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해랑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상상 이상으로 고된 일이었다. 그 놈의 유가행렬이 뭔지. 다행히 도성 안에 살지 않아 망정이지 그랬다면 사흘 내내 행렬을 했을 것이었다. 해랑은 어사화를 쓰고 말을 탄 채로 반나절을 간 뒤, 그대로 마을을 계속 돌아다녀야 했다. 해랑이 집에 들어온 것은 달이 뜨고도 한참 뒤였다. 완전히 녹초가 된 해랑은 집에 돌아와 자신을 맞이하는 이들 사이에서 석현의 얼굴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석현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은 해랑은 부모에게 인사를 드릴 때에도 정신이 빠져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피곤함을 핑계로 대충 마무리를 하고 안채에서 나온 해랑은 급히 오월이를 찾았다. 마침 부엌에 있던 오월이 눈 앞에 나타나자 해랑이 다짜고짜 물었다.
“오월아. 석현이는 어디 있어?”
“아… 저 그게…….”
해랑의 질문에 난처한 얼굴을 하는 오월에 해랑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해랑은 오월을 채근해가며 석현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오월이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며 해랑에게 그 동안의 일들을 얘기했다.
“석현 오라버니가… 도망을 쳤대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도망치다니?”
“칼 한 자루와 말 한 마리를 훔쳐 해주로 달아났대요. 도련님께서 집을 떠나시고 얼마 안 돼서요.”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석현이가 그럴 리 없어.”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하던 해랑은 다시 안채로 달렸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우현영의 방문 앞에서 해랑이 외쳤다.
“아버지, 저 해랑입니다.”
“들어오거라.”
다시 돌아온 해랑에 우현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올려보았다가 이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해랑에게 다가갔다. 혼란스러운 두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흡 하나 제대로 하질 못하는 해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불안정했다.
“해랑아, 무슨 일이냐? 응?”
“아버지. 석현이가 정말로 칼과 말을 훔쳐 해주로 갔습니까?”
우현영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해랑을 붙잡아 눈을 마주했다. 해랑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듯 보였다. 석현이 없어진 것이 이리도 서글픈 일일까. 해랑에게 석현은 어느 정도로 자리잡은 것일까. 우현영은 해랑의 상태에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해랑을 달래려 애를 썼다.
석현이 찾아 온 그 날 밤, 석현은 우현영에게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칼은 우현영의 바로 옆 바닥에 내리 찍혔을 뿐, 아무런 상처를 내지 않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우현영의 얼굴 위로 갑자기 뜨거운 것이 뚝 떨어졌다. 석현이 울고 있었다. 석현은 차마 해랑의 아버지를 죽일 수가 없었다. 죽이지 못하는 대신 칼과 말 한 마리를 우현영에게서 얻어냈다.
‘어디 갔느냐 묻거든 이 것 들을 훔쳐 달아났다고 하십시오.’
우현영은 그날의 잔상을 얼른 털고 해랑을 추스리는 데에 힘썼다.
“그래. 그랬다. 그 앤 이제 이 곳을 떠났어. 아마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게야.”
우현영의 말과 동시에 해랑의 두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석현이 그런 일을 벌일 리 없었다. 분명 자신이 과거 시험을 보고 오면 이 곳에서 기다려 줄 것이라 했던 석현이었는데.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해랑이 우현영에게 매달렸다.
“아버지. 석현이 거기에 가면 안 돼요. 전쟁터 잖아요. 거기에 가면… 가면 안 되는데…”
정신이 나간 채로 눈물 범벅이 되어 중얼거리는 해랑에 우현영이 깜짝 놀라 해랑을 두 팔로 붙들었다.
“해랑아! 정신 차리거라. 어찌 이러는게야? 그 애는 노비일 뿐이다. 네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노비일 뿐이라뇨? 석현이는 아버지의 오랜 동무의 아들 아닙니까? 이젠 그냥 노비 취급하시는 겁니까? 이러실 거면 제 곁에 두지나 마시지… 왜… 흐윽…….”
해랑이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우현영은 할 말을 잃고 무너진 아들을 멍하니 보았다. 설마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 아들이 혹여 석현에게 남들보다 더 큰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해랑에게 직접 묻고 싶었으나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저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두려워서.
*
며칠이나 잠이 들었던 걸까.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킨 석현은 아직 덜 아물어 욱신대는 허벅지에 작게 신음했다. 석현은 완전히 굳은 것 같은 손가락을 쥐었다 펴 본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상병들을 모아 둔 천막이 아닌 온전히 석현만이 있는 작은 천막이었다. 석현은 의아해하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아직 이 곳 저 곳이 쑤셨으나 움직일 만했다. 천막의 입구를 걷어내며 밖으로 향해보니 이미 산을 벗어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탈환해야 할 목표인 해주성이 눈 앞에 보였다. 숙부가 계셨던 바로 그 해주성이. 석현이 우두커니 해주성을 바라 보고 있을 때였다.
“석현아!”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석현을 불렀다. 류환이었다. 석현은 류환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류환은 석현이 반가운지 한 달음에 달려왔다.
“일어났구나. 모두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아니다, 아니야. 송구하다니. 네가 얼마나 큰 일을 해냈는지 아느냐?”
“제가 무얼 했습니까?”
“적군의 주요 인물을 베었다. 그 외에도 많은 병력을 해치웠지.”
석현은 그제야 자신이 이성을 잃고 칼을 휘두른 것이 떠올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코 끝엔 아직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했다.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석현은 자신이 살인귀가 된 것 같았다. 제 속에 눌러왔던 분노가 터져 나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괴로웠다. 토악질이라도 해서 속을 비워내고 싶었다.
“저 혹시… 그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누구 말이냐?”
“그… 종사관님의 수하들 말입니다.”
석현의 말에 류환이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풀어내며 미소 지었다.
“너무 걱정 말거라. 널 버리고 온 자들은 내 군법으로 엄중히 다스릴 것이니.”
석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하여 주언의 수하들이 더 큰 벌을 받게 할 것인가에 대해. 하지만 그 자들에 대한 분노는 사실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작자들이었다. 때문에 구태여 자신을 찌르고 간 일에 대해선 발설하지 않기로 했다. 석현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자잘한 일에 더는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목전에 둔 해주성이라는 커다란 목표물이 있기 때문에.
그 날 밤, 석현의 천막에 의외의 인물이 찾아왔다. 석현이 붕대를 교체하고 있을 때였다. 슬그머니 열리는 천막 입구에 석현이 고갤 돌려보니 그 곳엔 주언이 서 있었다. 석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갤 숙여 인사하자 주언이 복잡한 표정으로 석현을 보았다. 주언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는 석현이 의아한 듯 주언을 바라보았다. 주언은 석현에게 가까이 가더니 갑자기 허릴 숙였다. 주언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석현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주언은 허릴 숙인 채로 석현에게 말했다.
“미안하네. 내 부하들이 자네를 위험에 빠뜨렸어.”
“아, 아뇨. 아닙니다. 이미 지난 일이고 더는 괘념치 않기로 하였으니 종사관님도 신경쓰지 마십시오.”
“부하들을 잘못 둔 내 잘못이 크네.”
석현은 자신의 앞에서 허리 숙인 주언을 가만히 보았다. 제게 이렇게까지 미안함을 표하는 주언이 고마웠다. 주언이 다시 허리를 펴자 이번엔 석현이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이리도 제게 마음 써 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석현의 말에 주언이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사실 나도 자네를 좋아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야.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온 것 같았거든.”
주언의 솔직한 고백에 석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주언은 그런 석현을 보고는 살짝 미소 지으며 석현에게 말했다.
“허나 홀로 싸워 이겨낸 자네를 보니 확실히 알겠네.”
“무엇을 말입니까?”
“자네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걸.”
주언의 말에 석현의 두 눈이 커졌다. 얘기하지도 않은 것을 어찌 알았는지 몰라 휘둥그레 해진 석현에게 주언이 말했다.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졌어.”
주언이 그렇게 말하고 석현의 어깨를 툭 치고 밖으로 향했다. 석현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느냐 묻고 싶었으나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주언은 입구에 서서 석현의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보더니 툭 말을 던졌다.
“나중에 알려주게. 그토록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지.”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간 주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석현은 기둥에 매어진 자신의 검을 보았다. 해랑의 집에서 들고 나온 바로 그 검. 자신이 이 검으로 사람을 죽이고 심지어 우현영까지 베려고 했던 것을 알면 해랑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석현은 겁이 났다. 또 자꾸 해랑을 그리는 자신이 야속했다. 약해져선 안 된다. 석현은 밖으로 나가 우뚝 서있는 해주성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 곳만 도달하면 되는 것이다.
*
처음으로 궁에 들어가 일하게 된 날, 정신없이 아침 조회를 마친 해랑을 형민이 불렀다. 해랑에게 직위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형민은 해랑에게 동으로 만든 패 하나를 주었다. 해랑은 공손히 패를 받아 확인했다. 패에 적힌 것은 사간원이었다.
“자네는 오늘부터 사간원에서 일할 것이야.”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 전하.”
형민은 흐뭇하게 해랑을 보다 물었다.
“무슨 일부터 처리하고 싶은가?”
형민의 질문에 해랑은 순간 스치는 생각에 눈을 빛냈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해주에 가고 싶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형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해랑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전쟁이 난 곳일수록 관리가 소홀해지고 엉망이 되기 쉬운 법입니다. 제가 가서 그 곳을 감찰하고 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전하.”
해랑은 허리 숙여 간청했다. 꼭 가야만 했다. 석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째서 그리 무정하게 떠났는지, 왜 하필 해주로 간 것인지. 만난다면 와르르 쏟아 낼 말들이 한 보따리였다. 하지만 그 보다도 더 중한 건, 너무도 그리운 석현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봐야 겠다는 것. 그 것뿐이었다.
[작품후기]
여러분은 지금 해랑이가 직진수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