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밖은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둘이 저잣거리에 당도할 때 쯤엔 거리에 불빛들이 하나 둘 켜 있었다. 석현은 밤의 저잣거리가 더 좋았다. 낮처럼 번잡하지도 않을 뿐더러 은은한 등불들이 아른아른 빛을 내는게 퍽 예뻤다. 또 자신이 손에 쥔 등불이 이따금 해랑의 옆 얼굴을 비출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어여삐 빛나는 해랑의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저 집으로 가자.”
해랑의 손 끝엔 기방이 걸려있었다. 기방은 화려한 건물의 외양에 걸맞게 형형 색색의 등불들이 매달려 있었고 아름다운 악기 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석현의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안에는 분명 아리따운 기생들이 줄지어 있을 테고 해랑은 그런 기생 중의 하나를 불러 제 옆에 앉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별로 가까이서 보고싶지 않은 장면이다. 석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뒤 해랑의 뒤를 쫓았다. 기방 안 쪽에서는 이미 기방에서 풍류를 즐기던 이들이 나오던 중이었다. 갑자기 무리 중의 하나가 불쑥 해랑에게로 다가오며 아는 체를 했다. 성큼성큼 걷던 해랑은 기방의 문턱을 넘으려다 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자네, 우 판서의 둘째 아들 아닌가?”
“어? ……아! 어르신!”
그는 우 대감과 친분이 두터운 우의정 노의석이었다. 노의석은 예전에 몇 번 우 대감을 방문하러 왔던 적이 있었다. 노의석이 오면 이따금 우 대감이 둘째 아들을 불러 인사시킨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가 얼굴을 알고 있던 터였다. 해랑이 쪼르르 달려가 노의석에게 인사를 하자 그는 얼굴을 활짝 펴면서 해랑을 반겨주었다.
“그래, 자네가 여긴 어쩐 일로 왔는가?”
“제 친구와 함께 술 한 잔 기울이러 왔습니다. 이제 내일부턴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해야 하는 신세거든요.”
이제 공부만 하다니? 처음 듣는 해랑의 말에 석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랑은 그런 석현을 보지 못 한 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 곧 과거 시험이 있을 예정이니 그래야지.”
“예. 어르신 이제 들어가시는 건가요?”
“날이 어두우니 들어가 쉬어야지. 자네도 적당히 놀다 들어가게.”
“예. 그럼 들어가십시오.”
해랑이 공손히 인사를 하자 노의석이 허허 웃으며 해랑을 들여보냈다. 석현은 그 옆에서 함께 꾸벅 인사를 하고 해랑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노의석은 해랑에게 인사를 한 뒤 몇 걸음 걷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뒷 모습이 멀어져가는 걸 가만히 보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란 말이지…….”
노의석은 일행들의 부름을 듣고 서야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머릿속엔 해랑의 옆에 서 있던 석현의 얼굴이 떠 올랐지만 고갤 털었다. 제가 아는 ‘그 얼굴’과 비슷했지만, 노의석은 설마하고 가벼이 넘겼다.
*
해랑과 석현은 작은 방 하나로 안내받았다. 단촐한 방엔 큼직한 술상 위로 몇 가지 음식들과 술병 하나, 술잔 두 개가 놓여있었다. 해랑은 푹신한 방석 위로 털썩 앉았다. 기분이 좋은 듯 해랑이 웃었다. 석현은 술상과 멀찍이 떨어져 서서 그런 해랑을 지켜보았다. 해랑이 구석에 서 있는 석현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
노비의 신분으로 이 안에 들어온 것도 용한데 어찌 감히 술상 근처에 갈 수 있을까. 석현은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 때였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들겼다.
“나으리. 기녀를 들여보낼까요?”
관리인의 말에 석현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석현은 앉아있는 해랑과 문을 번갈아 보았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해랑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서 그랬다. 해랑은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뗐다.
“기녀는 괜찮으니 술이나 한 병 더 내주시게.”
석현은 안도의 숨을 뱉었다. 초조하게 말아 쥔 주먹에도 힘을 풀었다. 곧 술 한 병이 상 위로 놓여졌고 해랑은 문이 닫히자 마자 다시 석현을 불렀다.
“어서 앉아. 오늘 우리, 한 병씩 마시면서 상한 마음 좀 풀자.”
“예? 도련님. 과음은 몸을 해칩니다.”
“뭐 어때? 한 번 과음한다고 안 죽는다. 얼른 앉아.”
석현은 난처했지만 별 수 없이 해랑의 맞은 편에 앉았다. 신이 난 해랑이 잔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술을 부었다. 술 잔이 가득 채워지자 석현의 앞으로 옮겨졌다. 술을 아직 마셔 본 적 없던 석현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혹여 술을 이기지 못 해 자신이 해랑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할까 불안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기분 풀자고 자신을 데려온 해랑의 흥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석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눈 앞의 잔을 꽉 붙들었다. 해랑이 잔을 듦과 동시에 손에 든 잔을 입 안으로 한 번에 털어 냈다. 해랑 역시 그런 석현을 보고는 씨익 웃고선 술을 들이켰다. 석현은 난생 처음 마신 술이 식도를 타고 속을 뜨겁게 데우며 들어가자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썼다. 어째서 이런 걸 마시는걸까. 석현은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닦아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랑 역시 소매로 입가를 훔치며 석현을 살폈다.
“술은 처음이야?”
“예. 처음입니다.”
“하하, 네 첫 술 상대가 나라니 기분 좋네.”
그렇게 즐거워하는 해랑을 보고 있자니 석현은 괜히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마신 술 때문인지 해랑의 말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해랑은 다시 두 잔에 술을 채우더니 석현을 가만히 보았다. 석현은 저를 오롯이 담는 해랑의 두 눈에 긴장이 되어 무릎 위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해랑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석현아.”
“예?”
“나 내일부턴 공부해야 해. 곧 과거시험이 있거든.”
“예, 좀 전에 들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저잣거리도 맘껏 나오지 못 할 거야. 괜찮지?”
“저는 괜찮습니다.”
“내일부터는 너와 이렇게 자주 얘기를 나누지도 못 할 거야. 그래도 괜찮지?”
“예. 괜찮습니다.”
“……나는 안 괜찮은데.”
해랑의 말에 놀란 석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랑을 보았다. 씁쓸히 웃는 해랑이 석현을 보다 술 잔을 들어 채워진 술을 입 안으로 넘겼다. 석현도 덩달아 술을 마셨다. 그새 나와 정이라도 많이 드신걸까. 이렇게 말고는 달리 생각할 방도가 석현에겐 없었다. 해랑은 해랑대로 심란했다. 이젠 마음껏 놀지 못하는 것도 싫었고, 공부만 해야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더더욱 싫은 것은 이제 석현과 지낼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생긴 친구라고 너무 정을 많이 준 탓일까. 해랑은 석현을 생각하면 복잡해지는 제 머리를 털어내고 다시 웃으며 말했다.
“농이다, 농. 자자, 술이나 먹자!”
약간 붉어진 얼굴로 해랑이 술잔을 집어 들었다. 아까보다 내부가 더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석현은 후, 하고 숨을 뱉었다.
*
갑자기 어색해진 기류를 없애기 위해 해랑과 석현은 연거푸 술잔을 들어 올렸다. 둘 다 한 병을 거의 비워 냈을 쯤엔 해랑은 이미 술을 이기지 못 해 연신 고개를 떨궜다. 반대로 석현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약간 알딸딸한 기운은 있었으나 정신은 말짱한 석현이었다. 석현은 해랑을 어찌 집으로 데려가야 할 지 걱정이 되었다. 취해가는 해랑을 말려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나 이거 다 비우기 전까진, 절대! 집에 안 갈거야아!”
라고 외쳐 가며 제 술병을 품에 꽉 안아버리는 해랑이었으니 별 수 없었다. 해랑은 고개를 몇 번 꾸벅거리다가 갑자기 홱 세우고는 석현을 다 풀린 눈으로 보았다. 그리곤 오른팔을 상 위로 올려 턱을 괸 채 실실 웃어댔다.
“석현아아.”
“예, 도련님.”
“나는 네가 너무 좋거든? 근데 너무 싫어.”
뜻 모를 해랑의 말에 석현은 당혹스러웠다.
“아까의 일 때문이십니까?”
석현의 대답에 해랑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것이 귀여워 석현은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래에! 너는 너무 답답해. 말두 잘 안하구우…… 대답도 만날 ‘예, 도련님’ 아니면 ‘죄송합니다’ 이런게 다잖아. 나는 너랑 진짜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데……. 나는 이렇게 마음을 활짝 열었는데, 너는 아직두 꽉 닫고 있으니……. 내가 속이 안 상하겠어?”
아깐 의젓한 척했지만 결국 술 투정으로 속내를 털어낸 해랑에 석현이 옅게 미소지었다. 석현은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한 해랑에게 미안했다. 또 석현은 스스로가 답답했다. 해랑처럼 자유롭게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언젠가는, 웃으며 옛 일들을 얘기할 수 있을 그 때엔 꼭 해랑에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해주리라 홀로 다짐했다. 석현은 술로 뜨거워진 숨을 한꺼번에 토해낸 뒤 잠잠해진 해랑을 보았다.
헌데 술 때문일까. 석현의 마음속에 자꾸만 불경한 생각이 들었다. 제 눈 앞에 놓인 늘어진 해랑의 손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저것을 쥐고 싶어졌다. 한 손에 잡힐 저 작고 뽀얀 손을 한 번이라도 잡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다시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해랑의 머리와 음식 그릇 사이로 놓인 해랑의 왼손을 이리저리 보던 석현은 조심스레 오른손을 들었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붉게 물든 해랑의 손가락 끝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닿을 수 있었다. 석현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혹여라도 해랑이 깨어날까봐 잔뜩 긴장한 채 움직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석현의 손가락 끝과 해랑의 손가락 사이에 빈틈이 거의 없어지고 있었다. 석현의 손 끝이 해랑의 손등에 닿으려던 순간,
쿵 –
둔탁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깜짝 놀란 석현이 얼른 손을 뒤로 뺐다. 해랑의 손 끝만 보던 눈을 돌려보니, 해랑의 고개가 술상위로 처박혀 있었다. 석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을 내다보니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작품후기]
술의 힘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