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다시 피비린내가 일었다. 해랑이 붙들려 옴짝달싹 못하는 사이 병사들과 오랑캐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칼날이 번쩍일 때마다 여기저기서 고통에 찬 소리들이 터졌다. 정찰병들이 합류하여 함께 싸웠으나 전투에 능한 오랑캐들을 이기기엔 여전히 무리였다. 말들은 놀라 도망가거나 오랑캐의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해랑은 자신의 일행들이 칼에 쓰러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고통스러웠다. 제발 그만 멈춰달라 애원해보아도 해랑보다 덩치가 서너배는 더 큰 훈에겐 그저 어린 아이의 보챔정도로 밖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해랑은 어떻게든 이 싸움을 멈추고 싶었다. 무의미한 희생은 원치 않았다. 이들의 목표는 분명하게 해랑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 하나만 희생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해랑은 순간 머릿속에서 스치는 묘안이 떠올랐다.
“그만 싸움을 멈추게 하라!”
해랑의 단호한 목소리에 훈이 콧방귀를 뀌듯 비웃음을 흘렸다.
“귀찮은 것들은 없애고 가는게 편하지.”
해랑은 이를 빠득 갈고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나만 데려가면 될 것 아니냐!”
해랑의 말에 훈이 고개를 돌려 해랑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훈의 기세에도 해랑은 되려 눈빛이 더욱 단단해졌다.
“앞장 설 테니 싸움을 멈춰라.”
훈이 태도를 바꾼 해랑에 씨익 웃고는 두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에 날카롭게 울리던 쇳소리들이 모두 멈추었다. 훈은 말 옆에 묶어두었던 해랑에게 다가갔다.
“진즉에 이랬으면 서로 좋았을 것을.”
해랑은 분했지만 우선 병사들을, 그리고 다온을 살려야 했기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말했다.
“이 아이를 우리 병사들에게 부탁하고 오겠다.”
“허튼 짓 하면 그 땐 모두 살아남지 못 할 것이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훈은 해랑을 묶었던 줄을 풀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해랑이 깊이 묶였던 숨을 털어내고 함께 묶여있느라 힘들어 울어대던 다온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랬다. 그리고는 비탈길 중턱에 쓰러져있는 병사들에게 달려갔다. 살펴보니 다행히 목숨이 끊어진 이는 없는 듯 보였다. 해랑은 미안함과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로 병사들 하나하나를 살펴가며 물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간관 나으리…! 으윽……. 혹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묻는 이들에 해랑은 입술을 감춰물어야만 했다. 애써 웃으며 고갤 끄덕이는 해랑에 마음이 놓인 듯 병사들도 함께 웃어보였다. 해랑은 호위병 중 하나에게 다온을 건넸다. 얼결에 받아든 호위병이 당황한 얼굴로 해랑을 보았다.
“어째서 아이를 제게 넘기시는 겁니까……?”
해랑은 병사의 어깨를 붙들고 자세를 낮추어 조용히 속삭였다.
“잘 들으십시오. 저는 저들을 도성으로 안내하는 척하며 도성 가는 길 반대쪽인 산 깊숙한 곳으로 유인할 것입니다. 그 동안 여러분은 병영으로 돌아가서 병력을 동원하여 오랑캐들의 뒤를 쫓으십시오.”
“예? 하지만 시간이 꽤 걸릴 것입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괜찮을 겁니다. 제 안위는 제가 챙길 테니 너무 걱정마시고 절 믿고 내려가십시오.”
병사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머뭇거렸다. 해랑은 그들을 재촉하였고 엉거주춤 일어난 병사들은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풀고는 제 품 속 깊은 곳에 매어둔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나 하나만 희생하면 끝이다.’
해랑은 다시 몸을 돌려 훈에게로 향했다. 아침 햇살과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해랑의 몸을 감쌌다.
*
미친 듯이 말을 몰아도 이상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빠르게 달리던 석현의 말인데도. 그만큼 초조했다. 불안함이 석현을 엄습했다. 혹시라도 잘못 되었을까봐 미칠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제대로 인사하지도 못했는데 해랑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또한 해랑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멀어진 것이기에 더더욱 해랑을 구해내야만 했다. 머리로는 그토록 해랑을 밀어내려 애를 썼지만 결국 모든게 수포로 돌아가고야 만다. 어쩔 수 없었다. 이리도 심장이 거세게 뛰기에.
‘제발… 제발 무사하십시오……!’
얼마나 달렸을까. 우거진 숲의 초입쯤 왔을 때 저 앞에 한 무리의 병사들이 서로 부축하며 나오고 있었다. 필시 류환의 정찰병들과 해랑의 호위병들이었다. 하지만 해랑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석현은 말을 몰아 그들에게 다가갔다. 석현을 발견한 병사들 역시 서둘러 석현에게로 향했다.
“다들 어찌되신 겁니까? 간관 나으리는요?”
석현이 다급히 묻자 병사들이 서로 앞다투어 오랑캐의 습격이 있었음을 고했다.
“그 오랑캐 놈들이 궁으로 가기 위해 길잡이가 필요해서 우릴 습격했네. 열심히 싸워보았지만 숫자에 밀려서 그만…….”
“거 아무튼 간관 나으리가 싸움을 멈추게 하려고 자진해서 끌려가셨어. 도성 가는 길 반대쪽으로 그 놈들을 유인한다고 했어. 어서 병영으로 가서 병력을 충원해야 하네.”
석현은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다.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단 말인가. 석현의 두 눈이 질끈 감아졌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고는 칼자루를 꽉 쥐었다. 석현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도성 반대편이라면 저 쪽 길, 검은 숲이 맞습니까?”
석현의 손 끝이 향하는 곳에는 유난히 시커멓게 보이는 숲이 있었다. 석현의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본 병사들이 고갤 끄덕이고는 아차 싶어 되물었다.
“자네… 혼자 갈 셈이야?”
석현은 이미 말 안장에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당황한 병사들이 어찌 하지도 못하고 그를 올려다 보자 석현이 대답했다.
“가서 전해주십시오. 간관 나으리를 궁까지 모시고 갈 이들을 모아달라고 말입니다.”
석현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힘차게 말을 몰고 나아갔다. 병사들이 놀라 뒷걸음질 치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들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가는 석현을 벙찐 채 바라보다 이내 병영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석현 역시 마음이 급해져갔다. 해랑이 홀로 오랑캐들의 손에 잡혀 있다니. 게다가 유인 작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혹시나 작전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해랑의 목숨은 분명 온전치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제발 버텨주십시오… 제발……!’
고삐를 쥔 석현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
이제는 완전히 숲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 오게 되자 해랑은 더욱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들이 혹여 수상한 낌새를 느낄까 초조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식은땀이 절로 나 등골을 따라 흘렀다. 더군다나 훈의 말에 함께 오른 터라 바로 뒤에 훈이 버티고 있었다. 자신이 긴장한 티를 내면 분명 바로 들킬 것이 뻔했다. 해랑은 혹시를 대비하여 천천히 손을 움직여 자신의 주머니를 꺼내려 했다. 사부작대는 옷소리 마저 내지 않으려 조심히 움직이던 그 순간,
“잠깐.”
훈의 낮고 살벌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해랑은 움찔하며 주머니로 향하던 손을 멈추었다. 모두 멈추게 한 훈은 말에서 내리고는 숲을 살피기 시작했다. 훈의 움직임에 다른 이들 역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사이 해랑은 빠르게 손을 놀려 주머니를 꺼내 쥐었다. 주머니의 입구를 살짝 열어 그 안에 있던 것을 꺼냈다. 환이었다. 과거를 보러가기 전 우 대감에게 부탁했던 아주 강력한 환약이었다. 원래였다면 한 알을 쪼개고 쪼개어 극소량으로 먹어야 하는 약. 하지만 해랑은 나누어 먹을 생각이 없었다.
‘이걸 지금 쓰게 될 줄이야…….’
석현과 함께 있고 싶어서 만든 약이었다.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었고 자신의 그런 모습으로 인해 석현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만들었던 것이다. 해랑은 씁쓸히 웃으며 천천히 말에서 내려왔다. 손에는 환약을 꽉 쥔채로. 해랑이 말에서 내려오자 훈이 두 눈을 번쩍이며 해랑에게로 다가왔다. 분노로 가득찬 눈에 해랑은 오히려 초연해졌다.
“감히 네 놈이 우릴 속여?”
“나는 이 나라의 신하다. 내 어찌 너희를 궁으로 들이게 두겠느냐?”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오랑캐들이 한꺼번에 해랑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해랑은 환약을 입 앞으로 가져와 웃으며 말했다.
“아니. 네 놈들 손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해랑의 입술이 벌어짐과 동시에 훈의 서슬퍼런 칼날이 공중에서 번쩍였다.
[작품후기]
매일 오고싶은데 맘처럼 잘 되질 않네요...ㅠㅠ
그래도 여러분의 선추코에 늘 힘 받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