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그림자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해랑은 도망치듯 사랑채를 빠져나왔다. 먹은 것이 그대로 올라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체한 듯 울렁거렸다. 겨우 밖으로 나와 근처의 나무를 짚은 채 가슴을 부여잡고 섰다. 식은 땀이 나는 것 같았다. 겨우 숨을 고르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는데 순간 어지러워 다리 힘이 풀렸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해랑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았다. 명치에 이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싶은데 쉬이 되질 않았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순 없는데……. 해랑은 자꾸 아득해지는 시야에 두 눈을 껌뻑였다. 그 때, 흐린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님! 도련님!”
‘석현인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힘에 해랑이 힘겹게 앞을 보았다. 해랑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석현이었으면 했다. 안타깝게도 다가온 이는 석현이 아닌 어린 시종 정운이었다. 정운이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선 잔뜩 걱정하는 얼굴로 해랑을 불렀다.
“의원이라도 불러드릴까요?”
해랑이 고갤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괜찮아. 대신 곳간에 가면 체했을 때 먹는 환약이 있으니 그걸 별채로 가져다 줄래?”
“네! 조금만 기다리셔요!”
정운은 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하고선 곳간을 향해 조르르 달려갔다. 통증이 좀 줄었을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기에 해랑은 서둘러 별채로 향했다.
우현영은 해랑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미리 알아챘다. 점심을 먹는 내내 해랑의 안색이 어두워 걱정이 된 우현영은 숟가락을 내려 놓은 해랑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일렀다. 해진과 따로 할 얘기가 있다는 핑계로. 해랑이 나간 뒤 해진과 우현영은 차를 마신 뒤 집 안을 거닐었다. 너른 마당을 지나서 안채 뒤쪽길을 지날 때쯤이었다. 해진이 집 안을 둘러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도 힘드시겠습니다.”
“무엇이 말이냐?”
“제게 따로 할 말씀도 없으실텐데 이리 시간을 보내시느라고요.”
정곡을 찔린 우현영이 제대로 된 대꾸를 못하자 해진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꼬듯 말했다.
“해랑이가 그토록 약해 빠진 건 아버지의 책임도 있습니다.”
해진의 날 선 목소리에 우현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해진 역시 걸음을 멈추고 우현영 쪽으로 몸을 돌려 아니꼬운 듯 말했다.
“아니라곤 말씀 못하시겠지요?”
“해진이 너……!”
우현영이 아무 말 못하고 해진을 노려보았다. 별 것 아니라는 듯 유유히 걸음을 옮기는 해진에 우현영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별채에 가두다시피 키운 해랑이기에 세상 물정 모르고 순수하기만 한 아이로 자랐으니. 해랑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키워야 했다. 헌데 해진은? 해진의 성격이 저리 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해진은 어릴 때부터 조용했다. 다른 또래 아이들이 자주 울어 대는 것과 달리 거의 울지도 않았다. 가끔은 감정이 아예 없는 아이처럼 느껴질 만큼. 부부는 그런 해진을 걱정했다. 하지만 그저 감정 표현이 적고 침착한 아이겠거니 했다.
문제는 해진이 7살이 된 해에 일어났다. 하루는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던 해진을 김씨 부인이 발견했다. 김씨 부인은 마당 구석에 쭈그려 앉은 제 아들에게 다정스레 다가갔다. 해진은 무언가를 나뭇가지로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 아들의 시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 김씨 부인의 눈은 그만 못 볼 걸 보고야 말았다. 죽은 쥐의 사체였다. 7살짜리 해진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즐겁다는 듯 나뭇가지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의 행동쯤으로 가벼이 여겼다. 하지만 갈수록 해진은 도가 지나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동물을 죽이거나 시종들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공격적인 성향을 보였다. 심지어 동생인 해랑에게도 가차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우현영이 어린 해진을 붙들고 물었던 적도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그에 대한 해진의 대답을, 우현영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절 방해 하잖아요.’
그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열 살짜리 어린애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서늘하던 그 표정을. 우현영이 잠시 생각에 잠겨 걷던 중에 앞서가던 해진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바닥을 보며 걷던 우현영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앞을 보았다. 시선의 끝에 닿는 것은 석현이었다. 우현영이 아차 싶어 빠르게 자리를 뜨려고 하는 순간, 해진의 목소리가 우현영을 붙들었다.
“혹시 저 놈이 정기혁의 조카입니까?”
해진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토록 무미건조하던 해진이 이리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우현영은 고갤 숙였다. 이미 노의석도 알고 있는 마당에 해진에게 숨길 필요는 없었다.
“이미 소문으로 듣고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 허니 말씀해 주시죠. 맞습니까, 아닙니까?”
“…그래. 맞다.”
“아버지!”
성난 해진의 목소리가 우현영에게 꽂혔다. 우현영은 주먹을 불끈 쥔 채로 해진을 노려보았다.
“내 최소한의 양심이다! 저 아이만큼은 살려야 했어.”
“그러다 저 놈이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구요.”
해진이 최대한 목소리를 억누르며 우현영에게 말했다. 우현영은 고갤 틀어 석현을 바라보았다. 석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시종들과 일을 하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진 우현영이 한숨 쉬듯 말했다.
“그럴 일은 없다.”
“그걸 어찌 장담하십니까?”
“그럴 리 없대두!”
우현영이 지지 않고 핏대를 세워가며 외쳤다. 고성이 오가자 시종들 몇이 이쪽을 힐끔 보는 듯했다. 우현영은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마… 저 아인 곧 해주로 떠날 것이다.”
“해주요? 아아, 신분 상승이라도 꿈꾸는 가 보군요. 아님… 별로 살고 싶지 않거나.”
“그러니… 일을 그르칠 리 없다.”
“차라리 잘 됐네요. 굳이 제가 신경 쓸 필요 없이 제거되겠군요. 요즘 오랑캐의 기세가 상당하니 가서 살아 돌아올 리 만무할 겁니다. 뭐, 살아 돌아온다 해도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아버지는 신경 끄십시오.”
우현영은 노기를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아무리 제 아들이라지만 해진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았다. 해진은 금방 평온을 되찾고는 석현 쪽을 노려보았다. 이전과 같은 무표정이었으나 두 눈엔 살기가 가득했다. 해진의 시선을 느낀 석현이 해진을 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해진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꽉 물린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석현은 해진의 시선이 어쩐지 기분이 나빠 고갤 돌려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해진은 그런 석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우현영의 마음에 불안감이 피었다.
‘내가 괴물을 키웠구나…….’
우현영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업보인 것만 같았다. 절로 한숨이 나와 허공에 흩어졌다.
*
“도련님, 안에 계셔요?”
해랑이 별채에서 앓고 있던 중에 누군가 밖에서 해랑을 불렀다. 정운의 목소리였다. 해랑이 부탁한 환약을 들고 온 모양이었다. 해랑은 힘든 몸을 일으켜 정운을 불러들였다.
“들어오거라.”
정운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조그만 발을 들였다. 별채엔 처음이라 신기한지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랑은 그런 정운이 귀여워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이리 늦었어?”
“환약을 찾느라 오래 걸려서요.”
“어른들에게 좀 도와달라고 하지.”
“안 그래도 절 도와주신 형님이랑 같이 왔어요!”
정운의 말에 해랑이 고갤 들어보니 문 밖에 사람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게 누구냐? 함께 들어오지 않고선.”
해랑의 말에 문 밖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여 정운이 열어 둔 문 틈 새로 걸어왔다. 걸어 들어오는 이를 발견한 해랑은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석현이었다.
[작품후기]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선작, 추천, 코멘트에 많은 힘 얻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