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업득을 따라 어느 구석진 곳으로 당도하자 마자 업득이 석현에게 냉큼 고갤 숙였다.
“지, 지난 번 일은 내 미안하게 되었네!”
업득의 갑작스런 행동에 석현이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내려보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사과를 하십니까.”
“그 날부터 하고 싶었는데 기회를 못 잡았다네. 사실, 해랑 도련님 앞에서 자네가 일을 덮는 걸 보고 내 아차 싶었어. 내 철없는 시샘으로 상처줘서 미안허이.”
석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굳이 업득과 따로 시간을 내어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마뜩치 않았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 일이라면 이제 되었습니다. 그 날 모두 잊었으니 염려치 마십시오.”
업득은 마치 부처님이라도 만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돌아서려는 석현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런 업득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완전히 몹쓸 인간은 아니구나 싶어서 석현은 마음을 놓았다. 연신 미안해하던 업득은 무언가 할 얘기가 있는 듯 다시 허릴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선 석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실은, 내 은밀히 할 얘기가 있어서 자네를 불렀네.”
“무엇입니까.”
“자네의 숙부에 관한 얘길세. 숙부에 관해서 잘 모르는 게 있는 듯 하여 말해주는 걸세. 아, 참고로 내가 하는 얘기들은 어따 소문내지 말게.”
석현은 업득의 말에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곤 귀를 기울였다. 지난 번, 업득이 제게 지나가듯 던진 얘기들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터였다.
“자네의 숙부가 이 집에 처음 오신게 재작년쯤이었지 아마. 그 뒤로 이 집을 한 달에 두 세 번은 들르곤 하셨지.”
“그리 자주 오셨습니까? 그 먼 해주 땅에 계신 분께서요?”
“그래. 혼자 오셨던 건 아니고 몇몇 정승 나으리들과 함께 오셨었다.”
“혹시 누구누구였습니까?”
“내 기억으론 도제조 어르신도 계셨고, 우의정 어르신도 계셨다.”
“우의정이라면, 그 때 그……?”
석현은 기방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기방에 출입할 때 마주쳤던 남자를. 그는 해랑에게 인사를 건넸고 해랑 역시 반갑게 인사를 나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며 해랑이 말했었다.
‘저 분이 바로 우상 대감이셔. 종종 아버지를 뵈러 오시기도 하니 기억하고 있으면 좋을거야.’
숙부가 왜 그리 높은 분들과 함께 어울렸던 것인지 석현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숙부가 해주로 부임하신 것도 부러 권력과 거리를 두기 위함이라고 아버지께 들었건만……. 그 때, 업득의 한 마디가 석현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재작년쯤부터 오셨으니 새로운 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지 1년정도 지난 뒤였을 게야.”
새 임금이 즉위 후 1년부터라. 그렇다면 모든 것이 아다리가 맞는다. 숙부가 편지 속에 왕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것이 그쯤이었으니. 헌데 그럼 숙부가 어울린 이들 모두가 역모를 꾀한 자들이란 말인가? 석현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숙부를 포함해 우 대감과 우의정, 도제조 등 모든 이들도 잡혀 들어가 극형에 처해지고도 남았을 터인데 어째서 제 숙부만, 제 가족들만 이 꼴이 된 것인가. 머리가 핑 돌았다. 석현이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업득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자네, 숙부의 시신은 거두었나?”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만, 혹시 어디에서 형이 이루어 졌는지 아십니까?”
“참형을 했다고 들었네만…… 헌데 그 형에 관련된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았었다네.”
“어떤 소문입니까?”
업득이 석현에게 손짓하여 귀를 가까이 대도록 하였다. 한 번 더 주변의 눈치를 살핀 업득은 비밀스럽게 말했다.
“참형을 한다고 해놓고는 부관참시를 했다지?”
“부관참시요……? 시체의 목을 베었단 말입니까?”
놀란 석현이 되묻자 업득이 제 입술 위로 검지 손가락을 놓으며 조용히 하라 일렀다.
“그래!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문이 그리 돌았었다네.”
의문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혼잡한 석현의 머릿속에서 유일하게 명확한 것은 제 아비와 숙부의 시신이라도 거두고 싶어 졌다는 것이다. 우 대감이라면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뤄 줬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석현은 업득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고 별채로 향했다. 기회가 생긴다면 우 대감을 만나 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업득은 멀어지는 석현의 뒷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이 정도 알려줬으면 됐겠지? 녀석이 우 대감께 이 일을 꼬치꼬치 캐물으면 우 대감은 쟬 싫어하게 될 거니 나한테 좋고, 쟤는 정보를 얻었으니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게 이런 거 아니 겠어?”
*
업득의 얘기를 들은 석현은 하루 종일 숙부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해랑이 공부를 하고 있는 내내 바깥에서 마당을 쓰는 둥 마는 둥 하며 업득의 얘기를 몇 번이고 되뇌였다. 숙부와 우 대감, 우의정, 그리고 부관참시까지. 어쩐지 자꾸만 싸한 기분이 들어 쉽사리 머릿속을 비워 내질 못 했다. 때마침 해랑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석현은 빗자루를 내려놓고 해랑에게로 향했다. 방 안으로 향하니 해랑은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오랜만에 방구석에 틀어 박혀 있자니 좀이 쑤신 모양이었다.
“나 진짜 공부하기 싫다, 석현아.”
“그래도 열심히 하셔야지요. 과거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같이 말하네.”
잔뜩 심통이 난 해랑에게 석현이 부드러이 말했다.
“도련님, 저는 시험을 보고 싶어도 보지 못 합니다.”
석현의 말에 해랑이 아차 싶었는지 석현을 올려다보았다. 씁쓸히 웃는 석현의 얼굴을 보자니 미안함에 해랑이 고갤 떨궜다.
“……미안.”
“아니요. 제게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자는 거지요. 도련님은 공부에 집중하시고, 저는 그런 도련님을 옆에서 잘 보필하겠습니다.”
석현의 말에 해랑의 심장이 세게 튀어 올랐다. 해랑이 귀 끝을 붉힌 채 눈꺼풀을 반쯤 내리 깔고 말했다.
“너랑 있으면 가끔씩 내가 너보다 훨씬 어린 애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해랑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는 해랑이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려보다 석현을 힐끔 보았다. 석현은 지그시 해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저 깊은 눈동자로 자신을 보는 석현에 해랑 역시 넋을 놓고 석현을 들여다보았다. 석현이 희미하게 미소짓자 그제야 해랑이 정신을 차리고 책을 펼치는 시늉을 하였다.
“어어, 어디까지 보았더라?”
“저, 도련님.”
“으응?”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석현에 해랑이 마구잡이로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해랑은 부디 제 심장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석현을 보았다. 석현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는 해랑에게 물어왔다.
“혹시 제 숙부님을 뵌 적이…… 있으십니까?”
“뭐?”
그건 너무나도 예상 외의 것이어서 해랑은 당황해 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석현에게 질문의 내용을 되물어보았다. 석현은 담담히 해랑에게 한 번 더 물어왔다.
“제 숙부님을 뵌 적이 있으시냐 여쭈었습니다."
[작품후기]
어제 못 올린 관계로 오늘 연달아 두편 올립니다 ㅎㅎ
항상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에너지 받아서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