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해랑은 갑자기 받은 질문에 당황했는지 잠시 멈추었다가 곧 고갤 끄덕였다. 석현의 숙부라면 세 번 뵈었던 기억이 있다. 일전에 처음 이 집에 오셨을 때 한 번, 넓은 집 구경이나 한 번 해보신다며 아버지와 걸으시던 중에 별채 앞에서 마주쳤던 적 한 번. 마지막으로 역모가 들통나기 일주일 전, 마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걸 아신 것처럼 홀로 별채까지 오시어 인사해주신 날에 한 번.
‘내 조카 녀석이 자네 같은 벗이 있으면 참 좋을텐데 말이지.’
해랑은 차마 석현에게 마지막 기억은 얘기해주질 못했다. 석현이 마음 아파할 것이 뻔했기에 해랑은 두 번 정도 뵈었다고 둘러대었다. 해랑의 대답을 들은 석현이 깊이 생각에 잠긴 듯 보이자 해랑은 조심스레 물었다.
“왜……?”
“아, 아뇨. 그저 궁금해서요. 예전에 숙부께서 이 곳에 오신 적이 있다는 걸 들은 것 같아서. 그럼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보시던 책, 마저 보십시오.”
석현이 가볍게 인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해랑은 그런 석현을 멍하니 보다가 파드득 정신을 차리고 석현을 급히 붙들었다.
“아, 저기 석현아.”
“예?”
“있지, 나 열심히 공부할 테니 대신 이 책 한 권 다 떼면 함께 놀러가자.”
“예, 그리 하시지요.”
석현은 못 이기는 척 해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석현이라고 해랑과 함께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기에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석현의 대답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해랑은 석현이 나간 뒤로 다시 책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엉덩이가 근질거렸지만 꾹 참고 훗날의 즐거움을 기약했다.
*
해랑의 별채에서 나온 석현은 곧장 우 대감이 있는 안채로 향했다. 마침 누가 오기라도 하는지 시종들과 우 대감 부부가 마당에 나와있었다. 지금 당장 우 대감에게 말을 걸기엔 적합치 못한 상황이었다. 석현은 말을 거는 대신 시종 무리 안에 슬그머니 끼어 섰다. 업득이 그런 석현을 보고 친한 척을 해오기에 대충 상대해주고 시선을 거두었다. 잠시간 대문을 바라보고 서 있던 중, 요란한 소리가 나며 대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이를 맞이하러 우 대감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석현은 허리를 숙인 와중에도 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문 틈 새로 방문객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란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난 그는, 다름 아닌 노의석이었다.
‘저 자가 우의정.......’
석현은 허릴 편 뒤에도 노의석과 우 대감을 눈으로 좇았다. 그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사랑방으로 자릴 옮겼다. 석현은 노의석의 얼굴을 충분히 익힌 뒤 걸음을 돌렸다. 숙부에 관련된 사람들은 우선 외워두기로 작정한 석현이었다. 나중에 정보를 더 얻을 때 용이 할 것 같아서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석현을 미심쩍게 바라보며 안으로 향하는 노의석이 있었다.
“차가 아주 훌륭합니다, 우 판서.”
“지난 번 우상 대감께서 내주신 차보다야 소박하지요.”
“허허, 우 판서의 겸손을 따라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노의석이 기분 좋게 차 한 모금을 넘겼다. 밖에선 처마 밑에 달린 풍경소리가 은은히 울려퍼졌다. 조용한 내부에선 찻잔이 내려지며 받침과 부딪혀 딸그락대는 소리를 냈다. 노의석은 웃음을 거두고는 우현영 쪽으로 몸을 숙여 은밀히 말했다.
“헌데…… 우 판서. 내 요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자네 집에 정 참의의 아들이 있다지요?”
“……예.”
우현영이 한참을 머뭇대다 겨우 답했다. 우현영의 대답에 노의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심기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몇 번 하던 노의석은 다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현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억지를 써서라도 필사적으로 데리고 온 석현이었으니. 최대한 조용히 데리고 왔으나 언젠가는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갈 것은 예상했었다. 우현영은 말없이 찻잔만 그러쥔 채 침묵을 유지했다.
“사실, 지난 번 대감의 둘째 아드님을 기방 앞에서 만났습니다.”
“예? 기방이요?”
처음 듣는 얘기에 우현영이 놀라 입을 열었다. 유흥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녀석이 갑자기 기방엘 출입했다니 놀라지 않을 아비는 없을 것이다. 우현영이 말문이 막힌 채 눈만 껌뻑이자 노의석이 말을 이어갔다.
“제 시종 하나와 함께 들어가더이다. 헌데 그 시종 녀석이 정기혁 그 자와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해서 말이지.”
“아…….”
“마침 오늘도 마당에 모인 시종 중에 그 아이가 있더군요. 그 애가 나를 빤히 보는 것이 꼭 정기혁이 나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영 별로더군.”
“죄송합니다. 제가 따로 불러 훈계를,”
“아니오. 훈계를 할 것이 아니지요.”
나긋나긋한 노의석의 목소리가 되려 우현영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예? 그럼 무엇을…….”
“허허, 참. 우 판서. 아직 뭘 잘 모르시나 봅니다.”
불안한 표정의 우현영을 본 노의석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저 아일 데리고 있으면 안 됩니다.”
“예? 하지만 저 아이는……”
“우 판서. 아직도 그리 모르시오? 작은 불씨 하나라도 살려 두면 그게 산 하나를 집어 삼킬 수도 있는 법이오.”
노의석의 말에 우현영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우상 대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오랜 벗의 마지막 말이 뼛속 깊이 새겨 들어온 이상, 석현을 그대로 내쫓을 수도 없는 법이었다.
‘그들을 너무 믿지 말게. 언젠간 화살이 자네에게 올 수도 있어.’
우현영은 애써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선 노의석에게 의견을 물었다.
“제가…… 어찌 해야 할까요?”
“뭐, 한 가지 좋은 수가 있긴 합니다만.”
노의석의 두 눈이 매섭게 빛이 났다. 우현영은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칼을 겨누는 권력싸움에서 살아 남으려면 노의석과 같은 눈을 지녀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우현영의 머릿속에 스쳤다. 어쩐지 친구가 그리워졌다.
*
석현은 해랑의 별채로 향하는 발걸음을 아예 끊었다. 벌써 열흘이 넘었다. 매일같이 해랑이 저를 찾는 줄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다. 해랑의 인생이 걸린 사항이니 제 사심 채우자고 해랑을 찾아가 훼방을 놓을 수는 없었다. 오월이나 업득이가 해랑 도련님이 찾으니 빨리 좀 별채에 가보라고 성화를 부려도 들은 척도 안 했다. 저것도 보통이 아니라고 업득이 혀를 차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은 오월이가 다급히 달려오더니 빨리 별채에 좀 가보라며 난리를 쳤다.
“오라버니! 빨리요, 빨리! 둘째 도련님이 엄청 아프세요!”
석현은 그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채로 달렸다. 혹시라도 해랑에게 또 달오름이 온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약을 꺼내기도 힘들 상태가 될텐데……. 단순한 고뿔이나 몸살이길 바라며 석현은 무작정 달려 별채 문을 열었다. 황급히 해랑의 방으로 달려 들어가니 해랑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석현이 놀라 해랑을 흔들었다. 그러자 이불 밖으로 해랑의 얼굴이 빼꼼 내밀어졌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석현아.”
“예, 도련님.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십니까?”
“여기가 아파.”
해랑이 제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열이라도 있는 걸까 석현이 손을 뻗어 해랑의 이마를 짚었다. 그에 해랑이 석현의 손을 붙들고선 아래로 내려 제 가슴 위에도 얹었다. 해랑의 행동에 당황한 석현이 움찔하자 해랑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여기도 아파.”
“도련님……?”
“너랑 못 놀고 공부만 해서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
“……! ……꾀병이셨군요.”
석현이 허탈한지 숨을 후, 하고 뱉었다. 해랑은 미안하면서도 재미있는지 꺄르르 웃어대며 몸을 일으켰다. 말짱한 얼굴이 보이자 석현은 그래도 다행이라 여겼다. 해랑이 진짜 아픈 것보다야 백 배 천 배는 낫다. 석현은 슬그머니 손을 빼내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나마 보았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헌데 해랑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야, 어디가?”
“괜찮으신 거 확인하였으니 이만 물러가겠,”
“야! 가긴 어딜가!”
벼락 같은 호통에 석현이 그 자리에서 굳은 채 해랑을 보았다. 씩씩대는 해랑은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해랑은 책상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기세좋게 석현의 눈 앞에 내 보였다. 지난 번, 외출을 위한 조건을 걸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나, 나 약조한대로 책 한 권 다 뗐단 말야!”
벙찐 표정의 석현이 한참동안 해랑을 보다 픽 웃었다. 어린 아이가 심통을 내듯 울그락 불그락 하는 해랑의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석현처럼 웃었을 것이다.
[작품후기]
해랑(는)은 꾀병스킬을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