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어둠
해주의 밤 하늘에 붉은 달이 피었다. 땅에는 발 닿는 곳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으며 시체가 널려 있었다. 유(兪)나라의 오랑캐들은 해주로는 모자랐는지 황해도 전부를 차지하려 들었다. 쪽수로 밀어붙이는 적군에 태조국(太祖國)의 군사들은 놀라 도망가거나 투항하기에 이르렀다. 누구 하나 용맹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해주로 출정한 11군단의 장수 현류환의 한숨이 늘어만 갔다. 오합지졸들만 모여 제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스물 여덟 살의 패기 넘치는 젊은 장군의 마음에는 답답함만 쌓였다. 패전만 쌓이고 있으니 류환의 자존심에 상처만 늘어갔다.
여느 때와 같이 많은 병력을 잃고 겨우 수 십 명 만 살아 남아 병영으로 돌아가던 때였다. 한참 말을 달리던 류환은 수상한 기류를 느끼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류환을 따르던 성주언이 류환의 갑작스런 행동에 소리 내어 물으려 했으나 류환에게 제지당했다. 류환의 두 눈이 어둠속에서 빛을 내며 주위를 살폈다. 류환이 두리번거리다 오른쪽 방향을 휙 돌아보고는 크게 외쳤다.
“왼쪽으로 달려라! 기습이다!”
류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른쪽에서 적군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뛰기 시작했다. 류환과 주언, 그리고 몇몇의 병사들은 각각의 무기를 들고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정도의 병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숫자였다. 류환은 주언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결의를 다졌다. 속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칼을 쥔 손에 힘을 주고는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달렸다. 무자비한 류환의 칼에 오랑캐들이 나가 떨어졌다. 주언 역시 능숙히 적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그 많은 숫자를 상대하기엔 이미 한 차례 전쟁을 지르고 온 둘에겐 무리였다. 바닥난 체력에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예민하게 주변의 기운을 감지하던 감각도 무뎌져갔다. 적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류환의 등 뒤에 적장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장군!!!”
놀란 주언이 소리쳐 류환에게 위험을 알렸으나 이미 번뜩이는 도끼날이 류환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뒤늦게 제 뒤의 상황을 파악한 류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이렇게 지고 돌아갈 바에야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무거운 도끼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고 주언의 절규가 울려 퍼지던 그 순간이었다. 분명 도끼날이 목을 파고들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이 벌어지질 않았다. 류환은 이상함을 느끼고 서서히 눈을 떠 보았다. 도끼날은 코 앞에서 멈춰 있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보니 류환을 공격하려던 적장의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류환을 공격하려던 도끼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고 적장 역시 앞으로 고꾸라지며 땅에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그 뒤에 가려졌던 이가 드러났다. 말을 탄 채 적장을 벤 칼을 들고 있는 이가.
“누구냐?”
류환이 묻는 말에 의문의 남자는 되려 류환에게 되물었다.
“우선은 남은 적을 소탕하는 것이 더 중하지 않겠습니까?”
남자의 말에 류환은 도망치려는 적군들을 발견하고 말을 다시 몰기 시작했다. 남자는 굉장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류환과 주언은 자신들보다도 뛰어난 검술을 가진 이의 등장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침내 적을 모두 소탕하자 류환은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록 규모가 작은 전투였으나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다. 한숨을 돌린 류환은 남자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자넨 누구인가? 차림새를 보아하니 양반은 아닌 듯한데.”
그에 남자가 말에서 내려 천천히 류환의 앞으로 다가왔다. 류환이 살짝 긴장하여 남자를 내려다보는데 남자의 무릎이 굽어지며 땅에 닿았다. 남자는 두 무릎을 굽힌 채 고개를 조아리며 류환에게 물었다.
“혹시 올 해에 역모로 죽은 해주의 도호부사 정기혁을 아십니까?”
“잘 알다 마다. 헌데 그는 어찌……?”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들리며 똑바로 정면을 보았다. 남자의 두 눈동자엔 형언할 수 없는 수 만 가지의 것들 것 담겨져 있었다. 그 기세에 류환과 주언이 움찔할 정도였다.
“저는 정석현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전 해주 부사 정기혁이 바로 제 숙부님이시지요.”
“뭐?”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돌아가신 해주 부사 정기혁, 병조참의 정수환. 제 숙부님과 아버님입니다.”
석현의 말을 듣던 주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류환을 보았다. 류환은 그런 주언을 무시한 채 석현의 말을 들어주었다.
“자네는 아들인데 어찌 살아남았는가? 아, 혹시 소문대로 예조판서께서 자네를 거두신 건가?”
류환의 말에 석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속이 끓었다. 부글거리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석현이 대답했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서.
“아니요. 저는 제 아버님께서 희생하시어 노비로 살아가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노비이면서 칼과 말은 어찌 갖고 있는 것이냐?”
주언이 한 마디 거들자 석현은 입술을 꾹 말아 삼킨 채 입을 닫았다. 대답하지 못하는 석현에 주언이 무어라 쏘아붙이려 했으나 류환이 그를 막고 재차 석현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 이 곳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석현은 고갤 바짝 세우고 류환의 눈과 똑바로 마주한채로 답했다.
“이기러 왔습니다. 그 것뿐입니다.”
석현의 결연한 눈빛과 말투에 주언이 류환을 보았다. 류환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류환이 다시 말을 몰기 시작하며 석현에게 말했다.
“어서 일어나 말에 오르게. 서둘러 병영으로 가야 하니.”
석현은 류환의 말에 재빨리 말에 올랐다. 류환과 주언의 뒤를 따라 어두운 숲길 속으로 향했다. 석현이 우 대감의 집에서 나온 지 일주일 되던 날의 일이었다.
*
류환의 군사들 중 노비는 몇 없었다. 대체로 억지로 끌려온 이들이거나 신분 상승을 꿈꾸며 왔으나 정작 싸워 보기는커녕 병영 밖을 벗어나질 못했다. 게다가 신분 탓에 천대받기 일쑤였다. 그나마 류환이 노비 신분의 병사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주기에 망정이지 그도 없었다면 완전히 찬 밥 신세나 다름없었을 것이었다. 석현 역시 병영에 들어왔을 때 따가운 시선들이 석현의 뒷통수에 꽂혔다. 노비 주제에 말을 타고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무관들이나 중인들에겐 꼴보기 싫었을 테다. 게다가 석현은 류환이 전투에 항상 데리고 나갔기에 노비들 역시 석현을 시기했다. 때문에 이따금 석현에게 시비를 거는 이들이 종종 있었으나 석현은 별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주언 역시 석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순히 노비로 태어난 자가 아닌 역모죄에 휩쓸려 추락한 이를 곱게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석현을 대하는 류환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루는 석현이 침상에 앉아있을 때 같이 지내는 중인 하나가 석현에게 껄렁히 다가와 물었다.
“네 애비 따라 갔으면 훨씬 속 편했을 텐데 뭣하러 살아 남아서 이 고생이냐? 나 같으면 콱 뒈졌겠다!”
석현은 부러 그 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럼 어르신은 그리 하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뭐야?”
“제 말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 이 천한 놈이!”
남자가 석현에게 덤벼들자 석현은 단숨에 남자를 제압했다. 순식간에 붙들린 남자는 당황하여 찍소리도 내질 못하더니 급기야 빽 소리를 지르며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
“아이구! 이 노비 놈이 사람 잡네!”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석현의 막사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침 주변에 있던 주언도 달려왔다. 석현은 몸을 풀고는 똑바로 서서 주언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씩씩대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남자의 말을 들어주던 주언은 석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
석현은 주언을 보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제 걱정을 해주시기에 괜찮다 말씀드렸을 뿐인데 성을 내시기에 달래 드린 것뿐입니다. 심려 끼쳐 드려 송구 드립니다.”
주언은 언짢은 얼굴로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주언은 석현에게 손짓하여 밖으로 따로 불러냈다.
“난 나라에 충성하는 이이다. 솔직히 역모죄에 휩쓸려 노비가 된 네가 이 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난 모르겠다.”
“…….”
“네가 정말 이 나라를 위해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면 그냥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
주언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가려던 차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석현의 목소리가 주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싸운 들 어떠합니까? 승리하여 나라에 보탬이 된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나라를 위한 것 아닙니까?”
석현의 말에 주언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단지 자신을 위해 사사로이 싸우는 자와 정말 사랑하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는 겉으로 볼 땐 똑같을 순 있으나 정말 위기가 왔을 때는 극명히 갈리기 마련이다.”
석현은 타 들어가는 속을 느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주언의 말을 듣고 스쳐 지나가는 얼굴 때문이었다.
“나는 내 가족과 왕, 이 나라를 사랑하기에 싸우는 것이다. 너에겐 그런 존재가 있느냐?”
석현이 아무 대꾸가 없자 주언은 석현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틀었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걸음을 옮겼다.
“잘 생각해 보거라. 하물며 작은 것 하나라도 있을 수 있으니.”
주언이 자리를 떠나고 석현은 홀로 남아 한숨을 뱉었다. 하늘에 뜬 달이 오늘따라 시렸다.
*
드디어 복시 합격자가 발표나는 날이 다가왔다. 해랑은 빠르게 달려 궁 안의 시험장 문 앞으로 향했다. 이미 사람들이 모여들어 벽보가 붙길 기다리고 있었다. 해랑 역시 벽보가 붙을 곳 앞으로 가서 사람들 틈에 섞였다. 두 손을 꼭 모으고 부디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기를 바랐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시험장 안에서 상시관이 관군 둘과 함께 나왔다. 사람들이 그에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상시관의 명에 따라 관군 둘이 벽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벽보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자는 안으로 들어오시오.”
상시관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벽보 앞으로 향했다. 몇몇은 환호를 지르더니 안으로 내달렸고 몇몇은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해랑 역시 초조하게 벽보 앞으로 나아갔다. 23인의 이름 중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기 위해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헌데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이름이 없었다. 해랑은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석현과 해진의 얼굴이 동시에 스쳤다. 실망스러운 결과에 힘없이 어깨를 떨구고 거처로 돌아가려는 그 때,
“장원, 방안, 탐화랑을 발표하겠소.”
라는 상시관의 말이 이어졌다. 해랑이 놀라 뒤돌아보니 군관들이 새로운 벽보를 또 붙이고 있었다. 다시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새로 붙은 벽보 앞으로 향한 해랑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 장원 우 해랑 ]
해랑은 멍하니 그 앞에 서 있다가 제 눈에서 뭔가 툭 떨어지는 걸 느끼고서 정신을 차렸다.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해랑은 젖어 든 눈가를 닦아 낸 뒤 힘차게 안으로 들어갔다. 혹여 벅차 오른 가슴이 터져 버릴까 왼쪽 가슴께를 문질러 가면서.
[작품후기]
이번 편은 쪼매 길게 썼습니다 홍홍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일공 일수 입니다 여러분 ㅎㅎ
아 그리고 대충 아셨겠지만 장원이 1등 방안이 2등 탐화랑이 3등이랍니다
우리 해랑이 1등했대요 우쭈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