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39/64)

전초전

임금의 파격적인 명에 연회의 분위기가 쑥대밭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흥겨운 음악과 대조되는 대신들의 표정이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유유히 술잔을 기울이며 즐거워 하는 형민에 차마 판을 깨지도 못하고 쓴 입만 다시는 대신들이었다. 특히 노의석과 해진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형민과 석현을 번갈아 보다 잔을 들이키길 반복했다. 겨우 싹을 잘라냈는가 싶더니 죽순처럼 자라난 석현은 자신들의 앞길을 막을 것이 불 보듯 뻔할 것이다. 부아가 치민 해진은 해랑과 현영을 노려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저 둘이 모든 것을 망치기 시작했다는 생각 뿐이었다. 애초에 현영이 석현을 살리지 않았다면, 해랑이 석현을 감싸돌며 제 집안에 두지만 않았다면……. 해진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결국 잔을 세게 내려놓고는 밖으로 향하였다.

그런 해진을 해랑의 눈이 좇았다. 해랑은 어쩐지 통쾌하여 슬쩍 웃으며 술잔을 채웠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이 오늘따라 어찌나 당기는지 몰랐다. 류환과 주언 사이에서 어울리며 조용히 웃는 석현의 모습에 가슴이 세게 요동쳤다. 무관의 옷을 입은 석현을 보며 어쩌면 조금은 석현과의 관계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해랑은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그래, 어쩌면 다시 함께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 해랑은 그렇게 마음 한 켠에서 기대감을 키웠다. 지금 속이 타들어가고 있는 애비의 마음도 모른 채 해랑은 밝은 앞날에 대한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영은 멍하니 잔잔한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말의 우정이 결국 자신을 옥죄는 덫이 되고야 말았음에 한탄하면서. 이런 식으로 일이 꼬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현영은 제 선택을 더더욱 후회하였다. 아무리 소중한 우정이라도 제 아들보다 중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혹여 석현으로 인해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땐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석현의 집안처럼 모든 것이 풍비박산 날 것이고 자신과 두 아들들 모두 목숨을 부지하지 못 할 것이다. 현영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죗값에 대한 형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요란한 연회가 끝나고 모두 정리된 뒤, 해랑은 형민의 부름이 있어 사정전으로 향하였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위엔 손톱달 하나가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었다. 해랑의 기억 속에 남은 석현의 잔상들이 문득 떠오르게 만드는 밤이었다. 해랑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갤 들어 달을 보았다. 새하얀 달 때문일까. 어쩐지 마음이 시려 해랑은 폭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사정전에 든 해랑이 문 앞에 서자 곧바로 출입을 허하는 형민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사정전의 문이 열리고 해랑은 공손히 손을 모은 채 고갤 살짝 숙이고선 뚜벅뚜벅 걸어 형민의 앞에 서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굽어진 허릴 천천히 펴면서 고개를 들자 해랑의 시야에는 형민의 뒤에 선 채 자신을 바라보는 석현의 모습이 단번에 들어왔다. 해랑이 순간 당황하여 멈칫하는 찰나, 형민이 해랑을 불렀다.

“늦은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전하. 어인 일로 소신을 부르셨나이까?”

“내 딱히 별 일이 있어 부른 건 아닐세.”

“예?”

형민의 말에 당황한 해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형민이 미소지으며 석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두 사람, 가서 산책이나 좀 하시게. 오늘 연회 때문에 피곤할텐데 이 친구가 첫 날부터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거 아니겠는가? 둘이 아는 사이라고 하니 데리고 나가서 밤 공기 좀 쐬고 오게 하시게나.”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된 밤 산책이었다. 해랑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스러우면서도 설레이는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석현 역시 난처한 건 마찬가지였다. 연회가 끝난 뒤 휴식을 취하던 석현에게 다짜고짜 어명이 떨어졌다. 술시부터 전하의 곁을 지키라는 명이었다. 그 말을 함께 있던 류환이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는 연회를 마치고서 바로 일을 시키지 않는데 이상하다는 류환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이 상황이 되고 나니 그제야 상황판단이 된 석현이 둘 사이의 침묵을 깨고 헛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 굳이 오밤 중에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있으셨군요.”

“그러게……. 하하.”

해랑이 어색하게 웃는 사이, 둘은 어느새 어두운 돌담 아래에 섰다. 달빛도 들지 않는 곳이라 작은 등불과 적막만이 둘을 감쌌다. 둘은 돌담 앞에 심어진 나무 아래에 섰다. 어두운지라 작은 등불을 들고 있던 석현은 나무 근처 바위 위에 등불을 올려 두었다. 등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게 되자 또다시 마음이 부풀기 시작했다. 해랑은 차마 석현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쭈뼛대다 등불에 비친 석현의 옷차림을 발견하고 석현에게 말했다.

“그 옷, 정말 잘 어울려. 아까 연회 때 처음 보고 깜짝 놀랐지뭐야? 엄청 멋지더라. 정말로.”

“감사합니다.”

“네가 잘 되어서 너무 기뻐. 연회 때는 내가 다 행복하더라.”

진심이 가득히 묻은 해랑의 맑은 미소가 퍼지자 석현은 속에서 울컥 치미는 뜨거운 마음을 잠재우느라 애를 써야했다. 꽉 쥔 두 주먹을 들키지 않게 등불에서 살짝 멀어지는 석현을 눈치채지 못한 해랑은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석현은 그런 해랑을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해랑은 한참을 더 하늘을 올려보다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도 너처럼 이 나라에 도움이 되고 싶어.”

의외의 말이었다. 석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해랑을 보며 물었다.

“지금도 충분히 나라를 위해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석현의 말에 해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그런 일 말고. 이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일 말이야.”

해랑의 말에는 결연함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눈빛 역시 더욱 빛이 났다. 석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 순간, 해랑이 말했다.

“어쩌면 그 과정 속에서 나라에 혼란이 생길 수도, 피바람이 불 수도 있겠지만 나라를 위해선 해야 만 하는 일이 분명 있을 거야.”

석현은 담담히 말하는 해랑에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졌다. 걱정이 되었다. 혹여 해랑이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라를 바로 잡는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니 너무 급히 마음 먹지 마시고 천천히 해 나가시는 것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해랑이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에, 대답에 약간은 안도하게 된 석현은 찬 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들어가보셔야지요.”

“으응. 그래야지.”

해랑이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가 석현의 말에 정신이 들어 몸을 틀었다. 사부작대는 옷자락 소리만 퍼지는 좁은 길목에서 나란히 걷자니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게다가 해랑의 넓은 옷자락이 석현에게 자꾸 닿아댔다. 민망하여 옷자락을 붙들어도 보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어색해보일까봐 제대로 잡지도 못하는 해랑이었다. 석현이 그런 해랑을 모를 리 없었다. 석현 역시 온통 해랑을 향해 신경이 쏠려 있었으니까. 결국 석현은 걸음을 우뚝 멈추고야 말았다. 갑자기 멈춘 석현에 해랑이 당황하여 석현을 보았다.

“왜 그래?”

“먼저 앞으로 가십시오.”

“어?”

“옷자락이 닿아 불편하신 듯 하니 먼저 가시면 제가 뒤에서 지켜드리겠습니다.”

“아……. 응. 그래, 그럴게.”

해랑은 연신 부여잡던 옷자락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석현 나름의 배려였을테지만 어딘가 서운하고 아쉬운 것이 해랑을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함께 나란히 걷고 싶었는데……. 이 놈의 옷자락은 왜 하필 방해를 하는지. 해랑은 상한 속을 달래며 석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좀처럼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그런 해랑의 마음을 모르는 석현이 아니었다. 석현은 작게 웃으며 해랑의 뒤를 좇았다. 잘 가나 싶던 해랑은 이번엔 스스로 걸음을 멈추고는 휙 뒤돌아 보았다. 해랑의 얼굴엔 섭섭함이 그득한 채였다.

“이건 아닌 것 같아.”

“예?”

“같이 걷자.”

“…….”

“같이 걸을래. 이렇게 같이 있는데 왜 나 혼자 걸어야 해? 석현이 너와 겨우 다시 만났는데…….”

해랑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는게 그리 예쁠 수가 없었다. 결국 석현은 웃음을 터뜨리며 해랑에게로 다가갔다. 제 곁으로 다가온 석현을 살짝 흘겨보던 해랑은 팔을 뻗어 석현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제 품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해랑에 석현은 순간 당황하다가도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해랑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해랑은 기분이 좋아진 듯 석현의 가슴팍에 뺨을 부비며 말했다.

“이 품이 늘 그리웠어. 가까이 있어도 멀리서만 지켜봐야만 하는게 생각보다 더 고통스럽더라.”

“……이제 좀 마음이 풀리셨습니까?”

“응……. 나 너무 어린 아이 같나?”

“아뇨. 그저 솔직하신 것 뿐이지요.”

석현의 말에 해랑이 픽 웃었다. 관복을 입은 뒤로 부러 더 의젓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던 해랑이었다. 해랑이 유일하게 마음을 편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석현이기에 해랑이 골을 내고 어린 양을 부리는 것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 동안 꽉 막혔던 숨이 트이는 기분에 해랑은 기분 좋게 깊은 숨을 뱉어내었다.

“넌 여전히 어른스럽네.”

품에서 살짝 떨어져나온 해랑이 석현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해랑의 두 눈 속엔 밤하늘의 별이 그득했다. 석현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해랑을 바라보았다. 그윽하게 저를 바라보는 석현에 해랑은 사뭇 당황한 듯 슬그머니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허나 해랑을 감싼 석현의 팔에 들어간 힘이 해랑을 놓아줄 생각을 하질 않았다. 석현의 생각을 알 수 없자 해랑의 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왜?”

“…….”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해랑에 석현은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작품후기]

늘 일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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