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28/64)

드러나는 어둠

과거에 급제하고 나흘 뒤, 해랑은 떨리는 마음으로 궁에 당도했다.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궁궐이 새롭게 느껴졌다. 해랑은 신선한 기분을 만끽하고자 숨을 크게 들이쉬며 미소 지었다. 이제껏 그늘 속에서만 살던 자신이 이렇게 당당히 궁에 드나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모든 건 석현의 공이 컸다. 석현이 아니었다면 과거시험에 아무런 욕심도 안 냈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합당한 결과가 해랑에게 보여 졌다. 이제 행복한 앞날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랑은 굳게 믿었다.

궁 안에 들어서서 해랑은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장은 원래 성균관의 건물이었다. 성균관의 유생들로 보이는 이들이 해랑을 발견하자 다가왔다. 해랑이 장원 급제자인 것을 확인한 이들이 해랑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해랑을 데리고 들어 간 곳 정중앙엔 유생 둘이 옷 한 벌을 들고 있었다. 연두색 빛의 앵삼이었다. 장원 급제자들이 입고 유가 행렬을 벌이던 바로 그 옷. 해랑은 감격에 겨워 조심스레 앵삼을 향해 다가갔다. 자신이 저것을 입고 마을로 향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어서 석현에게 어사화를 쓰고 앵삼을 입은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 이것을 입으시지요. 곧 주상 전하 앞으로 가시게 될 겁니다.”

“예, 예!”

넋 놓고 있던 해랑이 유생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어 몸을 움직였다. 해랑은 문득 임금님은 어떤 분이실지 궁금해졌다. 이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젊고 잘생긴 분이시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용안도, 성정도 모두 궁금했다. 해랑은 유생들의 도움을 받아 앵삼을 입고 목화를 신은 뒤 밖으로 향했다. 전하의 앞으로 간다는 생각에 긴장되어 괜히 걸음이 빨라질까 조심하며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우해랑……?”

싸늘한 목소리가 해랑의 귀에 닿았다. 등골이 오싹해진 해랑이 몸을 움츠렸다 펴며 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그 곳엔 해진이 있었다. 복식을 갖춰 입고 다른 대신들과 함께 근정전으로 향하던 중인 모양이었다. 해랑은 걸음을 멈추고 해진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해진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으나 묘하게 비틀린 얼굴이었다. 틀림없이 해랑이 장원 급제자란 사실을 모른 채 온 것이 분명했다. 해진이 해랑을 보고 있으니 다른 대신들이 해진에게 물었다.

“장원 급제자와 아는 사이입니까?”

“아, 예. 아주 잘 알지요.”

해진의 말에 해랑과 해진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대신 하나가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아! 혹시 우 장령의 형제입니까?”

대신의 말에 해진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피며 잡아 두었던 발을 옮겼다.

“…그만 가시지요.”

해진이 먼저 쌩하니 앞서 나가자 다른 대신들이 무안한 듯 해진의 뒤를 따랐다. 해랑은 형 해진이 사라지는 걸 보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해랑이 과거에 급제할 줄도 몰랐건만 심지어 장원에 오른 것에 해진은 꽤나 분한 듯했다. 해진에게 한 방 먹인 기분이 든 해랑은 기분이 좋아 근정전까지 가는 내내 실실 웃었다. 아버지인 우현영이 자신을 봤을 때의 표정이 기대되었다.

마침내 해랑의 눈 앞에 근정전이 펼쳐졌다. 근정전 가운데에 놓인 돌길 양 옆으로 태조국의 모든 문무대신들이 양 옆으로 도열해서 해랑을 맞이하였다. 해랑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근정전 가운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던 해랑은 해진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그 뒤 이미 소식을 접한 우현영의 감격 어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해랑은 우현영에게 눈인사를 한 뒤 앞으로 향했다. 드디어 임금의 앞에 당도한 해랑은 무릎을 굽혀 앉아 고갤 숙여 어사화를 기다렸다. 어좌에 앉아 있던 왕이 일어나 서서히 해랑에게로 다가왔다. 마침내 어사화가 해랑의 머리에 씌워지고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 해에도 어김없이 좋은 인재가 뽑혔으니 모두 기뻐함이 마땅하다. 장원 급제한 이를 축하하세!”

왕의 명에 모든 이들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해랑 역시 큰 절을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납작 엎드린 해랑의 머리 위로 왕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장원 급제자 우해랑은 고개를 들라.”

위엄있으면서도 자상한 목소리가 어딘지 익숙했다. 해랑은 조심스레 고갤 들었다. 그리고 눈 앞에 선 전하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해랑의 두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혀, 형민……?!”

해랑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른 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왕 빼고는 아무도 듣지 못한 듯했다. 해랑의 모습에 형민이 픽 웃더니 몸을 가까이 붙여 속삭였다.

“미안허이. 내가 왕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네.”

“저, 전하…….”

“자세한 건 나중에 또 얘기 나눕세. 오늘은 그저 즐기게나.”

형민이 해랑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어좌로 돌아갔다. 해랑은 아직도 믿지를 못하고 형민을 보았다. 그러니까, 저잣거리에서 돈 없어 실랑이 벌이던 자가… 궁을 둘러 싼 담에서 함께 담소를 나누다 과거 시험 문제를 던져주고 간 자가 바로 주상 전하였단 말인가?! 해랑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입을 쩍 벌리고서 굳었다. 물론 곧 다 함께 연회를 열기 시작했으므로 금방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계속해서 형민에게로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놀랍게도 석현이 병영에 합류한 뒤로 류환의 군대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황해도를 점령하려던 유나라 오랑캐들은 처음으로 이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합류한 수도의 관군들도 태조국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데에 한 몫을 했다. 석현은 류환에게 여러가지 전술을 제안하며 적군을 흔들었다. 전쟁터에선 민첩하고 날카로운 검술로 적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병법을 통달한데다 무술까지 뛰어난 석현은 그야 말로 최고의 자원이었다. 류환은 석현을 굉장히 신뢰했으며 주언 역시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석현을 멸시하던 자들도 하나 둘 입을 닫기 시작했고 석현에 대한 신망은 두터워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뒤에서 시기하는 자들은 존재했다. 석현의 존재가 점점 커져감에 따라 정작 무관들의 입지가 약해져 가고 있었다. 특히 주언을 따르는 이들의 불만이 가장 컸다. 류환이 주언보다 석현을 더 챙긴다는 것 같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물론 류환을 잘 아는 주언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못박았으나 주언의 수하들은 그리 여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언이 류환의 눈에 잘 들어 위로 올라가야 자신들의 위치도 함께 올라갈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다시 해주를 탈환하기 위해 류환의 군사들이 행군을 하던 때였다. 산 하나를 넘어 가야 해주의 경계에 있는 향주성에 도달할 수 있었던 터라 험할지라도 류환은 산을 넘는 것을 택했다. 산에는 적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고 워낙 험해 온갖 변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허나 향주성부터 되찾아야 해주를 탈환하기에 수월했기에 감내해야 하는 위험이었다. 그렇게 한참 산을 넘는 중이었다. 마침 밤이 되어 류환은 행군을 멈추고 야영을 할 것을 명했다.

모두가 짐을 풀고 나뭇가지를 구해다가 천막을 쳤다. 혹시 모를 매복에 불은 켜지 않은 채 다들 고된 행군으로 지친 몸을 뉘이기 시작했다. 석현은 병영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천 하나만 바닥에 깔고 누웠다. 아름다운 별들이 하늘을 수놓아 황홀할 정도였다. 해랑은 저 하늘을 보면 분명 수 많은 별들보다 아름답게 웃을 거라고 석현은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해랑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희미하게 맴돌았다. 점점 옅어져 가는 해랑의 체향과 체온 모두가 그리웠다. 울컥 치미는 감정에 석현은 칼자루를 꽉 쥐고 눈을 감았다. 그 때,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현이 빠르게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나무 뿐인지라 석현은 더욱 경계했다. 천천히 걸음을 움직이며 검을 뽑으려던 그 때, 어디선가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화살은 석현의 팔 바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스쳐간 화살이 나무에 박히자 석현은 다가가 화살을 뽑아 확인했다. 날아온 화살을 챙긴 석현은 이를 바득 갈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달렸다.

석현은 앞서 달려가는 인영을 발견하고 그 뒤를 쫓았다. 워낙에 키가 크고 달리기가 빠른 석현인지라 금세 활을 맨 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거의 다 따라붙어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때쯤, 갑자기 어디선가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모두 주언의 수하들이었다. 석현은 바로 직감했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저들을 다 베어 버릴 수는 있으나 양반이기 그렇게 한다면 분명 문책을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석현은 칼을 도로 칼집에 넣고는 말했다.

“이런 무의미한 싸움은 이 전쟁에서 필요 없습니다.”

석현의 말에 비웃던 주언의 수하들은 되려 기세등등하게 무기를 꺼내었다. 그에 석현은 하는 수 없이 칼집 채로 쥐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주언의 수하들이 소리치며 달려들려던 그 때, 어디선가 또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모두가 놀라 주변을 살피는데 석현은 날아든 화살을 확인했다. 이건 틀림없는 오랑캐의 화살이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주언의 수하들이 허둥대는 사이 숨어있던 적군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석현은 칼을 꺼내어 적군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주언의 수하들에게 가까이 가 말했다.

“제가 길을 틀 테니 빨리 장군님께 보고하십시오.”

혼비백산하던 주언의 수하들이 고갤 끄덕이자 석현은 빠르게 움직여 달려드는 적군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부러 병영 쪽과 반대로 움직이며 주언의 수하를 보내려는데 수하 중 하나가 석현의 옆에서 넘어졌다. 석현이 그를 붙들어 일으켰다.

“빨리 가십시오! 어서 장군께 말씀을… 크윽!”

넘어졌던 수하가 갑자기 석현의 허벅지 앞을 단검으로 찔렀다. 예상치 못했던 공격을 받은 석현이 무너지고 그 틈을 타 주언의 수하들이 모두 병영 쪽으로 달렸다. 그들이 가는 쪽을 노려보던 석현은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꾹 누른 채로 마주 달려오는 적군들을 보았다. 일단은 이들을 먼저 해치워야 했다. 석현은 이를 악 물고 몸을 일으켜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왜인지 해랑이 떠올랐다. 석현은 고통으로 인한 것인지 오기로 인한 것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적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작품후기]

와아아 벌써 30회네요!

제가 글을 30회나 쓸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ㅠㅠ

이게 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ㅠ,ㅠ...♥

쓰면서 지칠 때도 많지만 독자님들의 응원에 웃습니다 !

앞으로 몇 화까지 갈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

포기하지 않고 꼭 완결을 낼 것이니 부디 힘을 주셔요 ><

늘 감사드립니다 ! 싸랑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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