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초전
유난히도 거센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세차게 때리는 빗줄기에 기왓장이 뚫릴 듯 했다. 이따금 빛이 칠흑 같은 하늘을 가를 때면 천지를 울리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장대비 속에서 누군가가 산길을 헤매고 있었다. 비에 젖어 얇은 옷이 몸에 들러붙었고 머리칼은 산발이 되었다. 비로 인해 앞이 도통 보이지 않아 자신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르는 듯하였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보자 손 끝에 무언가 걸렸다. 종이였다. 불길한 예감에 조심스레 종이를 쥐어 펼쳐 보았다. 집 북쪽에 세운 사당에 괴기스러울 만큼 붙여 둔 부적이었다. 부적의 글씨가 마치 피로 쓴 듯 검붉었다. 무서워져 서둘러 발을 옮기던 남자는 순간 느껴지는 서늘함에 걸음을 멈추었다. 극도의 공포감에 삐걱이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무도 없는 듯 했던 길에 웬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내는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채였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사내는 갑자기 우레보다 더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우현영 네 이 놈!”
헤매이던 남자는 바로 우현영이었다. 현영이 놀라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자 사내가 천천히 현영에게로 다가왔다. 음산한 기운에 두려운 현영이 뒤로 물러서려했으나 몸이 꼼짝을 못하였다. 점점 다가오는 사내의 기에 완전히 눌린 탓인지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비로 인해 차가운 공기가 더욱 오싹하게 느껴졌다. 현영은 천천히 고갤 들어 코 앞까지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남자의 얼굴까지도 새카맣기만 할 뿐, 눈코입은 온데간데 사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현영이 발버둥을 치려하자 사내는 불쑥 허릴 숙여 현영의 얼굴 바로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현영은 기겁하여 숨을 집어삼켰다. 그러자 갑자기 사내의 얼굴에 입이 생기며 가늘게 웃었다. 입이 생기자 코, 눈이 차례대로 얼굴 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영은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싶어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완전히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으… 으아아아악!”
결국엔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석현의 부친, 현영의 벗, 정수환이었기 때문이다. 분노로 가득한 수환의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현영은 떨리는 팔로 엉금엉금 뒤로 기어가려 노력했다. 여전히 헛수고일 뿐이었지만. 수환의 한쪽 입꼬리가 비웃듯 치켜올라갔다. 현영은 떨리는 손으로 주변의 돌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이보게 수, 수환이…….”
온갖 생각들로 말문이 턱 막힌 현영은 입만 뻐끔댈 뿐이었다. 적반하장으로 뭔 짓이냐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백 번 천 번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하지도 못하였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되었다. 그 때, 숨통이 조여들었다. 수환의 손이 빠르게 현영의 목을 낚아 챈 것이다. 수환의 손아귀에 우악스런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현영은 숨이 콱 막혀 꺽꺽대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든 손을 떼어내려 노력해도 소용없었다. 현영은 힘겹게 수환을 보았다. 수환은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로 현영을 보고 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지. 안 그런가?”
“커헉……!”
“기다리게. 곧 자네 집안도 똑같이 멸할 것이야.”
수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영에게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정신이 아득해져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엄청난 속도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현영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질끈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가쁜 숨에 가슴팍이 오르락거리고 있었고 식은 땀으로 이부자리가 축축히 젖어 있었다. 밖에선 그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알리듯 따스한 햇살과 함께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명랑히도 들려왔다. 현영은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 꿈이었구나.”
안도의 숨이었으나 두려움은 완전히 가시질 않았다. 수환의 마지막 말이 귀에서 맴돌고 있었다. 아주 선명하게도. 석현이 그렇게 집을 나간 뒤로 현영은 종종 수환의 꿈을 꾸곤 했다. 수환이 죽은 직후에도 꾸지 않던 꿈이었는데 이제와서 수환은 현영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석현을 살려둔 것이 화근인걸까? 전쟁터에 나간 것을 알았기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던 터에 심지어 공까지 세워 돌아온 석현이었다. 현영은 정에 이끌려 하게 된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해진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현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공신들을 위한 연회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
해랑은 일찍부터 채비를 하고 궁으로 향했다. 해진을 만나는 것은 껄끄러웠지만 석현의 공을 축하하는 자리를 빠지는 것은 역시나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이왕 가는거 조금이라도 괜찮은 모습으로 가고싶어 해랑은 유난히 단장하는데 시간을 오래 썼다. 그런 해랑을 가늘게 뜬 눈으로 지켜보던 오월이 씩 웃으며 물었다.
“도련님. 오늘은 유난히 신경쓰시네요?”
“뭐, 뭐가 말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대충하고 나가기 급급하시더니…….”
“내가 언제! 펴, 평소처럼 하는 건데 뭐…….”
하고는 휙 밖으로 향하는 해랑의 뒷모습을 보며 오월은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해랑은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얼굴로 재빨리 말에 올랐다. 열이 오른 얼굴 덕에 후후 숨을 내뱉어 줘야 했다. 열이 조금 가라앉자 해랑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었다. 자신을 끌어안아주던 석현의 손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마주하게 될 늠름한 석현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궁금했다. 석현은 과연 어떤 상을 받게 될 것인지. 주상께선 과연 석현의 신분을 어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긴장되면서도 설레이는 마음에 해랑은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오늘은 연회 때문인지 궁 초입부터 시끌벅적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전쟁 영웅들을 위한 연회이기에 모두가 기뻐할 수 밖에 없었다. 도성 전체가 연회나 다름없었다. 패망할 것 같던 태조국을 수렁에서 건져준 이들을 위한 잔치에 백성들이 어찌 신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랑도 기분이 좋아져 즐거워하는 백성들 사이를 천천히 살피며 지나갔다. 마침 날씨도 따사로와 나라의 경사를 축복하는 듯 했다. 해랑은 말에서 내린 뒤 걸어서 더 안쪽으로 이동하였다. 연회장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더욱 늘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관료들이 가득했다. 수랏간 상궁들도 분주해보였다. 해랑은 처음으로 겪는 궁 연회에 별세계에 온 듯 했다. 붕 뜬 기분도 잠시, 누군가 뒤에서 해랑을 불렀다.
“우해랑.”
기분이 쑥 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듣기만 해도 몸이 굳는 목소리였으니까. 해랑이 어거지로 몸을 돌리자 역시나 해진이 해랑을 싸늘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창백한 얼굴은 여전히 소름끼쳤다. 해랑은 허릴 꾸벅 숙여 해진에게 인사하고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해진의 목소리가 해랑을 붙들었다.
“연회 시작하려면 멀었다. 잠깐 할 얘기가 있으니 따라와.”
어릴 때부터 해진은 늘 고압적인 자세였다. 반항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이 해랑은 고분고분 해진의 뒤를 따라야 했다. 따라가면 해진의 기괴한 행위를 마주하거나 혹은 폭언과 폭력이 이어지곤 했지만. 하지만 이제 해랑도 더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해랑은 이겨내고 싶었다. 몸 양 옆에 있던 손을 움켜쥐고선 해랑이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해랑을 데리고 이동하려던 해진이 발걸음을 멈추고 해랑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제 말에 되묻던 적이 없던 해랑이었기에 해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당연한 절차였다. 해진의 심사가 뒤틀렸을게 뻔하기에 해랑은 두 주먹을 더욱 세게 쥐었다. 솔직히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언제까지고 해진에게 기죽어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해랑 자신도 이제는 어엿하게 관직을 가지고 있는 어른이기에.
“이 곳은 궁 안입니다. 여기선 같은 관료로서 예의를 지켜 주십시오.”
“뭐라고?”
“저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봐야 해서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해랑의 말에 벙찐 해진을 뒤로 하고 해랑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혹여나 해진이 뒤쫓아 올까 걸음걸이에 점점 가속이 붙기는 했지만. 해랑은 한참을 걸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당최 어디서 그런 용기가 갑자기 샘솟았을까 본인 스스로도 놀라웠다. 나중에 해진이 해꼬지라도 할까 겁이 났지만 그와는 별개로 통쾌함이 밀려왔다. 몇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해랑은 기쁜 마음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
마침내 연회가 시작되었다. 무희들과 악사들이 모두 나와 풍악을 울렸다. 생경한 광경에 해랑이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자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그런 해랑을 킥킥대며 놀렸다. 머쓱해진 해랑이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피자 해진과 우 대감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해랑과 멀리 떨어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화려한 가무가 끝나자 곧이어 왕께서 나오심을 알렸다.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왕을 맞이하였다. 마침내 왕과 중전이 나타나 자리하였고 모두가 그들에게 절하였다. 왕인 형민은 그들을 기쁘게 바라보다 외쳤다.
“오늘은 기쁜 날이오! 한 때 오랑캐에게 밀려 나라가 곤경에 처했으나 이 들 덕분에 우린 승리의 영광을 취했소. 오늘은 그 훌륭한 전사들을 위한 자리이니 모두가 그들의 공을 치하하며 즐겨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다시 한 번 모두가 허리 숙여 형민에게 절하였다. 이어서 연회장의 문이 열리더니 세 사람이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류환과 주언, 그리고 석현이었다. 해랑은 무심코 고갤 돌렸다가 석현을 발견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제까지 본 적 없던 석현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무관들이 입는 옷을 제대로 차려입은 석현에 해랑은 넋을 놓고 볼 수 밖에 없었다. 푸른색의 긴 철릭에 전립까지 쓴 석현을 누가 과연 이제까지 노비였다고 할 수 있을까. 해랑이 정신없이 석현을 바라보는 사이 해진은 석현을 죽일 듯 노려보았고 우 대감은 착잡한 마음으로 석현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땅만 보았다.
세 사람이 형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형민은 친히 내려와 그들의 공을 치하하기 시작했다. 해랑은 그런 형민의 말들이 전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저 새로운 모습의 석현에게만 온 신경이 쏠렸다. 한참을 세 사람의 공적을 말하며 상을 내리던 형민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나서야 해랑은 정신이 들어 형민을 보았다. 형민은 무언가 결심한 듯 주변을 쓱 둘러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정석현은 본디 역모죄로 연루되어 노비로 신분을 박탈당하였었다. 허나, 이 시간 이후로 정석현은 양민이 되며 과인은 정석현을 내금위장으로 임명하여 과인의 곁을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는 장군 현류환이 적극 추천한 바이며 나 또한 동의하였기에 결정된 사안이니 대신들은 모두 그리 아시오.”
형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미소짓는 이들은 딱 세 명, 형민과 류환, 주언 뿐이었다. 석현은 자신이 들은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두 눈만 꿈뻑댔다. 얼이 나가있다가 고갤 돌려 류환의 웃는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현실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제야 석현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유일하게 웃으며 울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아아, 석현아……!”
바로 제 볼을 꼬집어가며 꿈이 아님을 재차 확인하는 해랑이었다.
[작품후기]
아프니까 고만 꼬집으렴 꿈 아니란다 해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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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현생 겨우 뿌셔뿌셔하고 왔습니다
다시 또 천천히 달려 보겠습니다
느려도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