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종장終章 (5)
“주여래, 뭐야. 희원이 왜 울어. 넌 뭐 하고 있고.”
“오셨… 어요.”
“나갔다 왔어? 차가 아침이랑 다른 데 주차되어 있던데.”
“그게….”
“왜 이렇게 말을 못해. 너 방금 들어온 거야? 희원이 두고 혼자?”
빌어먹을. 빌어먹을! 여래는 세탁기를 짚은 손을 움켜쥐었다. 김무영은 항상 이상한 데서 감이 좋다. 무서울 정도다. 무영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케이의 존재를 알까? 그럼 오늘도 감시했을까? 아니야, 진정해. 만약 알았다면 김무영이 그 순간을 놓쳤을 리 없다. 김무영은 아마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과 케이를 찢어발겨 놓았을 것이다. 진정하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김무영이 족치려면 여래가 어떤 연기를 하든 간에 제멋대로 할 테니까.
무영은 윗옷을 벗은 여래를 노려보았다.
“너 요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여래는 세탁 버튼을 누른 후 몸을 틀었다. 세탁기 안으로 쏟아지는 물살과 세제가 뒤엉켜 거품을 만들었다. 휩쓸리면 안 돼. 정신 차려야 한다. 여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떨리는 입술이 들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차 좀 썼어요. 쓰라면서요.”
“애는.”
“두고 다녔죠. 희원이랑 외출하려면 얼마나 번잡스러운데요.”
“물고 빨고 한시라도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굴 땐 언제고?”
“그거야….”
“주여래, 너 내 앞에서 지금 머리 굴리냐?”
“….”
“똑바로 말 못 해!”
윽박지르는 무영 뒤로 정 여사가 얼른 희원을 안아 들어 쉬쉬하며 작은 방으로 옮겼다. 여래의 벗은 등을, 청바지 안으로 이어진 근육의 흔적들을 샅샅이 훑는 무영이 험악했다.
저번부터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다. 상기돼서 기분이 좋은 걸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
딱히 행복한 여래를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무영은 여래가 불행할 때만 여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여래가 웃으니까 무영은 쓸데도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평범하게 행복해질 줄은 몰랐다. 여래가 즐거우면 무영도 즐겁고, 여래가 웃으면 무영도 웃음이 나는 식으로 말이다.
혹시나 했다. 혹시나. 여래가 이제 완전히 포기를 했나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난리라니.
무영은 뺨이라도 맞은 것 같다. 아이를 낳았는데도 아직 색이 익지 않은 유두, 등을 반으로 쪼개며 갈라지는 예민한 척추, 배꼽 아래 한 뼘, 거무스름한 터럭 사이 아직 연한 분홍색으로 두드러진 켈로이드 상처. 여래의 상반신을 핥듯이 오르내리며 무영은 혹시라도 있었을지 모를 부정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켰다.
“주여래, 너 바른대로 말 해!”
여래는 식탁 의자에 걸쳐두었던 트레이닝셔츠를 들어 올렸다. 목구멍을 향해 머리를 뚫고 나오며 여래는 옷에 힘껏 얼굴을 문질렀다. 별일 아니란 듯 행동하기 위해 일부러 뜸을 들이던 여래는 무영이 거의 칠 듯 가까이 오고서야 겨우 입을 뗐다.
“집 보러 다녔어요.”
“…뭐?”
“이사하라면서요. 한 번 돌아다녀 봤어요. 그러다 길도 잃었고요. 휴대폰이 없어서 내비게이션을 쓸 수가 없잖아요. 그랬더니 벌써 이 시간이에요. 그뿐이에요.”
“하….”
“오버하지 마요. 희원이 그만 놀라게 하라구요. 안 그래도 희원이 요새도 가끔 자다 깨서 울어요. 뭐 때문인지는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요.”
“주여래, 너 진짜야?”
무영은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았으면서도 의외의 대답에 그만 방심한다.
“희원이 차 오래 타면 징징거려서 두고 갔어요. 히터 틀면 건조해서 코 마르고, 감기 걸리고 그러는데 겨우내 감기 뒷바라지 할 거 벌써부터 시작할 일 있어요?”
“어디 다녀왔어.”
“강남.”
“왜.”
“당신 회사에서 가까운 편이 나을 테니까.”
확연히 누그러든 기색에도 여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무영의 과한 반응이 지겹다는 톤을 유지한다. 무영은 양복의 상의를 벗고 식탁 위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래 대답의 진실성을 가늠하느라 눈은 저절로 가느스름해진다.
“그쪽이 오가는 게 편하지 않겠어요? 아, 아니다. 숨겨둔 오메가가 주변에서 얼쩡거리면 오히려 불편한가요? 미리 물어보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너…!”
조소를 띤 여래를 낚아채며 무영은 묻는다.
“너, 정말 옮길 거야?”
너무 가깝다. 입이 마른다. 무영이 준혁을, 케이를 눈치챌까? 아니, 그것은 이뤄지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 내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최대한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현재뿐이다. 계속하자. 여래는 눈을 치켜떴다.
“네.”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네.”
“그럼 너 이제…. 하, 아니다.”
여래는 팔을 붙든 무영의 손을 떼어내며 등을 돌렸다.
“왜요. 막상 내가 그러자고 나서니 부담스러워요?”
“아니.”
무영은 여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덮쳐오는 무영의 품 안에서 여래는 질식할 것 같다. 깊은 집착, 깊은 질투. 그 어느 쪽도 바닥은 없었다.
“놀라서 그래.”
“….”
“이런 순간이 올 줄 몰랐어.”
목 뒤로 끼치는 무영의 숨결에 소름이 돋았다. 여래는 허리에서 교차된 무영의 팔 위에 자신의 팔을 올렸다. 떨쳐내야 할지, 아니면 같이 끌어안아야 할지 헷갈렸다.
“정말이야? 여래야?”
그렇게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 마, 김무영. 내가 꼭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워지잖아.
“여래야.”
“놔요. 희원이 울겠어요. 방 들어가 볼게요.”
“그래.”
“….”
“나오면 같이 저녁 먹자.”
팔을 떨치고 희원을 부르러 가는 여래 뒤로 무영이 키들거렸다. 희원을 데리고 장을 보러 갈 수 없던 정 여사가 어제 한 묵은 반찬만을 내놓았는데도 무영은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아는 여래는 젓가락 끝을 문 채 희원에게 다정한 무영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눈치챈 무영이 고개를 들었을 때야 겨우 눈을 돌려 매운 오징어 볶음을 쑤석거렸다.
김무영이 더 나쁘게 굴었으면 좋겠다. 김무영을 속이는 이 뒷맛이 꺼림칙하지 않게 실컷, 못되게 굴었으면 좋겠다. 여래는 그런 스스로에게 질려버린다.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것도 유분수였다.
복잡하고 위태로운 중에도 케이가 떠오른다. 케이는 여래가 누구와 사귀고 있건 상관없다고 했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묻지 않겠다고도 했다. 케이는 여래만이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케이도 지금의 이 기괴한 저녁 식사의 광경을 본다면 넌더리를 내리라.
어른의 사정쯤으로 치부하며 비열한 자신을 변호하고자 하는 여래를 케이는 이해할 수 있을까? 소년 같은 케이, 아직 세상을 모르는 케이, 더러워지지 않은 케이, 하얀 눈밭 같은 케이, 솜사탕을 처음 먹어본 케이, 천진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케이. 케이. 여래 속에는 온통 케이뿐이었다.
케이.
준혁.
너를 만나고 싶어.
네가 누구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어.
너를… 다시 만나고 싶어.
샤워기의 물줄기 아래에서 여래는 가슴부터 배까지를 길게 훑었다. 두근대는 박동은 심장을 벗어나 온몸을 돌아다녔다. 배에서 그 아래 몸속 가장 깊숙한 심부深部에까지 내려온 떨림은 약한 수압의 물줄기로는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물방울들이 각인 위를 타고 굴렀다. 손등 위의 잎사귀들은 마치 장마 속인 듯 흠뻑 젖어있었다. 여래는 샤워하는 내내 케이만을 생각했다.
“왜 이렇게 오래 씻어?”
“그냥….”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나온 여래를 향해 무영은 희원의 가슴을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유아용 매트 위에 이불을 깔고 누인 희원을 그대로 여기서 재울 모양이었던 듯 거실은 이미 어둑했다. 낮춘 조도 속, 여래가 잠깐 희원을 들여다보려 옆으로 가 앉은 틈을 타 무영은 여래의 허리를 낚아챘다. 흠칫 굳는 여래를 성격적인 수줍음쯤으로 치부한 무영은 개의치 않고 샤워가운 안을 거침없이 훑었다.
“손이 다 불었네.”
무영은 여래의 손바닥 안에 입을 맞춘다.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여래를 억지로 잡아 붙들며 무영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샤워에도 풀어놓지 않은 팔찌가 섬세한 체인 사이로 머금은 물을 함부로 흘렸다.
“희원이 자.”
“…그래도 여기서는 싫어요.”
“누워.”
자글자글한 지문과 익은 살결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넣어 빠는 무영은 여래의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없다. 오히려 적당한 온도로 조리된 식품을 마주하듯 회가 동한 무영은 그대로 타고 올라 여래를 뒤로 눕혔다. 팔을 닻처럼 내려 옭아맨 무영과 그 아래로 몸부림치는 여래의 긴장이 팽팽하다. 오직 잠든 아이만이 고른 숨결을 내뱉으며 태평했다.
“여기서 이러지 마. 제발.”
아이가 깰까 봐 나직하게 애원하는 여래에 무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초조한 여래와는 정반대의 여유 있는 태도였다. 밤, 아파트 주차장을 오가는 차들의 타이어의 궤적이 숨죽이며 지나간다. 여래는 이제 거의 빌고 있었다.
“그만, 그만해요. 싫….”
“주여래.”
무영은 여래 위로 엎드렸다. 그 그림자 아래 여래는 완전히 겹쳐져 가두어진다.
“네 그런 점이 나를 미치게 해. 모르겠어?”
여래가 곤란할 때, 여래가 애원하고 사정할 때, 여래가 무영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고 작아질 때, 무영은 그런 여래가 좋았다. 목덜미를 따라 내려오는 무영의 입술에 여래의 눈동자가 너울거렸다. 살갗의 솜털들이 곤두섰다. 긴장 속에 묻은 경멸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영이 둔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는 이미 여래에게 취해있었다. 여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무영에게 여래는 이제 안심해도 좋을 사람이어야만 했다. 다시 케이를 만나러 나가려면 그의 방심이 필요했다.
케이.
나를 이해해줘.
준혁아.
네가 보고 싶어.
“여래야.”
가슴을 매만지는 무영의 손에도 여래는 케이 생각뿐이다. 심장 언저리를 어루만지는 건 무영이었는데도 자꾸만 케이의 그 갓 잡아 찢은 솜사탕처럼 여리고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는 건 여래로서도 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죽을 거 같다.
“하아, 하아.”
여래는 허리를 짚으며 앞에 놓인 계단을 망연자실하게 올려다보았다.
“빨리 가요. 네?”
앞서 나가려던 케이가 뒤처진 여래를 재촉한다. 여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싫어. 하아. 케이블 카 타.”
“돈 없잖아요.”
“아무튼 간에 싫어. 여길 왜 걸어 올라가. 아니면 버스라도, 흐윽. 타든지.”
“체력이 왜 이렇게 약해요? 원래 몸이 좀 약한 편?”
“아니거든!”
“뭐야, 내가 말만 하면 아니래.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뻥치는 거죠?”
삼 년 내내 집안에만 틀어박혀 간간이 백화점이나 나다니던 체력은 남산 하나 제대로 오르지 못할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학학거리며 달린 숨을 내뱉는 여래의 등을 뒤에서 밀며 케이는 활기차게 외쳤다.
“자, 다시 출발.”
“남산은, 흐, 갑자기, 하아, 왜.”
“우리 아무 데도 못 가봤다면서요.”
검은자위가 큰 강아지 같은 눈이 반짝거린다.
“그러니까 우리, 지금이라도 다 해 봐요.”
“뭐…?”
“데이트, 실컷 해요.”
“나 참.”
“자자, 이러다간 해지겠어요. 얼른요. 우리 올라가서 사진도 찍고 자물쇠도 채워야 돼요.”
“못살아 정말.”
“에휴, 나도 힘들어요. 체력 딸리는 연상이랑 만나는 게요.”
“야!”
발끈해 소리치는 여래를 피해 달아나며 케이는 계단을 두 개씩 덥석덥석 올랐다.
“하아.”
“괜찮아요?”
차갑게 적신 손수건을 눈두덩에 대고 벤치에 누워있던 여래는 자판기까지 달려갔다 내려온 케이가 내민 음료수를 받으려 일어났다. 사이다는 엔간히 내려간 바깥 기온에도 더운 양 캔 표면에 땀을 달고 있었다. 마치 케이처럼.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다고 했잖아.”
토기를 느끼며 멈춰선 여래에 케이는 처음 장난으로 응수했다. 나이 타령을 하며 주변을 맴돌던 케이는 나무를 붙든 채 헛구역질을 하는 여래에 여래보다 하얗게 질려버렸다. 조금 쉬어가면 된다는 여래를 기어코 눌러 앉힌 케이는 화장실까지를 오 분 만에 주파해 적신 수건을 만들어왔다. 생목이 오른다는 여래의 말에 다시 매점으로 뛰어가면서도 케이는 군말 한마디 없었다.
“내가 미안해.”
시무룩해 있는 케이에게 여래는 살풋 웃어 보이지만 어째 소득이 없다. 여래는 하는 수 없이 농담을 시도해본다.
“내가 미안해. 늙어서.”
“장난이었어요. 세 살 차인데 뭐.”
“아이고… 젊은 애 만나기가 힘드네. 다음에는 그냥 버리고 가. 그게 낫겠네.”
“진짜! 미안하다니까요. 그러지 마요.”
“….”
“버린다는 말, 기분 이상하니까.”
순진해 빠져 가지고는. 여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서 침울해하고 미안해하다가 제풀에 눈물을 글썽거리는 케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이리 와.”
여래가 부르자 벤치 끝에 앉은 케이가 조금 다가앉는다.
“더 가까이.”
바로 옆까지 온 케이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여래는 거기에 코를 비볐다.
“이걸로 용서해줄게. 잠깐만 이러고 있자.”
“네….”
“무거우면 말해.”
“네에.”
방학 기간이 아닌 평일 낮, 남산이란 운동을 나온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전부다. 가끔씩 멈춰가며 물든 단풍 아래서 번갈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모두 활짝 웃고 있었다. 정 여사도 빨리 단풍놀이 한 번 보내줘야 하는데, 여래는 케이와 여래를 지나치는 관광객들을 보며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보다 앞서는 건 몸의 바람이다. 여래는 도무지 일어나고 나고 싶지가 않다. 삼 년 분의 시간만큼 기대어 있고 싶다.
그런 여래를 일으킨 건 케이였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무얼 보고 있나 했더니 케이는 불쑥 지도를 켜서 내밀었다.
“우리, 불국사는 가 봤어요?”
경주의 전경이 담긴 지도에 여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럼 제주도는요?”
“거기도 못 가봤을걸. 내가 아는 한으로는 그래. 그런 건 왜 물어?”
“다음에 어디를 갈까 생각해 보느라요.”
“그렇게 멀리는 못 가. 종일을 비울 수는 없어.”
“그래도 모르잖아요.”
글쎄. 그런 날이 올까? 이렇게 도둑처럼 몰래 잠깐 만나는 것 말고 케이와 종일을 흠뻑 젖을 정도로 충분하게 함께 보내는 날이 올까? 희원을 소개하고, 희원과 함께, 희원이 있는 미래에서 셋이 함께 있는 날이? 눈물기가 어린 여래의 눈을 보며 케이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와르르 웃으며 지나간 중년 여성 뒤로는 인적은 그만 드물어진다. 케이는 침을 삼켰다. 여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단풍의 잎맥 같은 입술의 실금들이 고스란하다. 그것을 의식한 케이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입가를 다셨다.
“우리 정말 아무 데도 못 가봤나 보네요. 이것도 안 해, 저것도 안 해. 왕 지루했겠다.”
여래는 투덜거리는 케이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럴 짬이 없었노라고, 살아내는 게 힘겨워서 삼만 얼마짜리 토스터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게 우리의 데이트의 전부였노라고 마악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곁눈으로 흘끔거리던 케이가 완전히 여래를 바라보았다.
“그럼요. 있잖아요.”
“응.”
“우리 손은 잡아봤어요?”
“잡았지.”
“그럼 키스는요.”
“어, 어…?”
“그것도 안 해봤어요?”
말문이 턱 막힌다. 순진하면서도 노골적인 질문에 여래가 잠시 당황한 그때였다. 케이는 제 어깨에 걸쳐졌던 여래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가 뗐다.
“너…. 갑자기 이게 무슨.”
“별것도 아닌데 왜 안 했어요? 왜 안 했대요?”
“야.”
“나도 참 이상한 놈이었네.”
케이의 목이 옆에서 구경하고 선 다섯 손가락 단풍처럼 물들자 여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과 곧 그렇게 되리라는 직감이 칼날처럼 번득거렸다. 그러니까 키스의 예감이 케이와 여래 주변으로 가득했다.
“키스 안 해 봤다는 거 거짓말이죠. 저 놀리지 마요. 우리 다 해봤잖아요.”
“….”
“이렇게.”
사사사사.
사각사각 바람에 흩날리는 잎사귀들의 소리가 순간 끊겼다고 여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닿은 입술의 감각이 다른 모든 감각을 압도해 느꼈으되 유의미한 자극이 되지는 못해 벌어진 일종의 왜곡이었다. 단풍은 바람에 흔들렸고, 햇볕은 늦가을답게 따가웠으며, 기온은 평년보다 낮아 수은주는 영상 이 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여래는 오직 뺨을 감싸 쥔 케이의 손만을 느낄 수 있다. 케이는 작고 어린 것을 만지듯 조심스러웠다. 단지 마주치는 것 외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케이 대신 입을 열어 혀를 핥은 건 여래였다. 그다음은 정신없이 입 안에 들어온 것을 빨고, 섞인 타액을 삼켰다. 그 끝에 여래는 숨을 몰아쉬었다.
“준혁아.”
“나는, 그런 이름 몰라요.”
닿을 듯 마주 보는 케이를 여래는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잠깐만, 잠깐만 이대로 있자.”
“….”
“미안해.”
이후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자연스러웠다는 인상뿐이었다. 여래는 이제 눈앞의 그가 준혁이든 케이이든 상관없었다. 입술에서 시작한 키스가 뺨과 목덜미로 이어졌다. 케이의 이가 여래의 동맥을 눌렀다. 파닥거리는 혈관을 맛보듯 케이의 앞니는 한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섹스의 전주와도 같은 입맞춤들이었다. 여래가 고개를 돌리자 움직이지 못하게 볼을 잡은 케이의 손이 단단히 여래를 감쌌다. 그리고는 다시 키스였다.
결국 케이가 가보고 싶어 했던 산의 정상은 오르지 못했다.
“태워다 줄까?”
차 안에서 묻는 여래에게 케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가봐야 한다면서요. 그리고 나 사는 동네에는 이런 차 들어오지도 못해. 길 폭이 요만하거든요.”
차창에 손을 걸친 케이는 허리를 숙여 여래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쉽네.”
싱긋 웃는 케이와는 달리 여래는 복잡하다.
다음의 우리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건 우리를 어떤 결말로 이끄는 걸까. 생산적이지 않은 일회성의 만남인 걸 알면서도 여래는 케이에게 항상 다음을 약속하게 된다.
“들어가요. 전화해요.”
“그래.”
“안전운전. 알죠?”
“그래….”
이런 상황이 오래갈 리가 없다. 무영이 눈치채기 전에 접어야 한다. 꼬리가 길면 분명 밟힐 것이다. 그러나 엄정한 사실을 배반하며 몸은, 마음은 자꾸만 케이에게로 향했다.
가속 페달을 밟아 옆의 차를 앞지르는 여래는 전방을 주시한다. 케이, 나는 불안해. 너의 존재가 아니라 너와 함께 하는 미래를 원하는 내가 두려워. 무영 몰래 너를 만나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너와 만나는 걸 멈출 수 없는 내가 다음에는 무슨 짓을 벌일지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 * *
“오셨어요.”
나갔다 들어온 게 분명한 여래를 보면서도 무영은 별다르게 타박을 늘어놓지 않는다. 아직까지 집을 보러, 바람을 쐬러, 기분 전환이 돼서 드라이브를 한다는 여래의 변명은 유효했다.
“오늘은 어디 다녀왔어?”
“그냥…. 여기저기.”
“다음엔 나왔으면 들러. 얼굴 보고 가.”
“네.”
여래는 허리에 감긴 무영의 손을 떼어내며 싱크대를 향했다. 똑같은 풍경, 여느 때와 같은 일상, 한결같은 여래였다. 무영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희원을 안았다.
“먹자.”
식탁 앞에 앉은 무영은 허벅지에 앉힌 희원에게 맵지 않은 반찬을 가져다 물리며 즐거웠다. 익숙한 저녁이었다. 이제는 자신의 삶이라고 불러도 어색함이 없을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는 여래는 차마 그 둘을 오래 보지 못하고 먼저 일어나버리고 말았다.
“나, 목공예 일 해보고 싶어요.”
등을 보이고 앉은 여래의 말에 무영은 머리를 괴었던 팔을 풀었다. 둘은 막 섹스를 끝낸 참이었다.
“…여러 가지로 놀라게 하네?”
“그래요?”
“이사를 간다잖나, 목공예는 또 뭐야.”
“삼 년 동안 너무 아무것도 안 했어요. 텔레비전이라도 볼걸.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겠고 혼자만 바보 된 기분이야.”
“너 무슨 일 있었어?”
있었지. 당신한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그러나 여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돌아다니다 보니까요. 그런 생각이 나서. 나 혼자만 덩그러니 뒤처진 게 그래서요.”
“흐음.”
“싫으면 말아요. 집안에 들어앉은 멍텅구리 구경하는 게 당신 취민가 보니까.”
주여래가 무슨 바람일까. 오후 네 시에 깎았어도 저녁 열 시면 다시 파랗게 돋는 수염을 문지르며 무영은 생각에 잠긴다. 왜 저렇게 나부댈까. 잠자리에서는 참아주는 듯 목석처럼 구는 주제에, 섹스가 끝나고 나면 의무를 마쳤단 듯 바로 뭔가를 요구하려 든다. 이제는 되도 않는 투정마저 부린다. 그게 귀여우면서도 찜찜하다. 무영이 알던 주여래는 이렇지 않았다.
뭘까, 왤까.
무영의 눈이 날카롭게 여래의 벗은 등을 훑었다. 그런 무영의 시선이 걸리는 건 목에 남긴 연한 분홍색의 자국이다. 삽입과 사정이 섹스의 전부인 양 구는 여래에 무영은 덩달아 애무를 즐기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저건 무영이 남긴 자국이 아니란 말이었다. 여래는 무영의 입술이 지나는 것마저도 소름 돋아 했다. 종전의 섹스에서도 목에 무언가를 남긴 기억은 없다. 의심은 목덜미를 나른하게 쓸며 여운에 잠기는 듯한 여래의 모습에 완전히 기정사실화된다.
주여래한테 누가 있다.
무영은 드글거리는 속을 다잡으며 다시 물었다.
“주여래, 너 정말 아무 일도 없어?”
“없어요.”
끓어올랐던 가슴은 금세 식는다.
혼자서 궁리하고 궁지에 빠지고 곤경에 처하는 여래를 구경하는 재미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참아줄 수 있는 건 일탈이 어디까지나 무영의 컨트롤 하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무영이 자신 몰래 일을 벌이고 다니는 여래를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그게 무영 외의 다른 누가 여래의 목을 빨게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더더욱.
무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장 희원을 들고 나가버릴까 하다 마음을 바꾼다.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는 무영이 허리를 감아오자 여래는 후드득 몸을 떨었다. 무영은 아직 여운이 남은 아랫도리를 가져다 여래의 아래에 문질렀다.
“주여래.”
까슬한 음모가 엉덩이에 마구 비벼진다. 여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까지 제 안에 담가졌던 부위는 아직 뜨겁고 축축했다. 역겨운 감각이었다. 무영은 천천히 여래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무영은 이젠 여래가 질색해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지. 그래, 해. 알아봐.”
“고맙… 습니다….”
“그럼 내가 해주는 만큼 나도 너한테 받는 게 있어야겠지?”
“네?”
“너도 어디 한 번 최선을 다해봐.”
드디어 비싼 얼굴을 구경시켜 준다. 무영을 향해 뒤돈 여래의 옆모습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언제 안아도 늘 처음처럼 구는 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무영은 늘 여래가 새로웠다. 매번 흥분은 낡아지고 닳아지지 않은 새것처럼 일어났다. 방금의 섹스가 마치 없던 일인 듯 새삼 서글프게 구는 여래에 욕정이 불타올랐다.
“올라와.”
슬퍼지는 저 눈. 착각으로라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여래를 무시하며 무영은 마른 체구 중 유일하게 살집이 붙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세워서 넣어.”
그렇게 무참한 얼굴 하지 마. 여래야. 지금부터 실컷 짓밟아 줄 거니까.
여래 넌 꼭 여린 풀의 줄기 같아. 누워도 다시 일어나고 휘어져도 부러지는 법이 없지. 어차피 네가 내게 꺾이지 않을 바에는 나는 너를 눌러 옴짝달싹 못 하게 하겠어. 그게 너를 유린하고 피폐하게 하는 일이라도.
“흐윽….”
“똑바로 움직여.”
엉덩이 사이로 문질러 세운 무영의 것을 쥐어 제 안으로 더듬거리며 밀어 넣는 여래를 무영은 하나도 빠짐없이 노려보았다.
주여래한테 무슨 일이 있다. 무영에게는 나쁜 소식일 무슨 일이.
* * *
“찾으셨습니까.”
“그래.”
책상에 걸터앉아 창을 바라보고 있는 무영은 들어온 강 실장의 인사를 등으로 받았다.
“여래 뭐 하는지 좀 알아봐. 낮에 말이야.”
“네.”
“일하는 아줌마 쪽도 같이 파 보고. 둘이서 무슨 작당을 하는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자료 모아서 보름, 아니 일주일 뒤에 들고 와. 클린하든 더티하든 무조건 있는 그대로 보고해.”
강 실장은 책상 서랍을 열어 뒤지는 무영을 쓰게 바라보았다. 무영은 담배를 찾으며 계속 지시한다.
“한 번은 봐줘. 방심하게 만들라고. 덜미 확실하게 잡을 때까지 기다려. 발뺌할 여지 남기지 마.”
그간의 안온한 생활에 강 실장은 안녕을 고한다. 웃음기를 싹 뺀 무영은 예전의 그처럼 차가웠다. 한참을 뒤집더니 드디어 서랍 안에서 담배를 찾아낸 무영이 그 끝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는 무영은 놀라울 만치 삼 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담배가 건강에 나빠서, 그러라고 줄기차게 피워대던 김무영 말이었다. 입에 담배를 문 채 무영은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뭐해? 나가지 않고.”
“네.”
“강 실장. 나, 강 실장 믿어.”
“….”
“알지?”
무영은 담뱃재를 함부로 털며 강 실장을 쳐다보았다. 재가 날렸다.
탁.
문을 닫고 나온 강 실장은 들고 있던 클립보드를 책상에 던졌다.
여하튼 간에 주여래가 문제다. 그러기에 진작 사람 붙이고 이십사 시간 체제로 돌리자니까 물러진 무영이 됐다고 말리는 길에 그걸 못한 게 이 사달이 났다. 일지를 던지는 강 실장의 서슬에 새끼비서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강 실장으로서는 이 상황이 개 같아서 새끼 비서 기분까지 살필 여력이 없다.
클린하건 더티하건? 하, 웃기시네. 주여래가 설마 뒤에서 무슨 짓이라도 했으면 강 실장이건 주여래건 다 죽은 목숨이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선 안 됐다. 있다면 미리 처리해버려야 한다.
강 실장은 휴대폰을 열어 연락처를 불러냈다.
“조 사장님.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 * *
“저기.”
오늘 분위기가 왜 이러지. 케이는 머뭇거리며 여래 주위를 얼씬거렸다. 만나자는 전화가 왔을 때도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싶더니 만나는 장소에서는 아예 넋을 잃고 있는 여래는 작은 몸을 한껏 쪼그린 채 앉아있었다.
“저기요. 저….”
“왔니?”
곁에 케이가 앉아서야 비로소 복잡한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여래는 서둘러 낯색을 바꿔보려 애쓴다.
“무슨 일 있어요? 몸이 안 좋아 보여요. 눈도 부었고.”
여래는 힘들여 찡그린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초보 도예가가 만든 첫 번째 작품 같은 웃음이었다. 반쯤은 찌푸리고 반쯤은 억지인 그런 웃음을 케이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보자마자 지적하는 거야?”
“아니, 저는 그냥 걱정이 돼서. 그리고 차도 안 가지고 나왔고 하니까 무슨 일인가 싶고. 장소도 갑자기 바꾸고요.”
걱정이 따사롭다. 버스 정류장 뒤로 가로수 길을 따라 놓인 벤치에 웅크리고 있던 여래는 겨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보자고 했지.”
여래 말의 질감은 깔끄럽지 않고 물렀다. 케이에게 이런 여래란 조금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여래는 늘 케이 앞에서 약간 화가 나 있었다. 케이가 케이인 것이 못마땅하단 투였다. 가까워졌다가도 거두어가는 손에서, 웃으려다 마는 찰나의 표정에서 케이는 여래의 거리감과 그 거리감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여래가 오늘만은 약하다. 어째서일까, 어떻게 된 일일까를 고민하느라 쳐다보는 케이에게서 갑자기 일어나는 것으로 벗어난 여래는 등을 보인 채로 톤을 높였다.
“우리, 뭐할까? 오늘은 또 어떤 데를 가보고 싶어?”
“어제 잠 못 잤어요? 피곤해 보여.”
그제, 무영이 네 번째 사정을 했을 때 여래는 기절했다.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아래는 엉망으로 부어있었다. 그것은 섹스라기보다는 체벌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들면 또 어떤 모습으로 깨어날지 몰라 두려웠다. 그리고 예감이 있었다. 며칠 느슨했던 김무영이 이렇게 조여 오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김무영이 눈치챘다.
또 희원을 뺏어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꼬박 하루를 뜬눈으로 보냈으니 몰골이 성할 리가 없었다. 케이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여래는 머리를 흔들어 몰려오는 졸음과 신경과민을 떨쳐냈다. 케이 앞에서 무영과의 밤을 떠올리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그냥 들어갈까요?”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오늘 뭐 할 거냐구. 생각해둔 거 없어?”
“여래 씨.”
이겨내야 했다. 활기를 연기하며 케이를 보는 여래는 거의 성공할 거 같았다. 케이는 어수룩했고, 아이 같았으니까. 속이는 대로 속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본 케이는 심각했다.
“뭐야. 닭살 돋게.”
“여래야.”
가슴이 뻐근해진다. 여래는 이름만으로 자신을 부르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도 지지 않고 쏘아보자 여래는 기가 막혀 숨을 뽑아냈다. 어디서 반말이냐고 따질 틈도 없었다. 케이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케이는 예열되는 기분을 애써 참는다. 이름으로만 부르는 케이에게서 여래가 준혁을 비춰보고 있단 것쯤은 빤했다. 그게 아니라면 버르장머리 없는 애새끼를 보는 표정이 저렇게 물기를 머금을 리가 없었다. 자신 위에 다른 누군가를 겹쳐 보는 여래가 케이 또한 달갑지 않았지만 케이는 도무지 어떡하면 여래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릴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너…!”
“알겠어요. 미안해요. 나는 몰라도 된다고 자꾸 그러니까 초조해져서.”
“….”
“저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는데 당신은 가르쳐주려고 하지도 않잖아요. 그럼 도대체 우리는 왜 만나는 거예요?”
“그건.”
“애써 만나러 나오게 만드는 것도 그래요. 나는 부담만 되는 사람인가 싶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또 짜증 나요. 여래 씨가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인데. 오늘 만나러 온 이유도 그거 때문이었을 텐데. 난 당신이 누군지 아직도 몰라. 자몽티를 좋아하고 솜사탕을 싫어한단 것 빼고는.”
“케이.”
격자무늬를 이루는 보도블록의 대칭 지점을 쏘아보던 케이는 여래의 부름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여래는 설명하고 싶었다. 난잡스러울 정도로 거칠게 자신을 안은 김무영이 여래에게 사람을 붙였단 것도, 차를 몰고 이동하는 뒤로 따라오는 차량의 존재를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것도, 자꾸만 길을 잃는다는 여래에 무영이 차에 달아놓은 내비게이션을 켜 지하철역에 바로 붙은 주차장을 검색하고 그리로 핸들을 꺾은 것도, 주차장에 차를 세운 여래가 서둘러 주차 건물을 계단으로 빠져나가 지하철역까지 뛰었던 것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여래가 내려오길 기다리던 남자들이 험악하게 낯을 굳히며 바로 뒤쫓아온 것도, 플랫폼에 들어온 열차에 우왕좌왕하던 남자들이 무르춤하게 들어온 지하철을 타는 걸 보며 기둥 뒤에서 나온 여래가 지하철역에서 올라와 버스를 탔던 것도, 이번 한 번은 요행이 통했지만 미행을 따돌린 이상 김무영이 자신의 외출을 더는 허락하지 않을 거란 것도, 그러므로 여래에게 앞으로 자유는 없을 거란 것도 전부 다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여래는 손을 내밀었다.
“케이. 이리 와.”
여래가 케이라고 불러 주는 건 처음이었다. 케이는 지금까지 시근거리던 것도 잊고 슬그머니 여래 옆에 가서 섰다. 무턱대고 가슴이 뛰었다. 이걸 안다면 여래는 또 얼마나 케이를 풋내기 취급할까. 케이는 부러 툭툭 발끝을 찼다.
“오늘은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언제는 싸움이나 됐나 뭐. 나 혼자만 열을 냈지.”
“케이. 나랑 자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아예 멈춰버린다. 케이는 입을 딱 벌렸다.
“저기, 우리 아직 뽀뽀, 아니 키스밖에 못 했는데. 저기.”
“싫어?”
싫어서 망설이는 게 아니다. 케이는 여래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던 여래가 힘없이 기대오는 것이 마음 아팠다.
“싫진 않은데, 당연히 좋은데.”
“그럼 자면 되잖아.”
“왜 이렇게 마지막인 것처럼 말해요.”
“케이.”
“꼭 이걸로 다 끝내려는 것처럼, 그러니까. 마음이 막 슬퍼져서 나는….”
케이의 절박함이 여과 없이 전해져와 견디기가 힘들다. 여래는 케이의 가슴에 기대 눈을 가렸다. 케이는 여래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어. 나를 아는 사람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도.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쉽게 정리하려고 하지 말아요. 네?”
“…쪽팔리네. 나 지금 까인 거잖아. 섹스하자고 했더니만. 하하.”
“우스개로 넘어가지 마!”
케이가 진지해지면 큰일인데, 우리는 막다른 골목인데. 여래는 핏줄을 돋우며 소리치는 케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혹시 그… 지금 만나는 사람이랑 싸웠어요? 나랑 만나지 말라고 해요?”
“그런 거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나한테로 와.”
“뭐…?”
“그 사람이랑 헤어져요.”
여래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린애, 바보 취급을 해서가 아니었다. 못 미더워서도 아니었다. 가진 감정을 숨길 줄도 모르고 고스란히 드러내는 케이는 예뻤다. 준혁과 여래가 가져보지 못한 유년시절을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와 뒤늦게 누리는 듯한 케이에 여래는 눈이 다 부셨다. 낱낱의 표정들이 전부 사랑스러웠다. 추한 관계로 얼룩진 여래가 함께 있으면 혹시 케이가 더러워질까 걱정할 정도로. 여래는 케이의 순수함이 지금 이대로이길 바란다.
“나 버리지 마요.”
강아지 같은 눈매에 슬픔이 매달렸다. 여래는 가만히 그 눈동자에 손을 가져갔다.
“이젠 울 줄도 아니?”
준혁아.
“웃는 것도 잘하고.”
준혁아. 최준혁. 무뚝뚝하고 뚱해서 오해를 사곤 했잖아, 넌. 얻어맞아도, 칭찬을 받아도 너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 그게 서글프고 안타까웠다. 네가 행복하기를 정말로 바랐어. 너와 함께 있는 내내, 그리고 너와 헤어져 있던 삼 년의 시간에도 쭉 그랬어. 준혁이 네가 웃을 수 있게 되길.
“다 컸네.”
우리 준혁이, 나의 케이. 이제 너에게 나는 필요 없어. 너는 새로운 인생이 있어. 추잡하고 약해 빠진 나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 너만의 인생이. 여래는 드디어 결심할 수 있다.
다시는 너를 만나지 않을 거야.
“바래다줄게요.”
“오지 마. 네가 이러면 내가 더 곤란해져. 여기서 그만 가.”
“그럼 전화해요.”
뒤돈 여래의 등을 향해 케이는 외친다.
“꼭이에요. 전화해요!”
여래는 대답하지 않았다. 콧등 위로 떨어진 빗방울에 고개를 들자 하늘은 잔뜩 찌푸려져 금방이라도 폭우를 쏟을 듯 우렁우렁한 구름을 가득 매달고 있었다.
은애원으로 돌아가는 길 같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우산을 들고나와 줄 누군가는 곁에 없다.
* * *
“그걸 놓쳐!”
강 실장은 제 머리에 부딪힌 강한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조 사장으로부터 주여래를 지하철역에서 놓쳤단 보고를 듣고 함께 이사실에 들어간 강 실장에게 날아온 것은 며칠 사이 무영의 애용품이 된 크리스털 재떨이였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던 조 사장이 휘파람을 불며 몸을 움츠렸다.
“아따, 힘 좋으시네. 우리 이사님. 그 기운 뻗치는 걸 주여래한테 못 풀어서 어떡한디야.”
“조 사장님.”
강 실장은 이마를 누르며 조 사장을 말리려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멀찌감치 봐도 빼싹 곯기만 했지 머시가 이쁜지도 모르겠던디. 크크큭. 하긴 그런 것도 오메가 년이라고 뭐가 있긴 있어야?”
“조 사장님!”
“아니면 보기랑은 다르게 기가 막히게 떡을 잘 쳐버리나? 아주 쫀득쫀득혀요, 어쩌요?”
자신을 세상 물정 모르는 높은 데의 도련님쯤으로 치부하며 껄덕대는 조 사장에 무영은 바로 되받아치지 않았다. 가만히 시계를 푼 무영은 윗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조 사장이 선 책상의 반대편을 향해 걸었다. 조 사장의 재킷은 벌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음흉하리만치 불룩하게 도드라지며 머리를 내민 것은 리볼버의 실린더였다. 무영은 상냥하게 미소를 띠었다.
“조 사장님.”
“야.”
“내가 여래한테 존댓말 하라고 했죠.”
“어어잇! 윽!”
“누가 너한테 반말하래.”
갑자기 멱살을 쥔 무영에 밀려 바닥에 등을 부딪친 조 사장이 어떻게 손을 쓰기 전, 무영은 조 사장의 가슴팍에서 리볼버를 빼 그의 관자놀이에 박아 넣었다.
“니미럴, 아퍼, 아, 팔 빠지겄다고! 악! 이사님! 사장님!”
아래서 꿈틀대는 조 사장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며 무영은 중얼거렸다. 눈알을 스칠 듯 다가온 총구에 조 사장은 꿀꺽 크게 침을 삼켰다.
“똑바로 들어, 조 사장. 두 번 부탁했다고 무슨 특별한 사이나 되는 줄 알지 마. 기어오르지 말라고. 당장 주여래 찾아.”
“아, 알겠…. 알아 모신다고라.”
“나 조 사장 믿어. 저번에도 잘 해줬잖아. 이번에도 잘 할거죠?”
“야, 야. 하모요.”
발발 떠는 조 사장을 향해 무영이 즐거운 듯 끼릭, 실린더를 회전시키던 그때 조 사장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엉금엉금 기어 무영의 무릎께를 벗어난 조 사장은 휴대폰의 상대방에게 언성을 높였다.
“주여래는. 어? 어디? 주차장 왔다고?”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이마를 누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강 실장을 향해 무영은 짜증 섞인 입내로 혀를 찼다. 리볼버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무영은 티슈갑을 던져 강 실장의 발치로 보냈다. 다음번에는 피해, 라고 말하는 무영에게 강 실장은 민망한 듯 돌아서 티슈로 피를 찍어냈다.
“혼자여? 지금 어디로 가는디.”
팔짱을 끼우고 보는 무영을 향해 눈짓을 보낸 조 사장이 수화구를 막은 채 조심히 보고를 올렸다.
“어쩌시겠어라. 그냥 집으로 간다는디. 시방.”
무영은 개켜놨던 상의를 걷어 팔에 끼우며 턱짓으로 강 실장을 불렀다. 나간 강 실장이 차를 대기시키는 전화가 곧바로 연결되었다.
“족치러 가야지. 그럼.”
선뜻 리볼버를 챙길 생각을 못 하는 조 사장 대신 그것을 들고 나선 건 무영이었다. 나가는 무영 뒤로 창가에는 부딪쳐 으깨진 빗방울들이 하나씩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겨울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