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속으로
해시를 넘겨서야 일을 마친 석현은 빠르게 옷을 갈아 입은 뒤 해랑에게로 향했다. 마주했던 눈빛 속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해랑이 자꾸 눈 앞에 아른거리기에 석현의 발걸음은 조급해져만 갔다. 물론 자신이 간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또 가서 위로한다고 한들 힘내라는 말 밖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애매한 관계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석현은 재촉하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과연 자신이 해랑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 해랑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루어 질 수 없는 관계를 이런 식으로 붙들고 늘어져봤자 저와 해랑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아닌가. 석현은 하늘 위에 둥실 떠 있는 달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해랑을 밀어내려 했던 마음은 수 차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석현 자신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해랑에게는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 말은 결국 석현 스스로도 해랑을 절대 놓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절대, 절대로. 해랑만큼은 놓을 수 없다. 가장 힘들 때 자신의 곁에서 웃어주고 주변을 환히 밝혀주었던 사람이다. 처음으로 연모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 속에 콱 들어박힌 사람이다. 헌데 어찌 놓을 수 있을까. 석현은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다시 해랑에게로 뛰었다.
해랑의 거처 앞에서 석현이 작은 소리로 해랑을 불렀으나 해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대답이 없는 걸 보아 잠이 든 모양이었다. 석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을 잠근 것도 잊은 채로 해랑은 침상 위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담요도 제대로 덮지 않고서 자는 해랑에 석현은 무릎을 굽혀 키를 낮추어 해랑의 눈과 높이를 맞추었다. 감긴 눈 밑의 코, 뺨, 살짝 열린 입술 모두가 어여뻐 석현은 미소지었다. 고 작은 얼굴을 몇 번이고 눈에 담고 싶어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혹여 해랑이 저 때문에 잠에서 깰까 석현은 작은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향하려 했다. 헌데 석현이 몸을 돌리는 순간,
“…석현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석현은 다시 몸을 틀었다. 해랑이 인기척 때문에 깨어난 모양이었다. 석현은 괜히 미안한 마음에 해랑에게 죄송하단 말부터 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도련님의 잠을 깨웠습니다.”
“아냐. 괜찮아.”
“그럼 더 주무시지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석현이 당황하여 황급히 자릴 피하려 했다. 허나 해랑이 다시 석현을 잡았다.
“석현아. 잠깐만.”
“예?”
“잠깐만… 할 얘기가 있어.”
석현과 마주 앉은 해랑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뭐랄까,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 같은 느낌이라 석현은 더 불안함을 느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일어난 수 많은 일들에 지쳐 혹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싶은 나쁜 생각마저도 들었다. 하지만 해랑의 입에서 나온 얘기들은 석현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그 날… 왜 내게 상사화를 두고 갔어?”
그야말로 제대로 빗나간 예상이었다.
“너는 내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행복과 기대, 설렘 이 모든 것을 다 주다가도 한 순간에 날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더라.”
멍하니 작은 창틀 너머를 바라보며 해랑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석현은 해랑의 처음 보는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니라고, 모든 게 오해라고, 다 이유가 있다고 얘기해주고 싶어도 꿀 바른 듯 달라붙은 입술은 옴짝달싹하지를 못 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두 손이 잘게 떨려왔다. 밝게 빛나던 해랑에게서 빛이 꺼지고 있었다. 아무리 고되어도 빛나던 그 해랑이.
“그래. 우린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인거지?”
“…….”
석현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한 채로 해랑을 보았다. 해랑은 여전히 창 너머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었다. 생소한 해랑의 목소리에 석현은 소름이 돋았다.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너는 날 웃게 만들지만 동시에 날 울게 해.”
건조한 음성이 이어지면서 동시에 해랑의 두 눈가가 젖어들었다.
“아무래도 억지로 널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
파리한 얼굴 위로 눈물이 톡, 떨어져 굴렀다.
“이젠 안 되겠어.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계속 네게 매달릴 순 없잖아. 안 그래?”
석현의 왼쪽 가슴이 강하게 욱신거렸다. 아팠다. 전쟁터에서 칼을 맞았을 때보다 더.
“그만 할게. 너도 이제… 나 안 찾아와도 돼.”
해랑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웃느라 접힌 눈꼬리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석현은 파르르 떨리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 제가 그럴 수 있겠느냐고, 어찌 당신을 놓겠느냐 외치며 있는 힘껏 끌어 안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때가 아니면 해랑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은 없을 것 같았기에 석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해랑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도련님.”
“이제 도련님 대신 나으리라고 해야겠네.”
여전히 저를 보지 않는 해랑에 석현의 속은 타들어갔으나 내색하지 않고 인사한 뒤 빠르게 해랑의 거처에서 빠져나왔다. 석현은 몇 걸음 못 가 주저 앉았다. 먼저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해랑이었다. 그 손을 잡기만 하던 석현은 이젠 손을 잡지도 못한 자신이 비참했다. 해랑과 멀어지는 것이 힘들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아플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왼쪽 가슴이 너무 아파서 석현은 가슴팍을 부여잡은 채 울었다. 해랑의 앞에선 나오지도 않던 눈물이 밖으로 나오자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어린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해랑 역시 석현이 나감과 동시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최대한 매정하게 석현에게 말했지만 결국 아픈 건 해랑 자신이었다.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칼로 심장을 베이는 기분이었다. 석현이 상사화를 건넬 만큼 자신을 밀어내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 석현을 구태여 붙잡을 수는 없었다. 석현이 해주로 갔을 때야 아무런 언지도 없이 갔기에 놀라 쫓아갔던 것이지만 상사화로써 자신의 속내를 표현한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떼쓰는 어린 아이도 아니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려봤자 서로에게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헌부 개혁으로 인해 해랑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었다. 일에 파묻혀 지내다보면 조금이라도 잊고 지낼 수 있으리라고 해랑은 믿었다.
*
속이 답답한 해랑은 그 다음 날 집으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 뒤의 사당으로 향했다. 지난 번 꿈 생각도 나고 사당에 가서 한바탕 하소연이라도 하면 속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헌데 막상 사당에 도착하니 해랑은 할 말을 잃었다. 묘하게 예전과는 달라진 분위기였다. 사당 근처에 붙여둔 부적이 더 많아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편하게 들락거리던 사당의 기운이 을씨년스럽게 변해 해랑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이왕 온 거 조상님들에게 인사라도 드려야겠다 싶은 해랑은 사당 안 쪽까지 발을 들였다.
“저 왔어요.”
여전히 먼지 가득한 신주를 바라보며 해랑이 웃었다. 그 다음엔 석현에 대한 억하심정을 쏟아 내볼까 싶어 입술을 들썩여보았으나 속에서 치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해랑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석현이 자기만큼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서로를 좋은 추억으로 묻을 수 있는 그 날이 어서 오길 바란다고. 몇 번이고 눈물을 쏟을 뻔했지만 해랑은 잘 참아내고 웃으며 신주 주변을 정리했다.
“조상님들 챙기는 건 저 밖에 없죠? 그니까 제 기도 좀 잘 들어주세요.”
코는 훌쩍이면서도 애교있게 말하며 신주 옆 벽면의 지저분한 것들을 털어내던 해랑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뭔가를 발견한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던 해랑은 벽면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살폈다. 해랑이 보는 곳엔 무언가가 튄 자국이 있었다. 워낙 작은 것이기에 정확히 무어라고는 말하기 어려웠으나 해랑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핏자국……?”
뭔가 이상했다. 혹시나 싶어 해랑은 벽면 바깥 쪽을 살폈다. 바깥쪽 벽은 깨끗하기에 해랑은 벽을 따라 뒤로 향했다. 뒤 역시 아무것도 없는 듯하기에 옆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저게 뭐지?”
해랑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해랑의 손 끝에 걸린 것은 다름 아닌 천 조각이었다. 틀림없는 비단이었다. 해랑은 천 조각을 손에 쥐고 한참동안 살폈다. 왜 이런 비단 조각이 사당 뒷벽에 걸려 있는건지 알 턱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이 것에 대해 알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듦과 동시에 해랑의 고개가 집 쪽으로 향했다. 제 아버지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해랑은 비단 조각을 손에 쥐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