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7/64)

폭풍속으로

어전회의 이 후, 해랑의 주변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변했다. 오며가며 만날 때마다 반가이 인사하던 관리들은 해랑을 못 본 체 지나가기 일쑤였고 원래부터 해랑을 싫어하던 무리는 아예 대놓고 해랑이 들으라는 듯 험담을 하며 지나갔다. 함께 일하는 사간원의 간관들은 해랑을 위로하며 감싸는 듯 했으나 속으로는 해랑을 시기했다. 자신들을 따돌리고 왕에게 총애를 받기 위해 해랑이 혼자 나섰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혼자 자료를 수집하며 일 할 땐 몸이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었기에 오히려 즐거웠던 해랑이었다. 허나 이젠 몸 대신 마음이 지쳐갔다. 차라리 몸이 힘든 것이 백만 배쯤은 나았을 것이다. 어떨 땐 울음을 터뜨리고 싶을 지경이었으나 해랑은 이를 꽉 물고 버텨내려 애를 썼다. 울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자신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으며 집 안 사람들의 보살핌만 받던 양반집 둘째 아들의 역할에선 애저녁에 벗어났다. 그리고 저보다 더 큰 일들을 겪어내고서도 무너지지 않는 석현처럼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해랑은 버텼다.

이틀 뒤 다시 만난 해랑은 금세 수척해져있었다. 전하께 보고 차 들른 해랑의 모습에 되려 놀란 석현이 해랑을 바라 보았다. 해랑이 자신의 시선을 느낀 듯 했으나 부러 쳐다보지 않자 석현의 가슴 한 구석이 쿡쿡 쑤셨다. 해랑이 짊어진 마음의 무게가 해랑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아 아팠다. 나눠 질 수도 없는 짐이기에 더더욱.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전하.”

드디어 보고를 마친 해랑이 꾸벅 인사를 올리자 석현은 다시 한 번 더 해랑을 보았다. 허리 굽혀 인사한 해랑이 고개를 들고 나서야 겨우 시선이 닿았다. 석현의 얼굴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고 해랑은 그런 석현에 힘없이 웃어줄 뿐이었다. 해랑이 천천히 뒷걸음질 쳐 방을 나가려고 하던 그 때, 형민의 목소리가 해랑을 불러세웠다.

“헌데, 자네.”

“예, 전하.”

“자기 자신까지 몰아붙이지는 말게나.”

형민의 말에 해랑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섰다. 진심으로 저를 생각해주는 따뜻한 목소리에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했기 때문이었다. 해랑은 입술을 말아삼키고선 겨우 출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킨 뒤 웃으며 답했다.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애써 웃으며 방을 나서는 해랑을 가만히 보던 형민과 석현은 문이 닫히자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형민 역시 해랑이 꽤나 걱정되는 모양인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오늘 교대하고 나서 해랑이에게 한 번 가보게나. 말은 저래도 속은 상처투성이일걸세. 이 놈의 정치라는게 적이 생기는 순간 아주 골치가 아프거든.”

“……예. 전하.”

사헌부 개혁을 외친 그 순간을 석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해랑을 향해 쏟아지던 공격적인 언사들과 행동들 모두. 현재의 정치판은 노의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대부분의 대신들이 해랑을 싫어하게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 해랑은 홀로 그 모든 것들을 받아내고 있었고. 석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지켜야할 사람이 자신의 원수들에게 당하고 있는 꼴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이제 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터였다. 석현은 다시 움직일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

거처로 돌아가는 해랑의 어깨는 축 처져있었다. 애써 석현을 보지않으려고 했건만, 결국 마주한 시선에 겨우 붙잡아 오던 마음이 한 순간에 폭삭 주저 앉을 뻔했다. 다행히도 잘 넘겼지만 이 다음엔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석현을 보지 않는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랑은 편치 않은 마음을 달래고자 평소에 가는 길을 벗어나 좀 더 외곽 쪽으로 돌아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평소 가던 길로 가다보면 다른 대신들과 마주칠 확률도 높았고 외곽 길엔 나무와 꽃들이 많아 심란한 마음을 정화하기에 딱이었다.

발길을 틀어 외곽으로 들어서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예쁜 꽃들이 담을 따라 줄지어 피어있었다. 새들이 예쁜 소리로 지저귀고 나비들이 작은 날개를 팔랑이며 돌아다녔다. 해랑은 기분이 조금 나아져 길을 가다말고 근처에 놓인 바위 위에 걸터 앉았다. 여느 때보다 한가로이 햇살을 맞으며 있자니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기분이 좋아져 주변을 둘러보니 어딘가 낯익은 꽃이 피어있었다. 해랑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일으켜 꽃 가까이로 가서 살펴보았다. 꽃을 잠시 바라보던 해랑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꽃을 매만졌다.

“석현이가 주었던 꽃이구나.”

석현이 제 서안 위에 두었던 꽃을 발견한 해랑은 모든 짐들을 잠시 내려놓고선 하염없이 꽃만 바라보았다. 이따금 여린 꽃잎을 손 끝으로 어루만지기도 하며 석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땅에 옷자락이 끌리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은지 꽃을 보는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해랑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해랑은 고갤 들어 시선이 느껴지는 쪽을 보았다. 그 곳엔 어린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궁녀는 아닌 듯 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형민의 첫째 딸인 주혜공주였다. 형민에겐 아직 대를 이를 아들이 없었다. 첫째와 둘째 모두 공주들이었다. 때문에 형민의 반대편에 선 이들에겐 아주 좋은 형민의 약점이었다. 허나 형민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신의 사랑스런 공주들이 웬만한 왕자들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로웠으니까. 얼굴을 뵌 적은 없었으나 형민이 하도 얘기를 많이 해서 해랑에겐 어쩐지 익숙한 주혜공주였다. 공주는 좁은 길목에 해랑이 주저 앉아 있으니 부끄러워 차마 지나가지를 못한 모양이었다. 해랑은 아차 싶어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랑이 공주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서야 공주는 붉어진 얼굴로 총총거리며 해랑 쪽으로 다가왔다. 열 살을 갓 넘긴 듯한 공주는 빠른 걸음으로 해랑의 곁을 지나가려는 듯 했다. 헌데 공주는 해랑의 근처에서 대뜸 걸음을 멈추었다. 제 곁에 멈춰 선 공주에 당황한 해랑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공주마마.”

공주는 말 없이 시선을 내려 해랑이 보던 꽃을 잠깐 보더니 다시 고갤 들어 해랑을 보았다.

“간관 우해랑 어르신이 맞으시지요?”

“예, 마마.”

그에 공주 역시 고개 숙여 해랑에게 인사하였다. 마주한 공주의 눈동자엔 총기가 어렸다. 어린 나이이지만 제법 성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바마마께서 혹시라도 뵙게 된다면 꼭 인사드리라 하셨습니다. 아주 좋은 친구분이시라구요.”

“황송하옵니다, 공주마마.”

형민을 빼다박은 공주의 얼굴에 해랑의 입가가 씰룩였다. 어쩜 저리 닮았을까. 해랑은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주혜공주를 흐뭇하게 보았다. 주혜공주는 그런 해랑을 모르는 지 해랑이 뚫어져라 보던 꽃 앞에 앉아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해랑도 주혜공주의 옆에 나란히 앉아 꽃을 보았다.

“꽃이 참으로 아름다워 바라보느라 정신이 팔려 공주마마가 계신지도 몰랐습니다.”

“괜찮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본디 사람을 잡아 끌기 마련이지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유려한 말들을 쏟아내는 공주에 해랑은 제 어릴 적을 괜시리 떠올려보기도 했다. 내가 저 나이 땐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었더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해랑은 어두웠던 어린 시절만 떠올리곤 세차게 고갤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그 때, 주혜공주가 해랑에게 물었다.

“헌데 왜 하필 이 꽃을 왜 그리 유심히 보십니까?”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묻는 주혜공주에 해랑은 어물거렸다. 그 모든 일들을 솔직히 털어 놓을 수는 없었기에 단지 꽃이 아름답기에 바라보았다 대답했다. 해랑의 답에 공주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스쳤다. 해랑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여겼지만 이내 이어지는 공주의 말에 착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 꽃은 아름답지만 슬픈 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꽃 이름이 무언지는 아시는지요?”

“아뇨, 모릅니다만…….”

공주는 손 끝으로 꽃잎을 툭, 건드렸다.

“상사화입니다.”

“예?”

“상사화요. 잎과 꽃이 만날 수 없어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상사화.”

상사화? 상사화라니……. 주혜공주의 말에 해랑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서로를 생각하고 그리워 한다는 꽃이니 좋은 듯 하면서도 결국 만날 수 없기에 그리워 한다는 뜻이므로 안 좋은 듯도 했다. 해랑은 심각해진 얼굴로 꽃을 보다 저를 안쓰럽다는 듯 올려다보는 공주에게 되물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이었다.

“혹시…… 이 꽃에 담긴 또 다른 뜻이 있습니까?”

해랑의 질문에 주혜공주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름 그대로입니다. 이루어 질 수 없는 마음이기에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게지요.”

해랑이 충격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왼쪽 가슴이 갑자기 뻥 뚫린 듯 했다. 잠깐 내려놓았던 짐들이 배로 불어나 해랑의 위로 얹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이루어 질 수 없는 마음…….”

그 때였다. 갑자기 저 멀리서 궁녀들 여럿이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주혜공주를 찾는 듯 했다. 주혜공주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뵐 수 있기를.”

해랑이 인사할 틈도 없이 아버지인 형민처럼 주혜공주도 궁녀들에게서 도망쳐갔다. 해랑은 주혜공주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보다가 상사화를 보았다. 석현이 주었던 꽃. 그저 아름다운 줄만 알았던 꽃. 허탈해짐과 동시에 괴로움이 밀려왔다. 해랑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상사화의 꽃잎 위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투둑, 떨어졌다.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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