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ng link
케이와 여래가 한국에서 비행기로 다섯 시간 거리의 이국의 섬에서 액티비티 관광을 위주로 하는 여행사를 개업한 것은 육 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 육 개월 동안 케이는 온갖 사람들을 다 겪었는데, 오늘의 이 손님 또한 자신이 가진 경험의 지평을 넓혀줄 새로운 타입임을 케이는 의심하지 않았다.
“저기요!”
깜짝 놀랐다. 바다에서 나온 케이의 팔을 잡아챈 건 오늘 안내를 맡았던 손님 중 하나였다. 케이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생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기 있었네요?”
“네에….”
“그거 문신? 처음 봐. 항상 긴 팔만 입고 있었잖아요.”
“뭐. 그 비슷한 거죠.”
케이는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손님이 가리킨 팔의 문신은 여래와의 각인이지만은 그것에 대해 전부 이야기 할 필요나 의무는 없었다. 몸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바싹 마른 모래 위로 빨려 들어갔다. 아쿠아 슈즈-케이가 속으로 붙인 그의 별명이다-는 흥미진진한 얼굴을 한 채 물방울들과 똑같은 방향으로 케이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 내렸다. 그가 케이에게 다가서 뭐라 입술을 달싹이려던 그 때였다. 멀리서 무언가 함부로 맞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쾅!
케이는 자신의 팔짱을 낀 아쿠아 슈즈의 팔을 풀어내고 스튜디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수入水 장비들을 담은 상자를 포치 현관에 떨어뜨리듯 내려놓은 여래가 케이와 아쿠아 슈즈를 보고 있었다. 케이는 서둘러 그 쪽을 향해 다가갔다.
“여래야, 괜찮….”
조심하란 말을 하려 했을 뿐이다. 결코 나쁜 의도 같은 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여래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따라 들어가려는 케이의 눈앞에서 여래는 보란 듯 문을 세게 닫았다.
쾅!
“아후, 시끄러워. 왜 저러세요?”
아쿠아 슈즈가 투덜거리는 동안 케이는 꿀꺽 침을 삼켰다. 여래가 이상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풀풀 냉기를 풍겨대는 여래에 의아하던 차였다. 아무리 반성할 거리를 찾아도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 케이로서는 답답한 일이었다. 도대체 뭐를 잘못한 거지. 사무실로 쓰는 스튜디오 앞에서 멍한 케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 건 여즉 곁에 서 있던 아쿠아 슈즈였다.
“자유 시간도 거의 끝나가는 데 이제 뭐 할까요? 기념품점 안 가요? 몰 같은데?”
“설명드렸다시피 저희는 그런 옵션은 하지 않아요.”
“아아, 그래요. 나 돈 많은데.”
하긴 그러니까 이런 개별 가이드를 붙이는 여행을 하는 거겠지. 별다른 생각 없이 케이는 수십 번도 더 설명한 일정을 다시 한 번 끈기 있게 되풀이했다. 케이는 이런 일에 인내심이 있는 편이었다.
“호텔로 태워다 드릴게요. 아님 시내에 한 번 더 나가보셔도 괜찮아요. 토요일 밤은 야시장이 열리니까요. 꽤 볼거리가 많아요.”
“아, 그렇구나. 맞아. 들은 적 있는 거 같다.”
그러니까 수십 번도 더 말해줬다니까요. 케이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줄도 모른 채 아쿠아 슈즈는 계속 말을 이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죠? 솔직히 연 지 얼마 안 됐다고 해서 안내나 제대로 할까 찜찜했는데 여길 택하길 잘한 거 같아요. 프라이빗하고 장삿속이 없어서 좋아. 원래 이런 덴 옵션이 심하잖아요. 귀찮게 하고.”
“네에. 뭐….”
“아무튼지 간에 오늘로 정말 끝이네요.”
일몰에 기대듯 고개를 기울이고 생긋 웃는 아쿠아 슈즈가 케이의 팔을 한 번 더 잡아당겼다.
“그동안 내내 고마웠는데 어떡하죠?”
뭘 어떡하냐는 건지 왜 자신에게 묻는지 모르겠다. 눈만 끔벅이는 케이를 향해 아쿠아 슈즈의 말꼬리가 다시 한 번 높아졌다.
“어떡할래요?”
모른다. 케이는 손등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치며 아쿠아 슈즈가 빨리 답을 내리고 가주기만을 기다렸다.
아쿠아 슈즈는 친구 네 명이서 졸업을 기념 삼아 여행 온 무리 중 가장 천방지축인 한 명이었다. 이렇게 케이와 말을 트게 된 계기도, 준비 운동도 없이 해변에 뛰어들려는 걸 말리며 케이가 아쿠아 슈즈를 찾아 준 일 때문이었다.
젖어서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그를 대신해 케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아쿠아 슈즈를 신겨주었다. 그 짧은 동안에도 아쿠아 슈즈는 이미 바다에 들어가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계속 들썩거렸다. 어지간히 조급한 성격이었다.
‘아, 진짜. 괜찮다니까요!’
‘다치시면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케이의 대꾸에 아쿠아 슈즈가 떨던 다리를 멈췄다. 손님이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본인 과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다치는 순간 여행은 나쁜 기억으로 남게 되고 고객 평은 엉망이 되는 적이 많았기 때문에, 케이는 크고 작은 사고에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여래가 애써서 꾸려가는 여행사였다. 그가 속상해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참으세요.’
‘빨리 들어가고 싶은데.’
‘모래가 고와보여도 의외로 바닥에 날카로운 돌이 많아요. 이런 부드러운 발에는 상처 나기 십상이거든요.’
‘…저기요.’
아쿠아 슈즈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마침 신이 다 신겨졌다. 케이는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다 됐다. 자, 이제 가셔도 됩니다.’
‘이름이 뭐예요?’
공항에서 픽업하며 분명히 알려줬었는데 말이다.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케이는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케이입니다.’
그 후 아쿠아 슈즈는 일정 내내 케이에게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종알대며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멀어졌다 싶으면 같은 그룹인 친구들이 나섰다. 아쿠아 슈즈의 친구들은 케이 쪽을 향해 턱짓을 하곤 그를 케이 쪽으로 밀쳐버렸다. 케이로서는 도통 모를 노릇이었다. 여행 온 게 그렇게 재밌나? 일상을 탈출해야 할 정도로 찌들어 보이는 타입들은 아닌데 말이다. 이해 못 할 아쿠아 슈즈와 그의 친구들에 케이는 몇 번이고 여래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여래는 금방 냉장고에서 꺼낸 듯한 냉랭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방금 전, 문을 닫을 때처럼 말이다.
* * *
아까 그러고 가버린 여래가 신경 쓰여 죽을 노릇이지만 코 밑까지 바싹 다가온 아쿠아 슈즈를 무시할 수도 없어 케이는 웃으며 대꾸했다.
“고마우심 가서 소문 좀 잘 내주세요. 후기에 별 다섯 개! 꼭 다섯 개 주셔야 돼요?”
아쿠아 슈즈의 미간이 가늘게 좁아졌다.
“모르는 거예요,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예?”
“아니면 다른 누가 있어요? 하루 종일 여행사에 매달리느라 누구 만날 시간도 없을 것 같던데. 아아, 그럼 같이 다니는 가이드? 그래?”
케이는 입을 다물었다. 여래와의 관계는 대외적으로 비밀이었다. 공적인 업무에서 사적인 감정이 작용하는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를 드는 여래에게, 케이는 불만 서린 눈빛으로 항의를 했지만 여래가 못 박은 일에 케이가 반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여행객들에게 케이와 여래는 동업자인 걸로 서로를 소개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어버버, 말을 잇지 못하는 케이에게 아쿠아 슈즈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눈치 없는 게 나였네.”
피부 위에서 소금물이 마르며 따끔거렸다. 케이는 팔뚝을 쓸어내렸다. 뭐에 쓸렸는지 싶어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케이는 스튜디오의 창문가에 서서 케이와 아쿠아 슈즈를 보고 있는 여래와 눈이 마주쳤다. 보고 있는 여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여래는 케이가 손님에게 친절하게 하고 있는지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었다.
같은 일정을 백 번도 넘게 설명을 해줬다. 이해 못할 이야기를 해도 참고 들어주고 있다. 케이는 여래를 향해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만들어 보였다. 여래에게 배운 제스처였는데 다 잘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래는 무표정하게 창문을 벗어나며 그림자만을 남겼다.
우이씨. 잘하고 있고만.
“나도 오메가예요. 케이.”
“예?”
케이는 덜 마른 머리를 쑤석거리며 물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오메가라구요, 그러니까 나한테도 열린 문 아니에요? 가능성은 있는 거잖아.”
문이 어디 있지. 여긴 사방이 트인 바닷가인데. 두리번거리는 케이에게 아쿠아 슈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휴,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먹지.”
“도둑질이요? 네에? 안 돼요, 그런 건….”
허둥지둥하며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케이를 향해 아쿠아 슈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데리고 살기도 힘들겠다, 하…. 됐어요.”
정말 모를 소리였다. 그래도 끝까지 들어줬으니 별은 다섯 개겠지? 케이의 기대에 찬 눈빛을 무시하고 아쿠아 슈즈는 친구들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 * *
“여래야, 이거 인보이스….”
서류가 찢어지는 줄 알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팩 종이를 채간 여래에 케이는 멍하니 종이가 사라지고 없는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저기….”
“손님들 잘 데려다줬지?”
“응. 그럼. 호텔 앞에다가 내려줬고 메신저 연락처도 줬어. 한국 가서도 잊지 말라고. 그리고 다음에 또 오라구. 저번에 여래가 꼭 그러라고 했잖아. 그리고….”
“자알 한다.”
칭찬하는 말투가 어째 이상하다. 케이는 송장을 휙휙 넘기고 있는 여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래는 처음 케이를 걱정했었다. 여행사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업무는 필수였다. 그것도 매번, 어떤 캐릭터가 올지 모르는 예측 불가의 일을 네가 할 수 있겠느냐며 걱정하는 여래에 케이는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래에게 미덥게 보이고 싶었다. 잘 해내고 싶었다. 자신도 있었다.
손님맞이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케이는 사람을 어려워하는 편이 아니었다. 덥석덥석 인사를 하고 격의 없이 굴며 케이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으로 여래를 쳐다보았지만 여래는 케이를 그런 케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여래가 보고 기특해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평소보다 더 톤을 높였던 케이의 목소리가 차츰 낮아졌다.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여래가 걱정했던 것은 케이가 아니라 최준혁이었던 것을.
여래의 눈이 멀리를 보듯 아련해졌다. 케이는 그것이 아무리 과거의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최준혁에게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최준혁이 벌어놓은 십몇 여년의 세월이 너무 길었다.
오늘도 여래는 최준혁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케이는 씁쓸해진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함부로 코를 문질렀다. 여래는 송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케이를 불렀다.
“…케이, 희원이 좀 데리고 와 줄래?”
“아, 응! 그래!”
시터에게 맡겼던 희원의 이야기에 케이는 얼른 자리를 일어났다. 차 키를 찾으면서도 케이는 시선을 서류에 못박고 있는 여래를 훔쳐보았다.
어쩌면 그냥 컨디션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여래는 과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여행사의 구석구석, 잡다한 경리업무에서부터 매장 정리에 이르기까지 여래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케이는 나가려다 말고 서류에 체크 표시를 하며 넘기는 여래 앞에 섰다. 종이 위에 드리워진 그늘에 여래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왜.”
“여래야, 너무 무리하지 마.”
“뭘.”
“손. 손 말이야.”
여래는 어색한 각도로 뻗쳐있는 오른손을 서둘러 내렸다. 나쁜 짓을 하고 미처 못 치운 증거처럼 손을 숨기는 여래에, 케이는 여래가 내린 팔을 책상 아래에서 들어 올렸다.
“손 아직 아프잖아. 이따 내가 와서 마무리할 테니까 여래는 쉬어. 여래는 일을 너무 많이 하니까 피곤해. 오늘도 하루 종일 돌아다녔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나는 널 쉬게 해주고 싶어.”
“…건방지게 너너 할래?”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비틀어 손을 빼낸 여래는 뒤를 돌았다. 케이는 입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삐죽거렸다. 이런 때 정도는 손을 잡게 해줘도 좋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도 없는데 여래는 밖에서는 절대, 케이가 자신을 만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섬은 좁았다. 사람들은 이 안에서 끊임없이 소비할 것을 찾았고 그것의 방향은 종종 서로를 향하곤 했다. 게다가 알파와 오메가 한 쌍이라니, 딱 먹잇감이 되기 좋은 둘이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사는 것, 조용히 사는 것, 남들과 같이 드러나지 않고 보호색을 입고 살아가는 것. 그게 여래의 꿈과 목표임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하고 있는 케이는 최대한 스킨십을 자제하려 애썼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방금 같은 때!
겨우 얻은 평화를 소중히 하고 싶은 여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케이는 가끔은 밝은 데서도, 길에서도, 사실은 아무 데서나 여래를 만지고 끌어안아 그가 자신의 것임을, 자신 또한 그에게 속해있음을 분명히 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런 얘길 했을 때 여래는 귀를 뿌리까지 붉힌 채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말이다.
“…어서 가 봐.”
“여래야.”
“희원이 기다리겠다.”
케이는 머리를 함부로 긁적거렸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소금기를 남기고 말라버린 바닷물에 피부가 쓰라렸다. 여래에게 뭔가 있다.
* * *
“희원!”
“아바!”
차를 세우고 내린 케이를 향해 푸닥거리는 희원이 뛰어왔다. 한팔에 덥석 희원을 안아 올린 케이는 이마와 뺨에 마구 입을 맞췄다. 희원의 손목을 잡아 흔들어 시터에게 인사시키고 차로 돌아오며 케이는 희원에게 속삭였다.
“잘 있었어?”
“아니! 아바 업서서 시러써!”
“하하, 미안해. 오늘만 그런 거야. 응? 내일은 손님 없어.”
“응. 히원이 잘 차마.”
이젠 제법 야무지다. 통통한 뺨을 손끝으로 톡 친 후 케이는 희원을 카시트에 앉혔다.
“아, 착하다. 희원이. 참을 줄도 알고. 재밌게 잘 보냈어?”
“응. 케이는 조은 하루?”
희원의 배 앞으로 카시트 벨트를 끌어내리던 케이의 손이 멈칫했다. 별다른 일은 없었지만 아까의 여래가 신경 쓰였다.
“모르겠네. 좋은 하루였나 어쨌나.”
“상진이, 상진이.”
“아니야. 진상 때문은 아니고. 그런데 그런 말하면 못써요.”
“그럼 왜에.”
“그냥, 뭐…. 어른들은 그럴 때가 있다고.”
“그러며는 우리 짠 하까?”
희원이 자신의 보리차가 담긴 빨대병을 케이를 향해 들어 올렸다. 순간 벙쪄 멈췄던 케이는 부스스 웃음을 흘렸다. 저녁에 딱 두 번 반주를 했을 뿐인데, 맥주캔을 여래 것에 가져다 대며 부딪친 케이를 보고 그새 배운 모양이었다. 애 앞에선 찬물도 마시지 말라는 말이 틀린 거 하나 없다. 케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우리 집에 가서 한잔하자!”
“쪼아!”
시무룩하던 케이를 웃게 해 내심 뿌듯해진 희원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밤, 파도의 가장 끝머리에서 부서지는 달빛을 따라 달리는 해안도로가 시원했다.
* * *
그런데 말이다. 자다 깰 줄 알았으면 맥주를 마시지 않는 건데 그랬다.
“…귀찮아.”
자리에서 일어난 케이는 길게 하품을 했다. 화장실에 가려 침대에 앉은 케이를 붙드는 건 여래의 손과 끼워진 손깍지다. 잠든 여래에게 붙들리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뺨을 두어본 쓸어본 케이는 그 부드러운 감촉에 가슴이 찡해졌다. 밖에서는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주제에 밤에는 꼭 같이 자야 마음을 놓는 여래가 귀여우면서도 얄밉다.
한국을 떠나온 지 육 개월. 비밀인데 사실, 지금까지… 케이는 여래와 한 번도 못 했다.
갑자기 치미는 짜증에 케이는 이불을 걷어 차냈다.
처음에는 여래의 손 때문이었다. 아픈 사람을 두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미안했다. 다음에는 희원을 떼어놓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 때는 케이도 희원에게 익숙해지려 노력하던 시기였으니까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자는 게 마냥 좋았다. 희원을 수면 교육 삼아 방을 마련해 주고 나니 이 섬에 자리를 잡는 문제에다가 여래의 묘하게 서먹한 태도까지 겹쳐 그게, 그게, 그게 쉽지가 않았던 거다!
그렇게 육 개월 째. 손만 잡고 자자고 하는 여래의 담백하다 못해 냉정한 태도에 케이는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데이트할 때는 먼저 섹스, 하자는 대담한 말까지 뱉었던 여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 전혀 그럴 기미를 내비치지 않았다.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조르자니 가뜩이나 자신을 애처럼 대하는 여래에게 아예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 될까봐 차마 못하겠고 말이다.
아쉬운 김에 뺨을 손끝으로 더 쓸어내려 봐도 여래는 침대 쪽으로 얼굴을 돌릴 뿐 깨려는 기미는 없었다. 케이는 한숨을 내쉬곤 방을 빠져나왔다.
여래는 가끔씩 악몽을 꿨다. 열리지 않는 문, 발버둥 쳐도 제자리인 악몽의 끝에서 여래는 항상 케이를 찾았다. 그건 케이에게 조금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케이에게 있어 여래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잘해나가며 조금은 무심한 그런 존재였다. 케이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형이나 아버지 같은, 가장 마지막까지 믿지만 알 수 없는 그런 존재. 그런 여래가 희원이나 다름없이 어둠이나 꿈같은 것을 두려워할 때면 케이는 가만히 굳어 식은땀에 축축해진 여래를 쳐다보았다.
여래가 약하다. 거기서 이상한 기쁨을 느끼는 자기 자신이 징그러워 케이는 서둘러 여래를 깨웠다. 그 뒤로는 꼭 손을 잡고 잤다. 언제고 여래의 악몽을 깨워줄 수 있도록 말이었다.
“그런다고 정말 손만 잡고 잘지는 몰랐지…. 흐아암.”
케이는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와 허공에서 물기를 털다 멈춘 케이는 여래가 봤다면 질색을 했겠구나 싶어 다시 뒷머리를 긁었다.
여래는 가끔 케이를 모르는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몰에서 여래를 밀치고 지나간 남자에게 케이가 짧은 욕으로 그의 사과를 받아냈을 때, 약속보다 이르게 방문한 손님에 케이가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고 달려나갔을 때, 티셔츠의 밑단을 바지 안으로 넣지 않을 때, 그리고 웃을 때. 여래는 케이는 처음 본 누군가인 것처럼 다시 봤다. 케이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최준혁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 보자, 보자.”
냉장고 내부등이 각인을 비추자 팔목을 감아 올라간 담쟁이덩굴의 무늬가 푸르스름하게 밝아졌다. 냉장고를 연 케이는 컵에 따르지 않고 생수병에 입을 가져다 댔다. 이것 또한 여래가 봤다면 낯설어할 광경이었겠다. 케이는 한 모금을 마신 후 냉장고를 세게 닫았다.
최준혁. 자신의 다른 이름. 그러나 케이는 그 이름을 한 번에 알아들은 적이 아직까진 없다. 출입국을 위해 공항의 긴 줄에 서 있을 때, 은행 계좌를 열기 위해 창구에 앉았을 때 케이는 그 이름을 묻는 직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긴 했지만, 그 때마다 스파이나 비밀요원처럼 다른 사람으로 위장해 거짓말을 하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케이는 많은 것들을 새로 배워야 했다. 자기 자신마저도.
케이는 눈을 감았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대해서도 배워야 했던 게 있었지, 하고 생각에 잠기는 케이의 기분은 한껏 가라앉는다.
케이와 여래의 집은 해변을 마당처럼 바로 앞에 두고 있었다.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래는 쉽게 잠이 들지 못하며 파도 핑계를 댔었다. 자꾸 소리가 들려. 일어나 앉은 여래는 그 기척에 덩달아 깬 케이에 민망하단 듯 눈을 비볐다. 파도 소리 때문에 잠이 안 와. 길바닥 같은 목공소에서도 잠만 잘 잤는데. 이제 나도 늙었나? 하고.
여래는 이해를 구하듯 케이를 쳐다보았지만 케이에겐 목공소란 기억에 없는 장소였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여래는 찬찬히, 쌀 속의 돌을 고르듯 케이를 유심히 바라보다 덧붙였다.
‘은애원 나와서 내가 있었던 데야. 거기서 널 다시 만났어. 불이 났었는데 그 때.’
‘응.’
‘아니야. 됐어. 다시 자자.’
‘여래야.’
‘…깨워서 미안. 익숙해질 거야. 신경 쓰지 마.’
여래는 희원이 차낸 담요를 목 위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곤 침대에 누웠다. 케이는 여래의 어깨를 쓰다듬으려던 손을 거두고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한 번에 잘되어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여래가 케이를 낯선 사람처럼 대할 때, 설명하기를 포기할 때 케이는 조금 어려웠다. 조금만 더 내게 설명해주면 안 될까, 여래야. 케이의 한숨에 여래가 뒤척거렸다.
내가 모든 걸 잃었어도, 과거도 기억도 나의 이름마저도 잊었던 그때도 나는 여래 너를 그리워했는데.
케이는 들어 올린 팔을 올려다보았다. 여래와 똑같은 각인을 보면 마음은 차분해지고 명료해졌다. 달빛에 각인의 모서리들이 파랗게 빛났다.
그래, 많은 것이 불안하다. 하지만 난 기다릴 수 있다. 케이에게는 현재가 있다. 희원도 있다. 그리고 여래도 어찌 되었든지 간에 곁에 있다. 그건 과거의 최준혁이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에게 익숙해질 시간이. 잃어버린 연결점들을 매울 시간이.
* * *
“으, 으으!”
억눌린 신음이 침실에서 들려왔다. 케이는 머금었던 물을 급하게 삼키며 방 쪽을 돌아보았다. 신음은 멈추지 않았다. 케이는 의자를 밀어 넘어뜨리고 방을 향해 달려갔다.
“…윽!!”
침대 위, 여래는 발버둥 치고 있었다. 격렬하게가 아닌 온몸이 짓눌려 꿈틀거리는 게 고작인 몸부림이었다. 케이는 여래를 흔들었다.
“여래야. 여래야, 왜 그래.”
“싫… 안 돼. 제발.”
“눈 떠! 여래야, 눈 떠!”
“허억….”
땀에 가닥가닥 붙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어지럽다. 케이는 여래를 안아 일으켰다. 여래는 케이를 또 다른 악몽으로 여기며 발버둥 쳤다.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던 여래는 쉼 없이 등을 쓸어주자 겨우 떨림을 멈췄다.
여래는 케이의 어깨를 잡아 뜯을 듯 움켜쥐었다.
“여래야, 괜찮아?”
“어디… 어디 있었어?”
“주방에 잠깐 물 마시러.”
“…네가.”
여래의 목소리가 꺼질 듯 작았다. 평소랑은 다른 결의 목소리에 케이는 품 안에서 여래를 떼어내 뺨을 쥐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네가, 네가 또 없어진 줄 알았어.”
“무슨 소리야.”
여래는 울고 있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손을 적시자 케이는 가슴이 꽉 틀어 막히는 기분에 말을 잊었다. 여래가 무슨 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턱없이 허둥거려 케이는 더듬거렸다.
“그, 그냥. 나는 저기 여래야. 물을 마시러 간 것뿐인데…. 아무튼 간에 다신 안 그럴게. 절대 안 그럴게. 맥주도 안 마시고, 절대 안 마셔. 희원이 앞에서 짠도 안 할게 그럴 테니까.”
“네가 없어졌을 때랑 똑같았어.”
“여래야.”
“평범한 아침이었는데…. 갔다 오겠다고 하고 안 왔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했는데…. 뭘 입고 갔는지, 어떡하고 갔는지도 생각이 안 났어. 너를 설명해야 하는데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어. 그 때 내가 얼마나… 얼마나….”
케이는 여래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네가 사 온 자두라도 먹을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네가 걱정하면서 나가게 하지 말걸.”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넌… 이제 달라.”
여래는 케이의 목덜미에 기운 없이 이마를 비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약한 모습에 케이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너는… 케이 너는 잘 웃지. 다정하고. 행복해할 줄 알아. 사람들은 그런 너를 좋아해.”
“그건.”
그건 여래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었다. 여래가 비록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케이는 알 수 있었다. 평범함, 여래가 원하는 단 한 가지. 그게 아니었다면 케이는 매일매일을 이런 식으로 살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케이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너는 누구든 선택할 수 있어. 온갖 사람들이 다가올 테니까. 그 중엔 네 마음에 드는 누군가도 있겠지. 그럼 나는…. 어떡할까?”
“이해가 안 돼.”
“케이. 준혁아. 네가 죽거나 다치지 않고서도 내 곁에 없을 수 있단 생각이 들면 나는…. 난 너무 외로워져. 네가 네 발로 나를 떠날 수도 있단 생각을 하면 너를 두 번 잃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미칠 것 같아.”
파도가 해변을 핥는 찰싹거리는 소리가 끝없다.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부분이 있다. 그것은 아마 어떠한 말이나 행위로도 다시 메꾸지 못할 불가역적인 상처이다. 마치 여래의 손처럼.
망설이던 케이는 뻣뻣하게 굳은 여래의 오른손을 쥐었다.
“여래야. 우리 각인을 하자.”
여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뿐이라는 절대적인 맹세를 하자.”
“케이.”
“이 말도 내가 했을지는 모르지만…. 한 번 했다고 해도 나는 기억하지 못하니까. 다시 약속을 해줘. 여래야.”
우리에게는 공백인 시간이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것을 단숨에 따라잡을 지름길 같은 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너를 포기할 생각 같은 건 들지가 않아, 여래야. 네가 설령 복구 불가능한 나의 어느 부분을 그리워한다고 해도 괜찮다. 나는 너로 이루어져 있고 그건 바꾸거나 대체 불가능한 절대적인 무엇이었다.
“나는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그 순간에도 너를 사랑했어.”
“…케이.”
“당장 그러자는 건 아니야. 내가 더, 더 노력할게. 너는 그냥… 그냥! 편하게 있으면 돼. 최준혁만큼 나를 좋아질 때가 되면 그 때 허락해줘. 지금의 나를. 그 때… 다시 한 번 나랑.”
케이는 바다 옆에 집을 얻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파도 소리 대신 무엇으로 메울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랑 다시 각인을 해줘.”
여래는 천천히 케이의 뺨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서툰 케이의 모습이 보기 싫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준혁과는 다른 의미로 그랬다. 한 사람을 두 번 사랑하게 되다니, 우스운 일이라 생각하며 여래는 케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케이는 들은 것 같았다. 거의 영원과도 같은 파도소리에 묻힐 듯 작았던 여래의 대답을.
좋아. 라는 한 마디를.
* * *
그리고 그 후.
케이는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은 여래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가, 각인을 하면 첫, 첫날밤도 지내는 건가? 그래야겠지? 그거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여래는 설핏 미간을 구겼다. 여래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케이는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아니다. 각인 전에 해야지. 나, 나도 최준혁만큼 널 알아야 할 거 아냐.”
“최준혁이 너잖아. 그리고 모르긴 뭘 몰라.”
“벗은 건 잘 모르는데….”
여래의 손이 케이의 가슴을 밀쳤다.
“미쳤냐?”
“그렇잖아! 동등하게 기회를 줘야지! 어? 경쟁을 붙이려면 적어도 같은 조건하에서! 어?!”
“잠이나 자! 넌 지금, 그 얘기가… 으… 왜 나와!”
“왜! 뭐! 왜!”
“분위기를 깨도 이렇게 깨? 기껏 철이 들었나 했더니만.”
“아, 여래야.”
“빨리 자!”
< 외전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