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그림자
갑작스런 석현의 등장에 해랑의 두 눈은 토끼 눈이 되었다. 해랑이 벙쪄서 석현을 바라보자 정운이 그 모습을 살피고는 꺄르르 웃어 댔다.
“형님이 너무 멋지셔서 도련님께서 반하셨나 봅니다.”
“그, 그런거 아니야!”
당황한 해랑이 빽 소리지르자 정운이 신이 나서 더 크게 웃었다. 석현은 정운의 뒤로 와서 부드럽게 머릴 쓰다듬고는 말했다.
“먼저 가보거라. 난 잠시 도련님과 할 말이 있으니.”
“예, 형님. 그럼 도련님, 몸 잘 챙기셔요!”
정운이 곰살맞게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갔다. 해랑의 방 안에서 둘이 마주한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해랑은 기뻤으나 애써 감정을 숨기고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웬일이야? 얼굴 한 번 안 내보일 것 같더니.”
석현은 심통난 듯한 해랑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엷게 웃었다. 석현의 희미한 미소에 해랑은 숨이 턱 막혔다. 석현이 눈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해랑은 아픈 것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석현이 무릎을 굽혀 해랑의 맞은 편에 앉아 눈을 마주했다. 해랑은 어쩐지 긴장이 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숨막히게 따뜻하고 다정한 석현의 눈빛이 오랜만이라, 해랑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내일이 떠나시는 날이니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 왔습니다.”
말을 마친 석현이 웃었다. 그런 석현을 보는 해랑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였다. 눈 앞의 얼굴이 마치 꿈만 같았다.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었으나 혹여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옴짝달싹 하지도 못한 채로 석현을 보았다. 석현이라고 해랑이 그립지 않은 순간이 있었을까.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석현은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해랑의 두 뺨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해랑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 말하고 싶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신이 여길 떠나지 않고, 내가 이 곳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랑은 어수선한 정신을 겨우 붙들고 석현에게 물었다.
“아깐, 왜 거기에 있었어? 내가 사랑채에 있었을 때 말야.”
“그저 걱정이 되어 갔었습니다.”
“걱정……?”
“도련님의 표정이 내내 어두우시기에… 그래서 가 본 것뿐입니다.”
자신을 걱정하여 사랑채까지 왔었다는 석현의 말에 해랑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겨우 우겨넣었던 감정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들뜬 감정들이 해랑을 마구 두드렸다. 호흡이 두둥실 떠오르고 열이 올랐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해랑은 손에 쥔 환약에다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안절부절하였다. 석현 역시 해랑에게 하고 픈 말이 산더미였으나 목구멍으로 집어 삼켰다. 더 앉아있을 자신이 없어진 석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랑이 다급히 고갤 들어 일어난 석현을 올려다보았다. 해랑의 마음이 초조해져 갔다. 내일이면 집을 떠나는 날이라는 걸 되새김질하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부디 몸 조심하시고 시험도 잘 치르고 오십시오.”
“…응. 그럴게.”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석현이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하자 해랑의 마음이 들끓었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석현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다. 괴로웠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도 이젠 불가능했다.
“석현아……!”
붙들어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얘기하지 못 할 것만 같았다. 시험에 떨어져 일주일 뒤에 돌아올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영영 멀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외침이었다. 해랑의 부름에 석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해랑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해랑의 두 눈이 일렁이며 석현을 보고 있었다. 석현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얘기 한 번만 들어주라…… 응?”
“…말씀하시지요.”
얘길 들어 달라 해놓고 선 정작 하고픈 말이 해랑의 입가에 턱 걸렸다. 입 밖으로 좀처럼 나오질 못했다. 말이 나오지 않자 눈물이 대신 흘렀다. 마음이 아렸다. 해랑도, 석현도. 해랑은 눈을 질끈 감고 거친 숨을 후 뱉은 뒤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골라가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날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난…….”
애써 웃으며 말하는 해랑에 석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굳게 닫혔던 석현의 입이 열리고 좁은 틈으로 뜨거운 숨이 흘렀다. 이 어여쁜 이를 어쩌면 좋을까. 석현의 가슴이 조여 들었다.
“난, 날 보는 네 눈을 생각만해도 가슴이 뛰고, 날 만지던 네 손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어.”
차라리 밖으로 뛰쳐나가버릴까 생각하면서도 석현의 발은 해랑에게 묶여 움직이질 못 했다. 진심을 고백하는 해랑의 말들에 가슴이 벅찼다. 죽을 만큼 행복하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날 안을 때의 네 품을 떠올리는 걸로도…… 가슴이 뛰다 못해 터질 것 같아.”
말을 마친 해랑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 되어있었다. 그런 해랑을 보는게 괴로워 석현은 고개를 쳐들었다. 해랑은 우느라 파들거리는 몸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석현에게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전부 눈물자욱이었다. 해랑은 간절히 소망했다. 부디 자신의 손이 닿는 순간 석현이 사라지지 않기를. 힘겨운 걸음이 마침내 끝나고 해랑의 손가락 끝이 석현의 옷자락에 닿는 순간, 해랑은 눈을 질끈 감고 울음을 터뜨렸다. 해랑의 손이 석현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가 이내 석현의 허릴 감았다.
“석현아,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아. 아는데… 너무 잘 아는데……. 흑…”
“…도련님.”
석현이 조심스레 해랑을 밀어내자 해랑이 석현의 팔을 붙들었다. 그런 해랑을 보는 석현의 눈 역시 벌개져 있었다.
“나 못 견디겠어……. 너만 생각하면 자꾸 여기가 너무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해랑이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쳐 댔다. 석현은 그런 해랑의 손목을 잡아 채서 멈추도록 했다. 석현에게 붙들린 해랑이 무너지며 괴로운 듯 불규칙한 호흡을 토해냈다. 석현도 이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한계점이었다. 석현의 두 팔이 해랑의 떨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그에 해랑이 놀란 듯 숨을 멈추었다.
“내가 무어라고 이리도 무너지십니까?”
해랑이 대답도 못하고서 훌쩍였다. 이에 석현이 몸을 떼고는 커다란 두 손으로 해랑의 두 뺨을 감쌌다. 해랑의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부드러이 닦아주었다. 해랑이 천천히 고갤 들어 석현과 눈을 마주했다. 젖은 눈꺼풀이 들리자 석현의 새카만 눈동자가 보였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오롯이 서로를 눈에 담았다. 석현의 팔을 붙잡던 해랑의 두 손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제 뺨을 매만지는 석현의 손등을 감쌌다. 석현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해랑의 눈꺼풀이 조금씩 감겼다. 해랑이 완전히 눈을 감기 전에 석현이 나지막이 물었다.
“한 번만, 무례를 범해도 되겠습니까?”
해랑은 대답 대신 고갤 끄덕였고 석현은 곧바로 해랑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포개었다.
[작품후기]
주말동안 혐... 아니 현생에 치일 것 같아서 업뎃을 못할 것 같네요 ㅜㅜ
사실 그래서 주중에 포풍 업뎃 했네요 ㅎㅎ
가능하면 한편이라도 들구 오겠습니다 !
늘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