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6/64)

차라리

해랑은 의원의 말대로 정확히 사흘이 지나자 완벽히 회복되었다. 이제 정말로 류환의 병영을 떠나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짐을 정리해가며 석현의 얼굴을 몇 번이고 떠올렸는지 몰랐다. 그도 그럴게 의식을 잃었던 시간 동안 제 옆에 있어준 사람이 석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처음엔 아닌줄로만 알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 들어온 한 남자는 계속해서 해랑의 곁을 지켰다. 종종 해랑의 옆에서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기도 했다. 설마 석혁일까 싶어 억지로 뜬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주언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채비를 도울 때였다.

“석현이가 많이 걱정했습니다. 이리 건강해지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예……?”

주언의 말에 놀란 해랑이 굽혔던 허릴 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랑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언은 제 할 일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 밤낮없이 이 곳을 지켰습니다. 아마 모르셨겠지만요.”

“…….”

“아, 말하면 안되는 건가?”

주언은 혼자 중얼거리고는 픽 웃으며 일을 마무리하고 막사를 나갔다. 혼자 남은 해랑은 주언의 말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 놓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매몰차게 굴 땐 언제고 위험해 처한 자신을 구하고 내내 보살피기까지 한 석현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기뻤다.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석현의 말들이 전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짐을 전부 다 싸는 내내 해랑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짐이 전부 다 정리가 되었기에 함께 이동할 이들을 불러 말에 실어야 했다.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해랑이 막사를 나가려는데 입구 바로 앞에 누군가 서 있어서 하마터면 부딪힐 뻔 했다. 깜짝 놀란 해랑이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치다 넘어질 뻔 하자 놀란 상대방이 팔을 뻗어 해랑을 붙들었다. 서로의 얼굴이 코 앞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몸이 밀착되었다. 얼굴을 올려다보니 그제야 누구인지 확인 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해랑의 온 몸에 화르륵 열이 올랐다.

“석현아.”

막사 입구를 붙든 채 해랑을 안고 있는 이는 석현이었다. 석현은 당황한 듯 하면서도 해랑을 놓아주진 않았다. 그에 해랑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슬금슬금 벗어나려하자 되려 석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흡, 하고 숨을 집어먹은 해랑은 석현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야 했다. 그런 해랑을 가만히 보던 석현은 천천히 팔을 풀어 해랑을 놓아주었다. 민망해하는 해랑을 보는 석현의 눈엔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있었다. 한 번 틀어졌던 사이인지라 어색해하는 해랑에 석현은 막사 입구를 닫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전 번과 달리 부드러운 음성에 해랑의 맥이 빠르게 튀어올랐다. 해랑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 위해 석현의 시선에서 멀어져서 이미 다 정리한 짐들을 재차 정리하는 척 했다.

“괘, 괜찮아. 아주 멀쩡해.”

“…다행입니다. 아이도 건강하니 염려치 마십시오.”

“그래. 다행이다. 어… 그러니까… 네 덕분이야. 고마워.”

어색한 감사 인사를 전한 해랑은 석현에게 아예 등을 돌린 채로 움직였다. 상기된 자신의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정신없이 짐을 옮겨대는 해랑의 등을 잠자코 보던 석현은 제 칼자루에 달린 띠돈을 만지작대더니 곧 결심한 듯 해랑을 향해 말했다.

“…지난 번 일은 죄송합니다.”

석현의 말에 해랑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고갤 돌려 석현에게로 고정시켰다. 석현은 해랑과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고 제 두 눈동자에 오롯이 해랑을 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곳에 왔는가?

“다시 신분을 올리고자 이 곳에 온 것은 맞습니다.”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이 곳에 왔는가?

“그리고 제가 찾아야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이 곳에 왔는가?

“하지만… 단지 그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석현의 말을 해랑은 그저 조용히 들어주었다. 석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엔 지난 번과 달리 진심이 가득했다. 끝까지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석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화를 끝내려는 듯 서둘러 마무리하려했다.

“아무쪼록 며칠 전에 던진 저의 말들이 도련님을 너무 아프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해랑은 석현의 말에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아팠어. 엄청나게.”

해랑의 말에 석현이 미안한 마음에 고갤 푹 숙였다가 슬며시 들어올렸다. 석현은 조심스럽게 들어올린 시선에 맞닿은 해랑을 멍하니 보았다.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해랑을 보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전처럼 해랑의 처소에서 해랑을 보살피며 지내던 때인 것만 같은 착각이.

“하나만 물어볼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며칠 전에 한 그 말들… 정말 다 진심이었어?”

해랑이 석현의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석현은 잠시 고민했다. 해랑을 보호하기 위해 해랑을 굳이 아프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사실 답은 이미 결정되어있었다. 또한 해랑의 맑은 두 눈이 마치 석현을 홀리는 듯 했다. 또다시 거짓말을 하기엔 석현은 해랑에게 너무 무력했다. 석현은 해랑의 시선을 살짝 피해 고갤 돌린 채 작게 중얼거렸다.

“……아뇨.”

석현의 대답에 해랑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살짝 일그러졌다가 금세 활짝 피었다. 안도와 기쁨이 뒤섞인 해랑의 환한 얼굴에 어째서인지 석현의 마음은 아렸다. 한껏 웃던 해랑은 마음을 약간 가라앉힌 뒤 석현을 똑바로 보았다.

“이렇게 금방 들통 날 거면서 왜 거짓말했어?”

심통난 듯 툴툴 거리며 말하는 해랑이었지만 말투엔 웃음기가 여전했다.

“그 땐… 그래야 할 것 같았으니까요.”

“후회 해?”

“예?”

“그렇게 말하고 나서 후회 했냐고.”

톡 쏘듯 말하는 해랑에 석현이 못 이기겠다는 듯 너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후회했습니다.”

석현의 대답에 해랑이 장난기를 지우고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석현의 저 말 한 마디로 그간의 고생, 피로함, 아픔 들이 한 순간에 싹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해랑은 천천히 석현에게로 다가갔다. 허공에서 마주치는 두 시선이 얽혀 묘한 긴장감을 이뤘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 모두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코 앞까지 바싹 다가온 해랑은 웃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그래. 그거면 됐어.”

해랑은 바로 팔을 뻗어 석현의 두 볼을 붙들어 끌어왔다. 그대로 석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당황한 석현이 일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이내 천천히 눈을 감고 해랑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석현의 뺨을 감싸던 해랑의 두 손은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석현의 어깻자락을 꽉 붙들었고 석현은 더욱 깊게 해랑을 안았다. 더는 놓지 않겠다는 듯 해랑의 몸을 부서져라 안는 석현에 해랑의 숨이 차올랐다. 턱 밑까지 찬 숨을 터뜨리듯 해랑이 입을 열자 석현은 해랑의 더욱 깊은 곳까지 잠식하려 했다. 해랑은 갑자기 들어온 혀에 놀란 듯 살짝 몸을 떨었으나 이내 못 이기는 척 제 입 안을 내어주었다.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찌르르했다. 차오르는 숨에 해랑이 버거워하자 그제야 석현은 입을 떼었다. 자신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숨을 몰아 쉬는 해랑이 그리도 어여쁠 수가 없었다. 석현은 눈물 고인 해랑의 눈가를 엄지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문질러 닦아주었다. 그에 해랑이 고갤 들어 석현을 마주 보며 웃었다. 석현 역시 해랑에게 미소 지어준 뒤 해랑에게서 손을 떼며 말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해랑은 그제야 현실로 돌아 온 듯 제 짐들을 돌아 보았다.

“그래. 가야지 이제.”

해랑도 돌아가서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석현을 만났고 여기까지 온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니 돌아가 본분을 다하는 일만 남았다. 해랑의 대답에 석현은 해랑의 짐이 모여있는 곳으로 움직여 짐꾸러미를 들어올렸다. 해랑은 그런 석현을 가만히 보다 물었다.

“이제 앞으로 어찌할 셈이야?”

“그건 궁에 입성한 뒤에 결정이 나겠지요.”

“그래. 그렇겠지?”

아쉬움 가득한 해랑의 말에 짐을 든 석현이 해랑에게 다가가 달래듯 말했다.

“언젠가 다시 뵐 수 있길 바랍니다. 도련님.”

“응. 언젠가는…….”

“그 때까지 무탈하십시오.”

“너도.”

해랑의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밖에서 해랑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석현은 고개를 꾸벅 숙여 해랑에게 인사한 뒤 짐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해랑은 그런 석현을 끝까지 눈으로 좇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꼭…….”

늘 소망하던 것처럼 석현과 단 둘이 살리라 마음먹으며 해랑도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였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작품후기]

그래 좀 자주 만나렴 얘들아 (?) 호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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