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오랜만에 도착한 정자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아슬아슬했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유난히 안개가 짙은 탓에 강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해랑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석현의 손에 있던 보자기까지 빼앗아 들고는 정자로 마구 뛰었다. 해랑이 혹여 넘어지기라도 할까 불안한 마음에 석현이 함께 달렸다. 해랑이 신이 나서 정자 안으로 들어가기 전, 석현이 먼저 정자의 내부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잘 버티고 있기에 석현과 해랑은 정자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해랑은 자리에 앉자 마자 손에 쥐던 보자기를 풀어 헤쳤다. 호기심 어린 석현의 눈빛에 해랑이 부러 천천히 속에 든 것을 꺼냈다. 천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붓과 먹, 그리고 화첩이었다.
“도련님, 이건…….”
“내가 말했지? 한 번 더 널 그리고 싶다고. 오늘은 꼭 다시 너를 그릴거야.”
아이처럼 신이 난 해랑을 가만히 보던 석현이 당해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어보였다.
“예. 그리 하십시오.”
사실 석현은 지난 번 해랑이 그림을 그려준 날, 해오름이 온 것이 생각 나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며 해오름은 그리 자주 오는 것도 아니었고 그 날은 정말 우연의 일치로 온 것일 거라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했다. 석현은 마음을 편히 먹고 해랑의 맞은 편에 앉았다. 해랑은 석현이 동의하자 기뻐하며 일어나선 강가로 달려가 물을 떠왔다. 먹을 갈고 붓을 들고선 엎드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해랑은 오랜만에 다시 훑게 된 석현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어찌 저리 잘생겼을까…….’
건강해보이는 갈색빛 피부에 매끈한 콧대와 날렵하면서 반짝이는 두 눈, 적당한 두께의 입술과 잘 정돈된 얼굴형이 어우러진 석현의 얼굴은 해랑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엔 아무 생각없이 그렸던 해랑이었지만 오늘은 몇 번이고 넋을 놓고 보기 일쑤였다. 해랑은 그림을 그리다 말고 넋을 놓다가도 석현의 검은 두 눈동자와 이따금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정신없이 화첩을 들여다봐야 했다. 땀이 삐질삐질 나고 손이 잘게 떨려 오기까지 했다.
‘큰일이네. 전혀 그리질 못하겠어.’
해랑은 입술을 굳게 닫고선 어떻게든 석현을 그려보려고 애를 썼다. 헌데 애를 쓰면 쓸수록 자꾸 열이 오르기만 하고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석현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보는데 정작 자신은 아무 것도 그려내지 못하는 것이 창피했다. 해랑이 제대로 그림을 그리질 못하는 것을 알아챈 석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잠시 쉬었다가 할까요?”
“아, 아니! 자세만 좀 바꿔줄래?”
“예, 알겠습니다. 어찌 바꿀까요?”
“어…… 그냥 오른쪽 무릎만 세워서 앉아줘.”
해랑의 요청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던 석현이 살짝 몸을 숙여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석현이 몸을 숙이는 순간, 입고 있던 헐렁한 저고리가 아래로 쏠리며 가슴팍이 훤히 보였다. 석현의 탄탄한 가슴팍에 눈에 담기자 해랑은 완전히 몸이 굳었다. 시선을 둘 곳을 찾느라고 난리를 치면서도 자꾸 석현의 가슴으로 눈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열이 머리 끝까지 차올라 선선했던 공기마저 덥게 느껴졌다.
“오늘 참 덥, 덥다.”
“더우십니까? 부채라도 들고 올 걸 그랬습니다.”
석현의 말에 해랑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화첩에 코를 박은 채 뭐라도 그리기 시작했다. 제가 그리는 것이 대체 뭔지도 모르고서 마구잡이로 그리기 시작했다. 석현은 불안해 보이는 해랑이 걱정이 되었다. 식은 땀을 뻘뻘 흘리는 해랑을 보고있자니 더는 안 될 것 같아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 해랑에게 다가갔다. 해랑은 석현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되는 대로 붓을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해랑의 앞에 석현이 다다르고 나서야 해랑은 화들짝 놀라 붓을 떨구었다. 붓이 종이 위로 떨어져 먹이 이 곳 저 곳으로 튀어 정체모를 그림 위를 덮었다. 하지만 그림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눈 앞의 석현에만 정신이 쏠려 먹이 종이 위에 번지는 것도 모르는 해랑이었다. 석현은 화첩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도 잠시, 달큰한 향이 제 코를 찔러오는 걸 느꼈다. 해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이 차오르는지 가슴을 들썩이고 있었다. 불안감이 석현을 엄습해왔다.
“도련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해랑은 초조해보였다. 제 자신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르고 가쁜 숨만 내쉬고 있었다.
“석현아, 나, 나 어떡하지? 몸이 이상해. 나 약 안 가져왔는데, 만약, 달오름이면…….”
석현은 우선 해랑을 달래는 게 급선무였다. 해랑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니 아직 완벽히 열이 오른 것이 아니었다. 최대한 진정을 시켜 열을 가라앉혀야 했다. 해랑의 머리 위에 놓인 갓을 벗겨낸 뒤 해랑의 도포를 풀러 홑겹만 두고자 했다. 석현의 손이 갓을 벗긴 뒤 도포 자락 위로 옮겨지는 순간 해랑이 석현의 손을 잡았다. 잡고 있던 옷고름에서 해랑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니 간절한 눈빛의 해랑이 석현을 보고 있었다.
“아, 안 돼. 풀지 마.”
“열을 식히셔야 합니다.”
“싫어. 나 그냥 입고 있을래. 응?”
“그렇지만…….”
해랑이 필사적인 데엔 이유가 있었다. 석현의 가슴팍을 본 뒤로 발기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신체의 변화에 당황한 해랑은 어떻게든 석현을 막아야만 했다. 제 아랫도리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자꾸 몸부림칠수록 몸이 더 달아올랐다. 이제는 점차 제어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석현 역시 자꾸 코 끝을 간지럽히는 해랑의 단내에 수를 써야만 했다. 방법은 딱 두가지였다. 해랑을 잠재우던가 아니면 아예 해랑과 거리를 두던가. 해랑이 지금처럼 거부하는 이상은 어쩔 수 없이 후자를 택해야만 하는 석현이었다. 석현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자꾸만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빨리 멀어져야만 했다. 석현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해랑이 당황하여 석현을 붙들었다.
“어, 어디가?”
“물이라도 떠오겠습니다. 열을 식히셔야 하니.”
“가지마, 석현아. 내 옆에 있어.”
애원하는 해랑에게서 갑자기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체향이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이었다. 석현은 순간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무릎이 멋대로 구부러져 다시 바닥에 닿았다. 동시에 몸 속의 무언가가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때였다.
“아! 그 때 그 박하향……!”
석현은 놀라 해랑을 보았다. 해랑은 토끼눈을 하고서 석현을 보더니 갑자기 허억하는 소릴 내며 앞으로 다시 고꾸라졌다. 해랑의 상태가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젠 몸이 바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고통스러운지 몸을 웅크리다가도 신음을 내며 들썩거렸다.
“박하향이 어째서, 흐으, 너한테……?”
눈물 고인 눈으로 해랑이 석현을 보며 물었다. 석현은 그제야 해랑이 맡았던 박하향이 제 체향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석현은 체향을 갈무리하는 법을 아직 몰랐다. 해랑의 질문에 당황한 석현이 아무 말도 못하고 되려 박하향을 더 풀어버리자 해랑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갔다.
“너, 너 설마 양인이야……?”
“…….”
“아아, 석현아, 이럴 수가……!”
해랑은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달오름 시기에 양인과 음인이 한 공간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석현을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헌데 자꾸만 붙들고 싶어졌다. 본능적인 힘이 석현에게로 움직이게끔 만들었다. 둘의 향이 정자 안에서 뒤섞여 갔고 석현 역시 더 이상 몸을 가누질 못 했다. 자꾸 꿈틀거리는 욕망이 석현을 괴롭게 만들었다. 이성의 끈이 팽팽히 당겨져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했다. 이대로 가다 간 큰일이 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눈 앞의 해랑이 제게 손을 뻗어왔다. 저 손이 닿으면 더는 못 버틸 것을 석현은 알았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손이 가까워질수록 숨이 가빠져갔다. 구부러진 등이 점점 더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해랑의 손이 석현의 손등 위에 닿는 순간 한계치에 다다른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순식간이었다. 석현의 커다란 손이 해랑의 두 뺨을 감싸 쥐었고 해랑의 두 팔이 석현의 등을 쓸며 안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급히 겹쳐진 입술이 서로를 탐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애정 어린 입맞춤과는 거리가 먼, 욕망에 점철된 행위였다. 며칠간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들처럼 서로에게서 갈증을 해소하려는 듯했다. 입이 열리고 붉은 살덩이가 얽혔다. 그 사이에 석현과 해랑의 손은 거추장스러운 천들을 벗어내고 있었다. 해랑의 도포는 기어이 석현의 손에 의해 벗겨졌다. 나머지 옷도 풀어내자 해랑의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뒤이어 석현의 상의가 벗겨지고 해랑을 흥분케 했던 상체가 드러났다. 둘은 서로의 상체를 보며 한동안 더듬고 쓸어보다 다시 혀를 섞었다. 해랑의 혀를 쪽 빨아들이다가 부드럽게 감아 당기기도 하며 해랑의 입 안 구석 구석을 유영하는 석현에 해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뜨거운 숨과 질척한 타액이 한참을 뒤섞이다 제 옷자락을 꽉 붙드는 해랑을 느낀 석현이 먼저 입술을 떼었다. 아쉬운 표정의 해랑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석현을 보았다.
“나 좀, 나 좀 어떻게 해줘, 석현아.”
석현은 해랑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 다시 거칠게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둘은 생각했다. 자신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