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0/64)

전초전

어둠 속에서 다급한 숨소리만이 퍼졌다. 얼굴이 잔뜩 상기된 해랑이 앞장 서서 석현의 손을 잡아 끌고 있었다. 석현 역시 거친 숨을 내쉬어 가며 해랑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두 사람 모두 여유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궐 내의 볕이 잘 들지 않는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해랑은 걸음을 멈추었다. 해랑의 걸음이 멈추자 석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등불로 비추어보니 화려한 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고 수수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해랑이 나무로 만든 문을 열어 석현을 안으로 들였다. 내부엔 작은 침상과 서안, 종이와 붓 그리고 책자들이 가득했다. 이 곳이 어떤 곳인지 해랑에게 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의 석현에겐 그리 중한 사항이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들어찬 단 내음이 석현의 정신을 어지럽히기 시작했기에.

“하으……!”

“도련님!”

오랜만에 맡는 아찔한 향에 놀란 석현이 다급히 해랑을 불러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침상 위에 쓰러진 해랑은 이미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석현은 해랑에게 홀린 듯 입맞춘 자신을 탓해보았으나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달 아래에서의 낭만적인 입맞춤으로 끝내기엔 해랑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해랑의 숨이 점점 차오르고 석현의 코 끝을 스치는 단내에 두 사람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선 어디선가 안정을 취해야겠다는 석현의 말에 해랑이 빠르게 석현을 잡아 이끌어 여기로 온 것이었다.

“환약을 가지고 계십니까?”

“으응, 저, 서랍 안 쪽에.”

석현은 해랑이 가리킨 서랍을 다급히 열어 환이 든 상자를 꺼내었다. 상자 안엔 잘게 부서진 환 조각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급한대로 전부 들고 간 석현이 해랑에게 상자를 건네자 해랑은 떨리는 손으로 작은 조각 하나를 씹어 삼켰다. 석현은 그런 해랑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약효가 빠른 덕에 해랑의 호흡이 가라앉으며 열도 내리기 시작했다. 석현은 안도하며 약이 든 상자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해랑의 곁에 앉았다. 아직 빨갛게 물들어 있는 해랑의 얼굴을 석현의 큰 손이 덮었다. 해랑은 기분이 좋은 듯 힘없이 웃어보였다.

“내 몸은 너에겐 이리도 속수무책이네.”

석현의 손을 감싸며 해랑이 말했다. 해랑에게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굴리는 석현에게 해랑이 말을 이었다.

“약을 먹어서 당분간은 이러진 않을거야. 약이 워낙에 세서 말이지.”

“…다행입니다.”

석현의 말에 안도감과 미안함이 뒤섞여 나왔다. 해랑은 그런 석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 뺨을 감싼 석현의 손을 느릿하게 매만져 보았다. 이전보다 훨씬 더 투박해지고 단단해진 석현의 손은 상처투성이였다. 분명 전쟁이 이렇게 만들었으리라. 고단함이 느껴지는 석현의 손바닥에 해랑은 아직 뜨거운 자신의 볼을 부볐다. 해랑의 행동에 석현이 약간 놀란 눈치로 해랑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겨우 잡아보네. 네 손.”

“좀 엉망이지요.”

“아니. 자랑스러워.”

해랑이 석현의 손을 붙들어 입 앞으로 가져갔다. 석현의 손가락 하나 하나에 입술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손등 위에 입맞추었다. 이번엔 석현의 속에서 열이 올랐다.

“석현아.”

“예.”

석현을 불러놓고도 한참을 뜸을 들이던 해랑은 제 몸을 덮은 얇은 천을 한 번 꽉 쥐고 나서야 말을 이어갔다.

“나, 다시 안아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자 한참 말이 없는 석현에게 해랑이 다시 말했다.

“차라리 약이 없다고 할 걸. 그럼 그냥 네게 안겼을텐데.”

해랑의 말 뜻을 그제야 이해한 석현이 굳은 채 해랑의 시선을 피했다. 아랫입술을 질끈 물어 제 안에 남은 통제력을 끌어 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해랑이 석현의 손바닥에 쪽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자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차라리 저 문을 박차고 나갈까 싶으면서도 해랑을 홀로 두고 갈 용기는 없기에 아예 두 눈을 감아버렸다.

“……미안. 또 철부지처럼 굴었네.”

해랑이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갤 떨구었다. 석현은 그제야 아차 싶어 해랑을 보았다. 처량한 얼굴의 해랑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여기에 계속 있는 한 해랑은 이렇게 힘들어 할 것이 뻔했다. 석현은 해랑의 손에 붙들렸던 자신의 손을 빼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촉촉이 젖은 해랑의 눈동자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꼈으나 차마 바라보지 못 한 채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모셔다 드릴 테니 함께 가시지요.”

최대한 냉정히 말하려 애쓰는 석현에 해랑의 속에선 서글픔이 차올랐다. 제게 등을 지고 문 쪽으로 향하는 석현이 미워 노려보던 해랑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석현에게로 달렸다. 문고리를 잡아 열려는 석현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은 해랑에 석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가지마.”

울음에 잠긴 해랑의 다급한 목소리에 선을 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석현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석현이 몸을 돌려 해랑을 보았다. 해랑의 두 눈엔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아픔과 분노가 뒤섞인 해랑의 눈을 보는 순간 석현은 입술을 말아삼켰다.

“대체 뭐 때문에 아직도 날 밀어 내는 거야? 이제 너도 관직에 오른데다가 지난 번 내게 했던 말들 모두 거짓이었다면서.”

“그렇다고 해서 제가 도련님과 어떤… 특별한 관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석현의 말에 해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째서?”

해랑의 질문에 석현은 한참이나 말을 골라야 했다. 너의 가족이 나의 가족들을 몰살시켰으며 나를 이리 만들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기에.

“……아무리 신분이 올라갔어도 저는 여전히 역모에 가담한 가문의 자손일 뿐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있지요. 왜 없습니까?”

참다 못한 석현이 큰 소리를 내자 해랑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랑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볼을 타고 톡 떨어져내렸다. 석현은 미안한 마음에 한숨을 뱉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도련님을… 저 때문에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겨우 골라 뱉은 석현의 말에 해랑이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진심가득한 말에 따스함이 묻어있어서.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해랑을 석현이 조심스럽게 끌어 안아주었다. 석현의 따뜻한 품이 느껴지자 해랑은 더욱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석현은 문득 해랑이 과거를 보러 떠나기 전 날이 떠올랐다. 서로의 마음을 깨닫고 살을 맞대었던 그 밤이. 해랑의 뒷통수를 감싼 석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저 역시도 도련님께는 속수무책인가 봅니다.”

해랑이 천천히 고갤 들어 석현을 올려보자 해랑의 몸을 감싸던 석현의 두 손이 눈물길이 난 해랑의 두 뺨을 부드러이 쥐었다. 혹여 깨질까 두려운 것 마냥 다가오는 석현에 해랑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숨을 집어 삼키고선 두 눈만 동그랗게 떴다. 마침내 석현의 입술이 해랑의 입술 위로 달큰히 포개어지자 해랑의 눈꺼풀이 서서히 닫혔다. 해랑의 입술을 간지럽히는 석현에 해랑은 자연스럽게 틈을 내었다. 그와 동시에 석현의 혀가 해랑의 입 안으로 파고 들었다. 미끄러지듯 들어온 살덩이가 해랑의 붉은 살들을 뜨겁게 데워갔다. 점차 깊숙이 휘젓고 엉키는 혀에 둘의 호흡이 가빠져갔다. 단지 입맞춤일 뿐임에도 두 사람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호흡을 이기지 못한 둘의 입술이 급하게 떨어졌다. 잠시간 말없이 숨을 고르던 둘은 다시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았기에 해랑은 천천히 움직여 침상 위에 걸터 앉았다. 석현과 맞댄 시선을 놓치지 않은 채로. 석현 역시 움직이는 해랑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해랑이 마침내 침상 위에 앉자 석현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숙여 해랑에게 다시 입을 맞추며 해랑의 뒷통수를 감쌌다. 좀 더 진득히 얽혀오는 석현의 혀에 해랑의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석현은 조심스럽게 해랑의 몸을 침상 위로 눕혔다. 마치 해랑이 떠나기 전 날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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