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4/64)

전초전

“예?”

당황한 해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예상치 못한 형민의 반응이었다. 내용을 모르는 석현은 둘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무슨 생각으로 이 상소를 올렸냐, 이 말 일세.”

“그게…… 제가 과거 시험때에도 썼지만…….”

형민이라면 흔쾌히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착착 일을 진행시킬 줄 알았던 해랑의 예상이 제대로 빗나갔다. 워낙 뜻이 잘 맞던 사이였기에 해랑이 더더욱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형민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지고 해랑의 이마엔 진땀이 났다.

“이 나라의 썩은 가지만 잘라내기엔 이미 뿌리부터 썩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그 방법 뿐입니다.”

해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석현은 해랑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답답하면서도 해랑을 걱정하며 지켜보았다.

“그래서, 정말로, 사헌부를 완전히 뒤집어 엎자?”

형민이 매섭던 눈빛을 해랑에게서 거두고는 다시 상소를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석현의 커진 눈이 상소와 해랑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것이 믿기지가 않는 눈치였다. 사헌부를 개혁한다니! 지금껏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사헌부는 노의석을 중심으로 한 훈구 세력이 꽉 붙들고 있어 자신들의 입맛대로 자리를 채우거나 비우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다. 또한 부패한 관리들에게 수 많은 청탁을 받아 배를 불리고 세를 키웠다. 그 덕에 훈구파는 거침 없이 국정을 주무르려 했다. 자신들의 눈에 거슬리는 이들은 스스럼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정수환과 정기혁, 석현의 아버지와 숙부도 그렇게 숙청된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헌부를 개혁함으로써 그들의 입지를 좁히고 젊은 유생들로 이루어진 신진 세력을 더욱 강화하여 권력의 힘을 분배할 수만 있다면……! 석현은 빛나는 눈으로 해랑을 보았다.

“후…….”

그 때, 형민의 깊은 한숨이 흘렀다. 명석한 해랑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석현은 고갤 돌려 형민을 보았다. 형민은 아까와 달리 잔뜩 걱정 어린 표정으로 해랑을 보고있었다.

“자네, 이 상소대로 진행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줄은 아는가?”

“……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석현은 시선을 내리깔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사헌부를 개혁할 시에 생겨날 일이 무엇일지에 대해. 우선 당연히 기존 기득권 세력의 엄청난 반발이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신진 세력은 엄청난 지지를 보낼 것이고. 또……

“해랑이 자네가 위험해 질 수 있어. 분명 그들의 표적이 될 거란 말일세.”

“!”

석현이 놀라 해랑을 보았다. 되려 해랑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아니,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예전의 마냥 해맑던 해랑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걸 석현은 새삼 느꼈다. 결연함 마저 느껴지는 얼굴에 석현은 알 수 있었다. 전하가 아무리 말릴지언정 해랑은 이 일을 밀어붙일 것이라는 걸.

“…상관없습니다.”

석현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해랑은 두 주먹을 꽉 쥐어 무릎 위에 올려 둔 채 단호히 말했다. 형민은 못 이기겠다는 듯 피식 웃더니 상소를 돌돌 말아 접었다. 그에 살짝 긴장한 해랑이 상소를 가만히 보자 형민이 해랑을 바라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말게. 그대로 진행할터이니.”

“정말이십니까?”

“그럼. 참말이지.”

“전하……!”

형민의 허가에 뛸 듯이 기뻤는지 해랑의 엉덩이가 들썩이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석현은 해랑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한 편으론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다. 혹여 해랑이 이 일로 인해 안 좋은 일을 겪을까 걱정이 되었다. 전쟁터에서야 자신이 뛰어들어 지킬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석현은 입 안에 감도는 씁쓸함을 삼키며 해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형민 역시 해랑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음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각오 단단히 하게. 자네를 최대한 보호하도록 노력할 것이지만…… 그래도 험난한 길이 될 테니.”

형민의 따뜻한 음성에 해랑이 엎드려 예를 표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

엄청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석현의 정신이 멍했다. 해랑의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노력만큼 쉬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해랑은 그런 석현의 모습에 웃음이 나는 모양이었다. 석현을 힐끗거리며 쳐다보고 풉, 하고 웃기를 반복했다. 석현은 저를 보며 웃는 해랑이 얄미웠는지 아예 시선을 돌려 걸었다. 그에 해랑이 장난스레 말을 걸어왔다.

“나 데려다 주는 거면서 다른 곳 쳐다봐도 되는건가?”

해랑의 말에 민망해진 석현이 뻘쭘한 얼굴로 해랑을 살짝 보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런 일을 준비하고 계셨는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석현이 머쓱해하면서도 마음을 털어놓자 해랑도 장난기를 거두었다.

“나랏일을 시작하면서 보니까… 너무 많은 것들이 잘못 되어있더라. 특히 우의정 대감이 세력을 키워서 지금의 자리를 잡기까지 사헌부가 가장 큰 역할을 했고. 이젠 힘의 균형을 바로 잡아야 할 때야.”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십니까?”

해랑은 걸음을 멈춰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존경심과 괴로움이 뒤섞인. 결국 마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 떨어지는 석현의 고개에 해랑이 손을 뻗었다. 그 작고 하얀 손으로 석현의 짐을 덜어 주려는 듯 석현의 볼을 감쌌다. 부드러운 해랑의 손바닥이 얼굴을 감싸자 석현이 고갤 들어 해랑을 마주했다.

“희생이 아니야. 그저 나의 소임일 뿐이지.”

“…….”

“너무 걱정하지마. 나 쉽게 안 무너져.”

“……예.”

단단한 해랑의 말에 석현은 고갤 끄덕이고 다시 앞으로 걸었다. 해랑은 자신을 걱정하는 석현에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고 따뜻해져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두려운 마음이 아예 없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이었다. 해랑 또한 형민과 석현이 걱정하는 바에 대해 신경쓰고 있었다. 수 많은 대신들이 분명 저를 향해 온갖 비난과 협박, 멸시를 해댈 것이 빤히 그려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피해간다면 이 자리에 온 이유가 없다. 어렵게 과거를 통과하고 전쟁과 가난에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아이들을 만나며 절절히 느꼈다. 이 노력을 통해 얻어진 자리는 나를 위한 사사로운 자리가 아닌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자리라고. 그렇기 때문에 해랑은 따로 임시 거처까지 받아가며 백방으로 조사하며 고민했다. 부의 정당한 배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부패한 관리들이 얼마나 있는지, 검은 돈은 과연 어디로 새어나가는지 등등. 그 과정 속에서 찾아낸 중심 인물이 바로 노의석, 그리고 사헌부였다. 그들의 권력을 축소 시키고 새로운 인물로 개혁한다면 분명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고 해랑은 확신했다. 스스로를 믿기에 두려움을 이기고 본분을 다 할 수 있었다.

“옛날처럼 음지에 혼자 갇혀 살던 우해랑이 아니라구.”

임시 거처 앞에 선 해랑이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석현의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차마 가슴팍을 긁지 못하는 대신 애꿎은 뒷목만 문지르는 석현에 해랑이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웃음을 진정시킨 해랑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에 석현이 고개 숙여 맹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드리겠습니다. 도련님.”

숙였던 고개를 든 석현의 앞엔 눈부시게 웃는 해랑이 있었다.

*

이틀 뒤,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부분의 대신들이 빠짐없이 참여하는 자리이기에 어전이 북적였다. 석현은 형민의 바로 밑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노의석은 물론 우해진, 우현영 모두 참석해 있었다. 헌데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해랑이 보이질 않았다. 어찌된 일인가 싶어 초조해지는 와중에 어전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어전에 퍼졌다. 전하께서 해랑이 없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길이 없어 더욱 답답해진 석현은 주먹을 꽉 쥐며 어전의 문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무의미한 탁상공론만 오가며 회의가 진행되던 중 갑자기 어전 문이 활짝 열렸다. 서서히 열리는 문 가운데엔 목이 빠져라 찾던 해랑이 서 있었다. 해랑의 품에는 많은 양의 서책이 안겨있었다. 회의 중간에 갑자기 등장한 해랑에 회의를 하던 대신들의 시선이 모두 문 쪽으로 쏠렸다. 해랑을 발견한 이들이 수근대거나 큰 소리로 해랑을 꾸짖기도 했다. 우현영은 당혹스러움에 주변의 눈치를 보다 고갤 숙였고 해진은 싸늘하게 해랑을 바라보았다. 해랑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한 걸음으로 나아가 형민에게로 향했다. 형민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현이 바라보는 이 광경 속 해랑은 마치 진흙탕 속에서 고고히 핀 연꽃같았다.

“전하. 분부하신 자료를 모두 작성하였기에 전하께 올립니다.”

해랑의 말에 시끄럽던 어전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자료’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자 시선이 쏠렸다. 형민은 서책들을 전달받고는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침도 삼키지 못 할 만큼의 긴장감이 어전에 깔렸다. 대신들이 어떻든 신경도 쓰지 않고 형민은 차분히 서책들을 읽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읽던 형민이 마지막 책을 덮자 시선들은 이제 형민의 얼굴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형민의 입으로. 이윽고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형민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관 우해랑이 건네준 서책들은 잘 확인하였다. 이는 모두 나의 명으로 간관이 조사해온 내용들이다. 책의 내용엔 유착, 비리, 수탈 등의 수 많은 항목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모든 부정부패의 중심엔…….”

형민의 시선이 움직여 해진을 보았다. 차가운 두 시선이 허공에서 묶여 또 다른 긴장감을 자아냈다.

“바로 사헌부가 있었다.”

순식간에 다시 어전이 술렁거렸다. 허나 형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으로 소란은 바로 정리되었다.

“고로 사헌부는 5일 뒤, 모두 새로운 인물로 교체할 것이다.”

왕의 어명에 장내가 일순간 얼어붙었다가 모든 이들이 동시에 와르르 말을 쏟아냈다. 혼란스러움, 흥분, 분노가 왁자하게 오가는 가운데 형민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석현과 해랑의 고개가 들렸다. 마주한 셋의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다.

[작품후기]

오늘은 두편 올리네요 오랜만에... 허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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