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초전
석현과 밤을 보내느라 늦게 일어난 해랑은 어디론가 부랴부랴 향했다. 정신없이 옷가지를 챙겨입는 와중에도 석현이 준 꽃은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을 잊지 않는 해랑이었다. 꽃을 바라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해랑은 금세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고는 허둥대며 밖으로 나섰다. 해랑이 빠르게 달려 찾아간 곳은 바로 전쟁에서 구해낸 아이들이 모인 임시 거처였다. 형민의 지시로 마련된 거처엔 해랑이 데리고 온 다온 역시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 본 아이들은 예전의 꼬질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마치 양반가의 자제들 마냥 제법 귀티를 냈다. 짧은 기간 동안 궐밥을 먹었다고 고새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해랑은 아이들 틈에서 고운 옷을 입고 아장거리는 다온을 찾아내었다.
“다온아!”
해랑은 단숨에 달려가 아이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다온이는 해랑을 알아보기라도 하는 듯 꺄르르 웃으며 해랑을 반겼다. 해랑은 예쁘게 입고서 제게 웃어주는 다온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생사가 오가는 곳에서 자신이 구한 아이가 이제는 나라의 희망이 되어 있었다. 괜스레 벅차오르는 마음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온과 같은 희망의 존재들이 마당 곳곳에서 궁녀들의 돌봄을 받고 있었다. 해랑은 다시 한 번 다온의 몸을 조심스레 끌어 안아 다온의 체온을 느껴보았다. 아쉬움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출발할 시간입니다, 나으리.”
“아, 벌써 그리 되었습니까?”
“예. 방금 마차가 당도하였다 합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 아이들이 모두 해주의 향교로 떠나는 날이었다. 임시 거처는 임시 거처일 뿐이라 아이들이 오래 머물수는 없었다. 때문에 형민은 해주의 아이들을 해주의 향교에서 먹고 자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해랑과 석현의 청에 의한 것이기에 해랑은 더욱 기뻤다. 해랑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품에 안았던 다온을 내려놓으려 하는데 고사리 같은 손이 해랑의 뺨을 만졌다. 마치 작별 인사라도 하는 듯 다온이 해랑의 눈을 정확히 마주하며 해랑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덕에 하마터면 눈물이 터질 뻔한 해랑이었지만 눈물 대신 미소로 다온에게 인사를 해주기로 하였다.
“잘 가, 다온아. 가서도 건강히 잘 지내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랑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다온이 높은 소리로 웃어주었다. 해랑은 다온의 고운 머리카락을 쓸어주고는 마침 다가온 궁녀에게 다온을 넘겨주었다. 궁녀에게 안겨 떠나는 다온을 보자니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슬픈 작별은 아니기에 해랑은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온을 떠나보내고 해랑은 몸을 씻은 뒤 석현과 밤을 지샜던 곳으로 돌아왔다. 석현에게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이 곳은 해랑만의 공간이었다. 형민이 해랑에게 특별히 따로 마련해 준 거처였는데, 이 곳에서 해랑은 이전부터 준비하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해랑은 뻐근한 몸을 이끌고 다시 서안 앞에 앉았다. 이 일을 빠르게 해내야만 했기에 몸이 좀 힘든 것 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을 어찌 넘어야 하는가가 해랑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오늘은 그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 날이다.
“……사헌부.”
사헌부. 해랑의 형 해진이 있는 곳. 국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관리들의 불법행위를 감찰하거나 지위를 오남용하는지를 살피는 등 국정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곳이다. 바로 이 사헌부가 해랑이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깨끗하고 올곧아야 할 사헌부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헌부의 대신들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형민의 정치에 사사건건 시비를 텄고 탐관오리들을 관리하기는커녕 오히려 방관하고 심지어는 뒷돈을 받기도 했다. 그 중심엔 해진이 있었다. 왕권을 견제하려는 듯한 사헌부를 쥐락펴락하는게 바로 해진이었다. 무능한 대사헌을 무시하고선 사헌부의 젊은 장령들과 함께 나라를 갖고 놀 작정인 듯 했다. 해랑은 제 형이 벌인 일들 하나하나를 파헤치는 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몰랐다. 나라의 녹을 받아가며 나라를 갉아먹는 일들을 벌이고 있는 해진이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해랑은 자신이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료들을 한 번 더 검토 후에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여러 번 문질렀다. 피곤해진 듯 눈꺼풀을 한 번 닫았다가 천천히 뜬 해랑은 서안 위에 놓인 붓을 집어 들었다. 검은 먹이 묻은 붓이 종이에 닿자 글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글이 아니었다. 그 간 고심해 온 해랑의 모든 생각이 이 종이 위에 정리되는 것이었다. 해랑은 결연한 얼굴로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써내려갔다. 마지막 글자가 쓰여지고 붓을 내려놓는 순간, 거대한 불안이 해랑을 엄습했다. 해랑은 스치듯 예감했다. 분명 이 종이 한 장으로 인해 파란이 일 수도 있겠다고.
*
연회가 있고 이틀 뒤,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한 이들은 기방에 모여 술로 스스로를 적시고 있었다. 그 좁은 방 안엔 여럿이 모여있었지만 그 중심축엔 노의석과 해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참을 시끄럽게 기생들을 옆에 끼고 놀던 이들은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슬슬 연회 때의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아니, 전하는 해도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공을 세운거야 그렇다쳐도 어째서 대역죄로 노비가 된 이를 한 순간에 떡하니 벼슬을 줘버린단 말입니까?”
젊은 양반 하나가 흥분하여 소리쳐대자 주변의 관료들 역시 맞장구를 쳤다. 되려 해진과 노의석은 묵묵히 술잔만 입에 갖다댈 뿐,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우의정 대감. 이리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상소라도 올려서 임금께 우리의 의견이 이렇다, 하고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양반의 말에 노의석의 술잔이 들리다 허공에서 멈추었다.
“상소라. 상소를 올리면 뭐가 달라지는가?”
“예……? 뭐가 달라진다기 보다는…….”
남자가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쾅, 소리를 내며 노의석의 술잔이 서안 위로 세게 부딪혔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고 해진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으며 술잔을 채웠다. 그 사이, 노의석의 눈빛은 살벌한 빛을 띄고 있었다.
“달라질 것도 없는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는가? 할거면 제대로, 유의미한 행동을 취해야지. 아니 그런가?”
“예, 예…….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가만히 계실 것입니까?”
“허허, 거 젊어서들 그런가 성격이 급하구만 그래.”
노의석이 험악하던 눈빛을 거두고 다시 웃으며 제 술잔을 채웠다. 가득 따라진 술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던 노의석은 입가에서 잔을 멈추고는 다시 싸늘한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때가 올 걸세. 그 때를 기다리게나.”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술을 넘기는 노의석에 일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가 어색하게 풀어져갔다. 유일하게 해진만이 여유롭게 제 속도대로 술을 즐기고 있었다. 석현의 일은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한 해진이었다. 그래봤자 역모죄를 일으킨 집안 녀석일 뿐이다. 오히려 더욱 신경쓰이는 건 석현 보다 제 동생 해랑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늘 고분고분 제 말을 따랐던 해랑이 이젠 자신에게 대들기도 한다. 게다가 요즘 무엇을 하는지 해랑이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었다. 최근들어 잦아진 사간원의 견제 역시 거슬렸다. 분명 해랑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허나 그래봤자 해랑이 무얼 하겠는가. 해진은 어리고 나약한 제 동생을 떠올리며 다시 술을 따랐다. 입가엔 조소가 흘렀다.
*
짧게 즐긴 연회 후, 형민은 다시 국정에 전념했다. 수 많은 보고들을 확인해야 했고 쌓여있는 상소를 하나하나 읽어야 했기에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석현은 그런 형민의 뒤에 서서 형민을 보필했다. 형민은 젊은 왕이기에 그만큼 위험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작년만 해도 기미 상궁이 형민의 국에 숟가락을 꽂았을 때 숟가락의 색이 변하기도 했으며 야밤에 누군가의 침입으로 인해 침소에 화재가 날 뻔하기도 했다. 불안함을 껴안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형민이기에 석현은 더더욱 날을 세운 채 낯선 기운을 감지하려 했다. 헌데 문득 틈이 벌어질 때가 생겨 난감했다. 해랑의 얼굴이 떠오를 때. 그 때 만큼은 석현의 긴장이 여지없이 풀어져버리곤 했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석현은 주먹을 꽉 쥐며 마음을 다 잡았다.
“이보게, 석현이.”
한참 붓을 쥐고 글을 써내려가던 형민이 우뚝 멈추고는 뒤를 돌아 석현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형민에 석현이 고갤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을 필요는 없네. 가끔은 좀 풀어져서 다른 생각을 해도 돼. 뭐, 예를 들자면 연모하는 이를 생각한다던지…….”
형민은 눈치가 아주 빨랐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원래 진짜 고수는 자네처럼 힘이 바짝 들어가있지 않는 법이라네.”
형민이 피식 웃으며 다시 앞을 보자 석현의 긴장이 절로 풀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난 밤이 떠올랐다. 해랑을 다시 제 품에 안았던 그 날이. 떠올리면 벅차오르는 황홀함과 동시에 괴로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상사화 한 송이를 두고 와야 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관계를 해랑에게도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저를 보며 그리도 행복해하는 해랑에게 차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택한 방법이었다. 물론 해랑이 단숨에 알아차릴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석현이 씁쓸해하던 중, 갑자기 형민이 아, 하고 의미모를 소리를 내었다.
[작품후기]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