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어둠
‘너도 네 숙부와 아비와 함께 죽였어야 했는데.’
해랑을 떠나 보낸 뒤 석현은 방에 들어와 휴식을 취했다. 몸을 뉘이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석현의 귓가에 해진의 말이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대체 해진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숙부와 아버지는 역모죄에 연루되어 돌아가신 것이 분명했다. 허나 해진의 말은 숙부와 아버지가 해진에 의해 죽었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해진이 석현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에 관련이 있다는 걸까. 석현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그 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석현은 혼자 중얼댔다. 해진을 생각할수록 찝찝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치 못했다. 해진이 해랑을 대하는 태도도 마음에 걸렸다. 친동생을 어찌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걸까. 해진이 해랑에게 위협적인 존재라는 게 확실해진 이상, 해랑을 지켜내야 했다. 석현에겐 정보가 더 필요했다. 아무래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진과 관련된 것, 놓치고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석현은 몸을 뒤척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어 있는 조각을 맞추기 위해.
석현이 향한 곳은 이 집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사당이었다. 시종들은 사당에 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언젠가 석현이 사당에 대해 물었을 때 시종들은 그곳엔 귀신이 붙어 있으니 근처에도 가지말라며 손사레를 쳤다. 언제부터 그랬느냐 물으니 귀신이 붙은지는 25년정도 되었다고 했다.
그들의 말마따나 사당으로 향하는 문 앞엔 부적이 잔뜩 붙어있었다. 석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문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열고 들어갔다.
사당으로 가는 길에도 나무 사이사이에 부적들이 매달려 있었다. 음습한 분위기가 석현의 몸을 차갑게 감쌌다. 과연 사람들의 말처럼 귀신이라도 붙은 걸까. 석현은 마른 침을 삼키고 사당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사당에 도착한 석현은 삐걱이는 문을 열고 사당 내부에 발을 들였다. 무너져가는 초라한 사당 구석에는 거미줄이 걸려있었다. 퀘퀘한 냄새가 이 사당이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는 걸 알렸다. 사당 안에는 작은 제단이 놓여있었다. 제단 위엔 신주가 고이 모셔져 있었다. 석현은 제단을 자세히 살폈다. 신주 아래에 깔린 나무 제단과 그 밑의 돌바닥을 훑던 중이었다. 나무 제단 옆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뭔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주 극소량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석현은 무릎을 굽혀 무엇인지 살폈다.
“이건......?”
그것은 피였다. 검붉은 혈흔이 아주 작은 원의 형태로 말라붙어 있었다. 석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이 사당에서 피를 흘릴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기 시작했다. 석현이 멍하니 핏자욱을 보던 중,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부적들이 펄럭이며 기분 나쁜 소리를 내었다. 석현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득 사당을 에워싼 부적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석현은 한 장을 뜯어 품에 숨겼다. 석현은 오랜만에 저잣거리에 나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찾아 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
해랑은 반나절을 꼬박 말을 타고 이동해 궁 근처에 당도했다. 우 대감이 궁 안을 드나 들 때 사용하는 집 근처에 거처를 잡아 짐을 푼 해랑은 바람이라도 쐬고자 밖으로 나섰다. 시종들은 쉬게 두고 홀로 나온 해랑 앞엔 별세계가 펼쳐졌다. 수 많은 인파, 각양 각색의 상점들 그리고 눈 앞에서 보이는 왕이 있는 궁궐. 한적한 마을에서 지내던 해랑은 긴장되어 몸을 움츠렸다.
해랑은 늘 그렇듯 이 곳에서도 저잣거리를 찾아갔다. 일종의 습관같은 것이었다. 저잣거리엔 생명력이 넘쳐 났기 때문에 늘 갇혀있던 해랑에게 이 만한 탈출구도 없었다. 도성 안의 저잣거리는 해랑의 혼을 쏙 빼놓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해랑은 석현이 함께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해랑이 당과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였다. 좋아하는 주전부리들을 잔뜩 종이에 담고 있던 중, 옆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해랑이 놀라 고갤 들어 옆을 보았다. 해랑의 시야에 어떤 남자 하나가 상점 주인에게 붙들려 있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꽤나 난처한 표정이었다. 해랑은 당과 값을 빠르게 지불하고 남자 쪽으로 향했다.
“내 금방 가져오리다. 그러니 조금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으라는 거요?!”
“믿어주시오. 집이 바로 근처니 얼른 다녀오겠소.”
남자가 다시 상점 주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상점 주인은 우악스럽게 남자를 붙들어 잡았고 그 힘에 남자가 기우뚱했다. 중심을 잃은 남자의 몸이 쓰러지려던 그 때, 해랑의 손이 남자를 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해랑의 등장에 당황한 주인장과 남자가 두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 곧 상황을 이해하고 해랑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서로 나섰다.
“아 글쎄 이 분이 돈 한 푼 들고 오지 않고선 화첩을 사가겠다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오! 그게 아니라... 내 주머니에 돈이 없는 줄 몰랐단 말일세. 그래서 내 빨리 가져오겠다고 했거늘.”
해랑은 오고 가는 설전 속에서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해랑의 시선이 닿은 곳엔 남자의 손에 쥐어진 화첩이 있었다. 석현을, 석현 만을 그리던 자신의 화첩이 떠올라 해랑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해랑은 석현을 떠올리자 마자 자신의 주머니를 열었다. 그리고 언성을 높이는 주인장의 손에 엽전 하나를 쥐어주었다. 손에 쥐어진 엽전에 놀란 주인이 해랑을 바라보았다. 남자도 움직임을 멈추고 해랑을 보았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그만 실랑이들 하시지요.”
해랑이 씨익 웃으며 말하자 남자를 붙들던 주인의 손이 떨어졌다. 해랑은 머쓱히 웃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해랑이 몇 걸음 옮겼을 때 였다. 뒤에서 누군가 뒤에서 급히 해랑을 불렀다.
“저기, 이봐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해랑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봤다. 해랑을 붙든 사람은 방금 전 화첩을 사던 남자였다. 남자는 급하게 달렸는지 해랑의 앞에 서자 무릎을 굽혀 손을 얹고 차오르는 숨을 달랬다. 어느정도 진정이 되고 나자 몸을 세우고 남자는 해랑을 보았다. 해랑은 그제야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그게... 고맙다는 말을 못 한 것 같아서 말이오. 돈은 조금만 기다려주면 금방 가져다 주겠소.”
남자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는 남자에 해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많이 곤란하실 듯 하여 끼어든 것 뿐입니다. 그럼.......”
남자가 어쩔 줄 모르고 돌아서는 해랑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해랑의 팔을 붙들었다.
“저, 이름이라도 알려주시오.”
남자의 말에 해랑이 웃으며 말했다.
“우해랑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잠시 해랑의 이름을 곱씹는 듯 하더니 해랑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하자 다급히 말했다.
“나는 주형민이오! 주형민!”
“예. 기억하겠습니다.”
해랑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제 갈 길을 갔다. 형민은 멀어지는 해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마음 좋은 이를 만난 것 같군.”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형민도 발길을 돌렸다.
*
석현은 허름한 집 앞에 도착했다. 저잣거리를 지나 한참은 더 떨어진 곳이었다. 문에는 부적이 붙어 있었고 바로 옆엔 커다란 고목 하나가 서 있었다. 거기엔 온갖 색의 천들이 걸려 있고 밑엔 작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성황당이었다.
“계십니까?”
석현이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며 외쳤다. 안에는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석현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안의 작은 마당 가운데에 섰다. 그 곳에 서서 다시 한 번 사람을 불렀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석현의 말이 공허하게 흩어지고 나자 석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석현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누구요?”
석현이 기척도 느끼지 못한 사이 노파 하나가 석현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몸을 돌리자 마자 눈 앞에 서 있는 노파에 깜짝 놀란 석현이 움찔했다. 노파는 키가 작고 백발이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진 얼굴 가운데에 자리한 동공이 뿌옇게 변해 있었다. 석현은 당황했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손히 인사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만 이 동네에선 어르신께서 가장 영험하다 들었기에 찾아 왔습니다.”
‘저잣거리를 지나면 점집이 하나 있는데 그 집 노인네가 아주 유명해요. 이제까지 예언을 틀린 적도 없고 주술이 안 통한 적도 없대요!’
언젠가 오월이 석현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노파는 석현의 말에 옅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보잘 것 없는 늙은이일 뿐이지요.”
노파가 느리게 발을 옮겨 마루 위에 앉았다. 자리를 잡고 앉은 노파는 석현을 올려 보았다. 마치 멀쩡한 눈을 가진 사람처럼.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석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여쭐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요.”
“부적 하나를 찾았는데 용도가 무엇인지 몰라서요.”
노파에게 숨겨둔 부적을 넘기자 노파의 손이 더듬더듬 부적을 만졌다. 자꾸 찌푸려지는 노파의 미간에 석현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때, 갑자기 노파가 부적을 마루 위로 쾅 소리를 내며 내리치듯 놓았다. 긴장한 석현이 노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디서 이 부적을 구하셨소?”
노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심상찮아 보이는 노파의 얼굴에 석현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작품후기]
새로운 인물의 등장 !
하지만 서브공 이런 인물은 아닙니다 ㅎㅎㅎ
그나저나 벌써 25화까지 왔네요 !
모두 독자님들 덕분에 힘받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
많이 부족하고 재미없는 글이지만 ㅜㅜ
제 예상보다도 더 많이 좋아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
앞으로 함께 해주세요 저도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