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이게 무슨 일이냐!”
해랑의 호통에 깜짝 놀란 업득과 패거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바닥엔 석현이 몸을 웅크리고서 누워 있었다. 해랑은 사색이 되어 석현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석현은 심하게 다치진 않았다. 굳이 관계없는 이들까지 때릴 마음은 없었기에 석현은 적당히 맞아주는 시늉을 했을 뿐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석현을 본 해랑이 화가 치밀어 고갤 들어 소리쳤다.
“어찌된 일인지 낱낱이 고해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해랑의 성난 모습은 처음인지라 모두 당황해 서로 눈치만 보았다. 특히 업득은 해랑과 석현의 눈치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석현은 입가의 피를 닦아 내고 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싸늘한 두 눈으로 석현은 업득을 노려보았다. 업득은 석현에게 꽤나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석현이 안채 마당을 쓸고 있을 때 업득이 던진 말 때문이었다.
‘너도 부모 복은 드럽게 없구나. 해필 대역죄인의 집안에서 태어나서는, 쯧쯧.’
자신에 대한 비아냥쯤은 가벼이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을 욕보이는 언행이 업득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석현의 분노가 터져버렸다. 순식간에 날아간 주먹은 업득을 바닥으로 내다 꽂았고 그대로 업득의 위에 올라탄 석현은 가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게 두들겨 맞기 시작한 업득의 비명에 패거리들이 달려와 석현을 떼어낸 뒤 구타를 시작했던 것이다.
“별 일 아닙니다. 그냥 가시지요.”
이 일들이 그대로 해랑에게, 그리고 우 대감에게 전달된다면 필시 업득은 이 곳에서 쫓겨날 것이 틀림없었다. 처자식이 넷이나 딸린 업득에게 거리에 나 앉는 것만큼 더 두려운 것이 어디 있을까. 석현은 제게 간청하듯 바라보는 업득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흙으로 뒤덮인 옷을 툭툭 털어내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해랑이 당황해 석현의 뒤를 따랐고 업득 역시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해랑은 저 만치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석현을 쫓아갔다.
“왜 그냥 가는거야?”
“정말 별 일 아닙니다.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석현이 무심히 한 말에 해랑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예 석현의 팔을 붙들어 멈추게 한 해랑은 기분이 상한 듯했다.
“네가 누구와 싸울 녀석이 아닌 걸 내가 아는데, 별 일이 아니라니?”
“그저 제 잘못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너, 지금 거짓말하고 있어.”
해랑은 다 보였다. 석현이 지금 제게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걸. 석현이 거짓말을 할 때면 평소와 달리 눈을 한 번도 자신과 맞추지 않았다는 걸 해랑은 알았다. 일전에 해랑이 아버지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난 뒤 집 안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어린 시종들이 삼삼오오 모여 제가 석현에게 준 주전부리들을 먹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해랑이 다가가 고걸 어디서 났느냐 물으니 아이들은 우물쭈물하다 석현이 나누어 줬다고 했다. 그 날 저녁, 해랑은 석현에게 물었다. 내어 준 주전부리는 다 먹었느냐고. 그에 석현이 다 먹었다고 말했다. 눈 한 번 마주치지 못 하고선. 해랑은 그런 석현이 재밌어서 한바탕 웃었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석현은 또 다시 눈을 피했다.
“제 부족함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더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석현이 입을 꾹 다물다 툭 말했다. 해랑에게 이런 식으론 얘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무심하게 들리는 석현의 말에 해랑이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그에 석현이 움찔했다. 석현은 원체 무뚝뚝한 말투였다. 무심결에 뭉툭히 뱉어진 자신의 말에 해랑이 상처 받았을까봐 석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해랑이 우두커니 서서 석현을 흘기더니 땅을 내려보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해랑은 주먹을 꽉 쥔 채 입을 삐죽이더니 먼저 자신의 방으로 휙 들어가버렸다. 당황한 석현이 붙잡을 틈도 없이 해랑이 사라졌다. 석현은 덩그러니 서서 해랑이 들어간 자리만 허탈히 바라보았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것 뿐이었는데. 석현은 어쩐지 일이 꼬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
해랑은 속이 상했다. 안 그래도 과거 시험을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압력에 기분이 한 풀 꺾인 상태였는데 석현까지 저리 나오니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 딴에는 석현을 생각해서 업득이 녀석들을 호되게 꾸짖었건만, 저렇게 냉랭한 태도라니.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해랑은 홀로 서안 앞에 앉아 손톱을 뜯어 댔다. 사실 석현의 입장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이 일로 기분이 가장 상했을 사람은 석현이었을테니.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으나 석현의 그 불퉁한 한 마디가 왜 그리 속이 상하는지 해랑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해랑의 머릿속이 석현으로 인해 뒤죽박죽이었다. 영 기분이 풀리질 않았다. 문 너머에선 석현의 기척이 느껴졌다. 해랑은 가벼이 한숨을 쉬었다. 답답한 건 정말 질색인지라 해랑은 자릴 박차고 일어섰다.
석현은 해랑의 방 앞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거렸다. 어릴 적부터 말수가 적었고 커가면서는 혼자 수련하는 시간에 몰두했던 석현인지라 이런 상황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어디서부터 꼬였고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 걸 까. 아까의 일을 여러 차례 되감아 보며 석현은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짚어보았다. 그리고 서운했을 해랑에게 무어라 말을 할 지도 함께 고민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해랑의 기분이 좀 풀릴까?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해 뒷 목을 매만지다 석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석현은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저, 도련……”
석현이 해랑을 채 부르기도 전, 미닫이 문이 세게 열렸다. 쾅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앞엔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의 해랑이 서 있었다. 해랑은 저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석현을 올려보고는 대빨 내민 입술을 삐죽거렸다.
“들어올 거면…… 빨리 들어와.”
어색한 말투로 퉁명스레 말하고 선 휙 들어가버리는 해랑에 석현은 얼른 그 뒤를 따랐다. 해랑이 털썩 자리에 앉았고 뒤이어 석현이 맞은 편에 자리했다. 해랑은 심기불편한 얼굴로 석현을 가만히 보았다. 석현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해랑의 시선을 피한 채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결국 이번에도 먼저 말을 꺼내는 건 해랑이었다.
“석현아.”
“예, 도련님.”
“네가 왜 업득이 녀석을 때렸는지, 왜 네가 맞고 있었는지, 그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을게.”
“……”
“근데 왜 내가 이렇게 속이 상하는지 모르겠다.”
해랑의 말에 석현이 굳게 닫혔던 입을 툭 풀며 숙였던 고갤 들어 해랑을 보았다. 해랑은 여전히 뾰루퉁한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네가 맞은 것도 속상하지만, 네가 내게 차갑게 말하는 게 왜 이리 신경쓰이고 아픈 걸까? 네 말 대로 별 일 아닌 걸로 넘기면 될 것을……”
석현은 쿵쾅대는 제 심장을 느꼈다. 저 말 한 마디가 뭐라고 이리도 눈치 없이 마음을 흔드는지. 별 말도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제 감정표현을 꾸밈없이 내뱉는 해랑의 어투는 이상하게 석현의 마음을 쥐고 흔들 때가 있었다.
“미안해. 어린 애처럼 삐치기나 하고. 나도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 보다.”
“아닙니다, 도련님.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해랑은 연신 죄송하다 말하는 석현에 속이 상했지만 애써 웃어 보였다. 안 그러면 석현이 더 힘들어 질 것 같아서. 어서 빨리 이 복잡한 마음을 털어내고 싶어 진 해랑이 석현에게 말했다.
“아냐. 괜찮아. 죄송할 것 없어.”
해랑이 제법 의젓하게 웃으며 속 깊은 모습을 보이자 석현은 미안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걸 가만히 보던 해랑의 머릿속에 순간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 닫혀진 마음을 풀어내기엔 이 만한 것이 없다. 해랑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석현에게 말했다.
“대신!”
“예?”
“오늘 나랑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예…… 예? 그 무슨……”
석현이 황당해하며 되묻자 해랑이 이전의 천진난만한 얼굴로 대꾸했다.
“너 때문에 나 속상하니까 술 한 잔 하며 풀려고. 나갈 준비해.”
해랑이 즐거운 듯 콧노래까지 불러 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석현은 잠시 벙쪄 있다가 이내 해랑의 본래 성격을 깨닫고는 픽 웃음을 지었다. 석현 역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해랑의 채비를 도왔다.
[작품후기]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석현이 해랑이 예뻐해주셔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재밌어야 할텐데...
앞으로도 열심히 재미지게 쓰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