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6/64)

숨겨진 그림자

유난히 바쁜 아침이었다. 석현은 정신없이 사람들의 채비를 도왔다. 오늘은 우 대감 부부가 지방에 내려간다고 했다. 한 일주일 간 집을 비운다는 얘기를 오월에게 들었다. 듣기로는 해랑의 모친인 김씨 부인의 아버지가 위중하여 함께 방문한다고 했다. 두 사람이 이 집을 비우면 동시에 집 안에서 머무르는 시종들 역시 우르르 떠나기 마련이다. 석현에겐 이 일주일이 기회였다.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때마침 부부가 밖으로 나왔고 마당 앞은 함께 길을 나설 시종들과 짐을 나르는 일꾼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저 구석에서 해랑이 뛰어오고 있었다. 석현이 먼저 해랑을 발견했다. 혹여 뛰다 넘어지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며 조용히 해랑을 눈으로 좇았다.

“아버지, 어머니!”

해랑이 큰 소리로 부르자 우 대감과 김씨 부인이 몸을 돌려 해랑을 보았다. 뭐 그리 급하다고 뛰느냐는 핀잔에도 헤헤 웃으며 부부에게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건네는 해랑은 여전히 고왔다. 석현은 잠시 넋을 빼고 해랑을 보았다. 어찌나 오랜만인지 새삼 해랑에게 다시 반하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잠시 해랑이 시선을 느끼고 석현의 쪽으로 고갤 돌리자 석현은 잽싸게 정신을 차렸다. 밝던 해랑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석현은 더 이상 해랑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일부러 사람들 속에서 빠져나왔다. 굳게 먹은 마음을 이리도 쉽게 무너뜨릴 순 없었다.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가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옷자락을 붙들었다. 뒤돌지 않아도 뻔했다.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석현아……!”

역시나 해랑이었다. 다급히 잡는 손길에 옷이 당겨져 석현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해랑이 또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골랐다. 석현은 곤란한 얼굴로 해랑에게 물었다.

“인사는 제대로 하고 오신 겁니까?”

그에 해랑이 고갤 연신 끄덕이더니 웃었다.

“응! 당연하지.”

“…여전하시네요.”

해랑은 모를 것이다. 석현이 오랜만에 제 앞에서 빛을 내는 얼굴에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데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는 걸. 하지만 석현 역시도 몰랐다. 해랑이 당장이라도 눈 앞의 단단한 가슴팍에 뛰어들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다는 것을.

“저, 석현아.”

“네, 도련님.”

“나 이제 일주일 뒤면 궁으로 떠나. 그 전엔… 네가 마음 정리가 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뭐라고 저리도 간절히 날 보는 걸 까. 석현은 쓰게 웃으며 해랑을 보았다. 해랑이 쥔 옷자락이 더 진하게 주름 잡혀 갔다. 하지만 주름이 잡혀 갈수록 석현의 마음은 더욱 굳어질 뿐이었다.

“그래야… 다시 너와 마주 볼 수 있을 테니까.”

석현은 옷자락을 잡은 손을 살포시 감싸 쥐었다. 그에 제 옷을 잡은 해랑의 손에 힘이 풀리자 석현은 해랑의 손을 놓았다. 석현의 행동에 해랑이 조금 놀란 듯했다. 석현은 최대한 냉정하게 해랑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정리되기엔 아직 먼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떠나는 석현에 해랑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싸늘히 식은 말투에다 제 손을 거두는 손길까지……. 해랑에게 처음 보인 그 모습들 모두가 충격이었다. 다정할 줄로만 알았던 석현이었는데. 해랑은 어안이 벙벙하여 석현이 사라진 땅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석현은 해랑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해랑을 뿌리치던 손이, 해랑에게 차갑게 내뱉던 목소리가 떨리고 있던 것을 해랑에게 들켰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자신 때문에 놀랐을 해랑의 두 눈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서 몸을 숨겼다. 석현도 그런 식으로 해랑을 대하는 것이 괴로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해랑이 일 주일 뒤 과거 시험을 보러 떠나고 나면 자신도 바로 전쟁터로 나갈 작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신분의 차이로 꿈도 꾸지 않았지만 이제 사지로 뛰어들기까지 할 석현이었다. 해랑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해랑이 비슷한 양반댁 자제와 혼례도 올리고 평온히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둘이 서로 연심을 품어 봤자 앞에 놓인 것은 끝도 없이 바닥으로 끌려갈 늪일 뿐이었다. 그렇담 적어도 한 명은 행복해야 하며 그건 당연히 해랑이어야 했다.

‘살아 남는다면…… 그 땐 꼭 그 손 놓지 않겠습니다.’

*

밤이 어둑해지자 훤한 달이 하늘을 비추었다. 모두가 잠이 든 시간, 들릴 듯 말 듯한 발자국 소리만이 깨어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을 뚫고서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이는 석현이었다. 석현은 안채에 다다르자 신고 있던 신을 벗어 마루 밑에 집어넣었다. 맨 발로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안으로 발을 들여 마침내 다다른 곳은 우현영의 방이었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간 석현은 빠르게 우 대감의 서랍들을 열어보았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 작정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랍들을 모두 열어도 먹이나 종이, 붓 따위가 다였다. 어둠 속에서 석현은 마음이 초조해져갔다.

‘중요한 것은 분명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겼겠지.’

석현은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얼른 움직여 병풍 쪽으로 향했다. 병풍을 밀어내고 벽 뒤를 더듬어가자 손 끝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벽이었다. 석현은 어긋난 부분을 손으로 따라 그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네모난 모양의 형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석현이 테두리 부분을 살살 더듬어보자 아주 가느다란 실 하나가 있었다. 석현이 두 손가락을 모아 잡아당기자 네모난 부분의 벽이 밑으로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엔 궤 하나가 놓여있었다. 석현은 손을 뻗어 그 궤를 꺼내었다. 궤는 잠겨 있었다. 열쇠는 궤와 함께 놓여 있지 않았다. 석현은 다시 모든 서랍을 다 뒤지기 시작했다. 오싹한 등골로 식은 땀이 흘렀다. 이 궤만큼은 꼭 열어봐야만 했다. 하지만 서랍 안에는 아무리 찾아도 열쇠는 커녕 쇳덩어리 하나 보이질 않았다. 이대로 궤를 들고 나가야 하나 싶던 찰나,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보초를 서는 시종의 발소리임에 틀림없었다. 보초가 점점 더 가까워져 오던 그 때, 하필 손이 미끄러져 서랍 문이 세게 닫혔다. 곧이어 발소리가 우뚝 멈췄다. 석현의 관자놀이에 땀줄기가 흘렀다. 멈췄던 발소리는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복도에 울렸고 곧이어 우 대감의 방 미닫이 문이 확 열렸다.

“누구슈?!”

문을 열고 방 안을 둘러보는 보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방은 멀끔히 그대로였다. 마음이 놓였는지 휴, 하고 한숨을 쉰 보초는 다시 문을 닫고 이동했다. 석현도 작게 숨을 내쉬고는 병풍 뒤로 숨겼던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아까 보다 한층 여유로운 얼굴로 궤를 집어 들었다. 놀랍게도 석현의 손엔 궤 뿐만 아니라 열쇠도 함께였다. 보초가 들어온 사이, 석현은 횃불로 밝아진 틈을 타 방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 병풍 너머로 비치는 서랍 뒷편에 비밀스레 붙어있는 조그마한 함을 발견했다. 석현은 궤의 구멍에 작은 열쇠를 맞춰 넣었다. 딸각이는 소리와 함께 궤가 틈을 보였다. 빠르게 궤를 열자 그 안엔 몇 장의 서신, 그리고 깨어진 작은 장식품 하나가 있었다. 석현은 그것을 모두 챙긴 뒤 궤와 열쇠를 원위치 시키고 방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보초도, 그 누구도 나와 있지 않았다. 석현은 빠르게 제 방으로 돌아가 초를 켜고 서신을 먼저 펼쳐보았다.

“익숙한 서체……. 아, 이건…!”

석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서신에 적힌 글씨는 분명 숙부의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이따금 숙부의 서신을 보여주신 적이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석현은 초를 가까이 대고 좀 더 상세히 내용을 살폈다.

“왕께서는 총명하시지만 어리시기에 옆에서 흔들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분명 국정을 잘 이끌 것이니 염려치 마시고 왕께 힘을 보태자…?”

‘이상하다. 아버지께선 분명 숙부께서 왕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는데, 서신엔 온통 간신들을 지탄하는 글 들 뿐이다.’

석현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점들에 정신없이 나머지 서신들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읽어 갈 때 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확연한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내가 알던 숙부는 누구였단 말인가……?’

석현은 서신 외에도 챙긴 장식품을 들어 촛불에 비추었다. 석현은 그걸 보자 마자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얼굴을 구겼다. 왜 이 물건이 여기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숙부의 띠돈이 어째서 대감 나으리의 방에……?’

석현은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숙부가 처음 해주로 발령 가시던 때에 아버지와 함께 저잣거리에 나갔었다. 아버지가 숙부에게 드릴 선물을 사시겠다고 하시어 따라 나간 것이었다. 그 때 아버지가 바로 이 띠돈을 골랐었다. 어린 석현은 그 띠돈을 보며 예쁜 꽃이 그려져 있다고 외쳤었다. 그리고 자신도 이와 같은 띠돈을 꼭 사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랐던 기억이 생생했다. 석현은 바닥에 펼쳐진 서신을 다시 눈으로 훑었다. 모든 게 수상했다. 미처 알지 못한 진실이 분명 숨어 있을 것이다. 석현은 깨어진 띠돈을 꽉 쥐었다.

[작품후기]

와우 그사이 선작, 추천 그리고 코멘트 마구 달아주시다니

제가 힘을 안 받을 수가 없네요 ㅠㅠ

삘받아서 또 얼른 쓰고 올립니다 ㅋㅋ

왕창 올려뒀으니 이제 또 비축 쌓으러 가겠습니다... (너덜너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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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고로 띠돈은 칼을 허리나 등에 찰 수 있도록 만든 고리 같은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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