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날 밝은 줄 모르고 자던 해랑은 뒤집히는 속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머리는 깨질 것 같고 헛구역질이 나 몸을 일으켰다. 힘이 들어 석현을 부르려던 해랑은 순간 어제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기방에서 죽어라고 술을 퍼 마시고 선 석현에게 술주정을 부린 것 까진 기억이 났다. 헌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해랑은 등골이 오싹하여 어깨를 움추렸다. 자신의 기억이 저에게서만 사라지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어디 있을까. 해랑은 어지러이 널부러진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려 애를 썼다.
“그래, 분명 술을 마시다 석현이에게 서운하다 토로한 것 까지는 기억이…… 어? 맞아. 석현이. 석현이가 이 방에서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 해랑은 자신이 석현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한 것이 떠올랐다. 기억을 해냄과 동시에 해랑의 두 뺨이 붉어져 갔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하나의 기억을 찾아내자 또 다른 기억 하나가 스쳤다. 불덩이 같았던 자신의 몸. 달오름을 앓은 것이 떠올랐다. 헌데 문제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영 가질 않았다. 해랑은 다급히 서랍 두번째 칸을 뒤져보았다. 제발 아니길 바라며 서랍 속 작은 상자를 연 해랑은 좌절했다. 동그랗게 있어야 할 환약이 반쪽짜리로 남아있었다. 해랑은 도무지 믿기질 않아 두 눈을 껌뻑거렸다. 이제까지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어서 12년 전에 발현하며 크게 앓은 이후로는 해랑은 달오름을 겪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헌데 갑자기 달오름이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석현의 앞에서. 해랑은 크게 좌절하며 두 손으로 머릴 감쌌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그 때였다.
“도련님. 아침 식사를 준비해왔습니다.”
석현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해랑은 허둥대며 환약을 집어넣고 서랍을 닫았다.
“그, 그래. 들어와.”
석현이 갓 지은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훤칠해 보이는 석현에 해랑의 시선이 방황했다. 제 앞에 밥상을 놓아주는 석현의 손에 시선이 꽂히자 어제의 기억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아 해랑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어쩔 줄을 몰랐다. 혼란한 해랑의 앞에 놓여 진 것은 황태로 끓인 콩나물국과 밥이었다. 안 그래도 거북한 속이라 해랑은 우선 국물을 한 숟갈 떴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국물이 속으로 들어가자 속이 풀리는 듯했다. 해랑이 시원한 소릴 내자 석현이 가만히 미소지었다. 해랑은 그런 석현을 멍청히 보다가 하마터면 숟갈에 담긴 뜨거운 국물을 바지 위로 흘릴 뻔했다. 석현으로 인해 허둥대는 자신이 당황스러운 해랑이었다. 게다가 석현이 옆에서 밥을 먹는 저를 지켜보고 있는게 오늘따라 신경이 쓰였다. 이전이라면 아무 생각없이 식사를 마쳤을 해랑이었다. 해랑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안 드십니까? 속이 많이 안 좋으신지요?”
“괜찮아. 더 안 먹어도 되니 이제 치워도 돼.”
“예. 그럼 치우겠습니다.”
석현이 몸을 일으켜 밥상을 들었다. 해랑은 그걸 쳐다보지도 못하고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다가 작게 석현을 불렀다.
“저, 석현아.”
“예?”
석현이 나가려다 말고 몸을 돌려 해랑을 보았다. 해랑은 헤매이는 시선을 감추지도 못한 채로 석현에게 물었다.
“어제 혹시…… 내가 추태를 부렸거나 그랬다면, 미안.”
해랑이 제 손 끝을 만지작거리며 고갤 푹 숙인 채 말하자 석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런 일은 전혀 없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으응…….”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석현이 고갤 꾸벅이고 문을 나섰다. 해랑은 문이 끝까지 닫힌 것을 확인하고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놈의 술이 문제다. 괜히 석현과 마음을 풀어보겠다고 객기를 부린 것이 화근이 되어 온 정신을 풀어버렸으니. 게다가 난데없는 달오름까지. 해랑은 석현이 양인은 아닐거라 맘대로 추측했다. 만약 그가 양인이었다면 분명 사단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해랑은 섣불리 판단한 것이다. 석현의 단련된 정신력을 간과한 채, 해랑은 석현이 양인이 아니라 단정짓는 커다란 실수를 범하고야 말았다. 사실 석현이 양인이든, 평인이든, 음인이든 지금의 해랑에게 중요치 않았다. 해랑은 당장 석현을 볼 낯이 없었다. 석현이 자신을 어찌 생각할 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허나 그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우해랑. 정신차려.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야.”
해랑 자신이 지금 석현을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석현은 밥상을 들고 나와 문을 닫고 나서야 긴장으로 굳은 몸을 풀었다. 이젠 해랑만 보면 즉각적으로 반응해버리는 몸에 석현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까랑한 고 목소리만 들어도 심박수가 높아져 버리니 말이다. 게다가 어제 잡았던 손엔 아직도 해랑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석현은 잠시 밥상을 내려놓고 어제 해랑이 잡고 있었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살포시 쥐었다. 저도 모르게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에 석현은 얼른 입술을 말아 삼켰다. 그래. 이 정도면 되었다. 석현은 제 손에 해랑의 손길이 닿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제 주제에 맞는 삶이라고 여겼다.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가니 석현의 또래인 시종 오월이가 반갑게 석현을 맞이했다. 오월이는 혼자 있던게 심심했는지 밥상을 받기 전부터 별 시덥잖은 얘기들을 석현에게 쏟아냈다. 원체 수다스러운 아이인지라 석현은 묵묵히 들어줄 뿐이었다. 석현의 반응이 있든 말든 오월은 제가 오늘 아침 부엌에서 겪은 일들을 한바탕 쏟아내며 그릇들과 남은 음식들을 치웠다. 정리가 마무리될 때쯤 오월이 뭔가 생각난 듯 몸을 홱 일으키더니 대뜸 석현에게 물었다.
“아! 맞다! 오라버니. 또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석현이 영문 모르는 얼굴로 잠자코 오월을 쳐다보니 오월이 그릇에 남은 밥을 입 안에 넣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갑자기 업득 아저씨가 오라버니를 찾길래요.”
“그 사람이 왜?”
“모르겠어요. 좀 전에 와서는 오라버니를 찾기에 모른다고 했죠. 혹시 또 공연히 시비를 걸 속셈이지 않을까요?”
석현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업득을 흠씬 두들겨 패준 이후로 둘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냈다. 재밌는 것은 둘의 행동이 전과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꼬랑지를 내리고 깨갱하는 것은 되려 업득 쪽이었다. 석현의 눈치를 보며 설설 기던 업득이었기에 석현은 난데없이 저를 찾는 업득이 의아했다. 석현은 오월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주방을 나섰다. 그가 자신을 찾는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오늘 할 일이나 해야 겠단 심산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뒤에서 큰 소리로 석현을 불렀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이보게, 석현이!”
업득이 저 만치서 허겁지겁 달려왔다. 석현은 멀뚱히 서서 달려오는 그를 보았다. 업득은 열심히 달려와서는 석현의 앞에 멈춰 차오른 숨을 정리했다. 한참을 헥헥거리고 나서야 업득이 몸을 세웠다. 석현은 의구심을 품고 업득을 내려보았다. 그런 석현의 눈빛을 읽었는지 업득이 몸을 움추리고선 조심스레 얘기했다.
“잠시, 저 쪽으로 가세. 내 할 말이 있어.”
[작품후기]
와 벌써 10화네요 ㅎㅎ 몇 화까지 갈진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직 풀어갈 이야기가 많으니 쭉쭉 달려보겠습니다!
읽어주시고, 선작&추천 눌러주시고, 코멘트달아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
정말 많은 힘이 됩니다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