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어둠
무섭도록 비바람 치는 밤이었다. 그토록 거센 빗줄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무서운 살의를 느낀 것도 오랜만이었다. 우현영은 눈 앞의 거대한 기운에 눌려 찍소리도 못 내고 섰다. 지금 이순간 유난히 장대해 보이는 석현이 두려워졌다. 우현영의 등골을 타고 식은 땀이 흘렀다. 석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오밤중에 무슨 일이냐?”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감추며 우현영이 묻자 석현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찌 숨기셨습니까?”
뜻 모를 석현의 말에 우현영이 불안으로 어찌 할 바를 몰랐으나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무얼... 말이냐.”
우현영이 무어라 한 마디 더 덧붙이려 할 때, 석현이 손에 쥐고있던 것을 우현영의 눈 앞에 내보였다. 그것들을 받아 든 우현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석현을 보았다. 우현영의 손에 쥐어진 것은 정기혁의 서신과 띠돈이었다.
“어, 어찌 이것이 네 손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우현영이 서신과 띠돈을 쥐고 있으니 석현이 그것들을 다시 빼앗았다. 텅 빈 자신의 손 위를 황망한 표정으로 보던 우현영은 믿기지 않는 듯 잠시 초점을 잃고 있다가 번뜩 석현을 보며 말했다.
“네 이 놈! 설마 내 방에 몰래 들어간 것이냐?”
“지금 그게 그리 중요하십니까? 이게 어르신 방에 들어가 있는 이유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석현의 말에 우현영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아무것도 말할 순 없었다. 석현에게 모든 걸 알렸다고 노기 어릴 해진의 얼굴, 과거의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망연자실할 해랑의 얼굴이 우현영의 눈 앞에 스쳤다. 우현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어둠 속에 갇혔으면 싶었다.
“...대답 안 해주실 겁니까?”
석현이 점점 다가오자 우현영은 감았던 눈을 뜨고 석현을 보았다. 우현영의 부릅뜬 눈에 핏발이 섰다. 물러설 곳이 사라진 자에게 남은 건 오기뿐이었다.
“못 한다. 아니, 안 할 것이다.”
“...그리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우현영은 석현을 노려보다 갑자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석현은 재빨리 그 뒤를 쫓아갔다. 우현영은 안채 깊숙한 곳의 방 문을 열어제쳤다. 어둠 속에서 다급히 손을 뻗어 잡히는 것을 쥠과 동시에 석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우현영이 석현을 향해 몸을 돌림과 동시에 서슬퍼런 칼 끝이 석현에게로 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현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없이 우현영을 보았다.
“결국 저까지 벨 생각이십니까?”
“내가 널 겨우 살려냈으면 그냥 조용히 살았어야지. 그럼 이런 일 없었을 것 아니냐?”
“어찌 조용히 삽니까! 내 아버지, 숙부님이 누구때문에 억울히 돌아가셨는데요!!”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단 말이다!”
우현영이 팔을 들어 칼을 휘두르자 그보다 빠르게 석현이 움직였다. 칼이 목표를 잃고 허공을 가르자 우현영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동시에 석현의 손이 우현영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우현영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고 손에 쥐던 칼은 바닥으로 요란스레 떨어졌다. 석현은 천천히 칼을 잡아 들어 우현영에게 겨누었다. 코 앞으로 다가온 자신의 칼에 놀란 우현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석현은 서늘한 눈으로 우현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칼. 잠시 빌려야겠습니다. 전쟁에 나가려면 칼 한 자루는 있어야겠지요.”
“네.. 네가 정녕...!”
“전 살아 남을 겁니다. 살아서 모두가 파멸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것입니다. 당신은... 저승에서나 이 모든 것을 지켜보시지요.”
석현의 말과 함께 칼이 우현영의 머리 위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석현의 팔이 휘둘러지며 번뜩이는 칼날이 우현영에게로 향했다. 우현영의 비명과 함께 지축을 울리는 천둥이 내리쳤다.
*
악몽을 꿨다. 하필 과거 시험 당일에. 해랑은 식은 땀으로 젖은 몸으로 숨을 헐떡였다. 너무나 끔찍한 꿈이라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다. 꿈에서 해랑은 사당가는 길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온통 부적으로 둘러쌓인 길에 서 있던 중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급기야 부적들이 모두 떨어져나갔다. 놀란 해랑이 부적을 붙들려고 손을 뻗으려는데 저 멀리 사람 두 명이 서 있었다. 익숙한 차림새이기에 자세히 보니 해진과 석현의 숙부 정기혁이었다.
비바람이 거세 두 사람이 걱정된 해랑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자고 소리치려는 찰나, 해진의 손에 들려 있던 장검이 붕 소리를 내며 치솟더니 정기혁의 몸을 베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해랑은 소리 한 번 못지르고 겁에 질린 채 벌벌 떨었다. 울컥 피를 토해내는 정기혁을 차갑게 내려보던 해진이 고갤 돌려 해랑 쪽을 보았다. 해진이 점차 해랑 쪽으로 다가오려 하자 해랑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겨우 옮기던 와중에 뒷꿈치가 돌뿌리에 걸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해랑은 더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때, 갑자기 날아온 부적 한장이 해진에게 붙었다. 해진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팔에 붙은 부적을 떼고는 완전히 구겨 던진 뒤 홀연히 사라졌다. 해랑은 해진이 칼을 거두고 사라진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마구 뛰어가서 바닥에 누운 정기혁의 시신을 확인한 해랑은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시신의 얼굴이 석현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꿈에서 깼을 땐 이미 흐르고 있던 눈물과 땀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해랑은 황급히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꿈이 아닌 현실이 눈 앞에 있었다. 해랑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석현아.......”
해랑은 석현을 작게 부르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었다. 제 옆에 없는 석현이 유난히 더 그립고 걱정이었다. 이불 위에 앉아 겨우 한숨을 돌리니 밖에서 시종 하나가 슬 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고 알렸다. 해랑은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이불 속을 빠져나왔다. 어서 빨리 과거 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과거 시험장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엿을 파는 이들, 아들의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부모들, 아내와 아이들에게 인사하며 헤어지는 수험자 등등 별에 별 이들이 다 모여있었다. 해랑은 시험장 현판을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다 안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초시 시작이오!”
시험 감독관의 호령 뒤에 북소리가 세 번 났다. 해랑은 문제지를 받아들고 쾌재를 불렀다. 그동안 쉼없이 공부했던 삼경의 내용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막힘없이 답안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한 해랑의 눈 앞엔 희망이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시험 종료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일제히 붓을 놓은 이들이 한꺼번에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시험지를 거두어가는 이들의 손길이 분주히 움직였다. 모든 시험지가 모이자 시험장 문이 열렸다. 오래 앉아있느라 힘들었던 해랑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 날 저녁, 해랑은 유난히 잠이 오질 않았다. 이상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가만히 누워있지를 못하고 마루로 나와 앉았다. 구름에 가려진 달이 빛을 내지 못하고 허둥거리고 있었다. 해랑은 멍하니 달을 보다 마침 지나가는 시종을 붙들었다.
“혹시 집에서 온 기별은 없느냐?”
“예. 없습니다요.”
“...알았다.”
시종이 해랑에게 인사하고 사라지자 해랑은 한숨을 내쉬며 홀로 중얼거렸다.
“어찌 이리 가슴이 답답할까.......”
해랑은 무릎을 세워 끌어안은 채 얼굴을 파묻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벌써부터 향수병이라도 돋은 걸까. 아니면 상사병일까. 해랑의 얼굴이 닿은 옷자락이 그리움으로 젖어들어갔다.
*
초시 합격자 발표일이 되자 해랑은 부리나케 시험장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몰려든 곳으로 향하니 군관 둘이 초시 합격자 이름이 적힌 벽보를 붙이고 있었다. 희비가 교차하는 가운데 해랑이 인파를 헤치고 벽보 앞에 서서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우해랑... 우해랑... 우해...... 아, 있다!”
해랑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으며 환히 웃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과를 냈다는 사실이 해랑을 기쁘게 만들었다. 복시도 잘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붙었다. 초시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더 이상 해랑은 그늘에 가려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게 해랑을 더욱 기운차게 만들었다.
한편, 해랑이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는 동안 해랑의 거처로 서신 하나가 도착했다. 집에서 온 것이었다. 시종이 서신을 받고 잘 전달해 드리겠다 말하자 서신을 전달한 이는 해랑의 시종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모든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 절대 이 서신을 전해드리지 말게. 시험이 다 끝나면 그 때 전달하시게.”
시종은 고갤 끄덕이고 해랑이 모를 곳에 서신을 감추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해랑은 언젠가는 오겠거니 하며 서신에 대해 묻지 않았다. 서신은 그렇게 주인을 잃은 채 감춰졌다.
[작품후기]
전엔 무조건 노트북으로만 글을 썼는데
요즘은 아예 핸드폰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ㅎㅎ
그래서 그런가 시간적 여유가 없어도 틈틈이 쓰게 되네요
앞으로도 이렇게라도 좀 써야겠습니다
독자님들 조금이라도 덜 기다리시도록 ㅜㅜ 흑흑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