푸리고 바들거리는 게 즐거워서 있는 대로 주워섬기는 것뿐이다. 수준 낮은 짓임을 알면서도 케이는 멈출 수가 없었다. 여래는 빈정거리는 웃음을 띤 케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님 말구.”

“이, 이건….”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요. 우리 도대체 무슨 사이였어요? 댁은 날 어떻게 알아요?”

여래는 팔찌를 푸르고 장갑을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드러난 맨손에 케이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우리는… 각인을 한 사이였습니다.”

여윈 손등 위로 타고 내려온 덩굴의 잎사귀를 보는 케이의 눈이 뜨거워진다. 여래는 함부로 널린 케이의 손 옆으로 자신의 것을 가져가 나란히 했다.

“날, 정말 몰라? 준혁아.”

주말 오후의 느릿한 햇살이 여래 위로 끼어들었다.

기억난다면 좋겠다고, 케이는 생각했다. 여래를 알고 있다면 좋겠다고, 케이는 바란다. 무슨 기억이든 이 사람에 대한 걸 떠올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느끼는 이 공허감도, 어디에도 연결되지 못한 듯한 허무함도 사라질 텐데.

“준혁아. 나야. 나를… 너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아?”

하지만 정말로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뇌의 역진화. 발달된 뇌를 분열 당시의 초기로 되돌려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하는 작업, 그것이 케이에게 가해졌던 개조의 프로젝트였다. 만신창이가 된 뇌를 그런 식으로 보수했다.

당황한 얼굴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함을 증명하는 케이에 여래는 무너져 내렸다.

“내 이름도 기억 안 나?”

야, 너 내 이름은 아냐?

“여래야. 주여래.”

난 주여래야. 이 바보야.

왜 이렇게 그리운 기분이 들까. 그와의 이별과 재회가 마치 몇 번이고 거듭했던 기분이 드는 건 뇌의 착각일까, 아니면 그의 슬픔을 위로하고 싶은 섣부른 동정의 발로일까.

이 바보. 멍청이. 따라오지 마.

케이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머릿속의 음성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정말, 다 잊어버렸어?”

안타깝게도 그렇다. 케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울고 난 여래의 눈은 연하게 물러 있었다. 여러 번 눈가를 눌러 닦는 익숙한 동작이 그가 자주 울었음을 보여줘서 케이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나는 너를 사랑했어.”

과거형이었다. 문장의 시제가 둘 사이의 거리를 대신해서 재어주었다.

“너도 나를 사랑했어. 우리는 같이 살았어. 어느 날 네가 새벽에 일을 나가다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

“실종 신고를 하려고 경찰서에 갔었지만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았어. 알파와 오메가라면 치정일 게 뻔하다면서…. 그냥 질려서 떠난 게 아니겠느냐는 말만을 들었지. 시간과 인력을 낭비할 수가 없다고 했어. 널, 찾아야 했는데… 몸 때문에 밖에 오래 나가서 돌아다닐 수가 없었어.”

여래는 유산이 될까 봐 무서웠다,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의 언급을 피해간 건 그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을 책임지라 요구하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그게 끝이야. 그리고 갑자기 오늘이 된 거야.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네가 나타났지.”

“정말로, 다 잊었니?”

“나는 너보다 세 살 위야. 난 원래부터 고아고 넌 어머니에게서 버려졌어. 우린 같은 시설에 살았어. 네 진짜 이름은 몰라. 네가 말하지 않으니까 원감이 되는 대로 붙여줬거든. 넌 어리숙한 애였어. 이상하고 집요했어. 원감이 떠맡겨서 내가 널 돌봐야 했어. 그러다가 내가 먼저 시설을 나갔고, 그러다 우연히 널 다시 만났지. 난 네가 날 아직 찾고 있을 거라 생각 못 했는데 넌 나를 기억하고 있었어.”

“넌 날 잊지 않았어. 그때는….”

“넌 조금 특이한 애였어. 어렸을 때 다친 것 때문에…. 정말 기억이 안 나? 넌 그걸 제일 무서워했잖아. 맞을까 봐, 때릴까 봐. 네가 얼마나 조심했는데 그걸, 잊었어? 준혁아. 머리에 상처도 그것 때문이었잖아.”

“그만, 그만할게. 이런 게 이제 와 다 무슨 소용이야. 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다 잊어버렸다는데. 차라리 지금이 너에겐 나은 걸까? 넌 언제나 네 아버지처럼 될까 봐 두려워했으니까. 항상 정상이 되고 싶어 했으니까.”

“그런데 있잖아, 준혁아. 내가 기억해온 일들이… 너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여래의 턱 끝이 떨렸다. 무영이 옳았다. 이제 준혁이 돌아와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준혁의 얼굴을 한 타인의 시선이 여래를 보고 있었다. 여래의 서글픈 눈이 가슴을 짓눌러와 케이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답답하긴 나도 마찬가지야!”

멀리 떨어져 앉은 테이블이 케이의 외침에 이쪽을 향해 수군거렸다. 케이는 테이블을 내려치려던 손을 주먹 쥐어 참았다. 과거를 모르는 자신 따위는 필요 없단 듯 구는 여래가 지금 여기 살아있는 케이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었다. 엉망진창이지만 케이는 이 목숨을 부지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걸 부정당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나는 죽을 뻔했어. 걸레짝이 돼서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니야. 누군가가 일부러 한 일이겠지. 그럼, 좋아. 누가 나를 죽이려고 했을까? 난 아직 그걸 몰라. 눈 뜨자마자, 사회화 학습을 하자마자, 숫자를 읽자마자 청구서가 들이밀어졌어. 원한 적도 없는 수술의 청구서였는데 그걸 갚으려고 난 별짓을 다 하지.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살아남은 난 친구도 가족도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야. 그런데 넌, 뭐야.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 왜 날 원망하는 거야!”

여래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준혁은 여래에게 한 번도 소리를 쳐본 적이 없었다. 준혁의 얼굴을 하고 성나 있는 누군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주여래 넌, 당신은 어디 있었어? 내가 죽을 뻔한 그때 넌 어디 있었느냐고!”

준혁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준혁은 나쁜 말을 쓰지 않았다. 준혁은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준혁은 여래를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러니까 너는 최준혁이 아니야. 아니야!

웅크린 여래에 케이는 아차 싶었다. 누군가에게 고함을 쳐보기란 처음이었다. 적어도 케이가 기억하는 한은 그랬다.

“미, 미안해요. 난…. 갑자기 흥분해서.”

“흐으….”

“미안해요.”

여래가 바라는 게 이런 말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케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사과뿐이었다.

“미안해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서, 당신을 몰라서, 울게 해서. 전부 다 미안해.

“기억나지 않는 일에 책임지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여래는 눈을 훑어 콘택트렌즈를 빼버렸다. 준혁을 바로 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차에 안경이 있으니 됐다. 지금은 흐린 시야가 필요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잠깐만. 그렇게 멋대로…!”

“권리 회복이나, 다른 문제로 필요하시다면 알고 계신 번호로 연락 주세요. 최대한… 최대한 도움을 드릴 테니까.”

“이것 봐요!”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희원을 맡아주며 정 여사는 딱 두 시간만이라고 못 박았었다. 김무영은 가끔 무심한 듯 의미심장하게 정 여사에게 문자를 했다. 별일 없느냐는 심상한 문자지만 가슴 떨려서 거짓말을 하기 싫다고, 정 여사는 덧붙였다. 여래는 흐릿한 윤곽들을 한 테이블과 의자 사이를 아슬하게 걸었다. 굴러떨어질 듯 계단을 내려가는 여래의 황망한 뒷모습에 케이는 일어난 채 멈춰 서 주먹을 쥐었다.

멋대로 만나자고 하고, 그리워하고, 실망하고, 이제는 간다고?

“이런 씨발.”

오늘 생전 처음인 걸 많이 한다. 내뱉은 욕에 지레 놀랄 새도 없이 케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 * *

날이 갑자기 추워졌네. 유리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코 안쪽이 찡했다. 꼭 울기 직전의 감각처럼 말이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준혁의 어깨에 코를 비볐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 옆에 있었고, 넘치도록 흐르는 사랑을 여래에게 주었다. 준혁이 필요했다.

탁.

하지만 이제 준혁은 없다. 여래는 운전석 안에 몸을 던지듯 차에 올랐다. 눈이 흐렸다.

밖은 추워. 복도는 난방을 하지 않아. 따뜻하게 입어.

너는 이가 약해. 면역력도 낮아. 나는 너보다 세졌고 커. 이제는 내가 너를 돌봐줄 거야.

내 아이를 낳아, 그럼 그 애를 사랑할게.

여래야.

무엇보다도 네가 소중해.

그 말이 채웠던 자리가 텅 비워진다. 사랑의 기억이 빠져나간 가슴은 외부의 기압에 밀려 짜부라든다. 여래는 버티고 앉아있을 수가 없어 핸들에 머리를 기댔다.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하지만 어디로?

여래는 자꾸만 놓치려는 정신을 애써 그러모았다. 김무영이 알면 안 된다. 희원을 다시 뺏길 수는 없었다. 그 지옥은 한 번 다녀온 걸로 충분하다. 집에 가자. 집으로 돌아가자.

“흐으….”

그러나 집을 떠올리자 눈물은 잠금장치 없이 흘러내렸다. 집이라니,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니. 이제 준혁은 어디에도 없는데 내가 그곳으로 돌아갈 이유는 도대체 무얼까. 작고 허름한 아파트, 그곳으로 준혁이 다시 돌아올 것을 믿었기에 지키려고 했고 여래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윽….”

여래는 가슴을 쳤다. 준혁이 돌아오지 않았던 밤부터 많은 상상을 했다. 다친 준혁, 상처 입은 준혁, 불구가 되거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준혁,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정들로 돌아오지 못하는 준혁. 겁박당하고 구속당한 준혁. 그러나 그때에도 준혁이 여래를 잊었을 거란 생각만큼은 결코 하지 못했다. 준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여래를 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이제 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준혁아. 어떻게 살아야 하지?

차는 출발조차 하지 않았는데 여래는 길을 잃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다.

똑똑.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킨 여래는 순간 굳는다. 케이였다. 차창을 조금 내리자 그 사이로 케이는 팔찌를 내밀었다.

“놓고 간 거.”

여래의 무릎으로 팔찌를 던진 케이는 젖은 얼굴을 보며 물었다.

“울었어요?”

보여주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물고 전방만을 보는 여래를 향해 케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저기 미안해요. 아까 소리 질러서. 저도 이것저것 생각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얘기했어야 했는데.”

“….”

“미안합니다.”

뺨을 누르며 애써 침착하려 애쓰는 여래에 케이는 손을 뻗으려다 참는다. 여래는 무릎 위의 팔찌를 집으며 무표정을 가장했다.

“가져다줘서 고마워요.”

“저기.”

“그쪽 때문에 운 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요.”

제기랄. 미운 말도 잘한다. 케이는 뭐라고 쏘아붙이려다 말고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었다. 다시 싸우려고 따라 나온 게 아니었다. 어긋난 건 아까 한 번으로 족했다. 케이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여래 씨, 나 궁금한 게 있어요.”

울어서인지 시선은 아까보다 더 찰랑거렸다. 모래사장의 파도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여래의 눈길에 케이는 차체에 기댄 주먹에 힘을 주었다. 넌, 누구야. 이렇게 함부로 내게 밀려들어 오는 너는 뭐냐고. 난 널 몰라. 네가 내게 무슨 의미인지, 어떤 사람이 되주었는지 몰라.

그러니까 이제 알고 싶다.

“지금의 나는 관심 없어요?”

“…?”

“최준혁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만, 원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다음에도 보고 싶어요.”

케이는 차창을 내린 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올려다본 여래가 당황한 모습에 케이는 내심 만족스럽다.

“다음에 우리 또 만나요. 오늘 우리 이야기도 많이 못 했잖아요. 서로 화만 내고. 그러니까 다시 차근차근히 한 번 봐요.”

나만큼이나 당신도 혼란스러웠으면 좋겠다. 두 번째가 아닌 첫 번째로 겪어보는 초체험의 감정을 어쩌지 못해 서툴고 시행착오를 겪는 게 나뿐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은 케이이니까, 당신에게 케이로서 처음이었으면 해.

“네?”

순진한 강아지 같은 눈망울에 여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여래 씨는 휴대폰 없어요?”

가만히 고개를 젓자 케이는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그럼 난 또 기다려야 해요? 손 내 봐요. 번호 적어 줄게요.”

매직 뚜껑을 입에 문 케이는 여래의 손바닥에 열한 자리의 숫자를 재빠르게 그렸다. 뚜껑을 입에 문 포즈 때문에 케이는 뜻밖에도 개구져 보였다. 준혁이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에 여래는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리며 손을 허락한다. 쥐었다가 풀려난 손이 따뜻해서 여래는 그 온기가 날아가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꼭, 연락해 줘요.”

서둘러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여래 차의 꽁무니를 향해 케이는 크게 소리쳤다.

“꼭이에요!”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은 여래는 화장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정 여사에게 코트와 청바지, 니트를 맡겼다.

“세탁소에다 좀.”

“그럼 나 퇴근할 때 가져다가….”

“아니요. 지금요. 김무영 오기 전에요.”

정 여사는 옷더미를 쇼핑백에 넣었다. 불만이 입에 한가득이면서도 뱉어 놓지 않는 정 여사에 여래는 가만히 시선을 떨궜다. 아기 띠를 하고 쇼핑백을 든 정 여사는 문을 나서기 전 희원의 목에 두른 스카프를 침이 묻은 턱까지 올렸다. 보고 있는 여래에게 정 여사는 우물쭈물 묻는다. 매사가 거침없고 화통한 그녀답지 않은 질문에 여래는 밑바닥 없이 미안해졌다.

“여래야, 정리할 거지?”

김무영을? 아니면 최준혁을? 아니면, 케이를? 여래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정 여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세탁소랑 싸운 거 알지? 여러 번 걸음 하게는 하지 마. 기장을 웃기게 줄여놓고는 내가 그렇게 접어놨다고 박박 우기잖아. 다신 안 간다고 그랬는데…. 에이. 쪽팔려.”

정 여사에게 무엇도 자신할 수 없는 게 미안해서 여래는 입을 다물었다.

떨어지는 물줄기를 아프도록 맞는다. 웅크려 욕조 안에 들어간 여래는 발아래 뭉그러진 속옷을 멍하니 바라보다 샴푸로 손을 뻗었다. 거품을 낸 속옷을 박박 문대며 여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깨끗하게 씻어내야 했다. 여래의 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날을 세우는 무영이었다. 게다가 무영은 준혁이 어떤 페로몬을 띄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쩌면 여래보다 더.

혹여라도 묻어있을지 모를 준혁의, 케이의, 그의 체취가 걱정스럽다. 희미하게 일어나는 거품을 문지르며 여래는 케이가 안고 온 혼란도 함께 깨끗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준혁, 아니 케이가 손바닥에 써놓은 열한 자리의 번호는 잉크가 날아가고도 여전히 여래의 눈 안에 남아있었다.

공일공육하나칠….

여래는 눈을 감았다. 무영은 여래에게 휴대폰을 허락하지 않았다. 연락을 위해 매번 정 여사를 말려들게 하는 것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럼 어떡할까. 여래는 입술을 핥았다.

기다릴게요. 내가 싫거나 궁금하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케이는 거절을 염두에 두며 보호망을 치듯 웃었다. 그 짧은 웃음이 여래를 붙들어놓았다. 준혁은, 아니 케이는 얼마나 많은 때, 많은 사람들에게 저 웃음을 보여줬을까? 여래 없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이 웃었을까? 준혁은 그래서는 안 된다. 준혁은 여래의 것이었다. 그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여래 없이 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질투이자 원망이었고, 회한이었으나 진행 중인 야릇한 감정이었다.

“하아.”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며 여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김이 서린 유리에는 고집스러우리 만치 입술을 꼭 다문 모습이 여래를 마주보고 있었다. 여래는 이제 웃음이 어색하다. 조금이라도 행복한 기분이 들 때면 여래는 그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준혁이 없었으므로 웃어서는 안 된다고, 그 어떤 기쁨도 백 퍼센트로 느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단속해온 결과 여래는 무뚝뚝하고 성마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는 변했다. 난 준혁이 알던 주여래가 아니다.

여래는 손바닥으로 거울을 훔쳐낸다. 맑았던 상은 흐려지고 여래는 불투명해졌다.

준혁이는 이런 나를 좋아해줄까?

그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함량으로 그 자신인 걸까. 열 살과 스물세 살 우리는 만났고 사랑했고 헤어졌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고 그때의 나를 사랑했던 그도 그가 아니다. 그렇다면 다시 만난 우리 둘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아니, 갈 곳이 있기는 할까?

저녁, 강남에서 영등포시장 사거리를 지나 여래의 집까지를 삼십이 분 만에 주파해 도착한 무영은 나온 여래를 보며 눈썹을 들었다. 여래는 데친 시금치처럼 익어있었다. 늘어진 몸을 추스르려 한 손으로 다른 팔을 붙들고 선 꼬라지가 가관이었다. 그리고 냄새, 냄새가 이상했다. 평소에 덕지덕지 달고 다니던 희원의 침 냄새며 이유식 냄새, 분유 냄새 없이 여래는 깨끗했다. 표백되어 향기로운 여래가 불쾌하다. 무영은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여래를 붙들었다.

“뭐야?”

턱을 쥐어 누르는 무영의 손아귀에서 여래는 파들거렸다. 손안에서 여래를 이리 저리로 돌리며 무영은 여래를 탐색했다. 입안의 살이 부대꼈다. 놓으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아 여래는 이를 악다물고 무영을 노려보았다.

“너 뭐 했어?”

“놔요.”

“뭐 했냐고. 말해.”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러지 마. 아파.”

“오늘 너, 다르다고. 왜야.”

“일찍 씻었어요. 감기 기운 때문에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런 것까지 허락받아야 해요? 오늘 아플 예정이라고 강 실장한테 알리면 되겠어요?”

“집에만 있어도 감기에 걸리나 보네.”

정곡을 찌르는 무영이 뜨끔하면서도 여래는 내색하지 않으려 숨을 다잡았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게 제일 떨린다. 진정하자. 무영은 모른다. 알아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진정하자.

“모르죠. 누구한테 옮았는지. 집에 드나든다고 해봤자 당신뿐이잖아요.”

“그래서.”

“성가셔 정말. 희원이한테 옮기지나 마요.”

대답의 무게를 재듯 무영은 가만히 여래를 쳐다보았다.

“손이나 씻으세요.”

그것은 여래의 머릿속 전원이 내려졌던 어느 저녁 날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여래가 무영을 세면대 앞으로 몰아가던 그 날 말이었다. 심각하던 것도 잊고 무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았어. 알았어. 까탈스럽긴.”

“….”

돌아선 여래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한 끗 차이였다. 다음에도 무영이 이렇게 넘어가 줄까?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케이를 만나려고 한다면 앞으로도 몇 번이고 여래는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 놓일 거란 거였다.

게다가 이 뒷맛은 또 뭔가. 마치 자신이 무영을 배신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이 역겨운 죄책감은.

“희원아, 오늘 잘 있었어? 아구구. 기침하네.”

희원을 끼고 거실에 누운 무영을 등지고 여래는 세게 냉장고 문을 닫았다. 껴안고 뒹구는 둘을 보며 여래는 중얼거렸다. 무영은 착하지 않다. 무영은 상냥하지 않다. 김무영은 개새끼다. 나쁜 놈이다.

여래는 무영에게 미안하고 싶지 않았다. 무영에게 미안하다니? 말도 안 된다. 맥락에 맞지 않는 감정이었다. 오늘의 저녁은 애초부터 무영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광경이고 느낌이었다.

“우리 예쁜 희원이.”

그 자리는 준혁의 자리였다. 빼앗은 건 무영이었다. 이제 와 사람 미안하게 희원을 예뻐하면 어떡하나? 차린 저녁상 앞으로 온 무영이 서 있는 여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수고했어.”

무언가를 태울 때는 달콤한 향기가 난다. 긴장도 마찬가지다. 여래는 가슴이 졸여지는 매운 연기를 마시며 슬며시 고개를 피했다. 어차피 무영을 순순하게 받아준 적이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이제 와서 가만히 있으면 무영의 의심에 불을 댕기는 셈밖에는 되질 않는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역시나 무영은 새침하게 외면하는 여래에 그럴 줄 알았단 듯 관대한 미소를 띠고 넘어갔다.

“자아, 그럼 밥 먹어 볼까? 희원이도 어떻게 밥 좀 줄까? 먹고 싶어요?”

공일공육하나칠둘….

“하하. 어른들만 맛있는 거 냠냠해서 화났어요? 우리 희원이? 이거 매운 건데.”

여래는 이미 지워진 숫자들을 외워본다. 싱크대 앞에 서서 멍한 여래에 무영은 마른반찬을 우물거리다 젓가락을 놓았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흠잡을 데는 마땅히 또 없는 그런 저녁이었다. 무영은 희원을 앉힌 허벅지를 떨었다. 저 웃으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희원은 앉은 자리의 진동이 즐거워 까르륵거렸다.

주여래가 어딘가 이상하다.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겠다. 무영은 희원의 뺨을 살며시 쓸며 마주 웃었다.

* * *

“윤주야, 나 찾았어.”

눈썹용 일회용 색소를 분할을 해 놓는다는 게 포장을 잘못 찢었다. 아깝게 됐다고 생각하며 윤주는 찢어진 포장지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졌다.

“뭘.”

“찾았다고, 그 사람.”

“…잘됐네.”

“그게 끝?”

“그럼 뭐. 어쩌라고.”

“와, 냉정한 거 봐. 에이씨, 괜히 얘기했어. 관심도 없는데.”

윤주는 물티슈를 뽑아 묻은 색소를 닦았다. 잘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벌컥 짜증이 난다. 흥분한 케이가 요란하게 들이닥치지만 않았더라도 멀쩡한 걸 버리는 일은 없었다. 화인지 짜증인지를 참는 윤주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어때?”

“몰라, 더 얘기해봐야지 뭐. 기억도 안 나니까. 그런데 있잖아.”

케이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 내가 그 사람이랑 진짜 뽀뽀도 했을까? 데이트도 했을까?”

“음흉한 새끼.”

“그렇잖아. 각인한 사이라니까. 그런데 그쪽은 다 아는 데 난 하나도 모르고 있으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그래서 마음이 그냥 그랬어.”

“….”

“또 보고 싶어. 또 만날 거야.”

“그래.”

“너한테 제일 먼저 알려주려고 와봤어. 네가 그랬잖아. 그 사람을 찾으라고.”

그래. 그런 말을 했었다. 찾을 줄 몰랐으니까. 손톱 아래로 들어간 색소가 유난하게 거슬린다. 윤주는 물티슈를 손톱과 그 밑 살 사이로 밀어 넣었다. 케이는 제 할 말만을 마치고 외벽 문을 열었다. 옥탑을 향해 오르는 철제 계단 소리를 이기려 윤주는 목소리를 높였다.

“조심해. 케이!”

“뭘?”

“이거 저거 다.”

계단도, 그 오메가도, 너의 과거도, 전부 다. 그러나 윤주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케이는 이미 옥탑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린 후였다.

“안 오네.”

케이는 들여다보던 휴대폰을 가슴에 올렸다.

“자나?”

진동하지 않는 휴대폰 대신이란 듯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여래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밥을 먹었을까?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까? 케이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케이는 그저 연락을 기다릴 뿐이다.

“보고 싶다.”

생전 처음으로 얼굴을 가진 누군가가 그립다. 그것은 생각보다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 * *

[28일. 덕수궁 앞.]

[괜찮아요?]

고궁의 매표소 앞에 서 있는 여래를 부르기 전 케이는 먼저 크게 심호흡을 한다.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여래는 마치 그 근방에 살고 있어 잠깐 다녀오러 나온 듯 가벼운 차림이었다. 산뜻하고 앳된 얼굴에서 나이를 점칠 수 있는 건 심각한 표정뿐이었다. 조금만 웃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케이는 종이봉투를 든 손을 크게 흔들었다.

“여기요. 여기!”

“…왔어요?”

긴장된다. 나붓하게 깔았던 눈을 올려 뜨는 여래에 케이는 저도 모르게 더듬고 말았다.

“차, 차는요?”

“저쪽 공영주차장에 세워뒀어요.”

“아.”

그러고 나니 할 말이 없다. 애꿎은 종이봉투만 구겨진다.

“가요.”

케이는 좁은 골목을 끼고 어학원을 이웃한 고궁의 입구를 가리켰다. 나박하게 저며진 가을 낙엽들이 뒹구는 길 위에서 여래는 무심결에 꼭 데이트 같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이 와중에 무슨….’

상황과 인물이 모두 틀렸다. 달콤해지려는 기분에 대한 반발심으로 여래는 더욱 깊숙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뾰로통하게 케이를 쳐다보았다. 여래는 저번 팔찌 얘기가 생각나서 일부러 케이에게 심술을 부렸다.

“나 돈 없어요. 하나도.”

“예?”

“표 살 돈 없다구.”

그 말은 사실이었다. 무영이 인정한 소비 수단은 카드뿐이었다. 실시간으로 내역이 문자로 전송되는 카드는 추적 장치와도 같아서 여래의 위치를, 하고 있는 일을 무영에게 꼬박꼬박 보고했다. 현금 사용은 일절 금한 무영 때문에 오늘 여래는 정 여사에게 이만 원을 빌려서 나오는 길이었다. 구차하게 눈치를 보며 꼼지락거리는 여래에게 정 여사는 왜, 더 줘? 라고 물었지만 차마 염치 때문에 네, 라고 넙죽 대답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어중되어 여래는 자기혐오에 빠졌었다.

정 여사는 나가는 여래가 못마땅한 눈치이면서도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제발 일찍 들어오라는 부탁을 할 뿐이었다.

케이는 여래의 말에 어이없단 듯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만나자고 하면서 지갑도 안 들고 왔을까봐 그래요? 여기, 티켓이요. 끊어놨어요.”

“….”

“그리고 이거 받아요.”

종이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유리병에 든 유자차와 금방 나온 듯 비닐 포장 안에 습기를 가둔 식빵이 들어있었다. 케이는 내용물을 확인한 여래에게서 봉투를 다시 뺏어 들었다.

“입는 거, 차는 거, 타는 거 다 가지고 있는 거 같아서 먹을 거로 꼬시려고요.”

왜 유자차일까? 돌려 감기 한 테이프가 갑자기 멈추고 플레이된다. 과거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머리를 내밀며 준혁을 떠오르게 했다. 유자차. 맞아. 엄청 먹었었지. 잃어버린 첫애의 임신 초기에 먹은 거라고는 유자차뿐이었다. 교과서와 수능 문제집을 고물상에 판 돈으로 샀던 유자차 한 병은 일주일도 안 가서 바닥이 보였다. 준혁은 걱정을 했다. 그런 것만 먹으면 좋지 않아, 여래야, 라고도.

가만히 보고 있는 여래에 케이는 신이 나서 설명을 했다.

“금방 나온 식빵인데 유자청 발라서 먹으면 맛있어요. 저기 앉아서 먹어요. 많이 안 추우니까 괜찮죠?”

“왜 유자차예요?”

신이 나 식빵이며 유자청 단지를 꺼내려다 말고 케이는 설핏 콧등을 찡그렸다.

“저번에 자몽티 마셨잖아요. 이런 걸 좋아하나 해서 찍어봤어요. 감귤류. 시트러스류.”

“아아….”

맥이 풀린 여래에 케이의 손이 느려진다.

“왜요, 기대했어요? 옛날 일, 당신 취향, 그리고 내가 누군지 기억나서 사 온 줄 알았어요?”

여래는 말없이 유자청을 잼처럼 올린 빵을 한입 물었다.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케이에게는 실례인 일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뒤늦었다. 눈앞에 케이를 두고도 여래는 늘 그에게서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매번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번에도 화를 낼까 싶어 빵을 문 채 씹지도 못하는 여래를 보며 케이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평일의 정오 즈음, 고궁에는 인적이 드물다. 담장 너머의 고층 빌딩들을 울타리로 두른 고궁의 정원은 비밀스럽다. 높이 솟은 스카이라인 사이로 도려낸 듯한 파란 하늘이 여래와 케이 위로 떠 있었다. 두더지처럼 한 줄로만 식빵으로 파고드는 여래의 입가에는 유자 건더기와 빵 부스러기가 뭉쳐있다. 케이는 크게 팔을 넘겨 벤치의 등받이에 걸쳤다. 사이를 띄우고 앉은 여래의 등이 손에 닿을 때까지 크게. 하지만 정작 닿고 싶은 빵가루를 걸친 입술까지는 아직도 갈길이 멀었다.

“내가 뭘 알아가지고,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이런 걸 좋아하는 걸 미리 다 알고 계획하고 꿍꿍이를 가지고 그랬으면 좋겠다구요.”

“미안해요. 계속…. 내가 불편하게 하네요.”

케이는 분위기를 돌리려고 괜히 트집을 잡았다.

“그런데 그쪽 버는 족족 다 옷에다가만 쓰는 거 아니에요?”

“내가 뭘요.”

입가는 못 만져도 옷은 만질 수 있지. 케이는 과장스럽게 여래가 흘린 빵조각들을 코트로부터 털어냈다. 산비둘기들이 눈치를 보며 다가오는 걸 향해 식빵을 뜯어 던진 케이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잖아요. 휴대폰도 없지, 돈도 없지. 도대체 있는 게 뭐에요? 삐까뻔쩍하게 차려입고 다녀서 난 또 되게 부잔 줄 알았잖아.”

“그, 그게, 그런 거 아니거든요! 사정도 모르면서.”

“그럼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요?”

“나는….”

“여래 씨는 무슨 일 해요?”

여래는 순간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해졌다. 텅 빈 공백의 시간을 뒤로 남겨둔 건 케이만큼이나 여래 또한 마찬가지였다. 혼란스럽고 아파서 겨우 살아내기만 했다. 준혁을 그리워하느라, 무영을 준혁으로 보느라, 그리고 불현듯 준혁이 없음을 깨닫고 아파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3.2 킬로그램이던 아기를 11 킬로그램으로 키워낸 것만이 유일한 자랑이었지만은 그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황망해진 여래를 보며 케이는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단 듯 코트를 털던 손을 천천히 멈춘다.

“혹시, 결혼했어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동시에 여래는 명료하게 무어라고도 역시 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배우자나 애인이 있었다면 떳떳했겠다. 어떤 식으로든 준혁을 단락 짓고 과거의 페이지로서 덮을 수 있었다면, 그건 다음을 향해 나아갔다는 이야기이니까. 하지만 여래는 그러지 못했고, 준혁을 잊지 못한 채로 무영과 얽혀버렸다. 그 타래는 잘라내기 전까지는 풀 수 없을 정도로 엉켜있었다.

“혹시 여기 이렇게 나와 있는 거, 내가 여래 씨를 부담스럽게 하는 거예요?”

손가락에 유자가 묻었다. 무심결에 핥으려는 여래의 손을 잡아 내린 케이는 휴지로 그 끝을 꼼꼼하게 닦았다. 각인들이 위와 아래로 겹쳐지는 걸 보며 여래는 기어코 참으며 모아두었던 눈물을 흐트러트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어떻게라도 집적거릴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막상 닥치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부산히 여래 주변에서 어정거리던 손을 내려 어깨를 붙든 케이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후는 자연스러웠다. 여래를 안는다는 건 생각으로 빚어낸 행동이 아닌 몸에 깃든 감각에 가까웠다. 케이는 흐느끼는 여래에게 머리를 기댔다. 처음으로 확신이 들었다.

난 너를 정말로 알고 있나 봐. 주여래.

“울지 마. 제발.”

초의 심지처럼 가슴이 일렁거린다. 여래가 울면 케이는 다시 의료용 침대에서 깨어나던 그 날로 돌아가 눈을 깜빡거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람이 된다. 당신이 우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그, 그만 놔.”

여래는 주먹으로 케이의 가슴을 밀어 거리를 벌렸다. 무영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케이와 오래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정 여사에게 세탁소를 부탁한 동안 여래는 다시 긴 목욕을 해야 할 터였다. 케이와의 포옹에 그만큼의 가치나 효용은 없었다. 케이는 준혁도 아니었다. 대학입시를 정리하며 헌책으로 사 온 유자차 따위 같은 건, 그는 기억하지도 못했으므로.

“그럼 이젠 울지 마.”

그러나 케이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눈물이 흐른 자국을 지우듯 엄지를 문질렀을 때 여래는 정 여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시 그를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이좋게 식빵을 두 장씩 먹어치운 둘은 부스러기들을 비둘기들에게 털어주고 나자 그만 심심해진다. 미술관을 낀 고궁 안 정원을 따라 두서없이 걷던 케이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서 뒤를 따르던 여래가 그의 등에 코를 부딪히게 만들었다.

“원래 데이트가 이런 거예요?”

데이트는 무슨, 유산소 운동이면 모를까. 긴 보폭을 따르느라 자신의 페이스보다 재게 걷던 여래는 가쁜 숨을 다스리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체력이 부쳤다. 사방 89제곱미터, 전용면적 66제곱미터의 집에서만 오가며 기껏해야 백화점의 복도를 걷는 게 해 온 운동의 전부였던 여래로서는 거침없이 걸어 나가는 케이에게 원망을 느낄 정도다.

“우리가 데이트할 때는 뭐를 했었어요? 이런 데를 오진 않았었나 봐요. 여래 씨 표정이 영.”

“우린….”

여래는 말을 채 맺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준혁과는 아무런 추억을 쌓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혁과 여래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소는 미색의 페인트가 부스럼처럼 일어나는 시설이었다. 그 후로는 몸만 커진 둘은 목재소에서 하숙집으로 옮겨 다녔으며 그 후 겨우 둘의 집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금방 헤어지게 되어버렸다. 같이 쏘다닌 곳이라고는 마트, 목재소 뒤의 야산, 준혁이 다니던 대학의 학생 식당뿐이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쓸쓸해서 여래는 다시 코끝이 찡했다.

“이런 데는 안 갔어요?”

맹하게 코를 문지르는 여래에 또 뭔가 실수를 했다 싶은 케이는 서둘러 계단 위의 미술관을 가리켰다.

“안 갔어.”

“왜요?”

“그런 데를 뭐하러 가? 비싸고 재미없어 보이잖아. 드나드는 사람도 없는 걸 보면 뻔하지 뭐.”

“그래서 데이트 장소로는 딱 아니에요? 분위기 있고, 사람 없고.”

의미심장하게 웃는 케이에 여래는 진저리를 쳤다.

“뭐야…. 아무튼 관심 없었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나 이만 원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영 듣는 태도가 아니다. 여래는 팔짱을 끼고 과장되게 위아래를 훑는 케이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아님, 주여래 씨는 거울 보면 예술 작품이 있어서 굳이 이런 데 안 와도 되나?”

어이가 없다. 이 자식. 느끼한 말을 피클 없이도, 김치 없이도 잘도 한다. 도무지 어디로 튈지를 모르겠다. 제발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사고하고 행동해줬으면 좋겠다. 옅은 경멸을 띄며 보는 여래에도 케이는 더욱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예뻐요?”

“그만 못 해?”

“비결이 궁금해서 그런다고.”

“그런 말 같은 걸 내가 좋아할 거 같아?”

“되게 질색한다. 진짜 싫은가봐. 영 면역이 없네? 내가 예전에는 이런 말 한 번도 안 했었어요?”

“….”

“진짜?”

여래가 끄덕거리자 케이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와, 이거 진짜 나쁜 놈이었네.”

꼭 남의 흉을 보듯 이야기한다. 어느 쪽을 편들어야 되는 걸까. 과거의 준혁, 아니면 지금의 케이? 모르겠다. 여래는 퉁명스럽게 얼굴을 돌렸다.

“됐어. 그딴 거 바란 적도 없고.”

“기본 아니에요? 사귀었다며. 예쁘다, 좋다 말하는 게 정상이지. 내가 보기에 예쁘지도 않으면 도대체 왜 사귀어요? 예뻐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을 거면 왜 사귀냐구요.”

자꾸 준혁의 모습을 발견해내면 안 되는데, 케이는 준혁과 똑같이 사람 말문이 막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저는 진심이에요. 진짜로 예뻐요.”

미치겠네. 아까의 유산소 활동과는 다른 의미로 호흡이 가빠온다. 짓고 있을 표정을 장담할 수 없는 여래는 입술을 깨문 채 계단 위의 건물만을 고집스럽게 응시했다. 곤란해하는 여래를 보자 케이는 더 신이 나서 외쳤다.

“와, 너무 예쁘다.”

저 자식 일부러 저러는 거다. 분명히 즐기고 있다. 바람이 흐트러트린 머리를 쓸어 올리는 척을 하는 여래가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릴 때까지 케이의 환호인지 야유인지는 계속되었다.

* * *

붕어빵, 군밤, 번데기와 계란빵을 지나 솜사탕에서 케이는 멈췄다. 단 걸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실처럼 자아내어지는 설탕을 한참 구경하고 선 케이 때문에 여래는 주차비만을 빠듯하게 남겨두고 솜사탕을 하나 샀다.

“먹어.”

“와, 대박. 완전…. 이거 내 로망이었는데. 솜사탕 먹는 거. 파는 데가 은근히 없더라구요.”

“뭐 그렇게까지.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정확하게 내 기억 속에는 없으니까요.”

케이는 무심하게 솜사탕을 찢었다. 얇은 결의 솜사탕은 혀 위에서 색소만을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 허무하고도 강렬한 감각을 케이가 몰랐다고 생각하자 여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희원과 똑같다. 세상 전부가 처음이고 그래서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경험하는 희원과 케이는 닮았다. 케이는 앞으로 남은 인생동안 솜사탕을 볼 때면 그걸 사 준 여래를 떠올릴 것이다. 흰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남길 때처럼 이상스러운 감동이 일었다.

“그러니까 난 리셋된 컴퓨터 같은 거예요. 데이터는 저장장치로 옮겨왔지만 시스템 자체는 깨끗해. 지식은 있지만 경험은 없죠. 이상하죠? 솜사탕. 알죠. 단어도 의미도 다 아는데 먹어본 적은 없어요. 항상 먹어보고 싶었어요.”

“그랬구나.”

“데이트란 거, 재미있었어요.”

케이가 내민 솜사탕에 여래를 고개를 흔들었다. 끈적거리는 게 성가셔서 여래는 솜사탕을 싫어했다. 여래는 솜사탕도, 준혁과의 데이트도 모두 경험해보았다. 그런 여래가 케이가 지금 느끼는 흥분과 호기심을 똑같이 감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치고 피곤한 늙은이가 된 기분이다. 한결 가라앉은 여래를 보며 케이는 솜사탕 막대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우리 다음에 언제 만나요?”

“….”

“자주 나올 수 없는 거 알아요. 이해해요. 언제라도 괜찮아요. 또 보고 싶어요. 또 데이트해요.”

“넌 나한테 다른 누가 있는데도 상관없니?”

검은 케이의 눈.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는데 케이의 눈은 벌써 어두워진다. 잔인해지기 위해 여래는 그 눈에서 도망치며 시선을 피했다.

“아까, 너도 말했었잖아. 맞아. 나 그런 사람이 있어. 내 생활을 봐주고 나한테 돈을 주는 사람이 있어. 일도 안 하는 내가 무슨 수로 이 옷이며 차를 사겠어. 다 그 사람 덕이지. 그리고….”

그리고 그 사람은 무섭기까지 하다. 여래가 케이든 준혁이든 아니면 완전히 별개인 제삼자이든 누군가를 만났단 걸 알면 무영은 어떻게 나올까. 무영은 여래에게 여래가 처한 상황을 파악시키기 위해 희원을 데려갔었다. 여래가 다시 무영이 설정한 범위를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에 무영이 그것보다 얼마나 더 잔인하게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너와 만나는 건 상도덕 위반이라고, 생각해.”

“…난 그런 거 몰라요.”

“뭐?”

“도덕 같은 거, 윤리 같은 거 난 몰라요. 난 그냥 당신을 만나고 싶다구요.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요? 아니면 오늘 데이트가 시시해서 나를 만나기가 재미없어졌어요?”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면 우리 또 봐요. 그냥 재미로라도 심심풀이로라도 괜찮잖아. 이상한 짓 같은 거 하지도 않았는데 억울해요. 왜 그렇게 경계하는 거예요? 지금 만나는 사람이 무지무지 질투심이 심해?”

무턱대고 조르는 아이 같다.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은 아이에게 무언가를 단념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희원을 통해 그것을 알고 있는 여래는 케이에게 안 된다고 말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그 사람하고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럼 우리 만나도 되잖아요. 몰래라도.”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다음에 언제 볼 수 있는지 만이라도 알려줘요. 다음이 있으면 기다릴 수 있어. 응?”

“억지 부리지 마.”

“전화해 줄 거죠?”

“…생각해볼게.”

“생각하지 말고요. 그냥, 전화해요. 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웃는 케이가 눈부셨다. 언제나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웃는 준혁과 함께하는 순간 말이다. 거기에 홀린 여래는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다 대는 케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잔돈 혹시 동전으로 다 받을 수 있을까요?”

여래는 주차비를 계산하려다 다급하게 묻는다. 귀찮아할 기력조차 없는 징수원이 금고를 열어 일렬로 말린 동전을 감싼 종이를 찢는 걸 보며 여래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오백 원짜리도 괜찮아요.”

“옛수다. 에이. 차는 외제를 몰면서 잔돈을 여기서 깨.”

“…감사합니다.”

달아나듯 경사로를 오르는 여래의 꽁무니를 혀 차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차를 세우고 난 여래는 곧장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상가 옆 아파트 입구를 서성인다. 오래된 아파트는 지어질 때 함께 세워놓았던 공중전화를 아직 철거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노란 버스에서 와르르 쏟아지고 나자 여래는 천천히 공중전화 박스를 향해 걸었다. 여기 처음 오던 날이 떠올랐다. 센터에서 짐을 잔뜩 이고 지고 와 아파트 입구에 섰을 때 준혁은 아파트 동과 동 사이를 가리키며 말했었다. 저기야. 이제 다 왔어. 우리 집이야, 라고. 준혁이 표현하진 않았지만 여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행복해하고 있는지를.

뚜-.

수화기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한 겹 앉아있었다. 수화기를 들자 손이 스친 자리마다 먼지가 걷히며 색은 분명해진다. 여래는 바꿔온 잔돈을 모두 공중전화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그 뒤는 쉬웠다. 동전을 넣은 다음 번호를 찾아 눌렀다. 손바닥에 써주었던 번호는 이미 지워지고 없지만 열한 자리의 숫자는 손금처럼 아직 거기에 남아있었다.

공일공육하나칠둘 그리고 나머지 네 자리.

케이는 여래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곧장 받는 소리에 여래는 얼른 자신을 밝혔다.

“나야.”

-흐억!

뭐야? 여래는 수화기를 귀에서 뗐다가 붙였다. 인사치고는 거칠다. 달려와서 받았는지 헉헉거리는 짧은 탄성들을 연달아 뱉은 케이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겨우 차분해졌다.

“운동이라도 했어?”

-아뇨. 계속 전화 기다리다 정말 잠깐 밖에 보고 있는데 울려서 달려 오느라구.

“그래? 내가 방해한 건 아니고?”

-진짜예요. 기다렸어요. 전화 안 올까 봐 벌벌 떨면서요.

“…그래.”

딸각거리며 동전이 넘어간다. 여래는 얼른 잔돈을 집어 투입구에 넣었다. 전화기가 동전을 삼키는 소리에 그리운 기분이 든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기다리는 쪽이 여래였었다. 목재소의 책상에 엎드려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쏘아보며 전지훈련에 간 준혁을 기다렸던 그 시간들은 아직도 손끝에 만져질 듯 생생했다.

-번호가 이상해. 어디예요?

“공중전화.”

-아, 그럼 지금 밖에 하늘 보여요? 창문 밖을 보는데 뭔가가 달라.

어두워진 하늘에는 벌써 달이 걸렸다. 어제보다 이르게 찾아온 저녁 하늘에 겨울임이 실감 난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여래는 케이의 말을 기다렸다.

-달 주변에 동그랗게 띠가 보이는데 저거 달무리죠?

모른다. 초등학교에서 배우기야 했겠지만 달무리를 보거나 보기 위해 노력한 적은 없다.

-달무리 생기면 내일 비가 온다는 거라는데, 정말 그래요?

“글쎄.”

-뭐야. 그런 것도 몰라.

“그래. 몰라. 내가 다 알아야 해?”

-여래는 다 잘 아니까. 여래는 똑똑하니까.

달무리에 젖은 구름이 느리게 흐른다. 여래는 수화기를 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아팠다. 케이, 넌 누구야? 준혁이면서도 준혁이 아니고, 닮았다고 느낀 순간 낯설어지며 방심한 틈을 뚫고 기억의 가장 연한 부분을 무심하게 건드리는 너는.

-여래는 기억을 잃지도 않았고 나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당연히 알아야죠. 한 번도 달무리 본 적 없어요? 비의 강력한 예감으로 들썩이는 대기 같은 거 안 느껴져요? 달무리가 생겼을 때 강수확률은 육십 퍼센트에서 칠십 퍼센트나 된다고요.

“내가 무슨… 할머니냐. 날씨는 텔레비전으로 확인한다고. 평범하게.”

-하하. 그럼 이게 여래한테도 첫 번째 달무리네요.

“그러네.”

-멋있다.

“뭐가 그렇게 멋있어?”

헤어진 지 고작 한 시간, 그사이 별다른 소식이 있었을 리 없다. 케이는 협회에 상납하고 남은 아주 적은 생활비를 아껴 망원경을 샀다고 했다. 그게 자기가 찾은 첫 번째 취미라고 말하는 케이는 왠지 수줍었다.

-별 같은 거요. 우주 같은 거.

준혁의 방에 붙어있던 토성의 고리, 말머리성운들이 떠올랐지만 여래는 잠자코 케이의 말을 기다린다. 침묵을 오해했는지 케이는 그만 멋쩍어진다.

-왜요. 유치해요? 하긴 망원경도 배율이 높은 게 아니라 그냥 분위기만 내는 거긴 해요. 좀 그런가? 헤헤.

“아니. 안 싫어.”

-그럼요?

“그런 네가….”

좋아, 라고 말하려는 순간 동전을 넣을 타이밍을 놓친 전화는 끊어진다. 여래는 공중전화에 틀어박힌 담배꽁초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울지 않기 위해서 대신 뭐라도 미워하지 않고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현관문까지 달려 나온 정 여사가 바로 여래의 코트를 벗겼다. 잔뜩 토라진 희원이 부은 볼을 하고 있었지만 여래는 안아줄 수가 없다. 먼지 묻은 손이 너무 더러웠다.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희원은 여래를 향해 팔을 벌렸다.

“안아! 아나!”

“응, 그래. 희원아. 잠깐만.”

“으, 으으…. 아나! 아앙!”

“희원아. 미안해. 미안해. 내가….”

다른 데다 정신을 팔고 다니던 여래를 원망하듯 울음을 쏟아내는 희원에 마음이 더 바빠졌다. 회색으로 일어난 거품을 씻어내며 여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온다간다 언질을 주는 법 없는 무영 쪽이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너무 여유를 부렸다. 무영이 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케이의 체취가 남았을지도 모른다. 빼액거리며 바둥거리는 희원을 두고 옷을 벗은 여래가 세탁기로 뭉친 옷가지를 던져 넣던 그때였다.

“뭐야.”

“으아앙!”

“희원이 왜 이래.”

무영이 현관에 서 있었다. 허둥거리는 정 여사, 놀라 굳은 여래와 그 둘을 일러바치듯 울음을 그치지 않는 희원을 돌아보는 무영의 눈썹산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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