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그림자
석현이 안으로 들어서니 자리에 앉아있던 우 대감이 반기며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석현은 대감의 맞은 편에 자리했다. 우 대감은 여유롭게 차를 한 잔 권하며 석현에게 물었다. 이 곳의 생활이 어떤 지, 몸은 좀 괜찮은 지 등의 시덥잖은 얘기들이었다. 석현에겐 그런 얘기를 주고받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석현의 머릿속엔 온통 제 아비와 숙부에 관한 것들만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석현은 대충 대감의 질문을 받아 넘기다 약간의 틈이 생겼을 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헌데 어르신.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이냐?”
“제 아버님의 시신은 어디에 수습되었습니까?”
석현의 질문에 우 대감의 표정이 굳어졌다. 차를 한 모금 들이 킨 우 대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양지 바른 곳에 묻지는 못했다. 궁 서쪽의 금악산 아래쪽에 묻어두었지.”
석현에게 면목이 없는듯 우 대감이 고갤 떨구었다. 그에 석현 역시 차디찬 곳에 묻혔을 아비를 떠올리며 고갤 숙였다가 숙부를 떠올리며 또다시 질문했다.
“저, 그럼…… 혹시 제 숙부는 어디에 묻혀 계십니까?”
숙부의 시신 행방을 묻는 질문에 우 대감은 덤덤히 말했다.
“뭐…… 너도 알다시피 대역죄인은 저잣거리에 한 가운데에 묻혀 모든 이들이 밟고 지나가게끔 한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 곳이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아마 궁의 북쪽 길 일게다.”
“…그렇군요.”
석현은 궁 북쪽의 길을 떠올려보았다. 그 쪽엔 저잣거리가 하나 있었으나 워낙 터가 세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죄를 지어 길에 묻히는 이들은 죄다 북쪽 길에 묻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석현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그나저나 석현아.”
“예, 나으리.”
“혹시 이걸 보았느냐?”
우 대감은 종이 한 장을 석현에게 내밀었다. 종이엔 아까 석현이 저잣거리에서 보았던 벽보의 내용이 써 있었다.
“아, 좀 전에 장에 갔다가 보았습니다.”
“그래? 마침 잘 되었구나. 너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말이다.”
기회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벽보였기에 석현이 고갤 갸웃거렸다. 석현의 반응을 예상이나 한 것처럼 우 대감이 종이를 접어 책상 한쪽에 놓았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면 관직을 받을 수 있지. 그게 양반이든 노비이든 상관없이 말이야.”
“아……!”
석현은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무예 실력을 떠올렸다. 무과에 급제하여 숙부와 아버지처럼 훌륭한 무관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석현에겐 지키고 싶은,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이 단 한 명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석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풀었다. 금세 속내를 들킬 수는 없다.
“만약 석현이 네가 진정으로 생각이 있다면… 조금 위험하지만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예, 나으리.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만…… 현재로써는 둘째 도련님도 살펴야 하고…”
“어차피 그 애야 곧 과거 시험을 치르러 갈 테니 너무 걱정말거라.”
“…예.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석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우현영은 석현이 나가는걸 살피다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구겼다. 복잡한 마음을 토로할 곳이 없어 답답했다. 이럴 때 수환이라면 어찌했을까. 바보같은 생각에 우현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밖으로 나온 석현은 어쩐지 실낱 같은 희망이 제게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쉬이 나지 않는다. 때문에 이번 전쟁이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 아니면 도라는 건 확실했다. 전쟁에 나가 죽거나 큰 부상을 입을 확률이 더 높으니까. 또 노비들은 전쟁터에서 단순한 인간 방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자신이 공을 세울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단언컨대 지금의 생활보다야 전쟁에 나가 죽든 살든 뭐라도 해보는 것이 나았다. 석현의 입장에선 손해볼 것이 없다고 여겼다.
*
며칠 뒤, 오랜만에 해랑이 우 대감을 찾았다. 맑게 웃으며 자신에게 인사하는 둘째 아들을 가만히 보던 우현영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얼굴이 좀 수척해진 듯도 하고 이전과 달리 해랑의 분위기가 성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제사 어른이 되어가나 싶어 흐뭇하게 보는 제 아비에 해랑이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다. 공부는 잘 되어가느냐?”
“예. 뭐 그럭저럭… 하고 있습니다.”
“그래. 오늘은 어인 일로 온게냐?”
우 대감의 물음에 해랑이 슬슬 눈치를 보았다. 예전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그냥 왔다 거나 뭔가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을 해랑이었다. 헌데 오늘따라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아들에 우 대감은 어쩐지 초조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우현영이 눈썹을 한 번 치켜 올리며 아들을 재촉했다. 그에 한참을 뜸들이던 해랑이 입을 뗐다.
“저… 아버지.”
“응?”
“약 말입니다. 약을 좀 더 세게 지어 주실 순 없습니까?”
해랑의 갑작스런 요청에 우 대감이 의아한듯 해랑을 보았다. 그동안 잘 먹고 있던 약을 갑자기 더 강하게 지어 달라니. 지금의 약도 몸에 그닥 좋지 않기에 더 세게 지으면 분명 해랑의 몸에 해를 끼칠 것이었다.
“약을……? 갑자기 왜?”
해랑은 우 대감의 질문에 생각해 둔 답변을 빠르게 꺼냈다. 제발 자신의 대답이 아버지께 먹히길 바라면서.
“호, 혹시 과거 시험 보러 가서 약효가 떨어지면 큰일이니까요!”
“그래… 그렇긴 하지. 하지만 약이 세질수록 몸에 큰 부담이 가지 않겠니?”
다행히 잘 넘어가자 해랑은 우 대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아버지께 거절당할까 불안하던 마음을 빠르게 갈무리하고 차분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뿐만 아니라 혹시 시험장에 있을 다른 양인들까지 피해를 보면 안 되니까…….”
“그렇구나. 알았다. 내 약방에 말해두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 대감의 허락에 해랑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활짝 피었다. 해랑은 아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 나려다 무언가 생각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
“혹시 석현이의 숙부님과는 어찌 가까워 지신 겁니까?”
망설임없이 묻는 해랑과 달리 우 대감의 말문은 턱 막혔다. 제 아들이 이런 질문을 해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아무래도 석현과 붙여 놓아서 생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 대감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뭐… 그저 나라 얘기, 정사 얘기 나누다 보니 친해진 거지. 나랏일 하는 사람들끼리 다 그런 것 아니겠느냐.”
“그치만 어찌 저 멀리 해주에 계시던 분과 그리 친해지신 겁니까?”
“석현이의 아비인 내 친구 수환이의 동생이기도 하고, 뜻이 맞았으니 친해진게지. 마침 그 이가 도성으로 가끔 오기도 했고.”
해랑은 우 대감의 대답에 별다른 반응 없이 무덤덤히 고갤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저 생각나 여쭸습니다.”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것 같은 해랑에 우 대감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살짝 굳히며 해랑에게 말했다.
“해랑아.”
“예?”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석현이에게 너무 정 많이 주지 말거라.”
우 대감의 말에 해랑이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지난 일들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 아비가 하는 말에 의문을 품었다. 왜 자꾸만 자신과 석현이 가까워지는 것을 막아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괜한 억하심정도 들었다. 아버지도 결국 사람인지라 석현과 동무처럼 지내라며 들여 놓고 선 결국 노비이기에 자신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도록 하는 건가 싶었다. 성질이 났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냐니? 그야…….”
“석현이는 아버지께서 신경쓰시니 저는 그럴 필요 없다는 거지요? 그치만 아버지. 석현이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저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입니다. 어찌 제가 정을 주지 않고서 그 앨 데리고 있겠습니까?”
“……해랑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해랑이 부모에게 이토록 사납게 말을 하는 것이. 우 대감이 당황하여 해랑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해랑이 자릴 박차고 일어섰다.
“석현이한테 마음을 주고 말고는 제 마음입니다. 더는 말씀하셔도 듣지 않겠습니다. 그럼…….”
해랑이 쌩하고 방을 나갔다. 우 대감은 허탈히 문을 바라보다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영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이.
*
해랑은 방으로 돌아와 반쪽뿐인 자신의 약을 만지작거렸다. 현재의 약을 먹을 때에도 이따금 두통이나 하복부의 고통이 밀려오곤 했다. 다행히 약을 먹는 주기가 길어져 증상이 예전처럼 잦진 않았지만. 해랑은 지금보다 센 약이 꼭 필요했다. 우 대감에게 말했던 이유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석현아……!’
해랑은 약을 꽉 쥐며 석현을 떠올렸다. 석현과 함께 있기 위해선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약효가 강한 약이 꼭 필요했다. 비록 그게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히더라도.
[작품후기]
여러분 안녕하세요 너무 늦게 들고와서 죄송합니다 ㅠㅠ...
갑자기 폭풍 현생 + 건강 악화로 아무것도 하지를 못했습니다 ㅠ
연재 체납자로 있자니 마음이 무거워서 원 ...
평일에 비축좀 많이 해야할 것 같네요 흑흑
다시 한 번 죄송스러운 마음 전하며
여러분은 감기 조심하셔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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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달아주시는 분들 넘 감사드립니다!
힘이 됩니다 정말루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