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3/64)

전초전

“무슨 일이십니까?”

석현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형민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형민은 뭔가 심각한 듯 상소문 하나를 붙들고서 몇 차례나 반복해서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석현 역시 덩달아 긴장하여 그런 형민의 뒷모습을 숨죽여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형민의 입에서 허, 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생긴거랑 다르게 대범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예?”

“아니, 아니다. 그저 혼잣말이네.”

놀라 묻는 석현에게 형민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형민은 그러고 나서도 한참동안 상소를 들여다보았다. 대체 무엇이 써 있길래 전하께서 저리도 한참을 들여다 보시는건가 싶던 석현도 이내 관심을 돌리고 원래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다시 주위를 경계하려는 찰나, 갑자기 형민이 석현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석현아.”

“예, 전하.”

“내 부탁 하나만 하자.”

“분부 내려주십시오, 전하.”

석현이 고개 숙여 예를 갖추자 실실 웃던 얼굴을 감춘 채 형민이 말했다.

“간관 우해랑을 불러와다오.”

*

석현이 바로 근무에 들어가 정신없이 보내고 있을 때, 류환은 며칠 휴가를 얻었기에 오랜만에 집에 들어가 쉬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벗어나 돌아온 집은 류환을 따스하게 품어주었다. 정략장군에서 해주의 대도호부사로 발령받게 된 류환은 여러모로 기분이 묘했다. 우선 해주는 자신이 진두지휘했던 전쟁터였는데다가 처음으로 군사가 아닌 백성들을 다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관임에도 민생을 돌볼 때에 필요한 서적들을 많이 읽고 공부해왔기에 큰 두려움은 없었다. 그래도 처음은 늘 설레이고 긴장되는 법. 류환은 집에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도성을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여느 때와 같이 서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던 류환은 갑작스레 자신의 방을 찾아온 아버지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무얼 하나 궁금하여 찾아왔다.”

“그러셨습니까. 제가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앉으시지요.”

“그래.”

류환의 아버지는 좌의정 현태수였다. 그는 문관이면서도 무관처럼 풍채가 좋고 올곧은 성격을 그대로 눈빛에 드러냈다. 아들의 방에 직접 찾는 일이 거의 없던 터라 류환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느라 애쓰는 사이, 현태수는 류환이 마련한 자리에 앉았다. 부친이 무슨 일로 왔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류환이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사이 현태수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동안 잘 쉬었느냐?”

의외로 싱거운 질문에 류환은 빠르게 긴장을 풀고 대답했다.

“예. 오랜만에 집에 오니 좋긴 좋습니다.”

류환의 말에 현태수는 껄껄 웃으며 길게 난 턱수염을 몇 차례 쓸었다. 그러더니 아직 웃음기 남은 얼굴 위로 걱정의 낯빛을 띄웠다. 류환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제가 더 염려하며 그를 살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재빠르게 자신을 읽은 아들에 현태수가 남은 웃음기마저 지워낸 뒤 착잡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류환이 너, 혹시 우현영 대감의 아들과 친하게 지내느냐?”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아버지가 무슨 의도로 묻는지 몰랐으나 류환은 한 치의 고민없이 바로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 부하이자 든든한 동료였으니까요.”

현태수는 아들의 입에서 나온 ‘동료’라는 말에 한 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언짢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류환과 석현의 우애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돈독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현태수는 문득 정수환과 자신이 서로를 높이 샀던 시절이 떠올랐다. 정수환과 비록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청렴하고 곧은 신념을 가진, 자신과 비슷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의문스러운 역모 사건으로 정수환의 모든 것이 깎아내려갔으나 현태수는 아직도 믿고 있었다. 너무도 억울한 죽음이라고. 허나 역모죄에 관련된 일은 함부로 떠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너무 가까이 지내지는 말거라. 어찌되었든 역모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허나 아버님. 이번 연회에서 전하께서 면죄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그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진 것은 아니야. 아직 시선의 굴레라는 것이 남아있으니…….”

“그것 또한 곧 벗겨질 것입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류환에 현태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허나 현태수의 입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보였다. 류환이 잠자코 현태수를 기다려주자 현태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

아버지의 말에 류환은 놀라기는커녕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비웃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의정 대감과 그 무리의 분위기겠지요.”

“류환아.”

“맞지 않습니까? 영의정 어르신은 이제 연세가 많으시어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 없고 경빈 노씨의 세력을 등에 업은 우의정 대감과 사헌부의 장령 우해진이 국정을 흔들고 있잖습니까. 아, 물론 더 이상 장령은 아니지만.”

가시 돋힌 류환의 말에 현태수는 말을 잃은 채 아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자신의 젊었을 적을 보는 것 같아서. 현태수 역시 부당한 것에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어 성을 냈던 사람이니. 이미 화가 단단히 난 류환을 보고 있자니 류환이 해주로 떠나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의를 못 참는 류환의 성격 상, 어전회의라도 참석하게 되어 노의석과 그 무리들을 만난다면 들소처럼 들이 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네 맘은 잘 안다. 허나 지금의 상황에선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게다.”

“예. 알겠습니다.”

현태수는 고갤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려 했다. 류환이 함께 일어나서 그를 배웅하러 나섰다. 현태수는 몇 걸음 옮기다 말고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 서서 아들을 보았다. 걱정이 되어 찾아왔건만 대쪽 같은 아들의 성품만 확인하고 가는 꼴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현태수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 무슨 일이 생긴다 한들 너는 네 식대로 하거라. 지금처럼 권력을 두려워 말고 옳은 일을 찾아 하면 되는 것이야.”

“…예, 아버지.”

현태수가 떠나고 난 뒤, 류환은 다시 자리에 앉아 아비의 말을 곱씹었다. 험악했던 연회 분위기를 읽은 아버지의 걱정이라고만 생각하기엔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해주로 떠나기 전, 석현과 필히 만나 얘기를 나눌 것이 많아진 류환이었다.

*

석현은 사간원에 없는 해랑을 확인 한 뒤, 자연스럽게 해랑의 임시 거처로 향했다. 허나 석현은 당연한 듯 걸음해놓고선 막상 문 앞에 서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문을 두드려야 할 손이 주춤거렸다. 해랑에게 상사화를 건네고 헤어진 뒤였기에 석현의 맘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해랑은 그 꽃의 뜻을 이미 알고 있을까? 아니면 모르고 있을까…? 석현은 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어명을 떠올리고는 주먹을 꽉 쥐어 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린 직후에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허나 딱히 말이 없기에 석현은 작은 소리로 해랑을 불렀다.

“도련님, 접니다.”

석현이 안에 대고 말하자 그제야 해랑이 우당탕 뛰어나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쿵쿵대는 발소리에 이어 문이 삐걱이며 활짝 열렸다. 문 틈 새로 해랑의 환한 얼굴이 드러났다.

“석현아!”

뭐가 그리 반가운지 해랑이 석현의 목을 감아 안았다. 석현은 당황스럽고 멋쩍기도 하여 괜스레 헛기침을 몇 번 해야 했다. 팔에 힘주어 꽉 안고나서야 떨어진 해랑은 뒤늦게 석현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무슨 일이야?”

해랑이 방싯거리며 묻는 모습에 귀가 달아오른 것을 느낀 석현은 최대한 침착하게 제 임무를 다하려 했다.

“전하께서 간관 나으리를 모시고 오라 명하셨습니다.”

“아, 전하께서 나를 부르셨구나…….”

석현의 말에 급 풀이 죽은 해랑이 입술을 죽 내밀었다. 불퉁히 내민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맞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석현은 꾹 참아냈다. 상사화까지 준 마당에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건 해랑을 더 아프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가시지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석현은 마음을 잡고 해랑을 달래듯 부드러이 말했다. 해랑은 고갤 끄덕이고는 느릿하게 일어나더니 대뜸 말했다.

“근데 석현아.”

“예?”

“나으리보다는 역시 도련님이라고 불러주는게 좋은 것 같아.”

해랑이 큰 눈을 깜빡이며 즐거워했다. 석현은 하는 수 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해랑을 만날 때면 늘 간지러움을 참을 수가 없다. 경직된 자신을 풀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해랑은.

“예. ……도련님.”

“후후, 어서 가자.”

빠르게 채비를 한 해랑은 석현과 함께 형민에게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둘이 뭐 하느라 이리도 오래 걸렸느냐고 진지한 얼굴로 장난치는 형민 때문에 꽤나 애를 먹었지만.

“……저 전하. 진짜로 부르신 연유가 무엇이신지요?”

계속해서 둘이서만 당과를 먹고 온 건 아니냐, 아님 딴 길로 새서 산책하고 온 건 아니냐는 둥 농을 해대는 형민의 얘기를 겨우 해랑이 가로막았다. 그에 형민이 큼큼 목을 가다듬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민은 손에 쥔 상소 하나를 서안 위에 펼쳤다. 그리고는 사뭇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해랑을 보며 물었다.

“자네, 이거 무슨 생각으로 쓴건가?”

[작품후기]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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