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초전
해랑이 떠난 뒤 류환의 군사는 빠르게 철수 작업에 들어갔다. 부대 뿐만 아니라 주변의 민가와 해주성 일대까지 모두 돌며 혹여 남았을 잔당들을 소탕하고 극심한 피해를 입은 자들을 보듬었다. 가옥은 모두 불타거나 부서졌으며 시체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을 했다. 혹 전염병이 돌지도 모르기에 시신을 수습하고 그들을 땅에 뭍는 일까지 모두 한 뒤에야 도성을 향해 발을 뗄 수 있었다. 석현의 마음에 조금 걸리는 것이 있다면 부모를 잃은 채 굶주려 우는 아이들이었다. 동시에 해랑이 안고 왔던 아이 역시 떠올랐다.
‘그 아이도 전쟁으로 부모를 잃었다고 했었지.’
확실히 해랑이 자신보다 마음 씀씀이가 넓고 따뜻하다는 걸 석현은 새삼 느꼈다. 전쟁 고아인 어린 아이를 그리도 소중히 보듬는다는 것은 더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석현 역시 해랑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석현은 잠시 고민하다 류환에게 달려갔다.
“장군. 한 가지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류환은 갑작스런 석현의 말에 의아한 듯 보았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볼 만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어떻습니까?”
석현의 말에 주언 역시 동의하는지 크게 호응하며 거들었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기왕이면 지방 향교에 들여보내어 거처를 마련함과 동시에 교육까지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주언의 말에 석현이 기뻐하려 했으나 곧 이어지는 류환의 말에 그럴 수 없었다.
“허나 향교의 인력이 부족할뿐더러 재정적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국고를 열어 충당하지 않는 이상은 무리일세.”
현실적인 류환의 말에 주언과 석현은 더는 말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류환의 군사들은 원래 가려던 길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석현은 못내 아쉬운 듯 몇 걸음 가다 말고 뒤돌아 마을을 둘러보았다. 유난히도 쌉싸름한 탄 내음이 진동을 해 석현의 입가가 썼다.
*
이 얼마만의 도성인지 몰랐다. 마침내 수도에 도착한 류환의 군사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때마침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들을 칭송하기 위해 수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류환과 그의 병사들은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다함께 궁에 입성하였다. 류환이 도성에 입성하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임금께 자신들의 업적을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왕께서 승전보를 들고 온 이들을 직접 만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며 전갈까지 보내온 터라 더더욱 입궐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입궐한 이들은 궁 내부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석현 역시 처음 와 본 궁궐을 주의깊게 살피었다. 정신없이 보던 와중에 커다란 연못 위에 놓인 건물이 석현의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해랑과 함께 갔었던, 다 쓰러져가는 정자가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유심히 보았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낡은 정자를 소개해주며 맑게 웃던 해랑의 얼굴이 석현의 눈 앞에 피어올랐다. 그 때의 그 강가와 정자는 여전할까? 석현은 불현 듯 떠오르는 추억에 잠겨 한동안 연못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마침내 근정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장엄한 건물, 탁 트이게 넓은 돌바닥과 그 위에 도열한 관료들이 병사들의 기를 누르기에 충분했다. 병사들은 호기심에 근정전 안쪽을 곁눈질로 살펴보는 것이 다였다. 어차피 이 많은 이들이 다 들어갈 수 없기에 류환과 주언만이 안으로 들어가 왕께 보고를 올리리라 생각하였다. 석현 역시 근정전 안으로 향하는 류환과 주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헌데 류환과 주언이 두어 계단 올라가고 나선 휙 돌아보며 말했다.
“안 따라오고 뭐하느냐?”
“예?”
“어서 따라오거라. 전하께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누군지 보여드려야 할 것 아니냐.”
“장군…….”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지체말고 오게.”
류환과 주언이 석현을 보채자 석현은 정신없이 두 사람을 따랐다. 저 만치에 앉아있는 왕을 보자 괜스레 긴장이 되어 석현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왕이 계신 곳까지 일직선으로 난 돌길 위를 걷다보니 양 옆에 선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꽤 많은 관료들이 나온 것을 보아하니 어쩌면 해랑도 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해랑은 없었다. 대신 석현을 벙찐 얼굴로 쳐다보는 우 대감과 해진만 있을 뿐. 석현은 그들을 싸늘한 눈으로 본 뒤 고갤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젊지만 위엄있는 왕, 형민은 세 사람이 가까이 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이에 류환이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형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주언과 석현도 빠르게 앉아 왕께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신 현류환, 전쟁에서 승리하여 해주성을 탈환하고 돌아왔나이다!”
류환이 큰 소리로 승리하였음을 알리자 머리 위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들은 고개를 들어 짐을 보시오.”
왕의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린 셋은 뿌듯하게 웃고있는 얼굴과 마주하였다. 이윽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형민 역시 셋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왼손으론 류환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론 류환의 어깨를 감싸 토닥였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류환은 어쩔 줄을 몰라했고 뒤에서 보던 석현과 주언은 놀라 고갤 숙였다.
“자네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이 곳이 쑥대밭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참으로 고맙기 이를데가 없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형민은 한 번 더 류환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조정 대신들을 향해 외쳤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이들에게 내 크게 치하할 것이다. 내 노고에 맞게 합당한 처우를 해 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모두가 고개 숙여 형민에게 감사를 표했다. 물론 해진이나 노의석처럼 진심이 전혀 없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음 날은 공신들을 위한 잔치를 열 것을 공언한 형민은 관료들을 물러가게 한 뒤 세 사람을 따로 불러 자리했다. 해주의 실상을 제대로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해주는 어떠한가? 해주의 백성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겠지?”
“예, 전하. 해주 대부분의 민가가 황폐해지고 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렇겠지……. 하루 빨리 해주를 복구하도록 명해야겠군.”
석현은 류환과 형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니 해주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무례인 줄을 알면서도 석현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 불쑥 말을 꺼냈다.
“전하. 말씀 중에 무례인 줄을 아옵니다만 신이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당돌히 두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 석현에 형민이 흥미롭다는 듯 시선을 주었다. 석현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해주에는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아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아이들을 거두어 줄 곳이 필요하다고 사료되옵니다. 부디 너그러이 아이들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형민은 석현의 말을 잠자코 듣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당황한 세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자 형민은 겨우 제 웃음을 잠재우고서 말했다.
“미안, 미안하네. 내 갑자기 누가 생각이 나서 말이지.”
“예?”
“아무튼 이미 그 얘기는 내 귀에 들어와 있다네. 자네도 심성이 곱구만 그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형민은 고개를 푹 숙인 석현의 뒷통수를 가만히 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아주 출중한 무인(武人)이라고 들었네만.”
“황송하옵니다, 전하.”
형민은 느릿하지만 명확하게 말했다.
“내 자네에게는 꼭 주고 싶은 자리가 있는데.”
*
해주에서 돌아온 뒤 밀린 일들에 정신없이 보내던 해랑은 오랜만에 왕의 부름에 형민을 찾아갔다. 종종 해랑을 불러 담소를 나누던 형민이기에 해랑은 자연스럽게 왕의 처소로 향했다. 여느 때와 같이 형민은 서책을 보며 해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랑이 들어서자 반갑게 웃으며 서책을 덮는 형민에 해랑 역시 공손히 인사했다.
“부르셨나이까.”
“어서 앉게.”
해랑이 형민의 맞은 편에 앉자 형민은 무엇이 그리고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해랑은 그런 형민을 이상히 여겨 잠시 살펴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해랑의 질문에 형민은 여전히 즐거워하며 답했다.
“나 말고 내 벗에게 좋은 일이 있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 아니겠는가?”
“예? 그게 무슨…….”
“어제 해주에서 현류환의 군사들이 돌아왔다네.”
형민의 말에 놀란 해랑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현류환의 군사들이 왔다는 것은 석현 또한 왔다는 것 아닌가. 갑자기 마음이 일렁이는지 해랑은 손가락 끝을 꼼지락거려댔다. 해랑의 행동에 더욱 즐거워진 형민은 소리를 낮추어 해랑에게 말했다.
“내일 공신들을 위한 연회를 열 것이니 꼭 참석하게.”
해랑은 애써 침착한 척 하려 애를 썼다. 도로록 굴러다니는 두 눈까지 숨길 순 없었지만.
“아,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보고 싶지 않은가?”
“예, 예?”
“그토록 그 친구 얘기를 해댈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내빼는가?”
“아니, 저 그게…….”
형민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해랑은 꼭 석현의 이야기로 빠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시종이었던 아이라고만 얘기했지만 해주를 다녀와서는 결국 석현의 존재를 실토하고야 말았다. 눈치가 빠른 형민 덕분이었다.
“그 친구, 자네와 같은 말을 하더군.”
형민의 말에 해랑의 심장이 튀어올랐다. 해랑은 제 무릎 위의 옷자락을 꽉 쥐어야만 형민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터에 남겨진 고아들을 수용할 시설을 요청했어.”
“석현이가… 말입니까?”
“그래. 그 바람에 내 크게 웃어버렸지 뭔가.”
민망해진 해랑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고갤 푹 숙이자 형민은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해랑에게 재차 말하였다.
“내일 연회에 오게. 자네의 아버지나 형은 신경쓰지 말고.”
해랑의 속내를 정확히 짚은 형민에 해랑은 더 이상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예. 그럼 내일 연회에서 뵙겠습니다, 전하.”
그제야 마음에 드는 듯 형민이 웃자 해랑은 황급히 형민에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섰다. 부랴부랴 나가는 해랑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형민은 다시 서책을 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앞으로 자주 만나게 해줘야 겠어.”
[작품후기]
주상전하께서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