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부 : 종장終章 (6) (21/23)

3부 : 종장終章 (6)

달에는 지구와 같은 대기가 없다. 바람이나 물로 인한 풍화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지층 표면의 변화 역시 없다. 그래서 달은 지금까지 그것이 겪어온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운석에 부딪혔던 크레이터들, 식은 용암들이 어두운색을 빛내는 바다들, 암스트롱이 남긴 첫 발자국까지.

나도 마찬가지야.

케이는 이르게 뜬 달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달. 나는 내 상처와 생의 흔적들을 스스로 치유할 할 힘이 없다. 변화는 여래로부터 시작되었다. 화도 낼 줄 알고 초조해서 긴장할 줄도 안다. 전혀 다른 자신이 발견되고 태어났다. 케이는 뒤를 돌아 녹아 사라지고 있는 여래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진 질감과 향기를 손끝 말단에까지 퍼지는 온기를 되새긴다.

소리, 있어.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의 편린들은 파편만을 남기고 그 빛을 쇠한다. 그러나 그것이 주었던 따스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기억을 관장하는 것은 대뇌 전두엽의 고유한 영역이 아니다. 배우고 익힌, 체감하여 취득한 정보와 지식은 신경 조직에도 고스란하다. 기억은 몸의 일부로 체화體化된다. 한 번 자전거를 배우고 나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자연스럽게 탈 수 있는 것처럼.

아까 여래는 강변을 내려다보며 침울했다. 데이트라고 해도 이런 곳뿐이네. 추운 날씨였지만 여래가 인적이 드문 곳을 고집하다 보니 한강변 외에는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라고 중얼거리는 여래는 아래만을 보고 있었다. 여래가 가진 뭔지 모를 특수한 사정이 그를 위축되고 자신 없게 만들고 있었다.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장소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에 여래가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심상한 풍경도 특별한 순간으로 바꾸어놓는 마법 같은 당신이 여기에 있으므로 충분하다.

편의점에서 산 핫초코는 손을 데우기도 전에 식어버렸다. 컵을 손에 쥐고 여래는 물비늘을 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었다.

뺨을 할퀴는 강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여래는 강물 위에 떠다니는 빛 덩어리가 흘러가는 장면을 끝까지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이마가 저릿해질 정도로 추운 날씨에 대화는 없었다. 입을 벌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시렸다. 대신 케이에게 말을 거는 것은 과거의 여래였다.

난 반짝거리는 게 좋아.

그것은 분명 케이가 처음 보는 여래였건만 이상하게도 낯선 느낌은 없었다. 대신 여래를 영원히 저 빛 속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는 명령어가 켜졌다. 과거의 자신을 살게 했던 그 문장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감각이 기체처럼 에너지를 띠고 활성화되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말단에까지 힘차게 피가 돌았다. 여래는 스위치였다. 아니, 여래는 케이의 일부였다. 케이 자체였다. 그것을 지워내는 방법이란 케이가 죽거나 전부를 갈아 끼워 다른 인간이 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고 그래서 현재다.

잊고 있던 자기 자신이 깨어난다. 여래가 그리워하던 바로 그 자아가. 최준혁이.

케이는 지하철역으로 녹아 없어지고 있는 여래의 뒷모습을 마지막 한 점까지 샅샅이 바라본다. 하나하나를 사진처럼 기억한다. 시각 정보들을 수집한다.

섹스하자. 케이.

케이를 케이라고 부르는 여래는 주장하고 싶은 바도 없이 모든 걸 단념한 듯 보였다. 여래는 케이와 헤어지려 하고 있었다. 차근히 서로의 사이를 쌓아올리는 게 아니라 단번에 던져서 무너뜨리려는 여래가 가슴 아팠다. 괴로웠다. 여래에게 버림받는다. 여래가 손을 놓으려 한다. 그것은 세상의 종말과 같다. 여래는 기억 전의 케이의 인생을 지배하는 절대자였다. 여래는 케이의 신神이었다. 종교였다. 케이는 그것을 잃을 수 없었다. 겨우 찾은 자기 자신을 놓아도 좋다는 바보가 어디 있을까.

여래 없는 나는 불완전해. 자라지 않아. 성장할 수 없다. 달처럼 하늘에 고정되어있겠지. 아무도 다가오지 않고 아무에게도 다가가지 않는 채로. 인력과 척력의 균형으로 꼼짝없이 붙들려 같은 궤도만을 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여래는 케이는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간 여래를 따라잡기 위해 뛰었다. 여래에게 무슨 일이 있다.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아까의 문장을 수정한다. 여래 없이 나는 불완전할 수조차 없었다.

여래 없이 나는 없어.

유리遊離되었던 준혁이 이제 케이의 일부가 된다. 흡수된 준혁은 케이이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다른 누구이기도 하나 그것이 소구하는 본질은 같았다.

여래.

* * *

“저 차를 따라가 주세요.”

택시를 잡아탄 남자가 가리키는 손에 기사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흰색 세단이 신호에 걸려 서 있었다. 기사는 쯔쯔 혀를 찼다. 짜식이, 어린 놈이 뭐라고 목소리를 까는지 모르겠다.

“어흠. 불법적인 일은 못 도와드립니다.”

기사는 엄지와 검지로 전통도 유구한 그 제스처를 해 보였다.

“뭐, 요거, 요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남자는 가격을 흥정하려는 기사의 말에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불법적인 일, 아닙니다.”

말투가 어색하다. 외국인인가? 기사는 뒷좌석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말본새가 왜 저 모양인지 몰라, 요즘 애들이란. 쯧.

“스토킹이니 뭐니, 하도 세상 무서워서. 남의 차를 막 따라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게?”

“스토킹, 아니에요. 무서운 일, 하지 않아요.”

이거 점점 묘하다. 소리치는 놈, 윽박지르는 놈, 보자마자 반말인 놈은 많이 겪어 봤지만 이렇게 끝까지 순진할 정도로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녀석은 또 처음이다, 음흉한 새끼처럼 보이진 않는데 모르겠다. 이러다가 나중에 덤터기 쓰는 거 아닌가? 에라, 몰랐다고 해야지 뭐. 날이 추워서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오늘 마수걸이도 못 했다. 내리라고 할 배짱은 없었다. 기사는 핸들을 꺾어 정차했던 길가에서 빠져나왔다.

“안전벨트 매세요. 뒷자리도 필수입니다.”

“네.”

“나쁜 짓은 하지 마시고요.”

“나쁜 짓 안 해요.”

“아니. 나쁜 놈이 이마빡에 나쁜 놈이라고 쓰고 다니는 줄 아슈?”

“여래가 착하게 있으라고 했으니까. 안 해요.”

여래가 누군데? 라고 묻고 싶지만 기사는 깜빡이를 켜지 않고 차선을 변경한 앞 차에 욕지거리를 하느라 질문을 놓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차창이 빗물로 얼룩진다. 여래가 타고 있을 흰색 세단이 와이퍼의 사이사이로 가물거렸다. 쥐었다 편 주먹에 손금에서는 얕은 땀이 배어 나왔다. 여래는 차들 사이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으며 또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등을 세우고 앉은 케이를 백미러로 보는 기사가 아닌 듯 위로를 던졌다.

“너무 걱정 말아요. 차가 눈에 띄어서 따라가는 건 어렵잖으니까.”

“네.”

“그런데 무슨 사이유?”

케이는 허벅지에 올린 손을 다시 주먹 쥔다. 아까 여래를 만졌던 감촉은 눈 녹은 듯 사라져 이제 없었다. 여래만이 케이를 알고 기억하는 세상에서 여래가 없이는 케이도 없다. 비유나 찬양의 의미가 아니라 사전적인 단어 그대로다.

“제 전부예요.”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닌가 모르겠네. 기사는 솟구치는 의심을 누르며 핸들을 돌렸다. 올림픽대로를 올라가는 차는 크게 휘어 삼백육십 도로 돌았다. 여래와 케이는 비슷한 속도로 한 바퀴를 돌아 원점의 다른 높이를 향해 달려갔다.

* * *

여래 뒤에 붙여놓았던 남자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동선을 좁혀가던 조 사장이 뒷좌석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영등포라는디요.”

이마를 손으로 덮고 있던 무영은 조 사장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다음 IC에서 빠져.”

갈 곳도 없는 여래의 행선지란 어차피 집뿐이었다. 강 실장은 미리 영등포로 향하는 올림픽대로를 타라고 지시해 놓은 참이었지만 운전기사는 마치 처음 듣는 양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엑셀을 힘주어 밟았다. 차 안은 침통하리만치 정적이었다. 그 압력을 이기기 위해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기사는 앞 차를 추월하는 데에 혼신을 다한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

차 안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에도 불구하고 강 실장이 감히 입을 연 것은 무영이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다. 강 실장은 무영의 허벅지에 올려진 조 사장의 리볼버를 무시할 수 없다. 하여튼 조 사장이 문제였다. 저런 건 도대체 왜 들고 다녀서는! 일이 심각해지기 전에 미리 단도리를 치는 게 나았다. 수습하기 어려운 일은 벌이지 말아 달라는 사인 정도는 보내놔야 했다. 강 실장이 이마를 찌푸리자 아까 무영이 던진 재떨이가 찢어놓고 간 자리가 항의하듯 욱신거렸다. 무영은 좌불안석인 강 실장을 향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기계적인 미소였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금속성의 웃음.

“왜. 내가 주여래 쏘기라도 할까 봐?”

저녁 시간, 아파트 단지에서 그런 일이 벌어난다면 그건 신문사 주간과의 저녁 몇 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강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무영이 그 정도의 상식과 인지를 갖췄음을 믿어서는 아니었다. 대신 강 실장은 무영이 여래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그것은 믿음보다 큰 실재하는 현실이었다.

무영은 여래를 다치게 하지 못한다. 절대로.

“그래? 강 실장은 내가 못 쏜다 이거지?”

둘의 대화에 조수석에 앉은 조 사장의 귀가 움찔거렸다. 폭력의 징후라면 개처럼 후각이 좋은 부류의 사람다운 태도였다. 무영은 거의 신이 나서 돌아보려는 조 사장의 기척을 언짢은 기색도 없이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모르겠어. 두고 봐야지.”

“이사님.”

무영은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너머로 부서지는 빗방울들이 덧없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혈관 벽을 긁고 지나가는 혈액의 압력이 정상 이상으로 높았다. 여래가 필요했다. 그 어느 날, 미칠 것 같은 무영을 단숨에 진정시키던 하얀 여래, 긴 주차로의 끝에서 브레이크를 밟게 하던 여래가 보고 싶었다. 무영은 입을 열었다.

“여래가 왜 그랬을까? 강 실장. 그 대단한 최준혁 때문에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럼 말이야, 다른 누구라도 싫었어야 하잖아. 안 됐어야 하잖아. 그런데 다른 새끼를 만나? 말이 돼?”

순수하게 궁금증을 띠는 무영은 아이 같다.

“그런데 왜, 왜 그랬을까. 최준혁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고 다녔을까. 나한테 들킬 거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런 모험을 왜 했지? 희원이 그렇게 뺏겼다가 찾은 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강 실장. 왤까? 왜라고 생각해?”

“….”

“최준혁이 아니었다면 나였어야지. 당연히 그랬어야지. 그래야지 맞지.”

강 실장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무영도 대답을 추궁하지 않아 차는 잠시 적막으로 빠져들었다.

“난 그걸 용서 못 하겠어. 강 실장.”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여래도 무영이 여래의 외출을 눈치챘단 걸 알 터였다. 적당히 봐주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여래는 벌을 받아야 했다. 어쩌면 여래의 삶 자체가 내도록 무영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무시한다.

미친 연인, 나의 여래. 무영은 중얼거린다.

무영은 여래가 미쳐도 별로 상관없었다. 곁에 있기만 한다면 어떤 형태로라도, 유리관에 가두어서라도, 지저귀지 못하는 새가 되어도, 무영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좋았다. 그 마음을 깨닫자 바로 실행했다. 여래를 붙들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최준혁을 없애고 최준혁이 되는 것.

거짓을 연기하는 무영을 여래는 사랑해 주었다. 정말로 듬뿍, 흥건하게 여래의 사랑에 젖었다. 여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졸며 무영은 생각했다. 미치건 정상이건 여래는 여래일 뿐인데 그것을 구별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어차피 너일 뿐인걸. 여래는 허벅지 안쪽 부드러운 살을 찾는 무영의 코를 밉지 않게 비틀었다. 행복했다.

여래야, 그런데 왜 그랬어?

무영은 리볼버의 탄창을 돌렸다. 끼리릭, 음험한 소음이 났다.

여래든 그 새끼든 둘 다 족친다. 여래는 죽기 직전까지, 그 새끼는 죽을 만큼.

내리는 비로 인한 정체에도 불구하고 무영의 차는 도로를 쉽게 빠져나간다.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채찍질한 운전기사의 필사적인 주행 덕분이었다. 그래서 무영의 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여래의 차와는 거의 일이 분 정도가 시차의 전부였다.

엉성하게 성긴 화단 너머 여래의 동태를 살피는 무영의 차 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나지 않았다. 어떤 침묵은 소란보다 힘이 세다. 십분 여를 그러고 지났을까, 여래가 드디어 차에서 내리자 숨조차 편하게 쉬지 못하던 조 사장이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투둑, 투두둑.

가늘던 빗방울이 굵기를 더하는 데도 차 밖으로 나온 여래는 서두르지 않는다. 피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모든 행동을 천천히 느리게 하는 여래에 무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인상의 뜻을 아는 강 실장은 다시 한번 자신의 확신에 확신을 더했다. 그래, 김무영은 주여래를 다치게 하지 못한다. 주여래가 내리는 비에도 닳을까 못 참아 하는 김무영이 여래에게 당장 위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을 거였다. 아까만 보아도 무영은 조 사장의 반말도 못 참아 하질 않았는가. 그게 뭐라고.

강 실장으로서야 구설과 소문만 없다면 무영이 여래를 어떤 식으로 닦달하든지 간에 큰 상관은 없었다. 문이 닫힌 곳에서만 해라. 안 보이는 데서만.

차 문을 닫는 데만도 한참이 걸리던 여래는 차 키마저 떨어뜨린다. 여래는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그대로 서 있었다. 넋이 나간 듯 보이는 여래에 강 실장이 움직거렸다. 무영이 체면 때문에 나서지 못한다면 감정적이든 실제적이든 궂은일 담당인 강 실장이 나서야 할 차례였다.

“제가 나가볼까요.”

“놔둬. 얼마나 청승 떠는지 구경이나 하게.”

“이사님.”

“놔두라고 했어. 강 실장.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끼리릭.

녹 때문인지 무영 허벅지 위의 리볼버에서는 계속해서 위험한 소리가 난다.

차 키를 주우려 수그린 여래의 뺨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를 흘리며 웅크리고 앉은 여래는 작은 물웅덩이에 빠진 차 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떨어뜨린 게 키가 아니라 자기 마음인 양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채로 멍한 여래에 무영은 드디어 리볼버의 탄창을 돌리던 엄지를 멈췄다. 무영의 인내심이 닳아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사님!”

강 실장을 뿌리치고 걷는 무영의 뺨이 실룩거렸다. 무영은 거의 달리고 있었다. 여래는 철벅거리는 무영도 눈치채지 못하고 가만했다. 옹송그린 여래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무영은 치미는 화로 부들거렸다. 목구멍까지 치받힌 말들이 안에서부터 밀려 나왔다.

주여래. 너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왜 그러고 청승을 떨고 있어. 이 날씨에 비를 맞아서 어쩌려고. 몸도 약해빠진 주제에 뭐를 그렇게 슬퍼하느라 그러고 있어. 나는 여기에 있는데 너는 어디에 홀딱 빠져 정신을 못 차려. 뭐야! 누구야! 널 또 정신 나가게 한 게 누구냐고!

“일어나!”

벽력같은 무영에 커진 여래의 눈으로 빗물이 흘러들었다.

“일어나라고!”

차가운 겨울비가 심장에 스며든다. 억지로 잡아 일으켜진 여래는 놀랄 새도 없이 무영 손에 흔들렸다.

“…무영 씨.”

드디어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게 되었는데 이제 그 이름이 나는 쓰다. 무영은 여래를 붙든 팔에 힘을 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조여 터트려버리고 싶다.

“왜. 여래야. 그 새끼가 헤어지자던?”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왜.”

고약하다. 죽고 싶단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이라니. 감정에 앞서 실리적으로 구는 여래가 영악스럽다.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

“모, 몰라. 난 그런 거. 몰라요.”

“누굴 감싸!”

백세계白世界. 은애원의 운동장처럼 희고 텅 비어있는 나라. 눈앞은 하얗게 바랬다가 점점 색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번개가 쳤나 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영이 갈긴 따귀의 충격으로 잠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던 여래의 착각이었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붙들린 여래의 손이 빨갛다가 다시 창백해진다. 피가 돌지 않는 팔에 저릿하게 전기가 올랐다. 번개가 여기저기서 자신을 때리고 있는 듯해 여래는 후드드 머리를 털었다.

예전에는 겁이 없었나 보다. 은애원 원감은 저렇게까지 무섭지 않았었다. 때려볼 테면 때려보라지. 배짱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무영은 정말로 여래를 어떻게 해버릴 것 같다. 그래서 무섭다.

그동안 강 실장이 구슬려 놓은 경비는 끼어들지 못하고 멀리서 목을 빼고 경비실 주위만을 오간다. 우산을 든 강 실장은 무영과 여래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을 지켰다.

김무영은 주여래를 다치게 하지 못한다. 제발, 그래야만 한다.

거의 기도에 가깝게 되뇌는 강 실장이 절박했다. 그는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그새 이마에 앉은 무른 딱지를 쥐어뜯었다.

“말하라고!”

여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고인 빗물이 눈물 대신 뺨을 타고 내려갔다.

물리적인 폭력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드는 생각이란 이제 여기서는 정말로 더는 살 수가 없겠구나, 하는 회한이다. 경비 아저씨는 그렇지 않아도 오메가인 여래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정 여사가 아파트 옥상에 희원이 빨래를 넌다고, 햇볕으로 소독을 해야 좋다고 드나드는 걸 들킨 날 이후로는 더 그랬다. 게다가 이 난리를 떨어놨으니 앞으로 여래가 받을 눈총은 더 따가워질 터였다. 어차피 준혁이 살아있는지도 알았고, 그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린 것도 알았으니 여기서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아쉬운 건 왜람. 여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준혁은 케이가 되었다. 여래가 없어도 괜찮은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준혁은 돌아오지 않는다. 준혁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마찬가지였다.

“주여래.”

혼자서 멍한 여래에 무영은 여래를 잡아끌었다. 여래가 반사적으로 버티자 무영은 실 꼬투리를 잡아 끊어내듯 잡은 손을 거칠게 당겼다.

“이리 와!”

김무영은 또 어떤 지랄을 떨까. 이번에는 영원히 희원을 못 보게 하려나? 아니면 나를 반쯤은 죽여 놓을까? 여래는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볼을 감싸 쥐었다. 분명한 건 뺨 한 대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란 거였다. 여래는 무영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아파트 동 앞까지 온다.

“말해 봐. 나 바보 만들면서 희희낙락 재밌었어? 이사를 가? 일을 가져? 난 네가 이제 정신 차리고 살아보려는 줄 알았어. 그런데 나를 속여? 네 말 하나에 좌지우지되니까 그게 재밌었어? 우스웠어?”

“아니, 아니에요. 그런 거. 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상하다. 무영이 분명 처마가 있는 입구까지 몰고 왔는데 왜 이렇게 축축하지. 비 때문일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숨이 막히지. 꼭 물에 빠진 거 같아. 쿨럭거리는 신음마저 제대로 내뱉을 수가 없다.

“허윽!”

분을 참지 못한 무영이 여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목을 감싸 쥔 무영의 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여래의 목을 조르며 무영은 거의 미쳐있었다. 목을 쥔 채로 여래를 들어 올리다시피 한 무영 때문에 여래의 발끝은 허공을 위태롭게 디딘다. 서툰 발레리노처럼 허덕이는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무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눌린 목울대에 반사적으로 토기가 치밀어 오르지만 무영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겠단 듯 힘주어 쥔 여래의 흰 목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무영의 손아귀로부터 붉은 멍이 천천히 퍼져나갔다.

“나 병신 만드니까 재밌었지? 그 새끼랑 낄낄대면서 세상에 이런 재미가 없었었지?”

“컥! 무, 무여…ㅇ!”

“말해!”

무영 모母 걱정 대로였다. 무영은 여래에게 너무 광적이었다.

“이, 이러지, 컥.”

강 실장은 우산 손잡이를 놓친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나쁘다.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보는 눈이 없을 리 없었다. 아파트 단지에, 한창 사람들이 돌아올 퇴근 시간이 아닌가. 강 실장은 옥외 주차장을 둘러싼 수십 채의 아파트와 거기에서 여길 내려다보려 베란다를 서성이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블루투스로 부른 휴대폰으로 강 실장은 아파트 단지 입구 폐쇄를 주문했다. 그 사이에도 여래는 산소부족으로 새파랗게 질려가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멈춰! 김무영. 그 이상은 내가 아니라 누구도 수습 못 해!

강 실장이 개입하려던 그때였다.

“여래야!”

그를 밀치고 뛰어 나간 사람이 있었다. 강 실장은 손바닥으로 눈을 쓸었다. 물기 때문이 아니라 눈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래야!”

최준혁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빠질 수 없으리라 믿었던 상황이 최악을 보여주겠단 듯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 * *

비에 젖은 차창에 시야는 완벽하지 않다. 택시 기사는 와이퍼를 최대한으로 올려보지만 비는 금방 들이쳤다. 우수리를 받지 않고 택시에서 튕기듯 달려나간 남자의 뒷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기사는 포기하고 아파트 입구로 핸들을 돌렸다. 정문에는 오래된 공중전화를 기점으로 모여든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인간으로 벽을 만들고 있었다. 귀에 끼고 있는 블루투스 수신기가 번쩍거린다. 기사는 간발의 차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고, 돈 받았으니 이제 나는 모른다.

“뭐야!”

팔을 잡아 끌어내린 힘의 방향을 향해 거칠게 고개를 돌렸던 무영은 멈춰 굳어버린다. 무영의 얼이 빠진 사이 땅바닥으로 떨구어진 여래는 두 손으로 몸을 받쳐 일어나며 잔기침을 연거푸 토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여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에 가장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등장에 여래는 기운 없는 손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밀어낸다. 하지만 시도는 덧없다. 가라는 듯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때리는 여래를 붙들어 안은 남자는 이 비로부터, 무영으로부터 지키려고 한다. 그는 여래의 이름을 부른다.

“여래야.”

이 목소리를 안다. 때로 어떤 음성들은 지문 같아서 그를 구별해내는 고유의 특성이 되었으므로. 단조롭고 직설적인 이 어투, 어떻게 그걸 잊을까.

“여래야, 괜찮아?”

최준혁이다.

최준혁.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이 없애라고 지시했던 최준혁이 맞다.

사진을 보시겠습니까?

강 실장이 내밀었던 휴대폰을 그 때 보았어야 했다. 확인했었어야 했다. 여지를 남겨두지 말았어야 했다! 무영이 노려보자 강 실장은 고개를 떨궜다.

케이는 넘어져 있는 여래를 추스르며 일으켰다.

“여래야.”

무영이 졸라놓아 빨갛게 남은 손자국을 단 채 여래는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끌어냈다.

“여길, 어, 어떻…. 어떻게.”

“일어나. 가자. 여래야. 여기 있으면 안 돼. 저 사람, 너를 죽이려고 했어! 그런 건 나쁜 거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명료하고 단순한 어조는 그리운 기분을 불러들인다. 케이가 왜 준혁을 흉내 낼까? 떨쳐내기 어려우라고 일부러 저러는 걸까. 여래는 흐느꼈다.

“가….”

“여래야.”

“가, 케이.”

“….”

“가!”

믿을 수가 없다. 최준혁이 어째서 여기에. 어쩌다가 여기에. 닮은 사람 따위가 아니다. 저건, 완벽한 최준혁이다. 이마에서 정수리로 기어 올라가는 상처와 증오했기에 오히려 더욱 각인되어버린 얼굴과 모습까지, 저 남자는 최준혁이었다. 무영은 처리했다던 강 실장의 말을 믿었다. 사진을 보시겠습니까? 라고 물었던 강 실장도 황망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백 미터쯤 떨어진 그는 우산을 줍지도 무영을 향해 다가오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했다.

“하아, 이게 대체….”

한편으로 드는 안도감이 비참하다. 역시 여래에게는 최준혁뿐이었다. 여래를 움직이는 동력은 최준혁이다. 무영을 포함한 다른 누구도 아니다.

“케이.”

코로 들어간 빗물이 맵다. 여래는 크게 침을 삼킨 후 울먹거리는 케이를 떼어내기 위해 잡은 손을 뿌리쳤다.

“그냥 가. 빨리.”

“안 돼. 싫어. 못 가. 이런 데 두고, 못 가. 저, 저런 사람한테 두고는 못 간….”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돼!”

절규에 가까운 여래에 케이의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아스팔트로 손을 디뎌 겨우 몸을 버티고 있는 여래는 갓 태어난 네발짐승이었다. 연약하고 위태롭다. 케이는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무영이 여래의 그 사람임을 듣지 않아도 안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혼한 사이도 아니면서 여래를 구속시켰던 그 사람. 여래가 두려워하던 그 사람. 케이는 어금니를 질끈 깨문다. 저 사람이 문제다. 저 사람 때문에 여래가 힘들다. 저 사람이 없어야 한다.

무영이 하고 있는 생각도 케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준혁이 드디어 나타나버렸네? 하하, 여래가 지옥에서 불러왔나? 강 실장이 서투르게 처리했나? 뭐, 좋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실체 없는 허상과 싸우는 것보다야 이편이 낫다. 이번에는 정말로 끝내버린다. 잘 됐다. 그럼 여래도 이번에는 단념할 테니까.

퍽!

무영은 여래를 향해 무릎 꿇은 케이를 걷어찼다. 케이는 앞으로 넘어지며 여래를 놓친다. 기습이라면 한 번씩 주고받은 셈이었다. 흉통을 감싼 젖은 옷이 걸리적거린다. 무영은 상의를 벗어 바닥에 팽개쳤다.

“오늘은 확실하게 해야겠어.”

이런 순간이 너무 자주여서 이제는 몸이 저절로 반응해 버리고 마는 여래는 무영과 케이 사이를 가로지르듯 그 앞을 막아섰다. 팔을 벌려 케이를 보호하며 감싸고 올려다보는 여래에 무영은 짧게 웃었다. 같잖았다. 뒤의 최준혁도 앞의 주여래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내 손으로 멱을 따놔야 했는데, 시발. 그걸 못 해서 지금 이 지랄이 났네.”

여래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분명히 들었다. 그걸 못 해서? 내 손으로?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비켜, 여래야. 나 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들어가. 감기 걸린다.”

“김무영.”

“희원이가 찾을라. 가.”

그 입으로 희원이를 말하지 마. 여래의 투명하리만치 명백한 혐오에 무영은 그때까지 띠고 있던 기만적인 웃음을 지운다. 무영이라고 지금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여기서 마저 보든가. 실컷 구경해.”

“뭐를요.”

“내가 최준혁 죽여 놓는 거.”

“마, 말도 안 돼. 허세 부리지 마요.”

“하하, 웃긴다.”

허리에 손을 올린 무영은 바들거리는 여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계획한 것 중에 내 맘대로 안 된 거, 네 마음밖에 없었어. 여래야.”

“….”

“아니다, 최준혁까지 포함해서 두 개구나.”

퍼즐은 맞춰진다. 준혁이 사라지고 난 후 찾아온 무영, 준혁의 부재에 대해서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던 무영, 준혁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확신하던 무영, 전부 무영이었다.

무영이 준혁을 죽이려고 했다. 이번에는 절대 시도만으로는 끝내지 않을 것이다.

“케이.”

여래는 케이의 손을 잡았다.

“뛰어.”

물기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깍지 낀 여래의 손을 케이가 힘 있게 쥐었다. 설명 같은 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여래의 목을 조르던 김무영은 누구이며 희원은 또 어떤 사람인지 물어야 할 이름들이 많았지만 케이는 잠시 그건 뒤로 미뤄놓기로 한다.

* * *

엘리베이터 문을 내려치는 무영과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이로 케이와 여래는 위를 향해 솟아올랐다.

최고층,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 연타하는 손이 아까까지의 여래라고는 믿을 수 없게 빨랐다. 여래는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아 눌렀다. 엘리베이터 벽 양쪽에 붙은 거울 사이에서 한없이 되풀이되는 여래의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로 마구 흔들렸다.

“여래야.”

“케이. 지금은 가.”

“너 없이 안 가. 함께….”

“나, 아이가 있어.”

이런 식으로 고백해서는 안 되는데, 자포자기로 희원을 입에 담고 싶진 않았는데. 여래는 케이의 눈을 피하며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온몸으로 울고 있는 듯 발밑은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그 애는 나한테 전부야. 그 사람… 나한테는 모질어도 애한테는 안 그래. 지금까지 키우는 데에 도움도 많이 줬고. 그게 결국은 이렇게 빌미가 되어버렸지만. 그 사람, 꽤 무서워. 봤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도, 그 애도. 난 그건 못 견뎌. 난 죽어. 그 꼴은 한 번… 한 번도 너무 많았어.”

케이는 건성으로 듣는다. 케이는 그저 여래가 아이에 대해서 왜 이야기하지 않았는지가 궁금하다. 기억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긴다. 멈춘 부분은 어느 날의 대화에서다.

결혼했어요? 아니.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 그럼 왜 그 사람하고 못 헤어져요?

대답을 망설이는 여래는 머리카락을 서둘러 쓸어 올렸다. 머리칼이 만든 섬세한 그림자가 여래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라고 말한 여래는 서투르게 다른 데를 바라봤었다.

사정이란 아이였다. 케이는 이제야 그 말이 이해된다. 그래서 여래가 그 남자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래의 목을 조르던 남자, 그가 여래를 어떻게 대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래가 버텼던 건 아이 때문이리라.

그 남자의 아이는 아니다. 둘 사이의 아이를 키우는데 마치 시혜라도 베풀 듯 저렇게 유난과 생색을 내고 그 한 줌의 호의를 거둬갈까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케이는 아이가 그 남자의 아이가 아니란 심증을 굳힌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케이가 관찰한바, 여래는 다른 사람과 아이를 가진 후에도 과거의 연인의 등장에 흔들려 하는 미련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걸 이유로 들어 케이를 거절했으면 모를까.

“미안해. 케이. 그만 가. 제발.”

그렇다면 남는 의문이 있다.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일까, 하는 의문이다. 케이는 여래를 바라보았다.

“그 애 누구 아이예요?”

가슴이 쪼개진다. 모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조각들로 산산이. 이번에도 여래는 태연한 척 하는 데에 실패한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여래 대신 케이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내 아이예요?”

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은 내버려두고 여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층마다 전부 누른다. 층층마다 멈출 엘리베이터로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시간을 벌어줄 것이었다.

따라오란 말없이도 케이는 여래가 오른 옥상으로의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랐다. 옥외로 나갈 수 있는 열쇠를 찾는 건 쉬웠다. 방재함을 열고 벽에 손을 넣자 못에 걸린 열쇠가 짤랑이며 떨어졌다. 정 여사가 알려준 그 자리 그대로였다. 여래는 열쇠를 주워 문손잡이에 맞췄다.

“옥상으로 나가, 옆 동이랑 이어져서 건너갈 수 있어. 제일 마지막 동까지 가서 거기서 옥상 계단으로 내려가. 엘리베이터는 타지 마. 1층에서 기다릴지도 모르니까. 서둘러야 돼. 아직 사람 많이 풀지 않았을 테니까 아파트 단지 나갈 수 있을 거야. 가. 조심….”

“같이 가자, 여래야.”

뒤에서 끌어안은 케이에 손잡이를 돌리려던 손이 멈춘다. 한껏 조였다가 풀린 손잡이의 용수철이 층계참에 철컥거리는 소리를 울린다. 들끓는 감정을 애써 참는 케이의 목소리가 목 안쪽으로부터 나직하다.

“셋이서 같이 살자. 여래야.”

나의 아이, 과거가 잉태한 내 유전자의 사랑스러운 복제. 여래가 그 아이를 낳았다. 나의 아이다. 내가 사랑해줄, 나를 사랑할 아이였다. 알게 된 이상 이대로 갈 순 없다. 버둥거리는 여래를 더욱 깊이 안아 옴짝달싹못하게 구속하며 케이는 다시 말한다.

“아이랑 너를 두고 아무 데도 안 가.”

“….”

“나를 버리지 마. 여래야.”

“케이.”

케이, 그리고 준혁아.

“같이 살자.”

눈앞이 흐려졌다. 준혁이랑 희원이랑 같이 산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무엇을 걸어도 좋은데. 하지만 여래는 가진 게 없어서 그의 전부를 저울 위에 올려놓아도 눈금을 움직일 수 없다. 여래의 소원을 사가려는 사람 또한, 없다. 지금 무영은 희원을 인질 삼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려면 일단, 가.”

“너 혼자 여기 둘 수 없어! 그 미친, 미친놈이 아까 너한테 하는 거 봤잖아!”

“네가 죽는 것보단 나아!”

케이의 얼굴이 함부로 일그러졌다. 울음을 참는 아이같이 애쓴 얼굴에 여래의 마음이 무너진다. 또한 기뻐진다. 준혁은 다시 태어나 새로운 그가 되어도 여래의 거절만이 가장 아픈 일인 듯 군다. 준혁은 여전히 여래를 사랑한다. 경솔하게 웃음이 날 것만 같아 여래는 일부러 미간을 찌푸렸다.

우린 다시 긴 술래잡기를 해야 하나 봐, 준혁아.

“그 사람… 나한테는 그렇게 못 해. 난 괜찮아. 그러니까 가.”

“그렇게 했어. 때렸고, 목을 졸랐다. 여래가 변명하려 해도 일어난 사실은 바뀌지 않아.”

“준혁아.”

“….”

“케이. 그 사람은 난 못 죽여. 하지만 넌 아니야.”

아까 무영이 흘린 말을 기억한다. 무영은 준혁을 죽일 것이다. 이번에는 다시 케이로도 돌아올 수 없게 철저히.

“우리가 다시 만나려면 네가, 네가 먼저 살아야 해.”

습기로 축축한 공기가 여래를 울게 한다.

“우린 조금 긴, 술래잡기를 하는 거야.”

“여래야.”

엘리베이터는 이미 다섯 개의 층을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래는 케이의 등을 힘껏 밀었다.

“빨리 나가! 어서!”

끼리릭.

그러나 케이는 한 걸음을 채 가지 못한다. 미련 때문은 아니었다.

“늦었네.”

폭우 속, 리볼버가 위험스럽게 번들거렸다. 총구가 쿡쿡, 두통처럼 케이의 이마를 쑤셨다.

무영이었다.

철마다 선물 세트며 봉투를 가져다가 안긴 보람이 있게, 경비는 다른 동에서 올라가는 길을 설명해주었다. 여래가 아는 길을 경비가 모를 리 없었다. 옆 동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무영이 조 사장의 품에서 리볼버를 다시 뺏자 강 실장의 미간이 달라붙을 듯 좁혀졌다. 조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사장님, 그기 싸제라 쪼까 시원치가 않아버려라. 덜그럭거리고요.”

러시아 선원이 조립한 물건을 부산에서 샀다는 조 사장에 무영은 한 가지만을 물었다.

“쏴지긴 하지?”

아니라고 하면 그 총이 자신을 겨눌 것만 같아서 조 사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총이 자기만 아니라면 누굴 향해 발포되든 조 사장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 * *

“니네들 영화 찍냐?”

강 실장이 뒤에서 우산을 내밀었지만 무영은 함부로 그 아래를 벗어난다. 그는 비에 젖는 걸 개의치 않는다. 맞은 빗방울 한 방울 한 방울을 말려서 증발시킬 수도 있을 정도로 무영은 격정에 휩싸여있었다. 겨울의 초저녁은 비로 완전히 어두워졌다. 멀리서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콰르르릉!

견과류의 껍질을 부수듯 번개는 하늘을 쪼개어 놓는다.

“영화 찍냐고, 최준혁.”

“난 최준혁이 아니야. 난 그런 사람 몰라.”

무영은 공이를 당겼다. 철컥, 안전장치가 풀린 채 돌아가는 탄창에 여래는 케이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케이는 물러서거나 비키지 않는다. 의식은 온통 한 점으로만 집중되었다. 자신을 노리는 검고 작은 점으로.

“너 최준혁 맞아.”

긴장으로 벼려진 이 순간, 세 명을 둘러싼 건 어울리지 않게도 고춧가루와 마늘을 넣은 뜨겁고 진한 찌개 냄새다. 환풍구를 타고 퍼져 나오는 갖가지 저녁의 풍경들에 여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발치 아래, 고만고만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사람들이 식탁에 모여 있다. 흠뻑 젖어 돌아와 책을 말리며 우산을 챙겨주지 않은 탓을 하는 아이들, 데리러 가려고 했지만 길이 막혀 갈 수 없었던 사정과 그 대신 곧바로 먹을 수 있도록 따뜻하게 찌개를 덥혀 놓은 마음이 버무려진 평범한 일상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데도 여래는 거기에 닿을 수 없다. 행복은 너무 멀다.

“여래야. 무슨 생각해. 지금 내가 앞에 있잖아.”

무영이 뇌까렸다. 대신 여래가 가진 것이란 지금 이 순간, 무영이 준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비현실적인 장면이 펼쳐지는 바로 여기뿐이다.

여래, 준혁 그리고 무영은 정물처럼 멈춰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섣불리 이 균형을 깨트리길 망설이는 건 이 중 가장 거리낄 게 없는 무영마저도 마찬가지다. 폭우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우산을 내미는 강 실장을 지나치며 무영은 한 번 더 총구를 준혁의 이마로 디밀었다.

새삼스럽게 비가 차가웠다. 여래도 춥겠지, 생각하니 무영은 강 실장에게 우산을 가져다주라고 턱짓을 하려다 그만둔다. 어울리지 않는 짓도 이런 어울리지 않는 짓이 없었다. 우스워서 키들거리는 무영에 여래는 점점 더 공포에 질린다. 무영은 그런 여래가 서운했다. 무영은 이때까지 여래와 자신이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희원을 낳고 헤매던 여래가 그랬었다. 자신은 은애원에서 선택지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고. 그래서 버림받는 게 무섭다고.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게 최준혁에게 하는 말인걸 알면서도 맨살을 비비듯 여과 없이 와 닿는 여래의 애절함이 무영의 발을 못 박았다.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다는 건 자신을 서서히 잃어가는 가정법이었다. 우성 알파가 되면, 사업을 일으키면, 형을 짓눌러버리면,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나면! 그 가정들 사이에서 무영은 점점 없어져가는 중이었다. 흩어지는 무영을 그러모아준 건 여래였다.

손 씻어. 밥 먹어. 수염 깎아. 일찍 들어와. 희원이 좀 안아줘.

여래가 하는 짧고 단순한 말들이 무영은 좋았다. 다른 거창한 것 따위는 필요 없다는 태도가 명쾌했다. 여래의 세상에는 만약도 없었고 혹시도 없었다. 하루를 잘 먹고 잘 자기만 하면 만족이라는 관점은 단순하고도 아름다웠다. 예쁘게 그린 정사각형 같은 여래의 세상에서 무영은 쉬고 싶었다. 그래서 최준혁이 되었다. 최준혁을 연기하는 무영 자신이 가장 여래에의 행복에 배반적인 존재란 건 무시되었다.

광기였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떠냐 싶었다. 어차피 누구도 무영을 신경 쓰지 않는데, 어째서 무영이 이 미친 사랑을 참아야 하는가.

그러나 진짜가 나타나자 가짜는 폐기되었다. 여래는 금방 무영을 버렸다. 아니,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버릴까. 여래는 최준혁을 사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생을 통틀어 줄곧. 여래는 무영을 봐준 적이 없었다.

무영은 그걸 못 참겠다.

한 번 더 총을 밀자 준혁의 표정이 제법 반항적이 된다. 빌빌거리던 최준혁 주제에. 삼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 영원히 알 길은 없을 것이다. 최준혁은 곧 아무 말도 못 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철커덕.

이마 한 점으로 모든 의식은 집중되고 신경은 착란에 가까우리만치 활성화된다. 케이는 이마를 누르고 있는 총을 든 남자를 노려보았다. 김무영. 여래가 부른 이름을 떠올린다. 김무영. 오늘 이외의 기억은 없다. 김무영. 그러므로 이 들끓는 듯한 터무니없는 분노를 느껴야 할 이유는 없다. 이성적이지 않다고 생각은 한다. 그러나 케이는 이 자신의 것 같지 않은 격렬한 감정을 다스리고 싶지 않다.

여래의 뺨을 때리던 김무영과 목을 조르던 김무영.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있을 김무영.

준혁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은 김무영.

할 수만 있다면 너에게도 똑같은 징벌을 내리고 싶다.

아무도 널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에 버려져 끝없이 자신을 찾아 헤매는 벌을, 불면의 밤을 선물하고 싶다.

무영이 준혁을 죽이고 싶은 만큼 준혁 또한 무영에게 마찬가지다.

여래는 앞을 막아선 케이의 소맷부리를 당겼다. 희원만큼이나 준혁 또한 잃을 수는 없었다. 준혁이 없는 지옥은 지금까지 충분히 겪었다. 그 절망을 다시 처음부터 온 생에 걸쳐 통과하고 싶지 않다.

쏴아아.

강풍을 동반한 빗줄기는 겨울비답지 않게 거세다. 애벌레 고치를 찾으러 준혁이 은애원을 빠져나갔던 날도 꼭 이랬었다. 그래, 그 날 이후 여래의 인생에 준혁이 삽입되었었다. 인생은 돌아올 수 없는 분기점을 건넸고 그래서 지금이다. 이제 또 생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모른다. 여래는 케이를 흔들었다.

“준혁아, 케이야. 제발 뒤로 와. 이러면 안 돼. 맞서지 마.”

무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래야, 넌 그러면 안 돼. 지금 최준혁을 찾으면 나는 어떡하라구. 내 앞에서는 적어도 예의로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응?

“너 최준혁 빼돌릴 궁리하니? 또?”

푹 젖어 물가에서 건져 올린 듯한 무영의 웃음이 비리다.

“여기서 나가는 길은 없어.”

무영은 허리께까지 오는 난간을 보여 어깨를 으쓱했다.

“떨어져 죽든지, 아니면 나한테 죽든지.”

“무영 씨. 내려놔요. 부탁… 부탁해요. 제발. 그러지 마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여래가 무영의 발아래 고였다. 바지 끄트머리를 잡고 올려다보는 여래 너머로 먼저 빛이, 다음에 천둥이 온다. 무영은 중얼거렸다.

“주여래. 나한테 최준혁 목숨 구걸하지 마.”

보답 받지 못한 인내, 참아온 열등감, 속았다는 배신감. 그러나 그 무엇도 여래를 잃는다는 상실감보다 크지 않아 무영은 절망한다. 추의 균형은 항상 어긋나 있었다. 애초부터 무게 중심이 맞지 않는 저울은 여래에게로만 기울었다. 여래는 무영에게 싸구려가 아니었다. 그걸 여래만 몰랐다.

처음 한 점에 불과했던 분노는 메아리치며 점점 크기를 불려간다. 무영은 이제 울부짖고 있다.

“나를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마!”

총구에 밀린 케이의 이마가 뒤로 젖혀졌다. 번개가 밤을 밝혔다 사그라든다. 뇌우는 불길하리만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찰나 속에 케이와 무영은 어둠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케이는 침을 삼켰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한 번 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걱정인 건 여래다. 가차 없이 뺨을 갈기던 아까의 무영을 떠올리자 뒷목은 단단해진다.

“케이. 그러지 마.”

이제 여래는 케이에게 매달려 그를 만류하려 애쓴다. 성냥을 당기면 불이 붙을 듯한 상황에서도 기분은 턱없이 그리워진다.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한 시절에 여래는 나를 또 이렇게 지키려 애썼다. 나보다 쪼끄마면서 바보같이.

“케이. 비켜!”

그때 나는 어떻게 했지? 기억해내. 기억해내! 이 쓸모없는 머리야. 하지만 모르겠다. 그러니까 가르쳐 줘. 여래야, 넌 다 알잖아. 그러나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케이는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무영, 넌 절대 여래를 못 가져.”

“뭐…?”

“날 죽여도 안 돼.”

가차 없는 비가 세 명을 빗속에 묻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퍼부어졌다. 한 덩어리처럼 엉겨있는 준혁과 여래에 무영은 중얼거렸다.

“되는지 안 되는지 해 보지.”

딸깍,

돌아간 탄창이 총신에 맞춰졌다. 강 실장이 우산을 버리고 무영의 어깨를 쥐려던 그 순간이었다.

“준혁아!”

타앙-!

* * *

“비 그쳤네?”

“아휴, 다행이다.”

“오래 안 갈 거라고 했잖아.”

“그렇기는 한데 하필 예약 시간 다 돼서 쏟아지니까.”

“차라리 잘됐지, 뭐. 오늘 중에 비가 더 오겠어?”

“그러게.”

단기 서핑 강습을 위해 스튜디오를 찾은 여자들은 접수를 기다리며 낙관론으로 서로를 북돋우는 중이었다. 열대 기후인 섬에서 스콜성 폭우는 잦은 편이었지만 그만큼 금방 그치기도 했다. 그러나 모처럼의 휴가에는 잠시간의 비마저도 아쉬운 법이다. 하루는 일정으로 빼곡했다. 서핑 강습 다음에는 쇼핑몰이었지, 라고 계획을 되새김질하며 여자들은 쇼핑 리스트가 담긴 휴대폰의 스크롤을 내렸다.

“그런데 여기 누구 있는 건 맞아?”

“뒤에 사무실에 있잖아.”

“야. 찍소리도 안 들려.”

“기다려 봐. 아직 시간 안 됐어.”

“어째 으스스하다. 그치?”

스튜디오라기보다는 가건물에 가까운 실내를 돌아보며 여자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섬은 작은 기념품점에서부터 중앙 대로에 이르기까지 인파로 벅적거렸으나 여기는 다르다. 언뜻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적한 해변가에는 지나치는 행인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여행객 참변, 이라든가 험한 일 등으로 뭉뚱그려지는 기사의 헤드라인이 누구에게 먼저랄 것도 없이 여자 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격에 혹해 스튜디오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한 걸 후회하면서도 그래도 둘이 있으니 그나마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여자들은 서로에게 팔짱을 끼웠다.

끼이익!

서핑 보드가 사이즈별로 정리되어 있는 밖을 보며 살피던 여자 한 명이 급하게 들어오는 차에 친구의 어깨를 쳤다. 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서웠다.

“호랑이 왔다, 야. 지 말 하니까 오네.”

“어때? 막 이상해? 괜찮아 보여?”

강사일 것으로 보이는 새까맣게 그을린 남자가 먼저, 그리고 아이를 안은 남자가 다음으로 내린다. 보고 있던 여자 하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킥. 바둑돌들 같아.”

피부색 때문인지 둘은 바둑판 위의 검은 돌 흰 돌처럼 보인다. 아이와 함께 내린 남자는 흰 돌, 그을린 남자는 검은 돌이다. 흰 돌이 뭐가 못마땅한지 가다 홱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이자 검은 돌은 연신 멋쩍게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러면서도 흰 돌 검은 돌은 부지런히 여자들이 기다리는 스튜디오를 향해 걸었다. 그 와중에도 검은 돌이 현관을 구르던 알루미늄 캔을 줍자 흰 돌이 손목에 끼운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거기에다 버리라는 거였다. 뭐랄까, 호흡이 좋은 한 쌍이었다. 아이를 받아들려는 검은 돌을 거절하며 지나친 흰 돌은 스튜디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죠. 애가 칭얼거려서 받아준다고 늦었네요.”

“아, 네에….”

“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희원아, 잠시만. 내려가 봐.”

“히잉.”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 카운터 뒤로 돌아간 흰 돌은 서류를 꺼내며 분주했다. 울멍울멍한 아이가 누그러뜨린 긴장감에 더해 사근사근하게 웃는 흰 돌에 여자들은 안도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 작성 안내해 드릴게요. 보험 가입 때문에 조금 적으실 게 있어요.”

“아아, 네에.”

서류를 내미는 흰 돌의 오른손은 부자연스럽게 뻣뻣했다. 잘 펴지지 않는 중지 대신 나머지 손가락들로 요령 좋게 집어 서류를 내민 흰 돌에 여자들은 서로를 잠시 쳐다보았다. 신체가 부자유스러운 사람을 만날 때면 어떤 태도가 예의바른지가 항상 헷갈린다. 도움을 주는 게 옳은 것인지, 아니면 그의 장애를 장애 그대로 인정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옳은 것인지가 말이다. 여자들은 이런 매너도 가르쳐주는 데가 있으면 편리하겠다고 생각한다. 서핑 강습처럼.

“내가 한다니까.”

조용한 여자들과 흰 돌 사이를 가르듯 들어온 건 검은 돌이었다. 검은 돌은 여자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흰 돌의 손에서 서류를 뺏어 들었다. 크고 검고, 무뚝뚝한 검은 돌에 살짝 질린 여자들을 눈치챈 흰 돌이 검은 돌을 카운터 뒤편의 문으로 몰아갔다.

“넌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

“너나 희원이 데리고 집에 가.”

“영수증 정리도 해야 돼.”

“그것도 내가….”

“넌 도움도 안 돼. 이 바보야.”

바보라면서도 말투는 사뭇 다정하다. 옥신각신하는 둘에 아이가 끼어들었다.

“껌 머꼬 시퍼.”

“안 돼. 밥 먹을 건데 입맛 없어져.”

손님 대할 때랑은 또 다르게 흰 돌은 엄했다.

“그리고 저번에 희원이 껌 씹고 치카치카 안 했잖아. 그때 뭐라고 약속했어. 다음부턴 안 씹는다고 했지.”

“껌! 머꼬! 시퍼!”

“안 돼요.”

래시가드로 갈아입고 나온 검은 돌은 대치 중인 둘에 피식 웃으며 카운터를 뒤적거렸다.

“여래야, 그냥 줘. 좀 씹으면 어때.”

여래. 그게 흰 돌의 이름인가 보았다. 여자들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그 이름을 입 안으로 발음해 보았다. 걸리는 데 없이 매끄러운 이름은 닳고 부드러운 조약돌 같다. 그녀들이 붙여준 별명이 아주 틀리지만은 않은 셈이었다. 서랍에서 기어코 껌 하나를 찾아내고 만 검은 돌에 흰 돌은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안 된다고. 네가 이 닦아 줄 거야?”

“그러지 뭐. 맨날 내가 닦아주잖아.”

“치. 그거 가지고 생색이야.”

“그럼 목욕까지. 콜?”

“…콜.”

“희원아 자, 허락받았다.”

“케이 조아! 케이 싸라해!”

사랑이 참 싸구려이기도 하다. 뻔뻔하리만치 금방 헤실헤실한 아이에 여자들은 저도 모르게 듣는 티를 내고 말았다. 피식거리며 서로를 툭툭 치는 여자들 앞에 검은 돌이 다가왔다.

“다 쓰셨어요?”

“네.”

“그럼 일어나실까요.”

“아, 그런데 성함이…. 한국분이 아니세요? 여행 카페에서는 그렇게 봤었는데.”

검은 돌은 여자들이 적어놓은 서류를 집어 카운터에 올렸다. 접대용 미소가 제법 능숙하다.

“준혁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수평선을 전부 삼킬 듯 이글거리는 압도적인 석양을 바라보며 여래는 무릎을 베고 잠든 희원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벌써 땀이 촘촘했다. 서핑 강습을 받으러 온 손님들과 한참을 뛰어논 희원은 지친 모양인지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애들이 잠드는 건 항상 신기하다. 전원이 내려지듯 아무 데서나 갑자기 잠을 잔다.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부쳐본다. 어설프게 굳은 오른손과 손등 위에 남은 상처가 희원 위로 오갔다. 한 동안을 그러고 있던 여래는 희원이 뒤척거리자 눌린 뺨을 하고 잠든 자세를 바로 누였다.

“벌써 자?”

보드를 정리하고 들어온 케이의 물음에 여래는 괜히 억울한 기분으로 쏘아붙였다.

“이따 꼭 깨워서 씻겨. 어? 약속했다.”

“잔다고 하면 재워야지.”

“뭐야? 와, 진짜 어이없어. 누구는 기분 내고 누구는 못된 역할만 하고?”

“봐주라. 좀.”

케이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뻗은 팔이 여래의 등 뒤로 넘어온다. 요새 아주 능구렁이 같아졌다. 여래는 은근하게 등을 감싸는 팔을 찰싹 때렸다. 그러나 맞아 죽을 만큼도 아닌데 끙끙대며 앓는 케이에는 도리가 없다. 웃음을 흘리는 여래에 케이는 더욱 바싹 다가앉으며 어리광이었다. 희원이 베고 남은 허벅지 하나를 차지해 아예 드러누운 케이는 보이지도 않는 눈물을 흑흑, 어깨를 들었다 놓으며 닦기까지 한다.

“아까 껌은 미안해. 점수 따려고 그랬어. 안 그래도 희원이가 아직도 나 낯설어할 때 있단 거 알잖아.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는데.”

눈꼬리를 한껏 늘어뜨리고 쳐다봐도 여래는 냉랭하다.

“참아.”

“우이씨.”

애가 둘이라니까. 속으로 투덜거리며 여래는 소금기가 묻어 뻣뻣해진 케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희원이도 애잖아. 갑자기 ‘자, 이제 사이좋게 지내자’, 라고 해봤자 어떻게 갑자기 그래.”

“…알아.”

“시간이 지나야만 되는 일도 있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머리카락 속으로 넣은 손은 금방 오래된 상처를 찾는다. 엄지는 날카로운 자국을 따라가다 멈춘다. 오른손이 저리다.

“괜찮아?”

이런 데는 눈치가 귀신이라니까. 거둬 가려는 오른손을 낚아챈 케이는 눈앞으로 가져가 한참을 들여다본다. 앞뒤로 뒤집어가며 양면을 살핀 케이는 제 손도 아닌데 푸념이다.

“다치고 꿰매고… 수술 자국투성이야.”

여래는 얼른 손을 빼버린다. 벗은 몸이 볼품없는 건 자신도 잘 아는 일이었다. 배에는 아직도 희원을 낳을 때의 절개 자국이 불그스름했고 오른손에는 싱싱하게 새것인 흉터가 달려있었으니까. 고난의 전시장이 따로 없다.

“다치지 마, 여래야. 다치는 건 나쁜 거야.”

케이는 언젠가 들었던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움켜쥐고 싶어 오른손을 주먹 쥐어 보지만 이번에도 역시 잘되지 않는다. 기능은 잘해야 사고 전의 육십에서 칠십 퍼센트 정도만이 회복될 것이라고 수부외과의는 말했다. ‘그 날’ 이후 여래는 희원을 항상 왼쪽으로만 걷게 해야 했다. 더 이상 오른손으로는 희원을 잡아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타앙-!

그날, 두 명이 다쳤다. 총알은 케이를 끌어당겨 안은 여래의 손을 관통했다. 무영은 조잡한 조립과정을 견디지 못한 리볼버의 폭발을 맨손으로 고스란히 받아냈다. 둘 다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둘 다 오른손의 기능 장애를 입었다. 유성 그룹에서는 이 스캔들을 묵과할 수 없었다. 무영이 무슨 수를 쓰기 전에 무영 모母가 먼저 나섰다. 케이가 소속된 협회를 정리한 것도 그녀였다. 케이의 생명을 되살리는 데 빚진 수술 대금을 일시불로 지불하고 난 무영 모는 강 실장 편에 비행기 티켓을 들려 보냈다. 무영 모의 말마따나 그녀는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량을 베풀 조건이 좀처럼 갖추어지지 않을 뿐이다.

무영이 총기 폭발로 인한 손의 화상으로 수술과 회복을 반복하는 사이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티켓을 들고 여래를 만나러 온 강 실장은 답지 않게 민망한 기색이었다. 무영을 대리해 그의 상황을 전달하며 강 실장은 많이 망설였다.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 여래에게 강 실장은 어설피 뗐던 입술을 꽉 다물었다. 강 실장이 내민 비밀유지 각서에 오른손을 다친 여래 대신 사인을 한 건 케이였다. 서명은 최준혁으로 했다. 앞으로 그가 살아야 할 이름이었다. 자신이 잃어버렸던 이름이 아직 낯설어 케이의 글씨는 삐뚤빼뚤했다.

기압을 견딜 수 있다는 진단이 떨어지자마자 넝마가 된 손을 이어붙이기만 한 상태로 여래와 케이와 희원은 비행기를 탔다.

첫 가족여행이었다.

희원은 울었고 케이는 바둥거리는 희원을 안아주려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했으며 여래는 약이 듣지 않는 통증에 티셔츠의 등을 흠뻑 적셨다.

녹초가 된 세 명이 이국의 공항에 내렸을 때 이미 밤은 그들보다 먼저 찾아와 있었다. 케이가 택시를 잡을 때까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조는 희원을 추스르며 여래는 숨을 들이마셨다. 뭔지 모를 달콤한 꽃 냄새가 났다. 임시로 잡은 숙소를 향해 달리는 택시 안에서 여래는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은애원을 나오던 그 때 고속버스에서 보던 바다와 똑같은 바다였다.

바다는 항상 감동적이었다. 끝이 없다는 점에서 정말 그랬다.

* * *

“그만 봐.”

탓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손안에 움켜쥐고 있는 상처를 유심하게 들여다보는 케이 때문에 여래는 민망해진다.

“아팠어?”

“그래, 너 때문에 내가 이게 무슨 고생이야.”

왜 무영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왜 꼭 굳이 준혁이어야, 케이여야 했을까 궁금해 본 일 없다면 거짓말이다. 왜 너일까. 왜 너여야만 할까. 인생 전부를 통틀어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산다는 건 재미없고 지루한 일이지 않나? 가보지 못한 학교, 해보지 못한 연애, 살아보지 못한 삶은 케이로 인해 끝났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 속으로 침잠해도 답은 알 수 없었다. 모든 악조건과 교환해도 좋을 만큼 지금의 삶이 대단한지도 실은 잘 모르겠다. 이 말을 들으면 지금 무릎을 베고 누운 남자는 언짢아하리라. 여래는 예전의 준혁이 화를 참는 뚱한 방식이 잠깐 그리워진다. 준혁은 벽에 쓰인 글자를 읽듯 담담하게 불쾌를 드러내곤 했다. 부루퉁해진 준혁을 놀리는 건 나름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에 비해 케이는 솔직하다. 케이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눈을 보면서 이야기한다. 여래가 순간 당황해서 말을 멈출 정도다. 그런 점에서 준혁과 케이는 무척 다르다. 그러나 다음에 오는 말은 같다.

그러지 마. 나를 좋아해줘, 여래야.

“무슨 생각해.”

아무에게도 선택되지 못한 자신을 근원적으로 채워오는 따뜻한 갈구. 그것이 준혁을, 케이를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준혁과 케이는 여래를 완성시켰다. 불완전한 인간들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착각이 여래는 좋았다. 우리에겐 집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돌아갈 곳을 만들어냈지. 그건 대단한 일이었다.

여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해.”

“아닌데. 이상한데.”

“어휴, 따지기는. 그래. 허벅지가 저리다는 생각했다. 비켜. 일어나.”

일부러 밀어내는 여래를 눈치채고 케이는 웃으며 여래에게 파고들었다.

“진짜로. 무슨 생각했냐고.”

오늘따라 꼬치꼬치 따지네. 여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석양은 수평선에 삼켜지는 중이었다. 희원도 깨워야 하고 가게 문도 닫아야 한다. 할 일이 태산인데 태평하게 니 생각 내 생각 타령을 하는 케이의 입을 콱 쥐어박고 싶다. 자연히 말은 곱게 나가지 않는다.

“글쎄다. 내가 너한테 너무 아깝다는 생각?”

“뭐?”

정말로 애가 둘이라니까. 심드렁한 여래의 대꾸에 케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입을 댓발 내민 채로 노려보는 케이에 여래는 보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아, 그렇잖아. 평생 너한테만 질질 끌려다니고.”

“여래 너….”

“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보내고. 내 인생도 참.”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

으이구, 금방 이렇게 된다니까. 이럴 때는 준혁 그대로다. 여래는 떨어지려는 희원을 안아 엉덩이를 토닥였다. 찰방이는 살의 무른 결이 사랑스럽다. 이런 감촉을 지닌 희원을 선물한 너를 내가 어떻게 싫어하겠어, 농담이야. 여래가 웃으며 덧붙이던 그때였다.

“내가 지겨워졌어?”

석양이 지난 후로 옅은 어둠이 깔린다. 점점 무게를 더하는 케이에 여래는 아연해졌다. 정말이지 장난도 못 친다니까.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던 여래는 끌어안는 케이에 막혀 말을 삼켰다.

“그럴지도 모르지. 여래는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너무 많이 겪었어. 그걸 생각하면 늘 여래가 여기까지 와준 게 신기하고, 고마우면서도 불안해.”

한낮 동안 내내 태양에 시달렸던 공기는 아직도 따스하다. 여래는 이 더운 섬이 좋았다. 여기에서는 비가 내려도 금방 그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오래도록 젖어있지 않아도 되는 이곳의 삶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준혁과 희원이 함께 있었다. 그 둘은 우산을 들고나와 줄 여래의 가족이다. 이제 여래는 비가 무섭지 않다.

“여래는 나를 버려도 돼.”

“…야. 넌 또 금방 그렇게 되냐. 내가 뭐 너를 어쩐다고 그래.”

구시렁대는 여래의 어깨에 케이의 머리가 떨어진다. 속삭임은 소리 대신 가슴의 진동으로 들려온다.

“그런데 나는 여래를 못 버리니까. 그때는 차라리 나를 죽여줘.”

지나친 애정, 맹목적인 관점. 숨이 막힌다. 바닥 없는 바다가 두려워지듯 여래는 가끔씩 준혁이 무서웠다. 측정 불가의 영역에는 상상치 못한 존재가 기다리는 법이다. 그것은 굳이 물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본능이었다. 더 나아가도 괜찮은지, 여래는 항상 질문해왔다. 인생은 여래가 답을 내기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가시오’의 표지판이 있든 없든 앞을 향했다. 그래서 얻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희원과 준혁을.

“죽네 사네, 그런 소리 하지 마. 희원이 들을라.”

“정말이야. 여래야.”

내가 내 무덤을 팠군. 중얼거리지만 후회해봤자다.

“헤어지고 싶으면 그때는 그렇게 해. 그래야만 내가 너를 다시 찾을 수 없으니까.”

“케이. 그냥… 아니다. 내가 다 잘못했다. 그만해.”

“너는 후회할 거야.”

“최준혁.”

늘 보고 싶었지. 준혁이 네가 웃는 모습을. 작은 놀람들로 채워진 누구나가 누리는 일상을 사는 너를. 그러니까 나는 지금에 만족한다.

희미하게 웃는 여래를 케이는 움직임 없이 바라보았다. 시분초를 아껴 모든 순간을 빨아 삼키는 시선이 이제는 익숙하다.

“히잉.”

잠든 희원이 여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여래는 엉겨 붙은 희원이 남긴 팔로 케이를 당겨 마저 안았다. 충만함이 두 팔 안으로 끝없이 밀려들어 왔다. 해변의 모래사장이 떠오른 달 아래 반짝거렸다. 예쁘다. 여래는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준혁아, 집에 가자.”

지금 말하지 못한 마음들은 언제든 기분 내킬 때에 준혁에게 말해주리라. 시간은 충분했다. 여래와 준혁에게는 아주 많은 날들이 남아있었다. 설탕같이 작지만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캐어낼 시간들이.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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