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그리고 시작
5화
어색하던 것도 잠시, 말없이 걷던 해랑은 무언가 떠올리고는 급히 장터로 내달렸다. 더 늦으면 상점 문이 닫을거라며 소란스럽게도 뛰는 해랑 때문에 석현도 덩달아 달려야 했다. 그리 힘들어 했던 사람이 맞는지 해랑은 정말 전속력으로 달렸다. 장터까지 쉬지도 않고 달린 덕에 가까스로 도달한 두 사람이었다. 석현은 제가 도착한 곳이 무얼 파는 곳인지도 몰랐다. 숨을 고르며 둘러보니 그제야 문에 붙은 글자가 눈에 띄었다. 종이 파는 상점이었다. 이미 한 발 앞서 가게 안으로 들어간 해랑은 벌써 무언가를 구매하고 있었다. 아까의 민망한 일은 금세 잊었는지 석현의 앞으로 쪼르르 와서는 제가 산 것을 석현에게 내보였다. 손에 들린 건 화첩이었다.
“어인 일로 화첩을 구입하셨습니까?”
“예전엔 그림을 많이 그렸었는데 요즘엔 별로 내키지를 않아 통 그리지를 못 했거든.”
“다시 마음이 동하셨습니까?”
“응. 이제 다시 붓을 잡을 마음이 생겼어.”
해랑이 제 품에 화첩을 고이 품고서 가벼이 걸었다. 석현이 보기에 그런 해랑이 꼭 팔랑이는 나비 같았다. 석현은 6척을 살짝 넘는 장신에 갈색빛으로 그을린 건강해보이는 피부, 거기에 무술 훈련으로 단련된 단단한 몸이었다. 해랑은 그와 정반대였다. 5척 6촌 정도의 작은 키에 투명할만큼 새하얀 피부, 가늘고 보드라운 피부결을 지니고 있었다. 석현의 눈으로 봤을 때 해랑은 그야말로 흰 나비 같아 보일 것이었다. 게다가 해랑의 해맑은 성격도 한 몫했다. 어찌나 이리저리 잘도 돌아다니는지 꼭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강아지가 신이 나 마당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다. 해랑이 들고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종이 뭉치일 뿐인데 뭐 그리 좋다고 계속 들여다보며 걷는지, 저러다 넘어지기라도 할까 석현은 노심초사했다. 한참을 화첩에 정신을 팔던 해랑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뭔가 떠오른 듯 ‘아!’하고 외친 해랑이 고갤 돌려 석현을 보았다.
“집에 돌아가면 바로 그림을 좀 그려야 겠어.”
“뭐 그릴 것이라도 생각나셨습니까?”
“응. 너를 좀 그려야겠어.”
“예……? 저를요?”
“응. 첫 그림은 너를 그려 볼래.”
얼결에 해랑의 화첩에 처음으로 담기게 되자 석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질 못 했다. 어쩐지 부끄러워 거절하고 싶어도 이미 흥이 오른 해랑이었다. 때문에 석현은 저 대신 다른 걸 그리시는게 어떻느냐고 말하고 싶어도 하질 못 했다. 해랑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빠르게 별채로 향했다. 마구잡이로 신발을 벗어 던지고선 품에 안고 있던 화첩을 서안(*책상) 위에 펼쳤다. 빠르게 붓과 먹, 벼루를 챙긴 해랑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자 즐거운 얼굴로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해랑의 맞은 편에 앉아 좌불안석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손과 발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석현아. 편히 앉아 봐. 한 자세로 오래 있으려면 그 자세로는 좀 힘들 걸?”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석현은 해랑의 말에 다리를 풀었다. 늘 하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해랑의 눈치를 살피자 해랑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래. 그대로 가만히 있어. 이제부터 그려야 하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랑의 두 눈이 반짝이며 석현의 얼굴 구석구석을 훑었다. 처음은 석현의 동그랗게 묶인 상투 끝에서 시작하였다. 시선은 점차 내려와 석현의 이마를 살폈고 그 아래로 눈썹, 콧대, 두 눈과 뺨, 인중, 입술에서 턱 끝으로 이어졌다. 다음으론 양쪽 귀를 살피다 밑으로 이어진 목덜미를 쭉 훑어 내렸다. 석현은 해랑의 시선이 자신을 훑을 때 마다 어쩐지 직접 제 피부에 닿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벌거 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자꾸 호흡이 멋대로 가빠져온다. 그림을 그리기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긴장되었다. 아까는 순수하게 어찌 해야 할 줄 몰라 긴장했다면 지금은…… 조금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해랑의 눈과 손이 움직일 때 마다 마치 저 붓으로 몸 구석구석이 간지럽혀지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저릿하고, 열이 올랐다. 아랫배가 뻐근한게 영 불안하다.
“움직이면 안 돼.”
해랑이 집중한 채로 단호하면서도 무심히 말했다. 석현의 속도 모르고. 아랫입술을 꽉 물어봐도 소용이 없는 석현은 바지자락을 움켜쥐었다. 아랫도리가 심상치 않아 초조해졌다. 숨이 자꾸 턱턱 막힌다.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아무래도 몸이 이상하다. 더 있다 가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석현이 꽉 물고 있던 입술을 떼었다.
“저, 도련……”
“다 그렸다!”
다행히도 석현이 말을 꺼냄과 동시에 해랑이 붓을 내려놓았다. 해랑은 제가 그린 그림과 석현의 얼굴을 몇 차례 비교해보더니 흡족한 얼굴로 석현에게 화첩을 내밀었다. 석현에겐 화첩 속 그림을 여유로이 볼 겨를이 없었지만 마지막 인내를 짜내어 화첩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저와 똑 닮은 그림이 비어 있던 종이를 채우고 있었다. 석현은 힘겹게 웃어 보이며 감사인사를 표했다.
“그려주셔서…… 영광입니다. 도련님.”
“내가 더 고맙지. 그런데 왜 이리 안색이 안 좋아? 또 어디 아파?”
“저, 갑자기 두통이 와서…… 소인, 이만 물러 가겠 사옵니다.”
“아…… 그래. 그렇게 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난 석현이 문지방을 넘어 가려 는데 뒤에서 해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예?”
“다음에 또 그려도…… 될까?”
“예. 그리 하십시오.”
석현은 꾸벅 인사를 한 뒤 빠르게 제 집으로 향했다. 그런 석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해랑은 먹으로 그린 석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살풋 웃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몸에 석현은 바닥을 굴렀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괴로움이었다. 석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스무 살 즈음 찾아온다는 ‘해오름’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석현의 집안은 대대로 양인의 집안이니 스무 살쯤 엔 해오름 기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러니 그 때엔 자신의 몸을 너무 두려워 말고 자연스레 받아들이면서 잘 맞는 ‘짝’을 맞이하면 된다고. 그 땐 해오름을 가벼이 여겼다. 수련을 통해 고통에 무뎌 지기도 했고 자기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알게 되었으니 해오름쯤 이야 무난히 넘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이젠 온 몸이 불덩이가 되었고 땀으로 옷이 몽땅 젖어버렸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아랫도리였다. 방으로 들어오자 마자 뜨거운 숨을 토해낸 석현은 껄떡거리며 투명한 물을 흘려 대는 제 성기를 움켜쥐어야 했다. 이미 잔뜩 성이 나 핏줄이 도드라지고 검붉게 변해버린 기둥을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하기에.
“크윽……!”
손에 쥐자 바로 엄청난 자극이 전해져 왔다. 이상하게 변해버린 제 몸이 무섭고 수치스러우면서도 사태를 해결하고자 기둥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흥분된 손짓에 금방 사정감이 몰려와 허연 점액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기는 여전히 불덩이 같았다. 자꾸 무너지는 몸을 겨우 버텨가며 석현은 제 것을 계속해서 쥐고 흔들어 댔다. 한 번 사정한 탓에 예민해져 자꾸 입에서 쇳소리가 흘렀다. 이런 모습을 해랑에게 들키지 않고 빠져나온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자위하는 내내 자꾸 해랑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얗고 고운 얼굴의 해랑이 제 품에 안겼을 때를 떠올림과 동시에 석현은 또 다시 사정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지고 온 몸이 바르르 떨렸다.
“허억!”
텅 빈 머릿속에 다시 해랑의 얼굴이 채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사그라들 줄 알았던 욕망 또한 되살아 났다. 석현은 죄책감과 수치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으나 정반대로 해랑에 대한 욕정으로 가득 채워지는 자신에 혼란스러웠다.
“하아…… 도련… 님……!”
저도 모르게 성기를 흔들어 대며 해랑을 찾았다. 한 번 해랑을 입에 올리자 거침이 없어진 석현은 몇 번이고 해랑을 불렀는지 모른다. 그렇게 몇 번이고 절정을 맞이 한 끝 에야 조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성기 주변은 정액이 말라붙고 방바닥이며 배와 가슴까지 정액이 튀어 있었다. 뒤이어 허탈함과 배덕감,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들이 뒤섞여 석현에게 밀려왔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약을 구하고 짝을 구해야 하는데, 지금 석현의 처지로는 그 무엇도 구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로 인해 앞으로 또 언제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공포가 석현의 목을 조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석현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스무 살의 석현이 홀로 견디기엔 지독히도 캄캄한 밤이었다.
해와 달
다음 날 오전, 석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린 채 해랑에게로 향했다. 해랑의 별채로 걸음을 옮기는데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렇게 무겁고 무거울 수가 없었다. 석현은 해랑을 볼 면목이 없었다. 제가 모시는 도련님에게 욕정을 품고, 심지어 그를 떠올리며 제 아랫도리를 흔들어 댔으니……. 석현은 몇 차례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되돌아 갈 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분명 해랑이 저를 찾으려고 이리 저리 들쑤시고 다닐 게 뻔했다. 그럼 또 업득이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석현은 해랑의 방 앞에 서서 한참을 주저하다 결국 자신이 왔음을 해랑에게 알렸다. 석현의 목소리가 방 앞 복도에 울리자 곧바로 해랑이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왜 이리 늦었어? 한참 기다렸잖아.”
“……죄송합니다.”
“아냐. 그나저나 어제부터 안색이 좋지 않더니 오늘도 영 안 좋아 보이네.”
민망해진 석현이 입술만 말아 삼킨 채 대꾸를 하질 못 하자 해랑이 되려 수심 가득한 얼굴로 석현을 보았다. 해랑은 혹시나 석현에게 병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석현은 해랑이 걱정할 것을 알기에 약간의 몸살 기운이 있을 뿐이니 너무 염려치 마시라고 해랑에게 일러두었다. 석현의 말에 조금 안심한 듯한 해랑이 웃으며 석현에게 말했다.
“나 아버지 만나 뵈고 올 동안 여기서 좀 쉬고 있어. 아마 여기 있으면 아무도 너 안 찾을거야.”
“감사합니다. 도련님.”
해랑은 석현의 어깨를 가볍게 쓸고는 정리하다 만 옷 매무새를 마무리했다. 평소라면 해랑의 환복을 도왔을 석현은 차마 다가가서 도와주지를 못 했다. 열 발 자욱은 더 떨어져 있는 지금도 심장은 충분히 빠르게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다가간다면 심장이 제멋대로 튀어 나가기라도 할까 무서워 거리를 유지해야 만했다. 석현이 마음을 졸이는 사이 해랑은 갓을 쓰는 것으로 옷 입는 것을 마쳤다. 석현은 제 눈 앞의 해랑을 보자 문득 기시감이 느껴졌다. 석현도 저런 의복을 입었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한 달 전의 일들이 벌써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원래부터 자신은 노비였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양반으로 태어났음을 축복으로 여겼으나 한 순간에 처지가 뒤바뀌는 순간, 절망은 곱절로 돌아와 석현을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분홍빛 도포를 걸친 해랑을 보고 있자니 석현의 머릿속엔 온갖 생각들이 뒤섞였다. 옛날 자신의 모습을 아련히 떠올리던 그 때, 해랑이 석현에게로 다가왔다. 석현은 다시 바짝 몸을 굳혔다.
“이제 다녀올 테니 푹 쉬고 있어.”
“예, 도련님.”
해랑이 방을 나서고 나자 긴장이 풀리며 눈이 감겼다. 뜬 눈으로 지샌 밤이라 피로가 무겁게도 쌓여 있었다. 해랑의 향기가 은은히 도는 방 안에서 몽롱 해지던 찰나, 밖에서 석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석현을 부른 것은 업득이었다. 차마 눕지도 못 하고 벽에 기대 축 늘어져 있던 석현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밖으로 고갤 내밀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냉큼 나와서 마당이나 쓸거라. 시종 주제에 어디 감히 도련님 방에서 꼼짝을 않고 있어?”
“……죄송합니다.”
업득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혀를 차며 석현을 보았다. 만약 내가 양반이었다면 어땠으려나. 쓸데없는 생각인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손에 쥐어 진 빗자루가 자신의 신분을 낙인찍는 듯했으니까. 석현이 한참 마당의 흙들을 정리하는 내내 곁에 선 업득이 지켜보았다. 석현의 마음이 불편했지만 의식하지 않는 척 바닥만 보았다. 한참을 서서 바라만 보던 업득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애초에 노비로 태어나는 게 낫지. 양반이었다가 바닥으로 끌어내려지니 이만큼 억울한 게 어디 있겠어?”
“……견딜 만합니다.”
“고고한 척 말어라, 꼬맹아. 너 지금 양반 아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알면 다행이네. 가끔 보면 아직도 착각하는 것 같아서.”
살살 약 올리는 듯한 업득의 말 들이 석현의 속을 박박 긁었다. 하지만 저보다 훨배 많은 나이의 업득인데다 어제 일로 기운이 없어 석현은 구태여 대거리할 의지도 없었다. 업득은 그런 석현이 재밌다는 듯 낄낄거리다 힐끔 석현을 보며 말했다.
“역모의 주동자가 네 숙부라며? 네 숙부가 그런 일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말야.”
“제 숙부를 뵌 적이라도 있으십니까?”
석현이 약간의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로 업득에게 되물었다. 헌데 석현의 질문에 업득이 의외의 말을 뱉었다.
“아, 네 숙부 이 집에 자주 오셨었거든. 우리 대감 나으리와 친분이 있으셨지. 그래서 종종 뵈었었다.”
“예……?”
석현은 처음 듣는 말에 놀라 고갤 들었다. 우 대감과 제 부친의 친분은 알고 있었지만 숙부와의 친분은 들어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숙부는 아버지와의 교류도 딱히 많지 않던 분이었다. 이따금 서신으로만 소식을 접했을 뿐. 그도 그럴게 숙부는 도성과 거리가 먼 해주 땅의 도호부사로 있었기에 커서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뵌 적도 없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우 대감과 친분이 있다고?
“아무튼 어서 마무리하고 본채 마당도 좀 쓸거라.”
업득이 뒷짐을 진 채 사라졌지만 석현의 신경은 온통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제공한 숙부에게로 쏠렸다. 아버지가 숙부의 서신을 받으실 때면 늘 수심이 가득하시곤 했던게 떠올랐다. 서신을 읽으시다가 종종 ‘네 숙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라는 말을 하시곤 했었다. 아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서신엔 나라와 왕권에 대한 반기를 드러내는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왕에 대한 충심이 높았던 아버지는 그런 숙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대체 왜 숙부가 이 곳엘……?”
찜찜한 구석이 생겼다. 아무래도 더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석현의 두 눈이 다시 빛을 냈다.
*
따뜻한 차가 은은히 향을 퍼뜨렸다. 우 대감과 마주 앉은 해랑은 꿇어 앉은 자세가 불편해 사각이는 소리를 몇 번이나 냈는지 모른다. 그럴 때 마다 눈치를 주는 우 대감에 해랑은 다시 얼음이 되었지만 얼마 가지 못 했다. 참다 못 한 우 대감이 한숨을 내쉬었다.
“해랑아. 이제 너도 스물하고도 둘이다. 좀 더 의젓해져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무어라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분한 해랑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의젓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
해랑의 대꾸에 우 대감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물었다.
“과거 공부는 좀 하고 있느냐?”
“예, 하고 있습……”
“해랑아.”
“……안 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푹 떨군 해랑에 우 대감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살짝 누르며 말을 이었다.
“어째 요즘 들어 전보다 더 자주 나가는 것 같더구나.”
“……”
“이젠 석현이까지 데리고 나간다고 들었다.”
“아, 그게……”
외로울 석현이 마음에 쓰여 데리고 나가는 것이라 덧붙이려 했지만 우 대감 쪽이 한 발 빨랐다.
“네가 석현이에게 마음 쓸 필요는 없다. 그건 나 하나면 충분하니 너는 그저 네 일에 집중하거라. 이제 그만 놀고 쓰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치만 아버지……!”
우 대감의 서슬 퍼런 눈빛에 해랑이 깨갱, 꼬리를 내렸다. 우 대감은 다시 부드럽게 표정을 바꾸어 해랑을 보았다.
“나는 네가 저 구석에만 지내는 것이 늘 미안하고 마음에 걸린다. 이제 약효도 어느 정도 드는 것 같으니 어서 관직에 올랐으면 좋겠구나.”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만 물러 가 보거라.”
“예. 아버지.”
해랑은 허리 숙여 우 대감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작은 아들을 둔 우 대감의 입에선 다시금 한숨이 터졌다. 늘 아픈 손가락인 둘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혼자 외로이 지내던 고 어린 것이 친구가 생겨 얼마나 기쁠까 생각하면 둘째를 아예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젠 미래를 내다봐야 할 중요한 시기이기에 어쩔 수 없이 훈계를 해야만 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싼 우 대감은 홀로 중얼거렸다.
“……내 선택이 옳은 것이어야 할 텐데.”
시무룩해진 해랑이 밖으로 나오던 때, 부엌이 있는 동벽문 너머에선 한 바탕 소동이 일었다. 때 마침 그 쪽을 지나가던 해랑의 귀에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일인지 확인 차 동벽문을 열어보니 어찌된 영문인진 모르나 업득이 잔뜩 쥐어 터진 채로 씩씩거리며 서 있고 업득의 패거리가 누군가를 흠씬 두들기고 있었다. 깜짝 놀란 해랑이 달려가보니 바닥에 몸을 말고 발에 걷어 채이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석현이었다.
[작품후기]
공부는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