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차가운 새벽 공기가 해랑 일행을 감쌌다. 품 안의 다온이 뒤척이자 해랑은 아이를 꼬옥 안았다. 해랑은 호위병들에게 아이가 있어 빠르게 달릴 수가 없으니 조금 일찍 출발하자고 했다. 막상 길을 떠나고 보니 춥고 어두웠다. 괜히 자신 때문에 무리한 출발을 한 것은 아닌지 노파심이 났다. 정작 호위병들은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며 호쾌히 웃어보였지만. 석현이 있는 공간에서 한시라도 일찍 벗어나고 싶었다. 그건 필시 서로에게 괴로운 일이었다. 다시 한 번 대화의 물꼬를 튼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 뻔했다. 서로를 더더욱 상처입힐 테다. 싸늘한 석현의 눈빛에서 해랑은 절망감을 느꼈다.
‘살기 위해 그 정도 거짓말은 해야지요.’
귓가에 윙윙 맴도는 석현의 목소리에 해랑은 아찔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다 이렇게 변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예전에 자신을 보던 그 따스한 눈빛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석현과 함께 했던 시간들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진 듯 했다. 또다시 울컥하여 눈물이 흐를 뻔 했으나 겨우 참아냈다. 이겨내야 했다. 우선은 돌아가서 생각과 마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해랑은 힘주어 말고삐를 잡았다. 한참을 가도 가도 워낙에 느린 터라 얼마 가지를 못했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산 속 꽤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인지 해가 잘 들지는 않아 여전히 어두웠다. 한참을 말없이 가던 중, 해랑 일행은 잠시 말을 멈추어야했다. 꽤나 비탈진 경사로가 눈 앞에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필 풀이 무성하고 그 위로 아침 이슬이 맺혀있어 자칫 미끄러울수 있는 구간이었다.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호위병에게 묻자 그 역시 난색을 표하며 머릴 긁적였다.
“아무래도 말에서 내려 걷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해랑은 잠든 다온을 내려다보고는 고갤 끄덕였다.
“그리 하지요.”
말에서 내린 해랑에게 호위병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아이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 아이 정도야 제가 안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럼 대신 말을 끌고 가겠습니다.”
“예. 그럼 부탁드립니다.”
호위병 하나에게 말을 맡기고서 해랑은 다온을 안은 채 걷기 시작했다. 조금 위험했지만 조심조심 걸으면 충분히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우겨우 반정도 올라갈 즈음, 경사진 언덕 끝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냐!”
이를 발견한 호위병이 소리쳐도 반응이 없는 상대방에 해랑 일행은 걸음을 멈추었다. 해랑은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다온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호위병들이 천천히 검 쪽으로 손을 옮기는 그 때, 언덕 위에 있던 한 사람은 두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되더니 족히 열 명이 넘는 인원으로 늘어나 있었다. 뒤이어 갑자기 햇살이 숲 안을 비추었다. 그제야 그들의 형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사태가 파악된 해랑 일행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자들이 틀림없는 오랑캐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
동이 트기 직전, 석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어지간히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마음에 잠을 제대로 이루질 못해 일찍 눈을 떴다. 찬 공기가 도는 천막 안에서 석현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해랑의 상처입은 두 눈동자가 자꾸 앞에 있는 듯 아른거렸다. 정제되지 못한 말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가 버렸다. 그게 화살이 되어 해랑을 무차별히 공격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던 게 아닐까, 문득 후회도 되었다. 해랑은 오늘 아침 식사 후 떠난다고 들었기에 석현은 그 때 나가 떠나는 뒷모습이라도 볼 참이었다. 그러기 전에 확인할 것이 있었다. 석현은 침상 밑으로 손을 넣어 종이 뭉치들을 꺼냈다. 해주성에서 석현이 가지고 나온 서신들이었다. 세 장의 종이에는 숙부가 고심해서 썼을 내용들이 이어져 있었다.
[…신이 감히 청하오니 우의정 노의석을 파면하시고 사헌부를 개혁하소서. 그들은 왕권을 농락하고 위협하는 자들이옵니다. 조금이라도 그들을 더 방치한다면 분명 역모로 이어질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절절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충신의 글이었다. 임금께는 전달되지 못한 세 장의 서신이었다. 종이 한 장 한 장에는 모두 해주 부사의 직인이 정확히 찍혀있었다. 석현은 그것을 다시 고이 접어 작은 함에 넣고는 침상 밑으로 밀어넣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쓰일 것이었다. 석현은 두 눈을 빛내며 다시금 마음을 잡았다. 해랑을 생각하면 너무 아프지만 견뎌내야 했다. 작금의 상황에서 해랑에 대한 연정은 사치일 뿐이었다. 후, 하고 깊은 숨을 뱉어 낸 뒤 고갤 털고 일어난 석현이 입구를 걷어내자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병영은 잠에서 깬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제 이 곳과도 곧 작별이었다. 마무리된 전쟁터에서 더 볼 일은 없었다. 부상병들을 조금 더 쉬게하고 해주성 부근에 존재할 수도 있는 패잔병들을 처리하고 떠날 계획이다. 석현은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해랑의 존재를 찾았다. 하지만 어쩐지 보이질 않았다. 혹시나 싶어 해랑의 막사 쪽을 바라보았으나 말도, 막사 앞을 지키던 호위병들도 없었다. 석현은 한창 요리 중인 나이 든 병사에게 가서 조용히 물었다.
“혹시 오늘 아침 식사에 간관 나으리의 식사도 챙깁니까?”
노병은 석현이 말을 걸자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요리하느라 굽었던 허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크게 켰다. 그리고는 국자를 허공에 휘휘 저으며 답했다.
“아니, 어젯밤에 준비를 내가 다 해놓고 잤거든? 근데 오늘 대뜸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명령이 떨어졌지 뭐야!”
“어째서입니까?”
“이미 새벽에 떠나셨다던데? 거참, 갈거면 어제 미리 말하고 가던가. 에잇…….”
석현은 잠시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자기도 모르게 힘이 탁 풀려버렸다. 허무한 이별이었다. 이런 식으로 끝이 나버리니 맥이 빠졌다. 이젠 정말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석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마무리 짓고 몸을 돌렸다. 그저 해랑의 가는 길이 안전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급히 병영 안으로 뛰어 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다른 이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나 석현은 그를 눈여겨 보았다. 뛰어들어 온 이는 곧장 류환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석현 역시 그 뒤를 쫓아 류환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 입구를 열어 제끼자마자 류환의 두 눈이 커진 것을 보았다.
“소수의 오랑캐 놈들이 아직 남아서 도성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뒤쫓아서 잡아야 한다. 놈들은 소수여도 워낙 전투력이 강해 가는 곳마다 쑥대밭을 만들 것이 분명해.”
류환이 분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방이라도 뛰쳐 나갈 기세였다.
“저를 제외한 다섯 명의 정찰병이 뒤쫓고 있는 중입니다만… 놈들은 열 다섯 정도 됩니다. 그리고… 저……..”
“그리고?”
“아무래도 놈들의 동선과 간관 나으리의 동선이 겹칠 것 같습니다.”
우물대던 병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석현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류환의 막사를 뛰쳐나가는 석현에 류환이 당황하여 쫓아나왔다.
“석현아! 어딜 가려는 게냐? 석현아!”
빠르게 달려 말을 타고 나가는 석현의 뒷모습을 류환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다. 뒤이어 나온 주언 역시 황당한 듯 사라져가는 석현의 뒷모습을 보더니 곧 피식 웃고는 중얼거렸다.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 인가?”
“뭐라고?”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류환이 주언을 바라보며 묻자 주언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
오랑캐들은 느릿하게 해랑 일행을 향해 걸어 내려왔다. 마치 먹잇감을 눈 앞에 둔 맹수가 사냥 준비 동작이라도 하는 듯이. 해랑 일행은 뒷걸음질 치며 그들을 경계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뛰어봤자 벼룩인 꼴이었다. 그렇다고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도 없다. 이미 승리한 승전국의 신하들 아닌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기에 모두 칼을 꺼내어 대치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의기양양한 오랑캐들의 눈빛에 이미 승기가 올라가 있었다. 어느새 바짝 다가 온 오랑캐들은 예상 외로 공격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해랑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오랑캐가 해랑의 코 앞까지 다가오려 하자 호위병들이 해랑을 둘러쌓았다.
“비켜라. 저 녀석과 이야기를 좀 하고 싶으니.”
“어디 감히……!”
칼을 들려는 호위병을 간단히 제압한 오랑캐에 다른 병사들도 기세가 눌렸다. 해랑은 속 모를 오랑캐들의 행동에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분명 이런 식으로 도발을 하다간 모두가 희생될 것 같았다. 해랑은 최대한 긴장한 티를 내지 않고 그들을 상대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마십시오.”
“하지만 나으리!”
해랑은 병사들을 제지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오랑캐 잔당 중에서도 수장으로 보이는 이의 코 앞으로 가서 섰다. 그에 오랑캐의 수장이 씨익 웃으며 해랑을 훑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넌 좀 높은 관리인가 보군.”
“그저 태조국의 신하일 뿐이다. 너흰 패전국의 패잔병들일 뿐이고.”
“꽤나 도도하구만 그래. 그 아이는 뭐지?”
“…너희들이 벌인 전쟁의 희생양이다.”
자신을 ‘훈’이라 말한 오랑캐의 수장은 전사한 오랑캐 왕의 둘째 동생이었다. 그는 기어코 살아남아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도성으로 향하던 중 해랑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에겐 빠르게 궁으로 안내해 줄 길잡이가 필요했기에 해랑이 그 역할에 안성맞춤이라 생각했다.
“우릴 궁으로 안내해라.”
훈의 말에 해랑의 눈동자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 훈의 눈과 마주했다. 맑은 두 눈은 결연에 차 있었다.
“싫다면?”
해랑이 눈을 마주하고 서늘히 바라보자 훈의 표정 역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능글맞던 미소를 거두고 서슬퍼런 눈으로 해랑을 보았다.
“네 놈들을 모두 죽이고 궁으로 가 전부 불태울 것이다.”
적개심과 증오로 가득찬 목소리가 끓듯이 흘러나왔다. 해랑은 희생없이 이 상황을 모두 끝내고 싶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초조해지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아랫입술을 질끈 무는 순간, 밑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이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한 명이 아니었다.
“나으리! 간관 나으리!”
류환의 정찰병들이었다. 해랑이 급히 고갤 돌려 그들을 확인하려는 순간, 훈이 해랑을 순식간에 밧줄로 묶어 낚아챘다. 가벼운 해랑의 몸이 공중에 들리고 해랑은 놀라면서도 다온을 놓칠까 잔뜩 힘을 주었다.
“뭐하는 짓인가!”
“말을 안 들으면 무력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훈은 해랑을 들쳐업은 채 몸을 돌려 다시 위로 향했다. 그리고는 나머지 부하들에게 명했다.
“다 죽여라.”
[작품후기]
앞으로도 열심히 써서 가져오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