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8/64)

숨겨진 그림자

우 대감 부부가 일 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시종들이 분주한 움직임으로 그들을 맞이했고 석현 역시 마당에 나와 짐 나르는 것을 도왔다. 휑하던 집이 활기를 되찾았다. 오늘은 유난히 집 안이 시끌벅적했다. 다들 정신없이 짐을 나르고 음식을 했다. 집 주인이 돌아오기도 했지만 내일이면 해랑이 과거시험을 치르러 떠나는 날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아주 중요한 손님이 오시는 날이었다.

“그래. 오늘 해진이가 온다지?”

우현영이 자신을 마중 나온 해랑에게서 서신을 건네 받으며 말했다. 서신을 받은 뒤 바로 기별을 보낸 터라 우현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은 바로 우현영의 큰 아들 우해진이 오기로 한 날이었다. 우현영은 서신을 손에 쥐고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눈 앞의 둘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맑은 두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막내가 안쓰러웠다. 우현영은 해랑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안채로 들어갔다. 작은 녀석도 작은 녀석이지만 큰 아들을 생각하면 우현영은 단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둘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것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다. 둘째에 대한 마음이 안쓰러움이라면 첫째는 불안함이었다. 하지만 우현영은 이내 걱정을 떨쳐내려 애를 쓰며 숨을 골랐다.

분주하던 마당이 정리가 좀 되고 나서야 모두가 한숨 돌렸다. 시종들은 삼삼오오 부엌에 모여 간단히 요기를 하기도 하고 수다를 떨기도 하였다. 석현도 허기가 지기에 그들 곁에 앉아 식모가 만든 주먹밥을 입에 넣었다. 그 때 옆에 있던 오월이가 석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 오라버니. 오라버닌 첫째 도련님 뵌 적 없죠?”

“응.”

“오늘 도련님이 오시게 되면 오라버니가 꼭 조심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뭔데?”

석현의 질문에 오월이 주변의 눈치를 보고는 석현의 귓가로 다가왔다. 석현 역시 제 귀를 쫑긋 세워 오월에게 내밀었다. 오월은 손을 동그랗게 말아서는 석현의 귀에 은밀히 말을 흘렸다.

“첫째 도련님과 눈을 마주치면 절대 안 돼요. 아셨죠?”

석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오월을 보자 오월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첫째 도련님은 시종들이 눈을 마주치는 것을 엄청 불쾌해 하시거든요. 그러니까 꼭!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셔요. 아셨죠?”

석현은 오월의 말에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오월의 표정이 저토록 진지하지 않았다면 정말 웃어버렸을 것이었다. 석현은 오월에게 대충 고갤 끄덕여주었다. 오월은 새로운 정보를 알렸다는 데에 뿌듯해하며 자릴 떴다. 석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양반은 시종과 눈을 마주치면 병이 옮기라도 한단 말인가. 종종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양반들의 행태를 볼 때 마다 석현은 치가 떨렸다. 적어도 제 아버지께선 그리 가르쳐 주시진 않으셨기 때문에.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석현은 남은 밥을 마저 입 안에 넣었다.

*

한 편, 해랑은 안채에서 꼼짝없이 있어야 했다. 부모님과 함께 큰 형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제 방에서 편히 기다리고 싶었지만 우 대감이 붙잡는 통에 오도 가도 못하고 망부석처럼 앉아 있어야 했다. 부모님과 함께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덧 해가 중천이었다. 식사 때가 다 되었기에 업득이 와서 점심 상을 차리느냐 물었다. 허나 아직 해진의 기별이 닿지를 않기에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우 대감의 명이 떨어졌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기다린 끝에 해진이 마을 어귀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우 대감 부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향했고 해랑도 그제야 저린 다리를 펼 수 있었다.

마당으로 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던 소리가 뚝 멈추고 나자 잠시 후 대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고고하게 발을 딛는 이가 있었다. 해진이었다. 해랑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감이 해랑을 순식간에 휘어잡았다. 해랑에게 있어 해진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더러운 음인이면 조용히 사는게 마땅하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저절로 떠올려졌다. 열 살의 자신을 거리낌없이 멸시하던 열 다섯 살의 해진의 모습이. 그걸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축축히 젖어오는 손바닥에 해랑은 제 옷자락을 꽉 쥐었다.

해진은 미남자였다. 창백하도록 새하얀 피부에 깊고 커다란 눈, 갸름한 턱선이 해랑과 똑 닮았다. 하지만 따뜻한 느낌의 해랑과 달리 해진은 무섭도록 서늘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와 매서운 눈꼬리에 사람들은 해진을 어려워했다. 게다가 키도 큰 해진에 해랑은 늘 위압감을 느끼곤 했다. 해진이 마당 안으로 걸어오자 주변의 시종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석현은 해랑의 친 형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호기심에 뒤늦게 허릴 굽히는 바람에 하마터면 해진과 눈이 마주칠 뻔했으나 오월이 급히 잡아당긴 덕에 간발의 차로 피했다. 대신 허릴 숙인 채로 눈만 슬그머니 떠서 살폈다. 해랑은 우 대감 부부와 함께 해진에게로 향했다. 해진은 다가온 해랑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석현은 뭔가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해랑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자 해진이 무표정하게 해랑을 보다 우 대감에게 인사를 건넸다. 셋이 그 간의 안부를 나누며 사랑채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해랑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요!”

네 사람이 모두 들어가고 난 뒤 오월은 석현에게 버럭 화부터 냈다. 오월에게 미안함을 표한 뒤 석현은 해랑이 들어간 안채를 보았다. 해진과 해랑 사이의 그건 뭐였을까. 석현은 어쩐지 해랑이 신경쓰였다.

*

사랑채 안에 놓인 책상에 네 식구가 모여 앉았다. 해랑은 식구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참으로 기묘한 가족이라고. 온통 큰 아들에게 집중된 관심. 혹여 큰 아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절절 매는 부모와 자신. 해진은 가족의 맨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해진이 마치 왕이라도 된 듯 모두가 해진을 떠받들었다. 해랑은 답답해져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놀랍게도 해랑의 시선이 닿는 곳에 석현이 서 있었다. 해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현을 보자 멀찍이 선 석현이 입술 가운데에 검지 손가락을 대었다. 조용히 해줄 것을 당부하는 석현에 해랑은 어쩔 줄을 모르고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웃음이 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안절부절하는 해랑을 해진이 모를 리 없었다. 마침 우 대감 부부가 자릴 비운 때였다. 해진은 딴 곳을 보는 해랑을 나지막이 불렀다.

“해랑아.”

낮은 음성에 소름이 끼쳤다. 해랑은 살짝 몸을 움츠리며 천천히 고갤 돌렸다. 해랑을 불러 놓고도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한 해진이었다. 해진은 늘 이런 식이었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해랑은 겁을 먹은 채 해진을 보았다.

“형님…….”

“아깐 제대로 인사를 못 했다. 오랜만이구나.”

“예. 그간 잘 지내셨….”

해랑의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해진이 해랑을 흘깃 쳐다보았다. 해랑은 해진과 눈을 마주치자 마자 바로 고갤 떨궜다. 그에 해진이 비웃음을 흘렸다.

“잘 지냈어도 네 얼굴 보니 잘 못 지낸 것 같다.”

이죽거리는 목소리에 해랑은 입술을 꾹 닫았다. 두려움과 분노로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해랑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양 무릎 위에 손을 얹고 힘을 주었다. 해진은 다시 시선을 거두어 찻잔을 집어 들며 물었다.

“내일 과거 시험을 보러 간다지?”

“예.”

“초시도 못 통과하면 우리 가문의 수치다. 뭐, 음인인 이상 이미 흠이긴 하지만.”

“…….”

해랑은 얼굴이 벌개졌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꿎은 찻잔만 노려볼 뿐.

“아무쪼록 행운을 빈다.”

해진이 건조하게 말하고는 차 한 모금을 넘겼다. 해랑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때마침 우현영이 자리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계실 땐 해랑에게 모진 말을 하지 않는 해진이기에 해랑은 살짝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급히 밖을 보았다. 석현이 서있던 자리가 그새 비어 있었다. 고개를 좀 더 빼고 두리번거려도 머리털 하나 보이질 않았다. 다시 속이 탔다. 해랑은 찻잔을 들어 차를 들이켰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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