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최후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이들은 피곤한 기색보다도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다. 전투에 참여한 자신들이 패색이 짙었던 나라에 숨결을 불어넣은 전쟁영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대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뛰쳐나와 얼싸 안으며 승전보를 알리고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류환과 주언은 입가에 걸린 미소를 숨기지 못 했다.
“이제 맘 편히 잘 수 있겠구나.”
류환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자 주언이 따라 웃었다. 석현은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전쟁이 끝났으나 마음 속 소용돌이는 여전했다. 되려 허무함만이 남아 석현을 흔들어댔다. 기쁜 듯 하면서도 기쁘지 않았다. 해주성에서 몰래 가져온 숙부의 서신들이 가슴팍에 있었다. 어서 확인해야 한다. 석현은 류환을 향해 몸을 틀었다.
“장군. 소인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류환이 상기된 얼굴로 석현을 보았다. 함께 여흥을 즐기고 싶은 눈치였으나 석현에겐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벌써 들어가는가?”
“예. 피로하여 들어가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긴. 그리 공을 세웠으니 그럴만도 하지. 알겠네. 들어가보게나.”
“예, 그럼…….”
석현이 허리 숙여 류환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몇 걸음 옮기던 중에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왕께서 누군가를 병영으로 보낸 듯 했다. 석현 역시 되돌아가 납작 엎드려 왕의 신하를 맞이해야 했지만 무거운 몸에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못 들은 척 애써 무시하고 가려던 그 때, 갑자기 익숙한 향이 석현의 후각을 자극했다. 다리가 절로 멈췄다. 무겁던 몸에 힘이 쭉 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미약하지만 자극적인 그 향. 너무나도 그립던 그 향.
“인사드립니다. 사간원 간관 우해랑이라고 합니다.”
석현은 제 등 뒤로 명확히도 꽂히는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목소리의주인을 발견한 석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혹시 꿈은 아닐까. 하지만 찬 바람이 싣고 오는 매캐한 탄 내음은 현실임을 알렸다. 믿어지지 않아 두 눈을 암만 꿈뻑여봐도 지워지지 않는 존재에 석현의 코 끝이 찡하고 울렸다. 벅차오르는 가슴이 제멋대로 들썩였다. 마음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었다. 여전히 고운 해랑은 류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쩐지 좀 더 성숙해진 듯한 모습에 석현이 넋을 빼고 있던 중, 그런 석현을 주언이 발견했다.
“이보게, 석현이. 뭐하고 서 있는가? 와서 인사드리지 않고.”
속 모르는 주언의 말에 석현이 움찔했다. 동시에 해랑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해랑의 맑은 두 눈이 잔뜩 커져 석현을 담았다. 순식간에 커다란 파도가 둘을 집어 삼켜버렸다. 무방비하게 파도를 맞이한 두 사람은 어쩌지를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몸뚱이는 나무 토막처럼 굳은 채로. 굳게 마음 먹고 온 해랑마저도 속수무책이었다.
“저……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레 묻는 류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해랑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무언가가 툭, 볼 위를 스쳤다. 눈물이었다. 우스운 꼴을 면치 못한 해랑이 당황해 허둥거리자 류환은 시선을 거두어 석현을 보았다. 석현의 모습 또한 익숙치 않음은 마찬가지였다. 늘 사방을 경계하며 잔뜩 날을 세우던 석현이 저리 넋나간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둘 사이의 알 수 없는 기류에 류환은 슬쩍 자리를 피해주었다. 모여있던 이들을 모두 돌려보내며 편히 쉬라 명했다. 해랑은 차마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하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석현에게로 다시 고갤 돌렸다. 석현은 제법 복잡한 얼굴로 해랑을 보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씩 석현에게로 옮겨가는 발걸음에 납덩이를 매단 것만 같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석현이 어쩐지 두려웠다. 혹 신기루처럼 다시 사라져 버릴까봐.
“…도련님.”
가까이 마주한 석현은 사라지지 않은 채 목소리를 내었다. 자신을 부르는 석현에 해랑은 하마터면 울컥 울음을 터뜨릴 뻔했으나 겨우 참았다. 대신 손을 뻗어 상처 가득한 석현의 얼굴을 손 끝으로 쓸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
“…….”
“석현아.”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석현은 타들어가는 속을 겨우 가라앉히며 해랑을 제 천막 안으로 들였다. 좁은 천막 안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둘은 침묵만을 지켰다. 어색한 공기에 먼저 백기를 든 쪽은 역시나 해랑이었다. 해랑은 씁쓸한 웃음을 띄며 석현에게 물었다.
“어찌 내게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떠났어?”
석현은 차마 답하지 못하고 앙 다문 입술에 더욱 힘 줄 뿐이었다. 해랑에게 그 모든 진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석현 혼자만 감내하면 될 일이었다. 굳이 해랑에게까지 무거운 짐을 얹을 순 없다.
“……더는 노비로 살 수 없어서 도망쳤습니다. 그런 제가 도련님께 어찌 말 한 마디 남기고 올 수 있겠습니까?”
“왜, 왜 갑자기 그런거야? 나 없는 사이에 업득이가 괴롭히기라도 했어?”
“…아뇨.”
“그럼 대체 왜……?”
“말씀 드렸잖습니까. 본디 저도 양반이었으니 노비 노릇 하기 싫어 나왔다구요.”
매섭게 날아드는 석현의 말에 해랑이 움찔했다. 석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릴 지껄여야만 했다. 그래야 해랑을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랑 주변에 존재하는 악에게서 지키려면 우선 자신과 멀어지게 하는 수 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도련님 수발드는 것도 지쳤습니다.”
“……석현아.”
“원래 제 길이었던 무인의 길로 다시 들어가려 하니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거짓말이지? 너 이러지 않았잖아. 응?”
해랑이 급히 석현에게 다가와 소매를 붙들었다. 혼란스런 얼굴로 저를 보는 해랑에 석현은 겨우 세운 벽이 무너질까 주먹을 꽉 쥐고는 해랑의 손을 뿌리쳤다. 해랑의 두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당연히 안 그랬죠. 그 집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
“살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말도 안 돼. 그럼, 그럼 네가 나한테 고백했던 마음들은 대체 다 뭐야?”
진실을 거짓으로 뒤덮는 것이 이리도 힘든 일이라니. 석현은 스스로의 마음을 짓이기고 일그러뜨려가며 강하게 대답했다.
“살기 위해 그 정도 거짓말은 해야지요.”
해랑은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넘쳐흐르는 눈물 때문에 흐느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호흡이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이 모든게 거짓이길 바랐으나 석현은 이미 대화를 단절한 듯 등을 돌린 채였다. 붙들고 매달려보고 싶었으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아 울었다. 석현은 등 뒤에서 숨 넘어가는 소리로 울음을 삼키는 해랑에 심장이 찢기는 듯 했다. 하지만 이대로 약해진다면 이제까지 한 말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셈이었다. 석현은 애써 냉정하게 해랑을 향해 말했다. 차마 해랑을 쳐다볼 용기까지는 없었기에 등을 돌린 채로.
“그럼 이제 나가 주십시오. 방금 전쟁을 치르고 온 터라 피곤합니다.”
석현의 말에 해랑은 주먹을 꽉 쥐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랫 입술을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금방이라도 피가 터질 듯 했다. 석현의 굳은 뒷 모습을 해랑이 노려보았다. 밉고 괘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끌어안고 싶은 자기 자신이 더 미웠다. 배신감에 치를 떨어도 여전히 심장은 석현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지금 한 말 모두 후회하지 않는거지?”
천막을 나서려던 해랑이 물었다. 석현은 차오르는 호흡을 겨우 눌러 삼키고 대답했다.
“예.”
마침내 해랑이 천막을 벗어나자 석현은 급히 몸을 돌려 입구를 보았다. 참았던 숨이 터지고 맥이 탁 풀렸다. 침상 위에 털썩 앉은 석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렇게 거짓을 말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건 너무도 큰 착각이었다. 감당하기에 너무 큰 고통이었다. 그야말로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은 것을. 뒤늦게 석현의 두 눈에서 자신을 삼켰던 파도가 밀려나왔다.
*
어쨌든 임금께서 보내주신 것이기에 임무는 수행하고 가야 하는 해랑은 류환의 병영에서 하루를 더 지내야 했다. 마음이 무거웠으나 별 수 없었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으니. 예상치 못한 석현의 말들에 상처투성이가 된 해랑이었다. 가시돋힌 말들이 석현의 입에서 나오고 나서도 거짓이라 믿고 싶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다. 석현은 해랑과 일절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했다. 병영 구석구석을 감찰하는 와중에도 석현을 본 적이 없었다. 석현의 천막을 지날 때 마저도. 상심한 해랑은 일정을 마친 뒤 따로 마련된 제 천막으로 돌아와 멍하니 앉았다. 자꾸만 석현의 말들이 귓가에서 맴돌아 해랑을 괴롭혔다.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툭 떨구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옷자락을 당겼다. 다온이었다.
“이리 와. 같이 있자.”
침상에 있던 다온이 해랑에게 다가오자 해랑은 어쩐지 위로 받는 기분이 들었다. 깨끗하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저를 보는 다온을 해랑은 품에 안았다. 문득 하루 종일 이 좁은 곳 안에서만 있었을 다온이 안쓰러워졌다. 해랑은 다온을 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 서늘한 밤 공기가 둘을 감쌌다. 쏟아질 듯한 별들에 다온이 신기한 듯 옹알댔다. 해랑은 그런 다온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석현이 자고 있을 천막 쪽을 보았다.
“이제 우리 다시 돌아가야겠다. 그치?”
다온이 마치 말을 알아들은 듯 웃으며 해랑을 보았다. 해랑은 다시 안으로 몸을 들였다. 예정보다 조금 이른 출발 준비를 위해서.
[작품후기]
너무 너무 너무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라라루샤입니다
그동안 다들 잘 지내셨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ㅎㅎ
해가 바뀌는 동안 대체 무얼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일단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ㅠㅠ
전업작가가 아니다보니 개인적인 일들이 한꺼번에 겹쳐서 도저히 글 쓸 정신이 없었습니다 따흑흑...
이제 겨우 정신차리고 하나 가지고 왔네요 허허...
오랜만에 글 쓸라니까 참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싶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다시 시작했으니 또 열심히 달려볼랍니다 !
올 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기다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