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4/64)

드러나는 어둠

노파는 석연찮은 얼굴로 석현을 보았다. 노파의 분위기를 감지한 석현은 저 부적이 보통의 것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이건 제가 지내는 집 사당에서.......”

석현이 불안정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노파가 석현을 지그시 보았다. 찬찬히 석현을 살펴보는 것 같던 노파는 잠시 후 표정을 풀며 눈을 감았다. 노파의 손 끝엔 부적이 닿아 있었다.

“살인귀가 붙었군요.”

“예......?”

노파의 말에 석현이 의문을 품고 되물었다. 말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살인귀라뇨... 그 무슨......?”

“그 집에 붙어 있습니다. 피에 굶주린 혼이.”

노파의 말을 이해하기 힘든 석현이 미간을 잔뜩 좁혔다. 살인귀라니. 그렇다면 대감 나으리의 집안 누군가가 살인자란 말인가. 꽉 찬 머릿속에 석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노파를 보며 말했다.

“제가 보기엔 그런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석현의 말에 노파가 천천히 고갤 들어 석현을 보았다. 무얼 생각하는 지 모를 노파의 두 눈을 마주하자 석현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느릿하게 열리는 노파의 입에서는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찌 보려고 하십니까.”

“예......?”

“그 것은 분명 그 집안을 풍비박산 낼 것입니다. 다만 진즉에 그랬어야 하는 걸 이 부적이 겨우 막아주고 있는 것일 뿐이지요.”

석현의 커진 눈동자가 부적을 향했다. 대체 저 부적이 무엇이길래? 부적 위에 쓰인 알 수 없는 글씨를 따라 노파의 손 끝이 움직였다. 종이 끄트머리서 손이 멈춘 뒤 노파가 말했다.

“이 부적은... 살인귀를 억누르기도 하고 원혼을 달래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했잖습니까. 이 부적 덕에 살인귀가 아직 집안을 망치지 않았다고요.”

“그럼 이 부적을 더.......”

“허나.”

단호한 노파의 목소리에 석현은 하려던 말을 멈췄다. 노파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에 바짝 긴장하고 노파를 보았다. 주먹 쥔 손에 땀이 배였다.

“이미 살인귀가 피 맛을 보았습니다.”

석현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이미 살인자가 있단 말이라는 뜻인걸까. 아니 그전에 노파의 말을 전부 믿어야 하나? 석현의 속에선 의문과 의심이 뒤섞여 석현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 때, 노파가 부적을 어루만지더니 슬픈 표정으로 석현을 보았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생겨났겠습니다.”

노파의 말에 석현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들었다. 특히, 노파의 말마따나 억울히 돌아가신 제 아버지 생각이 석현을 괴롭혔다. 우현영의 방에서 나온 숙부의 서신과 띠돈까지도. 대체 무얼까. 석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노파에게 물었다.

“누가... 억울히 죽었는지 알 수 있습니까?”

노파의 뿌연 두 눈이 석현을 담았다. 한참을 석현 쪽을 보던 노파의 입이 느릿하게 열리기 시작했고 석현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

궐 근처에 도착한 지 이틀 째인 해랑은 다음 날 있을 과거 시험을 위해 책을 폈다. 불안한 마음에 한 글자라도 더 봐야만 했다. 헌데 도무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석현과의 일들 때문이었다. 아직도 석현의 손길이 제 살갗 위에서 생생히 느껴져 해랑은 몇 번이고 얼굴을 붉혔다.

해랑의 손에 들고 있던 책은 결국 몇 장을 못 넘어가고 덮혔다. 차피 내일이면 시험인데 굳이 지금 봐서 무엇하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해랑은 바람이라도 쐬야겠다 싶어 궐 근처를 걷기로 했다. 끝이 보이지도 않을만큼 넓디넓은 궁궐을 둘러싼 담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궁궐 내부에 해랑은 눈을 떼지를 못했다. 어제 늦은 시각에 보던 궁과는 또 달랐다. 해랑의 시선이 온통 궁 내부에 꽂힌 사이, 해랑의 바로 앞에 있던 작은 출입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으악!”

“아악!”

놀란 두 사람이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해랑이 땅바닥에 처박힌 엉덩이를 문지르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데 눈 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해랑보다 먼저 몸을 일으킨 상대방의 손이었다. 해랑이 고갤 들어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 앞의 남자를 본 해랑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 당신은......?”

“아! 해랑! 해랑 맞지요?”

“예, 맞습니다! 그.. 성함이......?”

해랑이 쭈뼛거리며 이름을 되묻자 상대방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형민이오. 주형민.”

“아아, 반갑습니다! 이리 다시 만날 줄이야!”

해랑이 그제야 형민이란 이름을 기억해내고 환히 웃었다. 형민은 해랑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곤 초조히 주변을 살폈다. 형민의 행동을 수상쩍이 여긴 해랑이 함께 주변을 둘러보곤 형민에게 물었다.

“누굴 찾으십니까?”

“아, 아니오. 혹시 어디 가는 길이었소?”

“아뇨, 딱히.”

해랑의 말에 형민이 잠깐 눈을 굴리더니 해랑에게 물었다.

“그럼 함께 산책이나 합시다.”

“좋습니다.”

둘이 나란히 돌담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 위에 수북하게 쌓인 은행잎들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운치를 더했다. 조금 걷던 해랑이 가만히 궁 안을 들여다보다 나직이 말했다.

“실은 내일 있을 과거 시험 전에 머리나 식힐 겸 잠시 나왔습니다.”

해랑의 말에 형민이 방긋 웃었다.

“오! 그렇담 사서삼경은 다 외웠습니까?”

“예. 진즉에 해놓긴 했습니다만 긴장하지 않고 잘 할 수 있을지.......”

자신없어하는 해랑의 말에 형민이 해랑의 어깰 툭 치며 말했다.

“다 해놓았다면 분명 잘 해낼테니 너무 걱정마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형민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에 해랑이 축 처진 어깨를 펴며 웃었다. 형민은 잠시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해랑에게 물었다.

“급제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까?”

해랑은 형민의 질문에 순간 당황해 입도 뻥끗하질 못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급제에만 매달렸지 정작 본인이 무얼 하고 싶은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해랑이 뒷통수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이 빠져 있자 형민이 걸음을 멈추어 해랑을 보곤 웃었다.

“하하. 대부분의 이들이 그럴겁니다. 나 역시도 그랬었지요.”

“이미 급제를 하셨습니까?”

해랑의 물음에 형민이 멈칫했다. 알 수 없는 형민의 표정에 해랑의 머리 위로 호기심이 두둥실 떠오르던 찰나였다. 갑자기 저 멀리서 꽤 여러 명의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급히 뛰는 듯한 이들의 모습을 먼저 발견한 형민이 갑자기 해랑의 어깨를 붙들고는 인사를 했다. 아주 다급하게도.

“나는 이만 가봐야겠소! 내 잊은 일이 있어서 말이지.”

“아! 저......!”

“아, 이건 말하고 가겠습니다. 도령이라면 부정부패를 어찌 척결할 것이며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어찌 할 지 궁리해보시오.

“예?”

“요즘같은 형국에서 가장 절실한 대목이라오. 잊지마시오!”

찡긋 웃어보인 형민이 빠르게 해랑의 곁에서 사라져갔다. 해랑은 정신없이 가버린 형민에 넋이 나가 있었다. 그 때, 군관들이 해랑에게로 다가왔다. 그 중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이가 해랑에게 물었다.

“혹시 방금 함께 계시던 분이 어디로 가셨는지 아는가?”

해랑은 형민이 사라진 방향을 힐끔 보았다가 눈치껏 그 반대 방향으로 길을 알렸다. 군관들은 해랑이 알려준대로 다시 뛰었다. 형민과는 반대 방향으로. 해랑은 이 상황이 재미있어 킥킥대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금 형민이 말한 것들을 되새김질했다. 관료가 되어 정말 무엇이 하고 싶은지. 관료가 되면 부정부패 척결 방안과 예방법에 대해서. 우연한 만남에 기분이 좋아진 해랑은 남은 돌담을 마저 돌기 시작했다.

*

해가 떨어지자 하늘이 흐려지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석현은 온 몸으로 비를 받아내며 철벅철벅 걸었다. 무방비한 얼굴 위로 빗줄기가 흘렀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옷이 석현을 무겁게 끌어내리고 있었다. 석현의 그늘진 얼굴엔 오만가지 감정들이 뒤섞여있었다. 우는지 웃는지 모르는 얼굴엔 살기마저 어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간 석현은 들어가자마자 만난 업득을 붙들고 물었다.

“첫째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이미 댁으로 돌아 가셨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석현이 제 방으로 사라지고 난 뒤 업득은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한 석현에 고갤 갸웃거렸다.

그 날 밤, 빗방울이 더 거세졌고 벼락이 쳐댔다. 우 대감은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으나 오지 않는 잠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미 숙면에 빠진 김씨 부인을 두고 천천히 안채의 마루로 향했다. 우 대감이 마루로 나가는 미닫이 문을 열어 발을 내미려는데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졌다. 빠르게 고갤들어 앞을 보니 어둠 속에 인영 하나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깜짝 놀란 우 대감이 숨을 집어먹고 그를 불렀다.

“누, 누구냐!”

긴장된 목소리로 묻는 우 대감에 어둠 속 인물이 천천히 우 대감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둠을 가로지르는 번개가 번쩍이며 두 사람 사이를 비추었다. 우 대감은 그제야 비로소 제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석현아.......”

벙찐 우 대감의 앞엔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보는 석현이 서 있었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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