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y the name
이 집에서는 말할 수 없는 이름이 있다.
* * *
아침은 누구에게나 바쁜 법이지만, IMF에서 외국계 은행으로 전직한 애널리스트의 거시 경제 전망을 곁들인 조찬 모임이 있는 오늘 같은 날은 모든 일정이 더욱 앞당겨져 시작되기 마련이다.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니.”
도움을 받아 셔츠를 입던 무영은 그 말에 걸려 넘어지듯 잠시 멈췄다 마저 소매에 팔을 끼웠다. 반듯하게 선 무영은 목 끝까지 단추가 채워지고서야 무영 모母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무영 모의 바람과는 달리 무영의 시선이 향한 곳은 도우미가 연 서랍을 향해서다. 서랍 안에는 재질과 색, 두께와 길이별로 구분된 장갑들이 기왓장처럼 차근차근 누워있었다. 무영은 왼손을 들어 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장갑은 무영 모의 아이디어였다. 장갑은 외부에 노출되어봤자 의혹과 구설을 불러일으킬 뿐인 손의 상처를 일시적이나마 눈가림해 주었다.
그리하여 사고로부터 만 육 개월, 장갑은 바지나 셔츠처럼 무영 착장의 필수적인 일부가 되어있었다.
“이거. 이거는 예비. 저거는 치워. 한여름인데 너무 덥군.”
“네.”
“김무영, 너 내 말 지금 무시하는 거야?”
다그침에도 무영은 듣는 둥 마는 둥 가죽 장갑 손목의 똑딱단추를 손가락 대신 손날로 힘껏 눌러 채웠다. 오른손등 위로 최선을 다했으나 완벽하게 복구되지는 못한 피부의 조각들이 기워진 모양 그대로 꿈틀거렸다. 무영이 케이를 향해 총을 당긴 그 날, 총신은 폭발하며 무영의 손, 정확하게 인대와 근육, 피부와 신경에 손상을 남겼다. 수술과 재활이 이어졌으나 오른손의 기능은 정상의 육십 퍼센트 정도 수준을 밑돌았다. 무영은 많은 일이 불가능해졌다. 이를테면 똑딱단추를 채우는 일 같은 것들이.
“김무영!”
“어머니.”
무영은 무영 모를 향해 돌아서며 장갑의 손목 께를 당겨 손끝까지를 완벽하게 장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주 선 아들을 향해 한바탕 말싸움을 준비하며 벼르는 무영 모와는 다르게, 무영은 마치 여느 가정집에서처럼 혼기가 꽉 차다 못해 넘친 아들이 히스테릭한 어머니를 향해 지어 보일 법한 그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무영 모는 기가 막혀 코로 뜨거운 김을 뺐다.
“하, 얘 좀 봐?”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궁금하세요. 제가 고해바치지 않아도 다 아시면서.”
“본인 입에서 듣는 거랑 같아? 그리고, 나한테 말해줄 뭔가가 있긴 해? 간섭이 싫다고 해서 맡겼으면 만난다 안 만난다, 어디까지 진도 뺐다 알려는 줘야 할 거 아니야.”
“결혼해요, 한다구요. 그거만으로는 부족하세요? 하하.”
웃어…?
무영 모는 지그시 무영을 노려보았다. 무슨 수작인지 도통 모를 노릇이었다.
죽자고 발버둥을 쳐서 묶어놔야 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링거를 뜯어버리고 병원 침대의 사이드 레일을 발로 차대는 통에 들썩거린 침대는 조금씩 움직여, 호출을 받은 무영 모가 들어갔을 때 보면 무영은 항상 아침에 보고 나온 위치에서 조금씩 엇나가 있었다. 악을 쓰는 무영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무영이 온몸으로 누구를 부르는지 무영 모는 알고 있었다. 무영 모는 그 때를 떠올리며 후드득 어깨를 떨었다.
“다 잘되어가고 있어요.”
흔들리는 무영 모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무영은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마세요.”
무영 모는 팍, 짜증이 치밀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어떻게! 괜찮은 척하는지, 뒤로 무슨 호박씨를 까고 앉았는지, 아님 진짜로 잠잠해진 건지 어쩐 건지! 저 시커먼 속 안에 들어있는 게 내 아들인지 아님 구렁이 너덧 마리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면서도 정말 ‘그 애’를 깨끗하게 잊었느냐고 대놓고 물을 수도 없다. 그것이 무영 모의 딜레마였다.
함께 가진 마지막 식사 자리가 떠오른다. 무영 모가 다그치자 긴 목을 드러내며 고개를 떨구던 ‘그 애’. 그런 ‘그 애’가 안타까워 괜히 손을 폈다 쥐었다 하며 안절부절못하던 무영. 당시에는 멀쩡했던 무영의 손. 손! 무영의 손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무영 모는 분통이 터졌다. 잠자코 무영이 곁에 붙어있었음 얼마나 좋아! 그랬담 무영이 저 꼴 나지도 않았을 텐데!
“오늘 저 따라가신다고 너무 일찍 일어나셨나보다. 좀 날카로우시네. 우리 여사님.”
무영 모는 품속 깊이 손을 찔러 넣으며 단단히 팔짱을 꼬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아들이었으니 무영 모는 지금 속 모르게 능청을 떠는 무영보다야 ‘그 애’가 더 미웠다.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만 끝까지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이야. 벌써 수천 번을 했을 원망을 다시금 하며 무영 모는 어깨에 올려진 무영의 손 위로 자신의 것을 겹쳤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미루고 미룬 결혼이 턱 끝까지 임박해 있었다.
“…좀 더 자주 자리를 갖자는 얘기야. 새아기랑 너랑 해서. 곧 이 집 사람이 될 텐데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굴기 있니?”
“그러세요.”
무영 모는 눈썹을 들었다 내렸다. 담담하게 수긍하는 무영에게서 유의미한 톤의 고저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내심 무영이 짜증이라도 내기를 바랐고, 또 그에 대한 대응만을 준비해 왔던 무영 모로서는, 이런 반응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속내를 철저히 감출 정도로 의뭉해진 아들을 더 다그쳐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무영은 그런 무영 모의 마음마저 읽은 듯 어깨를 토닥거렸다. 안심하라며 다독이는 제스처는 거의 다정하기까지 하다.
“조만간 저녁 자리 한번 만들어 볼게요.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하고 나가세요. 자아.”
“김무영, 너 이대로 넘어갈 생각 마. 이번에는….”
“네에, 사모님. 알겠습니다. 걱정 붙들어 매 놓으시라구요.”
“하, 기막혀. 얘 좀 봐.”
그 사고 이후 무영은 본가로 들어왔다. 동시에 잠시 계류 중이었던 혼담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비록 무영이 ‘작은’ 사고를 일으켜 신체와 평판에 흠을 입기는 했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었으므로 무영 모는 혼담의 계약에서 단 한 가지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조건뿐인 결혼이었다.
“아무튼 꼭이야. 이번 주 내로 다 같이 한 번 보자꾸나. 우리 다 같이.”
우리. 그 단어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매끄럽지 못한 솔기가 거슬리는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런 종류의 불편에 익숙하지 않은 무영 모가 무영을 향해 몸을 틀려는 순간, 강한 힘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다시 앞을 보게 했다. 무영 모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무영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이제 나가시자구요. 이러다가 첫날밤까지 따라 들어오시겠네. 하하.”
“너 정말!”
답지 않게 익살을 떠는 무영을 향해 무영 모는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속내는 안심이었다. 반거충이가 다 됐던 무영이 이제 쓸만해졌다. 이렇게 농담도 제법 하지 않는가.
무영은 싱긋 무영 모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무영 모는 가슴 가득 빼곡하게 차고 넘치는 사랑스러움에 마주 웃어 보였다.
그래, 이제 괜찮아진 거다. 가끔 가만히 앉아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을 들여다보며 미동 없이 굳어있는 무영 같은 건 봐주고 넘어가도록 하자. 핵심을 피해 가는 것 같은 저 화법도 짜증 내지 말자. 들쑤시지 말자. 주여래 같은 건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자.
주여래.
무영 모는 드디어 형체를 갖춘 그 이름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떠올리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면 말해버릴까봐 내내 피해오던 이름. 그러나 재난처럼 맞닥뜨린 그 이름을 다시 수면 아래로 밀어버리며 무영 모는 무영의 손을 움켜잡았다.
* * *
무영 모 소유의 건물 앞에서 그녀를 내려준 후 무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어머니를 상대하는 것은 보통 체력 소모를 요하는 일이 아니었다. 우선 어머니는 좀… 시끄러웠다. 그래서 한동안 창밖으로 스치는 거리를 내다보기만 하던 무영이 조수석에 앉은 남자를 부른 것은 한강을 넘고 나서의 일이었다.
“강 실장.”
“네.”
무영이 다친 그 날 이후 강 실장은 지방 매장의 구매부로 발령 받았다. 경력과 이력에 모두 반하는 인사발령은 징벌적 성격을 숨기지 않았다. 연고지에서도 떨어진 단신 부임은 사실상 유배였다. 그런 그를 다시 데리고 온 게 무영 모다. 수술 후 태연하게 강 실장을 찾는 무영의 심기를 어그러뜨리고 싶지 않았던 무영 모의 조치였지만, 강 실장을 아웃시킬 때 입김을 불어넣었던 게 무영 모였음을 떠올리면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거긴 좀 어떻대.”
무영이 언급한 ‘거기’란 지시대명사에 강 실장은 마른입을 소득도 없이 다셨다. 무영 모가 남기고 간 향수 냄새가 아직도 남아있는 차 안이었다. 무영은 그런 강 실장을 향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리셨잖아. 무슨 걱정이야.”
“나중에 따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어지간히 치가 떨렸나보지? 그렇게 몸을 사리는 걸 보면 말이야.”
강 실장은 무어라 답하기가 곤란하다. 무영은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권력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문의 수장인 무영 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없다. 이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줄타기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들 졸업할 때까지는 직장에 다니는 게 목표인 강 실장은 최대한 말을 고르며 대답을 찾았다.
“사진이랑 이것저것 자료가 좀 있어서 사무실 도착하시면 함께 묶어서 보고 드리려고 했습니다. 주말 끼고 받아서 바로 가져다 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진?”
“네. 해상도가 좋지는 않은데 몇 컷 건졌습니다.”
“그래.”
다행스럽게도 무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 옆자리 운전기사의 눈치를 보던 강 실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영은 한 마디만을 더 물었다.
“잘 있지?”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걸까. 강 실장은 짧은 고민에 빠졌다.
무영이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 강 실장은 알 수 없었다. 김무영이 ‘그 사람’의 현재가 어떻기를 바랄까? 비참하기를? 행복하기를? 도무지 모르겠다. 강 실장은 지극히 보통의 사람이었다. 일방적으로 집착하다 그마저도 거절당하고, 상대방과 자신에게 모두 상해를 입힌 다음에도 그의 근황을 물으려 사람을 붙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 그런 평범한 사람 말이다. 그래서 그는 고작
“그만그만…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말이었다. 이걸로 넘어갈까 싶던 무영은 다행히 더는 캐묻지 않았다. 비로소 정적이 찾아온 차 안에서 강 실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강 실장은 준비해 온 태블릿을 내밀었다.
“교민을 매수한 거라 전문적인 장비는 못 썼습니다. 그쪽으로 훈련받은 사람은 아니라서요.”
무영은 띄워진 사진을 보며 말이 없었다. 강 실장은 넋을 잃은 듯 화면에 몰두한 무영이 듣고 있는가 싶지만, 계속한다.
“염려하셨던 건강 상태는 양호합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드나들긴 하지만 그건 손 때문이고요,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섬에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에 진학하려고 알아본 적이 있단 것 정도가 최근 업데이트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가게는 여전히 하고 있는 중입니다. 꾸준하게는 되는 모양입니다. 수입은 아마 가게 오십, 그리고 ….”
케이, 최준혁이 한국에 유지하고 있는 수입원이 오십이었다. 케이의 신분으로 협회에 소속되어있을 당시 알게 된 여자가 계좌를 관리하며 송금을 해주는 것까지가 강 실장에게 주어진 정보의 전부였다. 강 실장은 무영 앞에서 케이와 최준혁을 들먹거려도 될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번에도 그는 우회로를 택한다.
“…그리고 다른 가외 수입이 오십인 것 같습니다.”
“가외 수입 출처는?”
“그건….”
“최준혁 쪽 수입인가보네. 강 실장이 더듬거리는 걸 보면.”
부지불식간에 대화에 등판한 최준혁에 강 실장은 긴장해 무영을 바라보았다. 무영 앞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이름들이 있다. 단신 부임으로 이리저리 전세를 들어갔다 빼느라 복비만 날렸던 강 실장에게도 그 이름들은 성가신 상처였다. 강 실장네 애들은 아직도, 학습지를 미루며 꾀를 피우다가 문득 정말로 전학 가지 않아도 되는 거냐며 강 실장에게 묻곤 했으니까.
무영은 이제 괜찮아진 걸까? 최준혁도, ‘그 사람’도 모두 과거가 되었을까? 강 실장은 자신할 수 없었다. 초조한 강 실장을 두고 무영은 액정 위를 손으로 쓸어내리다 움직이지 않는 화면에 장갑을 벗었다. 내려가는 화면들은 오려 붙인 듯 눈부신 바다를 배경으로 한 세 명의 사진을 끊임없이 비추었다. 스크롤 다운으로 내려가는 화면과 그 안의 한 사람을 집요하게 쫓으며 무영은 중얼거렸다.
“좋아 보이네.”
맞다. 강 실장으로서는 무영이 스스로 답을 내려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무영은 사진 위를 손끝으로 톡톡, 더듬었다.
“좋아 보여. 웃고 있잖아.”
강 실장은 꿈틀거리는 무영의 맨손에서 시선을 비켰다. 이제 무영과 장갑은 한몸 같다. 그래서 장갑을 벗은 손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특별히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부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몸을 대하듯 어색해지는 것이다.
무영은 구동이 여의치 않은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사진을 끊임없이 확대했다. 더 이상 벌려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
“죄송합니다. 해상도가 낮아서 잘 안 보이시죠.”
“됐어. 이만하면 훌륭해.”
그러나 확대된 사진은 인물을 깨어진 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 거친 화면에 무슨 의미가 있단 듯 무영은 뚫어져라 그 희부윰한 덩어리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사진 안의 세 명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SUV의 트렁크를 열어 짐을 내리는 흰 덩어리는 작은 덩어리를 뒤로 비키게 하곤 성가신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사진은 연속해서 거무스름한 형체가 장바구니를, 흰 덩어리가 작은 덩어리를 각자 안아 올리는 장면을 세분해 보여주었다. 강 실장이 슬슬 타이밍을 재고 있을 무렵 무영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손….”
“네?”
“손 말이야.”
태블릿에 거의 코를 붙이고 있던 무영 앞에 서 있던 강 실장은 무영의 말에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강 실장을 올려다보는 무영은 뜻밖에도 웃음기를 띄고 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강 실장.”
“네.”
“여래 손에도 나랑 똑같은 게 있어.”
이 집에서는 말해서는 안 되는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주여래다.
지금껏 피해 가려 무진 애를 쓰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버린 무영에 강 실장은 맥이 탁 풀려버렸다.
무영이 최준혁을 향해 쏜 총은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폭발했다. 그 사고는 최준혁 앞을 막아선 여래와, 총을 쥐었던 무영 둘 다에게 상흔을 남겼다. 무영은 본인이 저지른 사건과 그 후의 사고를 통해 손보다 더욱 깊은 내상을 입었다. 무영은 여래의 부재를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영이 앉고 서고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강 실장을 통해 여래의 근황을 한 줄씩 보고 받고나서의 일이었다.
무영은 다시 한 번 여래의 손을 가리켰다.
“각인이야.”
소름이 돋는다. 턱을 괸 무영은 흡족해 보였다. 무영은 하염없이 화면 안의 여래를 쓰다듬었다.
“최준혁 것이 아닌, 나와의 각인.”
각인, 그래. 기억난다. 무영은 여래 손등 위의 파르스름한 반점을 늘 거슬려 했었다. 각인은 일종의 접근 금지의 표시였다. 무영이 아무리 여래를 소유해도 여래의 마음까지는 어쩌지 못한다는 ‘다가오지 마시오’의 바리케이드.
강 실장은 무영의 바닥 없는 집착이 몸서리쳐졌다.
“잘 구해왔어. 고마워.”
고맙다는 인사는 무영 모에게 하는 게 좋겠지만 강 실장은 입을 다물었다.
사진의 출처는 무영 모였다. 지금까지 강 실장이 수집한 것처럼 꾸민 주여래에 대한 모든 정보 또한 출처는 같았다. 무영 모는 지나치게 누르면 튕겨 나가는 법이란 걸, 지난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무영이 꼭지가 돌면 주여래를 찾으려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노릇이었으므로 무영 모는 결혼식까지만이라도 얌전히 그를 붙들어 두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강 실장을 떠올린 건 그즈음에서였다. 강 실장을 부른 무영 모는 여래의 근황에 대해 적힌 에이포지 두 장을 던졌다.
‘적당히 흘려줘. 무영이가 회복할 의지라도 생기게 말이야, 강 실장. 침대에서 일어나게 만들란 말이야.’
‘사모님, 그럼 제가 어떻게….’
‘그런 거 정돈 알아서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제기랄, 내가 그런 재주가 있었으면 여기서 왜 이러고 있을까! 하지만 강 실장은 잠자코 입을 다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부적인 건 알아서 각색을 해. 하와이로 하든지, 아님 필리핀 어디로 하든지.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고 무영이가 생각하게 만들라고.’
그래서 사진에서 분명한 것은 깨어질 듯 새파란 바다뿐이었다. 무영이 훑은 사진 그 어디에도 사진이 찍힌 장소를 유추하게 할 단서는 없었다. 간판도, 차종도, 심지어는 해변의 위치마저도 특징되어지지 않게 포커스는 나가 있었다. 무영 모의 지시 덕분이었다.
무영은 떨떠름하게 굳은 강 실장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여래 손등을 볼 때마다 그게 항상 거슬렸거든. 최준혁이 남긴 각인을 보면 말이야, 여래가 그걸 보면 자꾸만, 자꾸만 최준혁을 기억해내는 것 같아서 더 싫었지. 그래서 이것저것 걸쳐줬는데. 내 거라고. 그렇게 싫어하더니만 드디어 여래가.”
무영은 고개를 들어 강 실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여래는 나를 절대로 잊지 못하겠지.”
그리고 당신 또한 주여래를 잊지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강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 후 되돌아오지 않은 악력으로 물건을 손에서 놓치는 순간마다, 멸실된 신경들이 저릿한 자극을 보내오는 때마다 주여래는, 김무영은 서로를 기억할 것이다. 서로가 같은 감정을 띠지 않다고 하더라도 무영에겐 큰 상관이 없는 일인 듯했다.
“그럼 됐어. 그걸 바랐어.”
“네.”
“강 실장. 어머니한테 전해. 김무영이 사진 받고 좋아하더라고.”
아까 흘린 식은땀이 다시 싹 마른다. 강 실장은 건조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무영과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머니가 여래 빼돌린 거 다 알고 있는 거잖아. 그런 걸 강 실장이 무슨 재주로 알아내.”
“저, 그게….”
“당신 무능력을 탓하는 건 아니야.”
무영은 차갑게 말을 잘랐다.
“어머니가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나도 알아. 강 실장은 그냥 나랑 어머니 사이에서 줄타기만 잘하면 되는 거야. 어머니가 던져주는 얘기들 잘 듣고 와서 나한테 알려주기만 하면 돼. 어머니가 궁금해 하시는 건 뭐든지 알려드려. 이제와 숨길 것도 없으니까.”
정말 그것뿐일까?
“강 실장이 주여래 있는 데를 알아낼 때까지 그렇게 해 줘.”
“이사님!”
“난 움직일 때마다 보고 들어갈 테니까 내가 함부로 나설 수가 없네.”
“뭘… 어떻게 하시게요.”
미치겠군. 이 모자母子는 쌍으로 나를 미치게 한다! 다 때려치우고 자릴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은 심정을 꾹 눌러 참으며 강 실장은 물었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여래가 최준혁 옆에 있는 건 싫은데 그렇다고 여래가 나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내가 여래를 어떡하면 좋을까?”
“그걸 생각하면 항상 기분이 아슬아슬해져. 미칠 것 같거든.”
“꼭 예전 여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나도 그럼 정말 편할 텐데. 다른 누굴 여래로 여길 수만 있다면.”
무영은 더 볼 것 없단 듯 태블릿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의자를 창가를 향해 돌려 앉은 무영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나가 봐. 일주일 내로 저녁 스케쥴 비워서 보고해. 어머니랑 저녁 먹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강 실장은 가만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 나왔다. 무영에게 변명을 해야 한단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무영 모에게 이 일을 어디까지 알려야 할지에 대한 계산으로 과부하 상태였다.
그래. 무영의 말대로 줄타기를 해야 했다. 균형을 잃어 땅으로 곤두박질치지 않으려면 신중해야 했다. 더 능숙하게 균형을 잡으면 잡을수록 알게 되겠지. 그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는 방법을 말이다.
“아이고야. 시발.”
강 실장은 눈두덩을 세게 문질렀다. 아침인데 벌써부터 피곤했다. 그러나 배워야 했다. 무영 또한 여래 없이 사는 법을 배워내는 중이었으니 강 실장도 못할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