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6/64)

전초전

어둠 속이었다. 온통 새카만 어둠 속에서 해랑은 헤매었다. 공포에 질린 해랑 앞에 나타난 건 집 뒤의 사당이었다. 해랑에게 사당은 큰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었다. 집 안 사람들 모두가 꺼리는 사당을 아무렇지 않게 출입하던 해랑이었다. 헌데, 꿈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꿈 속의 사당은 평소와 달랐다. 그야말로 괴기스럽고 소름끼치는 곳이였다. 부적은 피로 쓴 듯 시뻘겋게 번져 있었고 어둠 속에선 낙뢰만이 주변을 이따금 밝히곤 했다. 바람은 사람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로 불었다. 꼭 어둠 속에 누군가 있는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는 해랑이 주변만 둘러 볼 때, 굵은 낙뢰가 해랑의 앞으로 떨어졌다. 이어서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일자 해랑은 그대로 주저 앉고야 말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인영. 해랑은 어둠 속에서도 그가 누구인지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석현아.”

해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석현을 불렀다. 지난 번 꿈에선 죽은 채였던 석현이 이번엔 살아 있기에 해랑은 조금 안도하며 석현에게로 다가갔다. 석현은 다가오는 해랑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해랑은 마음이 급해져서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이상하게도 나아가질 못했다. 속도를 내려고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바닥을 내려다 보았을 때, 해랑은 기겁했다. 땅이 요동치며 해랑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마치 석현에게 가지 못하게 막는 듯 해랑을 밑으로 밑으로 끌어 당겼다. 자신의 몸이 가라앉는 걸 깨달은 해랑이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허우적 거렸으나 소용 없었다. 이미 반쯤 땅 속으로 파묻힌 해랑은 몇 번이고 석현을 부르며 팔을 뻗었다. 석현은 분명 자신을 부른 소리를 들은 듯 하였으나 고갤 돌려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해랑의 울부짖음은 점점 땅 속으로 묻혀 갔다. 숨이 턱 막히는 그 순간, 해랑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허억……!”

식은 땀이 온 몸을 적셨다. 해랑은 들썩이는 숨을 겨우 진정시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이젠 사당이 아닌 제 방이었다.

“또 사당 꿈이구나…….”

대체 사당이 왜 자꾸 자신의 꿈에 나오는 지 알 길이 없는 해랑이었다. 사당이 나올 때면 희한하게도 석현이 늘 그 곳에 있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해랑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별채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내다보면 집 너머의 사당이 보였다. 유난히도 그늘진 곳. 해랑은 생각했다. 조만간 사당을 찾아가야겠다고.

*

어전회의 다음 날, 류환은 해주로 떠날 채비를 끝내고 궁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 전하께 인사를 올리고 떠나기 위함이었다. 주언과 함께 형민에게 찾아 온 류환은 형민의 뒤에 선 석현을 보고 씨익 웃음을 지었다. 석현도 그 웃음에 화답하며 류환과 주언을 반겼다.

“신 현류환, 해주부사로 발령받아 떠나기 전 전하께 인사올리옵니다.”

근사하게 인사한 류환에 형민이 웃으며 얘기하는 동안 석현은 추억에 잠겼다. 어릴 적, 해주부사로 발령받아 떠난 다던 숙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늠름한 차림새로 다정히도 인사해주시던 숙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석현은 류환이 해주부사로 임명됨에 얼마나 안도하였는지 모른다. 숙부의 빈 자리를 대신하기에 류환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얘길 듣고 굉장히 기뻐했었다. 류환은 분명 잘 해내리라 믿었다.

“부디 조심히 가십시오.”

형민과 인사를 나눈 류환을 배웅하고자 석현이 따라나왔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석현에 류환과 주언이 번갈아 석현을 안아주며 인사했다. 생각지 못한 인사에 놀란 석현이 둘을 번갈아 바라보자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넨 부하이기 보단… 내 동료이자 친구일세.”

류환의 말에 석현의 눈이 더욱 동그랗게 변했다. 할 말을 잃은 듯 어물거리는 석현에 류환은 석현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많이 그리울 것 같구만. 부디 별 탈 없이 잘 지내게.”

석현은 속에서 울컥 치미는 것을 꾹 누르고 겨우 대답했다.

“예. 부디 건강하십시오.”

류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석현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발길을 돌리려다 갑자기 몸을 틀어 석현을 보았다.

“아,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군.”

“예?”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류환은 주변을 한 번 살피고는 석현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로 속삭였다.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어.”

석현이 설마하는 표정으로 류환을 바라보자 류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 무슨 일이 있을 것 같거든 내게 연락하게. 언제든 도우러 올 테니.”

“예. 그리하겠습니다.”

석현은 류환과 주언이 떠나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류환의 말을 곱씹었다. 불온한 움직임이라……. 하긴, 어전회의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석현은 찜찜한 마음으로 돌아서서 다시 어전으로 향했다.

*

모두가 잠들 시간, 기방의 가장 안쪽 방에 모여든 이들이 있었다. 노의석과 해진, 그리고 둘을 따르는 대신들이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 속에서 노의석만이 여유롭게 잔을 들어 술을 넘겼다. 초조하게 서로 눈치만 보던 이들 중 누군가가 참다 못해 나섰다.

“대감.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들고 일어나시지요.”

“맞습니다. 이는 분명 대감과 우리의 목을 조이기 위해 왕과 사간원이 벌인 짓이 틀림 없습니다.”

“본 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이딴 짓을 벌인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죠.”

하나가 물꼬를 트자 너도 나도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격앙되는 분위기를 다시 가라 앉힌 것은 해진의 비웃음이었다.

“하, 사간원이 벌였다?”

해진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해진의 눈에 살기가 돌고 있었다. 저럴 때는 노의석 마저도 해진을 건드릴 수 없었다. 언제 칼을 뽑아들어 내리쳐도 이상할 것 없을 기운이었다.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해진은 화를 꾹 누르듯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죠. 사간원이 아니라 우해랑 그 놈이 벌인 짓입니다.”

모두가 알았지만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이름이었다. 혹여 해진의 화를 돋굴까 일부러 돌려 말했으나 결국 해진의 입에서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일부러 그랬겠지요. 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너무 노하지 말게. 어차피 곧 사라질 존재인데.”

분노에 휩싸인 해진에 노의석이 어르듯 일렀다. 해진은 노의석에 말에 한 쪽 입꼬리를 당겨 웃고는 술잔을 비웠다. 나머지 대신들은 노의석이 한 말에 술렁이고 있었다. 사라질 존재라니.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몇몇 이들은 그게 정말이냐 묻기도 했다. 노의석은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이제 슬 때가 온 것 같구만. 전하께서도 친히 나서서 우리의 목을 치겠다 하시니… 살아 남으려면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노의석의 말에 사람들이 통쾌한 듯 주먹을 꽉 쥐어가며 동조하였다. 몇몇은 노의석의 계획이 궁금한지 질문을 이어갔다.

“허면 계획은 어찌 진행하실 건지요?”

노의석은 제게 들어온 질문에 대답 대신 해진을 향해 가볍게 눈짓했다. 해진은 서늘한 눈으로 대신들을 바라보며 노의석을 대신하여 답했다.

“반정을 일으키기 전까지 우릴 방어할 방어벽을 세울 겁니다.”

아리송한 말에 모두가 고갤 갸웃했다. 해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 대신 희생해줄 희생양을 만들 거란 얘깁니다.”

희생양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어느 때보다도 흥미롭고 긴장이 되었다. 반정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희생양을 세운다니……!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 해진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우해랑.”

세 글자가 방 안을 울리자 사람들의 눈이 커져갔다. 해진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스몄다.

“왕의 권력을 등에 입은 자는 더 큰 욕심을 가질 수 밖에 없지요.”

기분이 좋아진 듯한 해진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리 싫어한들 자신의 가족을 희생시킬 수 있는 자가 과연 이 나라에 몇이나 될까. 자칫하다간 자신들의 목숨도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대신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그럼 어떻게 그 자를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한 젊은 대신이 묻자 이번엔 노의석이 대신 답했다.

“사헌부는 아직 우리 손에 있지 않은가?”

노의석의 말에 그제야 이해가 가는 듯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부는 마음만 먹으면 소문 만으로도 관직에서 탄핵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해진은 그 점을 굉장히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들의 계획에 신뢰를 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왕과 해랑의 신뢰관계였다. 그 둘의 결속은 상당히 견고해 보였기에 과연 왕이 해랑의 탄핵을 그냥 두겠느냐 하는 것이다.

“믿음을 깨야지요.”

그 점은 이미 파악했다는 듯 해진이 자신있게 말했다.

“서로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그 틈을 노려 치고 들어가면 됩니다.”

말을 마친 해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구태여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면 그만이다. 해진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두 눈을 빛냈다.

[작품후기]

어느새 후반부로 흘러가고 있네요 허허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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