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그리하여 실로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게 된 둘이었다. 해랑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방 뛰었다. 저와는 달리 평온히 걷는 석현에 괜히 심통이 나 공연히 옷자락을 잡아 당겨보기도 하고 길 가에 핀 꽃을 꺾어 석현의 얼굴 앞에 내어보기도 했다. 석현은 그런 해랑을 지그시 보며 웃기도 했고 때때로는 무심한 척하려 애를 쓰기도 했으나 귀 끝이 붉어진 건 숨길 도리가 없었다.
둘은 지난 번 함께 갔던 정자로 향하고 있었다. 해랑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기엔 그곳이 최적이었다. 먼 거리를 걸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둘이었지만 석현의 한 손엔 짐보따리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그건 해랑이 들고 나온 것이었다. 무엇인지는 석현도 알지 못했다. 해랑이 나중에 정자에 가서 열어봐야 한다며 보자기 속 내용물을 비밀로 감췄다. 자신이 들고 가겠다며 낑낑대는 해랑에 석현은 한사코 그를 말리고는 제 손에 보자기를 쥐었다. 그리도 무거웠던 짐을 솜털마냥 들고 걷는 석현을 잠자코 해랑이 보았다. 괜스레 멋쩍어진 해랑이 ‘나도 남자이거늘 어찌 이리 힘 차이가 나는 걸까?’하고 뒷머리를 긁적이기에 석현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걷던 둘은 잠시 얕은 언덕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해랑의 체력이 금방이라도 바닥 날 것 같아 석현이 제안한 것이었다. 해랑이야 당연 좋다고 달려가 그늘진 곳에서 다리를 뻗었다. 둘이 나란히 나무 아래에 앉자 선선한 바람이 어딘가로부터 불어왔다. 바람이 둘 사이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부드러이 감싸기도 하며 돌았다. 해랑은 간지러운 바람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바깥 공기에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이 얼마나 그리웠던 시간인가. 해랑은 천천히 눈을 떠 제 옆에 앉은 석현을 보았다. 석현 역시 기분이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해랑과 단 둘이 말없이 앉아만 있어도 행복함이 차올랐다. 그 동안의 온갖 복잡한 생각들은 떨쳐내고 오롯이 이 시간만을 느꼈다. 지그시 먼 곳을 바라보는 석현의 옆모습을 보던 해랑이 쑥쓰러운 모양으로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해랑의 갑작스런 말에 석현이 민망한듯 고개만 꾸벅 숙였다. 석현의 반응에 재밌다는 듯 소리내어 웃은 해랑은 고개를 앞으로 돌려 말을 이어갔다.
“지난 번에, 우리 술 마신 날에 말야. 갑자기 달오름이 왔었어. 그 날 네가 약을 챙겨줬지?”
“예.”
“너 아니었음 정말 큰일날 뻔했어. 아, 하필 어디서 갑자기 박하향이 나기에 기분이 좋아서 맡았더니 그 뒤로 훅 올라오지 않겠어? 그나마 네가 양인이 아니라 다행이었어.”
그렇게 말하며 해맑게 웃는 해랑의 앞에서 석현은 차마 자신이 양인이라고는 말 할 수 없었다. 그저 작게 ‘예’하고 말았다. 박하향의 진원지는 저도 알 수는 없었다. 자신은 전혀 맡지 못 했기 때문에 그게 자신의 체향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석현은 주먹만 꽉 쥔 채 어색함을 애써 숨기며 해랑의 말들에 대충 대꾸했다. 해랑이 기분좋게 웃다가 숨을 풀어내며 약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과거 말이야. 반드시 급제를 하고 싶으면서도 하고 싶지가 않아.”
“어째서입니까?”
“나도 형님처럼 나가서 살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과거 급제를 해야 하지. 그런데 급제를 하면 난 이제 봉급을 받고 사는 나라의 일꾼이 되는 거야. 그럼 난 이런 시간은 맘껏 누리지 못하게 되겠지.”
석현은 왠지 쓰린 마음이 들었다. 현실을 생각하니 그랬다. 해랑의 말이 맞았다. 해랑이 과거에 급제하고 나면 그는 일을 하러 나갈 것이고 그럼 둘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확연히 줄 것이다. 하지만 해랑은 양반이고 자신은 노비일 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질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순 없는 거니까요.”
“역시 그렇지? 사실 예전엔 어느 한 쪽을 포기한다면 급제를 포기하려는 마음이 컸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제법 단호해진 눈빛과 말투에 석현이 물었다.
“허면 지금은 급제하시어 이 집을 나가고 싶으십니까?”
“응. 나갈거야.”
석현은 해랑의 말에 씁쓸히 미소지었다. 당연한 절차임을 알면서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석현이 힘없이 고갤 끄덕이는데 대뜸 해랑이 손을 뻗어 석현의 어깨를 감쌌다. 석현이 고갤 들어 보니 눈 앞엔 해사하게 웃고 있는 해랑의 얼굴이 있었다.
“꼭 나갈거야. 너랑 같이.”
“아……!”
“우리 꼭 함께 나가서 좀 더 자유롭게 살자. 알았지?”
“……예. 좋습니다.”
이 어여쁜 이를 어쩌면 좋을까. 석현은 당장 해랑을 품에 안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열이 오르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때, 그런 석현을 식혀주려는 듯 저 멀리서 부터 풀을 쓸며 오는 세찬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풀을 흔들고 나서는 해랑의 갓이 탐이 난 모양이었다. 대충 묶어두었던 해랑의 갓끈이 풀어지며 갓이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앗!”
당황한 해랑이 허공에 두 손을 허우적거리던 그 순간, 석현의 손이 해랑보다 먼저 갓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석현이 길게 팔을 뻗어 해랑의 갓을 잡은 것이었다. 해랑은 석현의 손에 잡힌 갓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렸다가 흠칫 놀랐다. 석현이 팔을 뻗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인 탓에 둘의 거리가 몹시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코 앞에 서로의 얼굴이 있었다. 조금만 더 몸을 기울였다간 금방 입술이 맞닿을 수 있을 그런 거리에.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석현 역시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다 바닥을 지탱한 제 팔에 힘을 줬다. 둘은 잠시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두 눈만 꿈뻑였다.
“아, 저, 고, 고마워!”
먼저 움직인 건 해랑 쪽이었다. 해랑은 머리 위로 어정쩡히 올렸던 두 손을 풀고 석현이 잡아 둔 갓을 다시 잡아 고쳐 썼다. 그에 석현 역시 몸이 기우뚱거리지 않게 조심스레 움직여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둘 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 지 생각도 나질 않아서 어색한 침묵만 흘려보냈다. 숨은 막히는데 어찌 해결해야 할 지 몰라 애꿎은 옷자락만 만지작대던 해랑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쉬었으니까 이제 그만 가자!”
어색하게 외친 해랑이 먼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석현은 얼른 자릴 털고 일어나 해랑의 뒤를 쫓았다. 어쩐지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큰일이었다.
*
한참을 걸어 목적지까지 3분의 2정도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지면을 울리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한 두명의 소리가 아니기에 둘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웬만하면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목이라 해랑은 이상히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수의 군사들이 저 만치서 몰려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젊은 장수 하나가 말을 타고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있었다. 완전 무장한 것으로 보아선 단순한 훈련은 아닌 듯 보이기에 해랑은 석현을 붙잡아 끌고 그들과 함께 걸음을 맞추며 병사 한 명에게 물었다.
“저 혹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해주 땅으로 갑니다.”
“해주요? 해주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오랑캐가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요. 거 더러운 오랑캐놈들 쳐부수러 가는 중입니다.”
해랑은 그 말을 듣고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이미 생각에 잠긴 채였다. 해주, 해주라. 하필 다른 곳도 아니고 해주라니. 마음이 여간 심란한 것이 아니었다. 숙부가 그리 된 걸로도 모자라 오랑캐까지 침입하였으니 해주의 백성들이 안타깝기까지 했다. 석현이 우두커니 서 있자 해랑이 다가와 석현의 왼팔을 잡아주었다.
“너무 염려치 말아. 분명 예전처럼 금방 물리 칠 수 있을 거야. 네 숙부님이 계셨을 때처럼.”
석현의 숙부인 정기혁은 매우 청렴한데다 똑똑하고 병법에 능한 자였다. 그가 해주의 도호부사로 있을 때, 오랑캐가 국경을 넘는 법이 없었다. 혹 넘어올 지 언정 빠르게 소탕하여 굳이 도성의 관군들이 몰려갈 일도 없었다. 때문에 해주 땅에 살던 이들은 정기혁을 매우 좋아했으며 정기혁 또한 해주 도민들을 사랑으로 섬겼다. 정기혁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고 임금 또한 그런 정기혁을 매우 아꼈었다. 헌데 그런 해주 땅에 오랑캐가 침입한 것도 모자라 수도의 군사들까지 동원되어 간다는 것은 사태가 그닥 좋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숙부의 공들을 들어왔던 석현의 입장에선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부디 별 탈 없길 바랄 뿐입니다.”
석현의 말에 해랑이 그를 토닥였다. 군사들은 흙먼지를 잔뜩 일으키고 저 멀리 사라져갔다. 둘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 갈래 길 앞에선 두 사람은 군사들이 가지 않은 왼쪽길로 들어섰다.
[작품후기]
열일하는 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