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어둠 위로 보름달이 길을 내어주었다. 달을 등진 두 인영이 기다란 그림자를 그리며 길을 걷고 있었다. 비척비척 길을 걷던 그림자 하나가 결국 다른 그림자 옆으로 픽 쓰러졌다. 거나하게도 취한 해랑이었다. 그 옆엔 곤란한 얼굴의 석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해랑을 부축했다. 아직 사람이 좀 있는 넓은 거리라서 술에 취한 해랑을 맘 편히 부축할 수는 없었다. 저번처럼 감히 노비 주제에 양반과 접촉 하느냐며 누군가가 달려올 수도 있는 것이니. 우선 빨리 저잣거리를 벗어나 우 대감 댁 집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했다. 석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이동했다. 혹여 누가 또 시비를 걸까 최대한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석현은 해랑을 아예 들쳐 업었다. 술에 절어 축 늘어져 무거울 줄만 알았던 해랑은 석현의 생각보다도 훨씬 가벼웠다. 어찌나 솜털같은지 해랑의 작은 체구가 새삼 실감이 났다.
“어찌 이리 가벼우실까.”
석현은 홀로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해랑을 등에 업자 술 기운이 돌아 뜨거워진 해랑의 뺨이 석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종종 차오르는 숨이 가쁜지 푸- 하고 뱉어 내기 라도 하면 석현의 귓가로 해랑의 술 내음 섞인 숨소리가 스치곤 했다. 석현은 허공에서 달랑거리는 발이 가냘퍼 마음이 쓰였는지 한참을 걷다 가도 해랑의 발을 살필 때도 있었다. 서로의 몸이 붙은 곳이 뜨거워져 갔다. 석현은 잔뜩 신경이 곤두서서는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혀나.”
그 때, 해랑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석현이 눈만 굴려 해랑을 보며 되물었다.
“예?”
“석현아……”
또렷이 제 이름을 부르는 해랑에 석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예, 도련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좋다아.”
“예? 무엇이……?”
당황한 석현이 제대로 물어볼 틈도 없이 해랑의 팔이 석현의 목을 감아왔다. 아예 얼굴을 석현 쪽에 딱 붙여서는 흐응, 하는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는 해랑이었다. 순간 석현의 온 몸에 열이 화르륵 올랐다. 석현은 일 났다 싶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자꾸 몸이 뜨거워지는 게 틀림없이 또 해오름이 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랑의 앞에서 그런 망측한 꼴을 보이기엔 죽기보다 싫기에 최대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어디선가 달큰한 내음이 석현의 후각을 자극했다. 은은한 듯하던 단내가 점점 짙어지더니 이윽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향이 세질수록 석현의 몸이 달아올랐다. 정신이 자꾸 아득해지는 게 무서워진 석현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오래 참았다가 뱉기를 반복했다. 안 그러면 몸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대체 이 향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던 그 때, 석현은 제 등이 유난히 뜨거운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뜨거운 것이 제 등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도, 도련님!”
*
“하아, 으……”
붙들고 있는 해랑의 다리가, 저를 붙들고 있는 해랑의 팔이, 제게 부벼지는 해랑의 뺨이 모두 불덩이였다. 해랑의 호흡이 가빴으며 식은 땀이 나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이 틀림없었다. 단지 술 때문이라고 하기엔 해랑의 상태가 범상치 않았다. 또한 해랑이 숨을 내쉴 때마다 더욱 짙게 퍼지는 달콤한 과일 향을 알아차린 이상, 석현은 지체할 수 없었다. 석현은 해랑을 꽉 붙들고선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 킬 때마다 저를 괴롭히는 단내에 몇 번이고 고꾸라질 뻔했지만 석현은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제 등엔 해랑이 업혀 있으니 절대로 넘어질 수는 없었다. 겨우 당도하여 황급히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별채로 달려 들어간 석현은 해랑을 방 안에 눕혀 상태를 살폈다.
“도련님, 눈을 떠 보십시오! 도련님!”
“흐으, 읏, 석현, 석현아아……”
“예, 도련님. 말씀하십시오.”
“나, 어떡, 하으, 약, 약 좀……!”
“어디 있습니까?”
“저기, 서랍, 두번째, 칸…… 흐윽!”
해랑이 가리키는 곳으로 석현이 가서 빠른 움직임으로 서랍을 뒤져보았다. 해랑의 말대로 서랍 두번째 칸 안에는 네모난 상자가 하나 들어있었다. 금색 상자를 열어 보니 동그란 환약 하나가 있기에 석현은 그것을 집어 들어 해랑에게로 돌아갔다. 한 손으론 해랑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론 환약을 집어 해랑의 입에 갖다 대었다. 해랑은 환약을 반 입 깨물어 삼켰다. 약을 삼키고 나서도 해랑은 한동안 괴로워하다가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방 안을 가득 메우던 과일 향도 점점 옅어져갔다. 석현 역시 뻐근했던 아랫배가 조금씩 괜찮아졌다. 다행히도 해오름이 찾아오진 않았다. 석현은 잠시 숨을 돌린 뒤, 해랑이 쓰고 있던 갓을 벗겨 벽에 걸어두고 식은 땀이 난 이마를 천으로 닦아주었다. 불편해 보이는 옷은 갈아 입혀 주고 싶어도 건들 수가 없어 그냥 두기로 했다. 긴장이 탁 풀리자 석현에게 피로가 몰려왔다. 해랑과 똑같이 석현 역시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석현은 반쪽짜리 환약을 다시 서랍에 넣어두고는 해랑의 곁으로 가 앉았다.
“도련님, 소인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편안히 주무십시오.”
해랑에게 작게 말한 뒤 석현이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석현의 팔목을 해랑의 힘없는 손이 붙들었다. 깜짝 놀란 석현이 해랑을 보았다. 해랑은 겨우 눈을 뜬 채로 석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힘에 부치는지 눈물이 그렁한 채로 저를 보는 해랑에 석현의 심장은 그대로 멎는 것 같았다. 석현은 저 우는 모습 마저도 아름답다 생각했다. 이제 석현의 눈에 해랑은 무엇 하나 어여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해랑에 대한 마음에 석현은 무서울 지경이었다.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연이 닿지 못 할 것을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 때 해랑이 석현의 팔목을 감싸던 손에 미약하게나마 힘을 주었다.
“가지마…….”
“……”
“가지마, 석현아. 흑...... 나 무서워.”
“도련님.”
“이렇게,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 오늘 밤만…….”
언제 이성의 끈을 놓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석현은 팔목을 타고 내려와 제 손등을 덮는 해랑의손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리도 간절한 두 눈으로 붙드는데 어찌 뿌리치고 돌아설 수 있을까. 부디 스스로가 선을 넘는 일은 벌이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석현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해랑의 손은 여전히 석현의 손등 위에 얹어져 있었다.
“손, 잡아도 돼?”
아직 남아있는 잔향에 정신이 몇 번이고 아득해지는데 해랑의 말,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석현을 자극해왔다. 너무도 강렬히. 열기가 남은 해랑의 손바닥이 천천히 석현의 손을 쓸어내리다 손바닥과 바닥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간지러웠다. 그래서 석현은 참았던 숨을 전부 뱉어 버리고는 결심한 듯 해랑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에 해랑의 몸이 움찔하더니 이내 안정을 찾아갔다. 그래. 어차피 닿을 수 없는 연이라면 이렇게라도 마음을 채우는 수 밖엔. 석현은 스스로를 위안하며 해랑의 손을 감쌌다. 고 가늘고 작은 손이 석현의 손 안에 쏙 들어왔다. 석현이 그리도 잡고 싶었던 손이었다. 부서지기라도 할까 석현은 비싼 자기를 다루듯 해랑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마워, 석현아.”
“곁에 있겠습니다. 부디 평안히 주무십시오.”
“……응.”
해랑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석현의 온기에 해랑은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취한 상태인데다 약이 돌기 시작하자 점점 몽롱해지면서 정신이 흩어져 갔다. 채 떨어지지 않은 열로 인해 귓가가 웅웅거렸다. 그 소음에 석현의 목소리가 뜨문뜨문 섞여 들어왔다.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긴 한데 뭐라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하지만 약기운으로 멀어져가는 정신을 붙잡을 여력이 해랑에겐 없었다. 석현의 말들이 쓸데없는 소리와 섞여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해랑은 별 수 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만 했다.
“……들으셨을까.”
석현은 까무룩 잠이 든 해랑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해랑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눈물길을 엄지 손가락으로 지웠다. 석현은 해랑을 지그시 바라보며 해랑이 잠결에 차마 듣지 못한 말을 홀로 되뇌이며 밤새 곁을 지켰다. 언젠간, 이 말들을 제대로 전할 수 있길 바라며.
[작품후기]
가끔 약이 좀 없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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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추석연휴가 끝나가네요
연휴동안 많이 써두려고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만만치가 않네요 허허
그래도 웬만하면 매일 한 편씩은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늘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눌러주시고 보면 힘나는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