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그림자
석현이 차갑게 돌아섰던 그 때 이후로, 해랑은 좀처럼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속마음을 털어 놓은 적도 없으면서 실연당한 기분이 들었다. 울적했다. 심지어 눈물이 간간히 차오르기까지 했다. 해랑은 천장을 보며 눈물을 애써 삼키곤 했다. 맘 같아선 당장에 석현을 불러내고 싶었다. 나에게 어찌 그리 매정히 구느냐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막상 석현의 앞에 서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걸 해랑은 잘 알았다. 해랑에겐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집에 당도하시면 그 다음 날, 해랑은 이 집을 떠날 것이다. 해랑은 약이 담긴 상자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같이 가자고 하면… 가줄까?’
해랑은 석현에게 함께 궁으로 가자 말하고 싶었다. 궁으로 가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겠지만 가면 초시, 복시, 전시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때문에 집을 떠나 있는 기간이 일주일이 될지 몇 달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은 이 집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홀로 지낼 수 있었다. 궁 근처의 괜찮은 집도 이미 구해 놓은 터였다. 여길 떠나 석현과 함께 아늑한 집에서 머물 수 있다면……. 해랑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그래서 해랑은 부러 더 강한 약을 원했다. 혹여 약효가 떨어져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석현은 분명 완전히 자신을 떠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큼은 죽기보다 싫었다. 해랑은 고갤 흔들어 상념을 떨치고 다시 책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 때였다.
“도련님, 안에 계십니까?”
업득이었다. 해랑이 들어오라 하자 업득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업득은 서신이 담긴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해랑 앞에 봉투를 내려 놓는 업득에 해랑이 물었다.
“누구에게서 온 것이냐?”
“첫째 도련님께서 온 것입니다요.”
“형님… 께서?”
해랑은 봉투를 열어 서신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읽어가는 글자수가 늘어날수록 해랑의 안색이 어두워져 갔다.
“…조만간 집에 오시겠다는 구나.”
해랑의 말에 업득은 흠칫 놀라더니 설설 눈치를 보았다. 업득이 조심스레 해랑에게 물었다.
“단신으로 오신답니까요, 아니면 마님과 함께 오신답니까요?”
“홀로 오신다니 그에 맞게 준비하거라.”
“예, 도련님.”
업득이 나가고 나서 해랑은 한숨을 쉬었다. 한 동안 집에 오지 않았던 큰 형의 방문 예고에 해랑의 마음이 영 불편했다. 자신을 마치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그 눈초리가 눈 앞에 선명히 그려진다. 마주치는 것조차 거북하다.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해랑은 책을 덮고 고민하다 몸을 일으켰다.
*
해랑이 향한 곳은 사당이었다. 해랑의 조부모님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조상들을 모신 곳이었다. 오랜만에 찾는 사당은 사람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듯했다. 해랑은 한숨을 푹 내쉬고 신주 주변에 쌓인 먼지를 후 불어 날렸다. 신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해랑은 바닥에 깔린 작은 멍석 위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렸다. 짧게 기도를 마친 해랑은 고갤 들어 신주를 바라보았다.
“저 왔어요. 해랑이. 오랜만이죠?”
답이 없는 신주를 물끄러미 보던 해랑은 픽 웃었다.
“한 동안 안 오다가 나 힘들 때만 찾아오고… 나 되게 못 됐다, 그죠?”
해랑의 말에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와 풍경소리를 냈다. 잔잔히 울리는 그 소리는 마치 해랑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듯 들렸다.
“저 너무 힘들어서 왔어요. 사실 이제까지 정말 아무렇지 않았거든요? 제가 우리 집안 유일한 음인인 것도, 음인이라서 열 살때부터 부모님이랑 떨어져서 혼자 지낸 것도, 형이 날 싫어한 것도 다 괜찮았어요. 근데 지금은 제가 좀 불쌍해요.”
여전히 웃고 있는 해랑의 눈시울이 차츰 붉어져갔다.
“제 몸 하나 통제하질 못해서 연모하는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멀어지게 만들었어요.”
설움이 복받치기 시작한 해랑의 목소리가 떨렸다.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 위로 눈물이 타고 흘렀다.
“난 너무 좋아서 속에서 불이 나는데 나 때문에 그 앤 더 차가워져 가요… 난 붙잡고 싶은데 그 애가 너무 힘들어 하는 걸 보면… 차마.. 붙잡을 수가 없어요.”
해랑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나무로 된 신주의 문이 바람에 삐걱이는 소릴 냈다. 바람이 조금 더 강해져 전보다 풍경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해랑은 엎드려서 흐느끼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무심한 신주를 젖은 눈으로 한참 보던 해랑은 잠긴 목소리로 신주를 향해 물었다.
“전 어떻게 해야 해요…?”
바람이 잦아들고 풍경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사당 안엔 대답 대신 묵직한 정적만이 흘렀다.
*
사당을 빠져나온 해랑이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운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기 싫어 시종들이 잘 다니지 않는 남쪽 길로 향했다. 가을이 끝자락으로 향해가는지 바닥엔 낙엽들이 켜켜이 쌓였다. 한참을 걷던 중에 하필 낙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나무뿌리에 해랑의 발이 걸렸다.
“악!”
해랑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그대로 엎어진 해랑은 꿈쩍을 않았다. 누가 보면 그대로 죽은 줄 알았을 것이다. 해랑은 넘어져서 아프기보다 제 처지가 서러워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진짜 조상신이라는 게 있긴 있는 걸까? 정말 있다면 이러실 수는 없는 것이다. 해랑은 끅끅대며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그 때였다.
“도련님……?”
하필 이럴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해랑이 울음을 뚝 그치고 고갤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석현이었다. 당황한 해랑이 재빨리 몸을 돌려 눈가를 닦아낸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석현을 보았다.
“어, 어어. 웬일로 이쪽으로 가?”
“심부름… 때문에요.”
석현은 해랑의 눈가가 벌건 것을 보았다. 하지만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그렇구나…… 그래.. 어, 얼른 가 봐.”
“예…….”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둘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해랑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저기…! 내 심부름도 하나 해주면… 안 될까?”
“말씀하시지요.”
해랑이 잠시 망설이다 두 주먹을 꽉 쥐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와 함께 가자.”
“예……?”
“며칠 뒤에 이 집을 떠날 때, 너도 함께 가자. 응?”
해랑의 말에 석현이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가늘게 접어 웃으며 고갤 내저었다.
“죄송하지만 도련님.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어째서?”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전 이 곳에서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부디 이런 저를 용서하십시오.”
해랑이 꽉 쥐던 두 손에 힘을 풀고 떨구었다. 단호한 석현의 눈빛에 해랑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래. 괜찮아. 나도 그냥 물어본 거야. 너무 신경쓰지 마.”
물기어린 눈가를 닦아주고 싶어도 손을 뻗을 수 없어 석현은 답답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게 최선인 것을. 석현은 꾸벅 고갤 숙이고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 이젠 영영 되돌릴 수 없는 걸까? 석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해랑은 고갤 떨궜다.
[작품후기]
항상 읽어주셔서 넘넘 감사합니다
선추코는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된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