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6/64)

드러나는 어둠

며칠 뒤 해랑은 홀로 붓을 사러 장터에 갔다. 초시 때 사용한 붓이 갈라져 쓸만한 상태가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시종들에게 부탁을 할까 했지만 마음도 답답하여 바람도 쐴 겸 직접 길을 나섰다. 길을 가는 내내 악몽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해랑은 어떻게든 잊어보려 애를 썼으나 마지막으로 본 석현의 얼굴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질 않았다. 번잡한 장터에 들어서고 나서야 해랑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해랑이 붓 두어 개를 사서 가게를 나올 때였다. 장터를 거니는 중에 해랑의 시선을 붙잡는 곳이 있었다. 유난히 으슥한 비좁은 골목이었다. 골목의 끝엔 허름한 움막 하나가 있었다. 해랑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 곳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호기심을 뿌리치기엔 그 곳의 기운이 해랑을 강하게 잡아 끌고 있었다. 어둔 길을 지나 움막에 다다르자 해랑의 눈 앞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다 무너져 가는 집들, 피골이 상접하여 기운없이 누워있는 이들, 그들의 공허한 눈빛들. 해랑은 말문이 막혀 멍하니 처참한 빈민촌의 광경을 바라보다 발을 옮겼다. 처음 보았던 움막 안을 살피니 웬 어린 아이 하나가 그 안에 앉아있었다. 아이는 누가 보아도 보살핌 받지 못한 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저분한 상태였다. 아이는 해랑을 보자 경계하는 눈빛으로 몸을 웅크렸다. 해랑은 그런 아이가 안쓰러워 최대한 부드러이 말을 걸었다.

“안녕? 넌 여기서 혼자 사니?”

아이는 입을 열지 않은 채 한참 해랑을 바라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의 대답에 해랑이 걱정스러운 듯 움막 안을 살폈다. 움막은 곧 무너질 것 같았고 비좁아 아이 혼자 사는 것도 버거워보였다. 해랑이 그런 아이가 안쓰러워 주머니를 열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작은 돌 하나가 날아와 해랑의 팔을 툭 쳤다. 돌에 맞은 팔을 문지르며 옆을 보니 아이보다 좀 더 큰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는 잔뜩 경계태세를 갖추고 해랑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 동생한테 손대지 마!”

두 아이들은 자매인 듯했다. 해랑은 아이가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씩씩대던 소녀가 움막으로 달려와 제 동생을 살피고는 아무 이상 없음을 확인하자 동생을 꽉 안은 채 해랑에게 말했다.

“볼 일 없으면 가요!”

날 선 아이의 말에 해랑이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주머니를 열어 가지고 있던 엽전 다섯 냥을 꺼내어 소녀 앞으로 내밀었다.

“저… 이거.”

소녀는 내밀어진 엽전을 보더니 더욱 성을 내기 시작했다.

“필요 없어! 위선자!”

“저, 그런게 아니고…….”

“당신들의 더러운 돈 따위 안 받아!”

“더럽다니?”

“다 알아. 우리 같은 힘없는 백성들 돈 빼앗아서 당신들은 배불리 먹는다는 거. 우리 부모님도 당신 같은 양반 때문에 돌아가셨단 말야!”

해랑은 그제야 소녀의 적개심 가득한 눈빛이 이해가 되었다. 수탈을 일삼는 벼슬아치들에 의해 고통받는 백성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해랑을 아프게 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을 하는 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해랑은 그제야 깨달았다. 과거에 급제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에 대해. 무엇을 하고싶은 지에 대해. 해랑은 소녀에게 말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뭐?”

소녀가 당황하여 해랑을 보자 해랑은 자신의 주머니를 통째로 내어주며 웃었다.

“이거 받아. 위선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으니까 받아줘. 그리고 약속할게.”

“뭘……?”

“꼭 이번 과거에 급제해서 더 이상 이 나라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하겠다고.”

소녀는 해랑의 두 눈을 가만히 보았다. 때묻지 않은 맑은 눈을 가만히 보던 해랑은 미소지으며 주머니를 소녀의 앞에 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장터를 향해 걸었다. 마음속에 보다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자 발걸음에 한층 힘이 실렸다. 반드시 과거에 급제할 것이다. 그래서 해랑 자신처럼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일 할 것이라 다짐했다. 해랑의 두 눈이 빛났다.

*

해랑이 도성 안에 머문지도 스무 날이 지났다. 그토록 고대하던 복시가 드디어 오늘로 다가왔다. 해랑은 두 주먹을 꽉 쥐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상하리 만치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초시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것도, 얼마 전에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깨달은 것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연결되었다.

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초시 시험장과 달리 복시 시험장은 조금 더 진중하고 엄격했다. 시험장 분위기가 익숙치 않아 어수룩한 해랑과 달리 이미 한 두 번쯤 와본 경험이 있는 듯한 이들이 많았다. 해랑은 어쩐지 주눅이 들었으나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수그러드는 어깨를 의식적으로 쫙 펼쳐서 당당해지려 노력했다. 허나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다. 해랑은 차가워진 손을 주물거리며 빨리 시험지가 나오길 기다렸다.

“시험지 배부를 시작하겠소.”

드디어 시험지 배부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시험지가 나누어졌다. 해랑은 떨리는 마음으로 제 앞에 놓인 종이를 펼치기 시작했다. 잘 포개어진 종이를 살살 펼쳐내자 먹으로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해랑은 글씨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현재 팔도 각 지에 나라와 백성은 뒤로 한 채 자신의 이득에만 눈이 먼 관료들로 넘쳐나고 있는게 우리 나라의 현 실정이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수탈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길에는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대들이라면 부정부패를 어찌 타개할 지, 타개한 후 어떻게 예방할 지 자유롭게 의견을 내시오.]

“말도 안 돼……!”

해랑은 문제를 다 읽은 뒤 깜짝 놀라 고갤 들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문제에 해랑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질 못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들고 있던 붓이 흔들려 먹이 떨어져 종이 위에 번졌다. 해랑은 고개를 털고 다시 한 번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 문제를 읽었다. 아무리봐도 믿어지질 않았다. 문제의 내용은 바로 얼마 전, 형민이 해랑에게 던지고 간 질문이 아니었던가.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해랑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큰 눈을 꿈뻑거렸다.

‘대체 그 사람은 누구지?’

혹시 시험 출제를 맡은 관리인걸까? 아님 조상신이라도 되는 걸까? 온갖 의문들이 해랑의 눈 앞에 두둥실 떠다니는 가운데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고막을 때리는 소리에 정신이 든 해랑은 얼른 붓을 잡고 빠르게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어느새 해랑의 입꼬리엔 결과를 확신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침내 시험이 종료되자 해랑은 자신있게 답안을 제출하고 시험장을 나섰다. 이제 열흘만 지나면 과거 급제자 발표가 날 것이다. 그럼 그 결과를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가 석현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해랑은 제 어깨에 놓였던 무거운 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홀가분했다. 빨리 석현을 만나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부풀었다. 어서 해가 지고 달이 져서 열흘이 속히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

과거 시험이 끝나고 일주일 뒤, 왕이 집무를 보는 사정전이 북적였다. 며칠 간 답안지를 붙들고 씨름하던 이들은 아주 형편없는 답안을 제외하고는 왕께 들고 가 심사하시기를 요청하였다. 많은 양의 종이들이 임금의 책상 위에 놓였다. 젊은 왕은 종이를 받아 들고 한 장 한 장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혜안들이 속속 등장하자 기쁜 듯 함박 웃음을 지으며 종이를 넘겼다. 한참을 읽던 왕은 어느 종이에서 유난히 시선을 오래 멈추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왕은 갑자기 종이를 들어올려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상피제, 분경금지법, 서경제 모두가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좋은 예방법이라 생각하옵니다. 허나 가장 중요한 사헌부가 개혁하지 않으면 결국 이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현재의 사헌부와 사간원을 완전히 뒤엎으라……? 유 내관은 이를 어찌 생각하는가?”

왕이 턱을 매만지며 옆에 서 있던 내관에게 물었다. 임금의 질문에 유 내관은 허리 숙여 대답했다.

“대부분의 이들이 기존 제도를 강화하는 방안만 모색하는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방안이라고 생각되옵니다. 허나 과감한 만큼 위험 부담이 클 것이옵니다.”

“그렇지? 무모할 만큼 과감하지. 하지만 내가 바라던 방향으로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군.”

“그토록 사헌부 개혁을 원하셨는데 드디어 좋은 인재를 만나신 것 같습니다.”

임금의 손에 들렸던 답안지가 다른 종이들과 따로 놓여졌다. 임금의 얼굴엔 만족한듯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이제 나를 노리는 세력들과 제대로 붙어 볼 만 하겠어. 어서 답안지의 주인과 만나보고 싶군.”

왕의 손가락이 답안지를 주욱 훑다가 멈추고 툭툭 건드렸다. 손가락 끝이 닿은 곳엔 검은 먹자욱이 둥그렇게 번져있었다.

[작품후기]

과거 시험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찾아가며 쓰기는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조금 바꿔서 설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차피 가상의 국가이니... 부디 양해부탁드려요 헤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다들 감기 조심하시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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